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6,334,321
  • Today | 39
  • Yesterday | 838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은 한국의 언론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베델 선생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에 맞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그의 발자취 속에는 배울 점들이 많습니다.


▲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모습


어니스트 베델 선생은 1872년 11월 3일,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처음 한국에 방문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시기였던 1904년 7월 18일에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는데요. 이를 필두로 1905년 8월,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1907년부터는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많은 구독자를 얻음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대내외로 알리게 됩니다. 그의 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을 했지만, 당시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선생의 신문은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일본의 언론 탄압 속에서 신속한 보도와 논설로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기 위해 열강의 개입을 요청하는 밀서를 여러 나라에 보냈습니다. 그 중 영국 신문 <트리뷴>지가 고종의 밀서를 실었는데요. 이에 대해 일본은 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것이 아니고,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었는데요.

고종 밀서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매일신보>는 밀서의 사진을 큰 사진판으로 실었습니다. 이로 인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해 오던 일본 당국은 크게 당황했고, 우리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


이러한 언론 활동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끔 노력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베델 선생을 추방하기 위해 수차례 끈질긴 재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일제 통감부는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베델 선생의 추방에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통감부는 반일적인 신문기사를 썼다는 이유를 구실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통감부는 베델 선생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신문지법’에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베델 선생의 <대한매일신보>도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통감부는 이 법률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고 베델 선생 추방을 강력히 추진하자, 영국도 마침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의 제2차 재파는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고, 한국,영국,일본 세 나라가 관련된 역사상 유례없는 재판에 한국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베델 선생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해에서 3주동안 구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델 선생은 그 후에도 계속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 언론 활동을 이어갔고, 일제는 언론을 통해 베델 선생이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배포하며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에 베델 선생은 명예회복을 위해 언론과 법적인 절차로 대응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여러 차례의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를 받으며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37세에 갑작스럽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베델 선생의 묘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베델 선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신문사에 모여들었습니다. 베델 선생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나라, 한국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으로 그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베델언론인장학금'을 제정하였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비록 생김새는 달랐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컸던 베델 선생. 대한민국의 언론을 지켜낸 영웅, 베델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479&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485&cid=46668&categoryId=46668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385&cid=40942&categoryId=33384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영웅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2018년 제3차 대학생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탐방'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현장과 사람 중심의 따뜻한 보훈을 체험하다! 국가보훈처 창설 제57주년 기념식 취재기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건립 방향을 모색하는 학술회의 및 공청회가 열립니다.
국가보훈처 창설 제57주년 기념식, 따뜻한 보훈이 가득했던 현장 속으로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