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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독립운동가’ 하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를 꼽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 분의 독립운동가 외에도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한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분들도 많은데요. 오늘은 그 분들 중 한 분인 조명하 의사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 조명하 의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명하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그가 보통학교에 다니던 때에 우리 민족이 총궐기한 3·1운동이 일어났죠. 그리고 일제는 만세 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들을 처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어린 조명하 의사는 조국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조금씩 키워나갑니다.


그러던 중 조명하 의사는 1926년 3월 황해도 신천 군청의 서기로 근무하게 됩니다. 당시 신천 군청은 일제의 산하기관이나 다름없었는데요. 그럼에도 그가 군청에 근무하게 된 이유는 일본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청에 취직한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1926년에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우리 민족이 또다시 대규모로 궐기하는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지켜본 조명하 의사는 조국독립에 강한 열망을 느끼게 되었고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나이 22살,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나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요.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의 뜻을 실현시킬 만한 마땅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기 위해 중국과 가까운 대만으로 이동합니다.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대만인으로부터 보검도를 구해 기회가 찾아오면 바로 처단할 수 있도록 칼날에 독극물을 발라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조명하 의사 의거지 (출처: 독립기념관)


1928년 5월, 조명하 의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옵니다. 대만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를 검열하기 위해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까지 역임한 왕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돼 온다는 사실이 대만 신문에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한 조명하 의사는 일본 정계의 거물이자 민족의 원흉인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구니노미야가 일본군 검열을 마치고 기차편으로 대중역을 출발하기로 한 날을 의거 날짜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5월 14일 아침, 그는 보검도를 가슴에 품고 집을 나섭니다.


많은 인파 속에 숨어든 조명하의 눈앞에 여러 대의 차량에 수행원을 태우고 선두 무개차에 탄 구니노미야가 포착됩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구이궁이 탄 차 뒤에 올라 그를 찔렀습니다. 하지만 차에 걸쳐진 휘장 때문에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무개차가 속도를 높였지만 조명하는 다시한번 힘껏 독검을 던졌습니다. 구니노미야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려 검을 피하는 바람에 조명하 의사의 검은 구니노미야의 어깨를 스치고 운전수 등에 박혔습니다.


의거 후 조명하는 당당하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일본 군경들에게 피체되었습니다. 그는 그해 7월 18일 대만 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조명하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한편, 조명하의 독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현장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단검의 독이 온몸에 퍼져 6개월 뒤에 죽었습니다. 


▲ 조명하 의사 동상 (경기 과천시 막계동 위치)


젊은 나이에 독립 의지를 품고 우리 민족의 원흉을 처단하는데 성공했던 조명하 의사. 그는 순국 직전,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건,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사랑할 줄 아는 참된 애국자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는 5월 14일 일요일은, 조명하 의사가 의거를 치른 지 89주년이 된 날입니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일, 꼭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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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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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건우

    2017.05.13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죄송한데 이거 참고해서 동영상좀 만들어도 될까요???

  2. 김건우

    2017.05.13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죄송한데 이거 참고해서 동영상좀 만들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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