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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외국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우리나라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나가 힘을 쏟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위 문구는 1949년, 그 분의 서거 후 묘비명에 새겨진 생전 소원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8월 11일 거행되는 ‘헐버트 박사 서거 68주기 추모식’을 맞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셨던 그 분의 생애와 한국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업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호머 헐버트 박사 사진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 주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을 지낸 아버지 캘빈 헐버트와 다트머스대학교 창립자의 후손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인격이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가훈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가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교사가 되기 위해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교육에 누구보다 열정이 가득했던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순 한글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직접 저술하는 등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서구식 교육제도를 뿌리내렸습니다. 1891년,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의 축소 운영으로 사임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그로부터 2년 뒤, 선교활동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 육영공원에서 교육 중인 호머 헐버트 박사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블로그)

 

이 때 한국으로 돌아온 헐버트 박사는 출판사에 외국의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는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하며 수많은 서적과 기사를 작성합니다. 편집과 출판에 경험이 있던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 서재필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우리나라의 언론 창달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연구에 동참하였고, 한글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최초로 도입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 을사늑약 반대 고종친서 (출처 : 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블로그)

 

 

 

한편, 1890년대의 한국은 일제에 국권침탈의 위협을 받는 풍전등화 정국의 연속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 1894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헐버트 박사는 조선조선의 주권회복을 위해 본격적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때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으로, 고종의 정치적·외교적·문화적 자문위원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 11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는데요.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면담하여 을사늑약을 저지해 달라는 내용의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헐버트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 헤이그 특사 (좌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또한, 그는 고종에게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을 제안했습니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게 되는데요.


헐버트 박사는 특사 3인보다 먼저 헤이그로 넘어가 각국 대표에게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대한 일제의 부당함과 독립을 주장하는 등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펼칩니다. 또한, 일제 통감부의 감시를 피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위해 준비해야하는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는데요. 이는 헐버트 박사가 이후 ‘제4의 헤이그 특사’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제2차 만국평화회의 (출처 : 양원주부학교 홈페이지)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인의 헤이그 특사는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헐버트의 헤이그 특사 파견 가담이 발각되자 일본은 헐버트 박사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합니다.

 

헐버트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전역과 전 세계를 돌며 각종 회의와 강연에 참석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해 알리고 이를 규탄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각종 한국의 분리 독립에 관한 글을 쓰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 4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호머 헐버트 박사 (출처 : 오소운 목사의 [찬송가 블로그])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40여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였습니다. 감격스러운 한국 방문이었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헐버트 박사는 86세의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소망에 따라, 고인은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정부는 헐버트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50년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호머 헐버트 박사 모습 (출처 : 피터김의 체험 나누기 블로그)


오는 8월 11일(금) 오전 11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마포구 합정동 소재)에서 ‘헐버트 박사 서거 68주기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이번 추모식에서는 1903년에 헐버트 박사가 역사상 최초로 만들었던 거북선 모형이 114년 만에 공개됩니다. 이 거북선 모형은 헐버트 박사가 1904년에 미국 세인트 루이스 시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하고자 미국으로 가지고 갔으나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요. 이번에 해양유물수집가 전우홍 선생에 의해 한 세기가 넘어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고, 이날 추모식에서 최초로 공개됩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 정신을 높이 사고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생을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던 헐버트 박사를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http://www.hulbert.or.kr/
대한민국역사박물관

 http://muchkorea.tistory.com/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751&cid=40942&categoryId=3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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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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