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799,947
  • Today | 375
  • Yesterday | 1,895

86년 전 4월, 전 세계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킨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봉길 의사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위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입증한 의열 투쟁이었습니다. 또한, 침체기에 빠져있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합니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86주년을 맞아 윤 의사의 이야기를 훈터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립니다.


▲ 윤봉길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사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깨닫고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열아홉 살의 나이였습니다. 윤 의사는 우연히 공동묘지 앞에서 글을 읽을 줄 몰라 부모의 묘지를 찾을 수 없었던 한 청년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 청년을 보며 윤 의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농민들의 무지를 극복하며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 의사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하는 등 활발한 농촌계몽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일제로부터 독립할 구체적인 행동을 실행하기로 결심했고, 1930년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만난 윤 의사는 본격적으로 의열투쟁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왕의 생일을 기념해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축하식’을 홍구공원(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한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드디어 기회를 맞은 윤 의사와 김구 선생은 치밀한 준비를 진행했고,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식을 통해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이 아닌 민족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 윤봉길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 (출처: 독립기념관)


의거 당일인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 의사는 행사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제치고 일제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처단했고 노무라,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침략 원흉들에 대한 역사적인 의열 투쟁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 대해 당시 중국 정부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는 윤 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출처: 독립기념관)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이후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정부는 윤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오는 4월 28일,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86주년 기념식이 열립니다. 4월 28일 토요일에는 의거지인 중국 상하이 소재 루쉰공원(구 홍구공원)에 설립된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29일 일요일에는 서울 서초구 소재 매헌기념관에서 각각 진행됩니다. 또한,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지역인 충남 예산에서도 29일 일요일 추모다례가 개최됩니다. 


▲ 지난 4월 13일 제99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등 주요내빈이

삼의사 묘역에 헌화 및 분향을 하는 모습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서신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4월 말, 윤봉길 의사의 민족애(愛)를 함께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58주년 ‘4.19혁명’이 기념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4·19민주묘지(서울시 강북구)에서 거행되는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에는 4·19혁명 민주유공자와 유족, 시민 등 이천오백여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의 역사’, 4.19혁명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4·19혁명이란?


1960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불법적인 장기집권에 저항했던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뜻합니다. 


▲ 3.15선거 후보 포스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승만(당시 3선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부정 선거 실시 등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해왔기에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력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함으로 인해 이승만의 재선이 확실시 되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 또한 당선을 시키고자 학생들이 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요일 강제 등교 조치’를 실시했고, 3.15선거 당일에는 ‘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습니다.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이승만,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민주적인 결과에 대해 시민들은 저항을 시작하게 됩니다.


▲ 부정선거 규탄 마산 시위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4·19혁명,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국민들은 이미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대구 지역의 야당 후보 유세 참가를 막기 위해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에게 가해진 ‘강제 등교 조치’ 등에 반발하며 학생들이 ’2.28민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선거 당일부터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의거’가 전개되었습니다. 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치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의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당국과 경찰은 발포를 하며 폭력적으로 시민들을 진압했습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마산 3.15의거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16세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채로 4월 11일에 발견된 것입니다.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모습에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은 극에 달했고, 전국적인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즉 ‘4.19혁명’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4·19혁명의 전개 과정은?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 약 4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 ‘정치깡패’에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출처: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4월 19일, 전국적으로 10만 명 규모의 이승만 정권 퇴진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시위대는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경찰 4명을 포함한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4.19혁명 초등학생 시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당국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 300여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으며 수만 명의 국민들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4·19혁명의 결과는?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를 발표하고 대통령 사임서를 제출하였습니다. 180여명의 사망자 및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낸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끝까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시민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반드시 기억해야 할 4·19혁명의 역사


오는 4월 19일(목)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민주주의! 우리가 함께 가는 길, 국민이 함께 걷는 길”이라는 주제로 진행될 이번 기념식은 58년 전 사건을 단순히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따뜻하고 찬란한 미래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수많은 시민들의 뜻이 모여 역사에 기록된 ‘4.19혁명’. 민주영령을 함께 추모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4월 19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참고 자료

- 국립4.19민주묘지 http://419.mpva.go.kr/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4.19혁명' http://contents.history.go.kr

- 고려대학교 4.18의거실록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늘은, 화창한 봄에 일어나 그 잔혹성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가슴 아픈 역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1919년 4월, 수원군(현재 경기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일본군이 폭력적으로 탄압한 사건,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원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3월 31일에는 제암리 인근 발안장터에서 약 1천 명의 시민들이 동참한 만세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4월 3일에는 수원군 최대 규모의 ‘우정면, 장안면 연합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헌병과 경찰은 시위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진압 과정에서 가옥들을 방화하여 제암리 사건 이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 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검거인원 442명에 이르는 등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만세운동의 주동자 색출을 위해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은 제암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며 20여명을 제암리 교회 예배당으로 몰아넣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도 만세운동 주도 인물인 김홍렬 선생 등 6명이 참살당했습니다.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은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보복성 학살사건이었으며, 죄 없는 목숨들이 스러져간 가슴 아픈 역사였습니다.


▲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일제의 제암리 방화, 학살 후 파괴된 민가 (출처: 독립기념관)



제암리의 독립운동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순국하신 홍원식 선생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홍원식 선생은 충남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914년 제암리에서 항일비밀결사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을 펼친 인물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수원군의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고, 일본인 상점에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홍원식 선생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제암교회에서 순국하였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제암교회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묻힐 뻔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과 기록을 남기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세계에 알렸던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입니다.


▲ 스코필드 박사 (출처: 독립기념관)


영국 출신의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와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3.1운동의 중요성을 직감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선생은 제암리와 수촌리를 직접 찾아가 기록하였고, ‘제암리의 대학살’, ‘수촌 만행 보고서’ 등을 작성하여 사건을 널리 알렸습니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항일독립만세운동의 뜻을 기억하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가 4월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 열렸습니다. 


▲ 4.15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포스터 (출처: 화성시청)


99년 전 가슴 아픈 봄날, 만세운동에 동참한 분들과 제암·고주리에서 희생당한 순국선열을 추모합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따뜻한 봄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 참고 사이트 

- 국사편찬위원회 ‘불타버린 제암리 교회’

- 네이버 지식백과 ‘홍원식’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영웅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다,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취재기
낯선 나라를 위해 흘린 피와 땀, 전쟁기념관에서 알아본 유엔군의 희생
6.25참전 미국군 전사·실종장병 유가족 방한, ‘아픔과 슬픔을 위로합니다.’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어나 ‘민주의 횃불’을 높이 들다.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