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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수세에 몰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는데요.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호국영웅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게 뒷받침해준, 엑스레이 작전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 6.25전쟁의 대반전, 인천상륙작전


▲ 인천에 상륙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들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지만 끊임없이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방어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요.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적진지의 배후, 인천을 칠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이 같은 그의 결정에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는데요.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 에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불리한 요건은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상륙작전 개시 시기인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작전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연합군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두 번째로는 인천항이 대규모의 함대가 자리 잡기에는 협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인천항에 앞서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했으므로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이를 극복해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선택한 것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이유가 적군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국군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북한군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공격하면 전략적으로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인천 지역에 허술한 방비태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 인천시내에 들어온 연합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치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여 명이 넘는 인원으로 이들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내는 등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약 3일 후에는 김포와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하여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국군은 서울 이남의 모든 지역을 되찾았고, 북으로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겨진 사전작전, X-RAY작전


▲ 켈로부대 대원들 (출처: 브런치 블로그)


그러나 이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가 시행되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의 계획을 세우던 중, 인천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급제동이 걸리게 되었는데요.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당시 해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에게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의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밀물과 썰물 때의 해안 길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상황 등을 탐지해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 엑스레이 작전(X-Ray Operation)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작전에서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KLO)부대는 인천에 잠입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켈로(KLO)부대는 ‘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1949년 주한미군이 전투 병력을 철수하면서 첩보 수집을 위해 창설한 비정규전 부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켈로부대는 첩보부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국군 간의 의사소통도 담당하는 중요역할을 했습니다.


▲ 임병래 중위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켈로부대는 임병래 중위를 포함한 해군 장교와 민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수정예부대로, 인천 인근에 배치된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바다에 떠 있는 지뢰를 제거했으며,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파악했습니다. 정보를 모으기 위해 부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북한군으로 위장하거나 민간인 인척 시내에 잠입했습니다. 또한 해안의 북한군 방어 태세 확인을 위해 어부로 가장하기도 했는데요. 


▲ 홍시욱 하사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잠입했던 부대원들은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14일, ‘모든 일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을 받고 인천 영흥도에서 철수 준비를 하던 중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 중 부대원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 포위되고 마는데요. 이에 임중위와 홍하사는 자신이 잡히면 기밀이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팔미도 등대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첩보부대원들의 작전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닌데요. 인천상륙작전 당일, 켈로부대의 부대장 최규봉 대장은 켈로부대를 이끌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 팔미도에 잠입하여 등대를 사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등대의 연료탱크와 등불 받침을 연결하는 중요 부품이 사라져 불을 켤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약 2시간에 걸친 수색 작업에도 사라진 부품은 찾을 수 없었으나 기적적으로 어둠속에서 부품을 발견하면서 등대의 불을 밝혀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 수만 명을 태운 함대가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67년 전 오늘은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보통 ‘인천상륙작전’ 하면 맥아더 장군이나 연합군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성공 확률이 5000:1로 매우 희박했던 이 작전의 배후에는 목숨을 걸고 노력했던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 또 이들을 도우며 영흥도에서 활약했던 무명 용사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나라의 숨은 영웅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참고자료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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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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