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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난다

오늘은 515, 스승의 날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스승들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정신적 지주로 큰 가르침을 준 수당 이남규 선생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말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이남규 선생은 신채호 선생뿐만 아니라 변영만 선생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는데요. 독립운동가의 참 스승, 이남규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남규 선생

 

#뿌리깊은 명문가의 집안

이남규 선생의 집안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유가(儒家)의 명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전통이 깊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당 이남규 선생을 비롯해 맏아들 이충구, 손자 이승복, 증손자 이장원 4대가 의병·독립 운동가·충남 예산지역 625전쟁 호국영웅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집안으로도 유명합니다. 또한, 3대가 모두 현역 복무를 성실히 마쳐 병역명문가로 선정되는 등 대한제국에서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시기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남규 선생은 1882년 문과에 급제하여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오른 후 1885년에는 홍문관교리에 임명, 부수찬, 수찬을 역임하는 등 관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은 청나라와 일제의 세력다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요. 그러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였고, 일제는 이를 한반도 침략의 기회로 삼아 189457일 군대를 파견하는 등 조선침략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이를 본 이남규 선생은 청절왜소(請絶倭疏)’ 를 올려 이에 대비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남규 선생의 글(1896), 1896년 의병의 전쟁 상황 등을 기록

(출처: 독립기념관)

 

오늘날 일본 사람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의 문을 들어왔습니다. 외무관서에서 힘써 이를 저지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웃 나라의 환란(患亂)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일찍이 구원을 청한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의 상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일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청하지 않았는데 구원을 말한다면 이는 실상을 속이는 것이고, 안전을 보장하는데도 오히려 보호를 내세운다면 이는 우리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저들(일제)이 소란스럽게 큰 군대를 움직여 우리의 영토로 들어오고 나라의 법금(法禁)도 묻지 않고서 우리의 도성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은 그 속에 반드시 간사한 꾀가 들어 있을 것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우리의 사람 없음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도 마땅히 갑옷을 수선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대비하여야 합니다. 다른 나라 군대가 도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 우리가 편안하게 이에 대비하지 않을 수 있단 말 입니까.”

 

#항일 운동의 선두자로 앞장서다.

 

무장한 의병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 일제의 사주 아래 폐후조칙이라는 매국적 조치마저 발표되자 분노에 찬 이남규 선생은,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를 고종황제에게 올려 소신을 밝혔습니다. 명성황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려, 동맹국과 함께 일제를 처단하자는 강력한 성토를 담은 주장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앉으셔서, 선비와 백성들을 모두 앞에 불러 놓고 애통의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은 죽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망하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망함을 재촉하고 그 남아 있는 것이 구차하며, 죽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죽는 것을 재촉하고, 그 사는 것이 구차하게 된다. 너희들은 원수의 적을 그릇 곁에 있는 쥐라고 생각하여 던져 때리기를 꺼리지 말며, 너희 몸을 엎어진 둥주리의 새알이라고 하여 그 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지 말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짐의 분개하는 바를 대적하여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종묘사직의 욕을 씻게 하라'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동맹 각국들로서도 윤리 기강을 알지 못하고 적의 뒤를 따르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함께 분개하여 향응(響應)하여 더불어 일을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라는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수당 이남규선생 3대항일투쟁사적비 (충남 예산군 위치)

 

#“나는 대부(大夫)이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

한편,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이남규 선생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민종식이 주도한 의병운동이 일어나 그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에는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왕명에 의한 합법적인 길 이외에 의병활동에 직접 참여하고자 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이후 홍주의진이 크나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그를 찾아오자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남규 선생이 홍주 의진과 관계가 있다는 밀고가 끊이지 않자 체포를 위해 1907819, 일본군이 그의 집에 파견되었습니다. 체포될 당시 이남규 선생은, “나는 대부(大夫)이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으며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습니다. 일본군은 선생을 협박하면서도 회유를 시도했지만 선생은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은가라며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일제는 칼로 선생을 죽이려 했고, 옆에 함께 있던 맏아들 이충구와 가마꾼 김응길이 이를 막으려 시도하다 함께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함으로 맞섰던 이남규 선생의 용기. 어쩌면 이런 올곧은 정신이 있었기에 신채호, 변영만 선생같이 훌륭한 제자가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515일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항일 애국 운동의 위대한 스승 이남규 선생님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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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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