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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창리지구 전투 전적비 (강원 화천군 사창리 소재)


#사창리 전투의 설욕


1951년 3월 서울 재탈환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치열한 전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의 막강한 화력에 부딪힌 중공군은 1951년 4월 말 전 전선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 하였습니다. 당시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산 일대는 국군 제6사단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1951년 4월 중순, 국군 제6사단은 중부전선 미 제9군단의 작전 계획에 따라 김화를 목표로 계속해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의 반격을 받게 된 6사단은 사창리 부근의 명월리와 광덕리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하였습니다. 그곳에서 6사단은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사창리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우리군의 병력, 야포,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계곡으로 밀려들게 됨에 따라 큰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 후 제6사단은 병력을 수습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가평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습니다.


#결사의 의지를 다지다





▲결사 표식을 새긴 철모(출처: 국방부 6.25전쟁 제 60주년 사업단 블로그)


이후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설욕을 씻고자 결사 표식을 철모에 새겨 결의를 다지며, 경기 양평군의 용문산 일대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에 다시금 춘계 대공세를 펼치게 되었는데요. 특히 중공군은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던 용문산 일대를 공격해 왔습니다. 국군 제6사단 장도영 장군은 전체 사단 병력의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인 제2연대를 주 방어선보다 훨씬 위쪽인 북한강 아래쪽으로 보내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북한강으로 넘어올 중공군을 염려한 장도영 장군의 계획이었습니다.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인 제2연대를 향해 몇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제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하였습니다.



▲용문산 전투상황도(출처: 국방부 6.25전쟁 제 60주년 사업단 블로그)


5월 20일 새벽 5시에 국군 제6사단의 7,19연대가 중공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그 전날 새벽부터 중공군은 국군 주력을 상대로 전투를 하고 있다고 믿어 후방에서 공격을 받자 이곳을 주저항선으로 오판하여, 예비대까지 투입한 총 3개 사단의 병력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틀간의 격전 당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2연대는 도강하는 중공군에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이 약해진 틈을 탄 2연대는 427 고지로 후퇴하였습니다. 427 고지로 후퇴한 2연대는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조명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격렬히 맞섰습니다.


▲용문산 전투 전적비(출처: 전쟁기념관)


국군 2연대는 중공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의 의지로 끝까지 싸웠고 결국 중공군은 질서를 잃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발전소까지 60여km나 중공군을 추격하였습니다. 패주하던 중공군은 화천호에 이르러 퇴로가 막히고,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적군을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시키거나 포로로 잡습니다. 


 

이로써 6사단은 적은 병력으로 전례없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전 사창리 전투의 불명예를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사단이 격전을 벌였던 화천저수지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의 ‘파로호’라는 지명을 하사하였고, 화천 저수지는 지금까지도 파로호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다.


 

용문산 전투는 6.25전쟁을 통틀어 단일 전투로는 가장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격퇴한 전투입니다. 이는 일개 방어전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북진의 발판의 마련하는 등 6.25전쟁 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린 기록적인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재반격의 기반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미 육군사관학교 전술 교본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세계사에서도 주목받는 전투입니다.


현재 육군은 제6사단 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하여 이 날의 승리를 오늘날까지 기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결사의 의지로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용감히 맞서 싸운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분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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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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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우선

    2017.05.23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지가 6하단 용문산 부대에 근무하셨고.저도 6사단 화학대에서 근무 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이천호국원에 영면하십니다. 저희 가족은 용문산 용문사 절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청성사를 보고 군생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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