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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바치고 해방 후에는 민족의 통합을 위해 투신한 인물,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일입니다. 오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 71주기를 맞아 스스로 불꽃이 되어 독립운동사를 뜨겁게 수놓은 그의 삶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청년 여운형, 민중을 일깨우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 선생은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공부했고, 1907년에는 고향인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가문의 노비를 해방시켜 봉건적인 인습을 타파하는 선례를 보였던 여운형 선생은 기호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에 힘썼고 초당의숙의 교사로서 청년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선생의 청년기는 민중을 일깨우고 그 힘을 양성시키는 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 여운형 선생 (출처: 국가기록원)


# 신한청년당, 세계에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전하다 


여운형 선생은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였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에서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한 단체였습니다.

여운형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 선생을 대표로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렸습니다. 또한 장덕수 선생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는 데 힘을 실어주도록 했습니다.

또한, 여운형 선생은 간도, 시베리아 지역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우리 민족에게 큰 자극을 주어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파리평화회의를 위해 작성된 독립청원서 (출처: 독립기념관)

▲ 파리평화회의 대표단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뜨겁게, 더 뜨겁게 독립운동에 힘쓰다


또한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활약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동경에서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대한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다섯째 줄 왼쪽이 여운형 선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1월, 몽양 선생은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합니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 명 이상의 군인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군자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 한국노병회 회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편, 여운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창호 선생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편해나가자는 개조파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선생은 안창호 등과 함께 개조파의 입장이었고, 임시정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나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 국민대표회의 개회 및 규정 (출처: 독립기념관)


이후 1933년, 여운형 선생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으로 취임해 언론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조선중앙일보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내용을 보도하며 유니폼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습니다. 일명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여운형 선생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됩니다.


▲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선수의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광복 이후 해방 정국을 이끌어가다


여운형 선생은 1944년 8월,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조국 광복을 준비합니다. 광복 이후에는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여 활동합니다. 또한 선생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가 힘을 합쳐 민족의 통합을 꾀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처럼 여운형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이끌고, 광복 이후에는 혼란한 민족을 보듬어 하나가 되게 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에서 극우파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습니다.

정부는 2005년에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7월 19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 71주기입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 민족의 독립을 이룬 여운형 선생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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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무엇일까요? 외압이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성과 공정성을 지켜 보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언론은 그 특성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거나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통치자들이 언론을 장악하려고 했던 이유도, 피통치자들이 치열하게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때는 어땠을까요? 당시에는 신문이 거의 유일한 언론매체였습니다. 일본은 언론을 탄압하며 조선의 신문을 집요하게 검열했습니다. 일제의 매서운 눈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국내 언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신문이 있었는데요. 바로 ‘대한매일신보’였습니다. 오늘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글 한 줄의 힘을 보여주었던 신문, 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던 시절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 대한매일신보, 치외법권을 이용해 일제의 언론탄압을 피하다


▲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 언론인 베델 선생이 독립운동가 양기탁 선생 등과 힘을 합쳐 만든 신문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순한글로 간행되다가 1907년에 이르면 국한문판, 영문판, 순한글판 등 세 종류로 발행됩니다. 덕분에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을 수 있었고 발행부수가 1만 부를 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최고의 발행부수였으며 한국 언론사에서 국한문, 한글, 영문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에 폐간되었던 국내의 다른 신문과 달리 대한매일신보가 꾸준히 발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베델 선생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자 편집인, 어니스트 베델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핑계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했습니다. 이 때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이용했고, 사실에 근거한 보도와 논평을 꾸준히 발행하면서 대표적인 민족언론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 대한매일신보, 펜으로 일제에 맞서다


대한매일신보는 신채호, 박은식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습니다. 다른 민족지와 다르게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정간될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필진들은 반일적인 논설과 기사를 과감하게 써낼 수 있었습니다.


▲ 독립운동가 신채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특히 신채호 선생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계몽운동이 필요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한국민족의 강인함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08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했는데요. 이는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하여 역사를 체계화한 것으로 일본인들이 제기한 식민주의 역사관을 거부한, 한국 근대역사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한 고종의 친서를 만천하에 공개했고 그 친서가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에 전달됐다는 사실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를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국권회복운동을 벌입니다.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대가 의병활동을 벌이자 그 내용을 심층 취재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의 사전검열대로라면 의병을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해야 했지만 대한매일신보는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의 의병운동을 보도했습니다.

흔들림 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보도, 일제의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 논조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사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꺾기 위한 일제의 집요한 탄압


대한매일신보의 활약을 막기 위해 통감부는 갖가지 수법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했습니다. 마침내 일제는 ‘신문지법’을 일부 수정하여 국내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외국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해 압수 및 판매 금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합니다. 이를 토대로 베델 선생을 추방하기 위해 여러 공작을 벌였고,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 선생을 국채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금시키기까지 했습니다.


▲ 양기탁 선생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러한 과정에서 베델 선생이 물러났고 그의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이 대한매일신보의 사장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매일신보의 판권 일체를 금 4만 원에 팔아넘긴 후 우리나라를 떠났습니다. 결국 대한매일신보의 소유권은 통감부에 넘어갔고 몇 개월 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맙니다.


▲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이토 히로부미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에서 신문이 가진 권력은 비상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끊이질 않으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집요한 사실 보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한매일신보. 민족의 자립정신을 강조한 논설과 사실에 입각한 항일 기사를 통해 국민들의 가슴속에 독립 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7월 18일은 대한매일신보 창간일입니다. 일제의 언론탄압에 굴하지 않고 독립정신과 언론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한매일신보의 의미를 되새겨봅시다.


*참고 사이트:

국립중앙도서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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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북한군은 불법 남침을 감행했고 이것으로 한반도에 3년간의 악몽, 6.25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전쟁 초기,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우월했던 북한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6.25전쟁과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타국에서 유엔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왔습니다. 


그들은 남한이 패전 위기에 놓인 순간 반격의 힘을 실어주었고, 의료지원을 통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해주었습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아 먼 나라까지 찾아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유엔의 파병 결정과 유엔군의 활약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이튿날인 6월 26일,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한국으로의 파병을 최종 결정합니다.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출처: 전쟁기념관)


1950년 7월 5일, 미군 스미스 특수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6개 유엔 회원국이 대한민국에 전투 병력을 파병했고, 우리 국군 역시 유엔군 총사령부의 지휘 아래 편입되어 전투를 치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한의 기습에 국군은 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말았고, 국군과 유엔군은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나 있었습니다.


▲ 폐허가 된 서울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우리 군은 유엔군과 힘을 합쳐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8월과 9월에 걸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당시 전 병력을 이곳에 집중시켰던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됐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며 전쟁 발발 3개월 만인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 인천 폭격을 지켜보는 맥아더 원수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정전협정 체결 과정


1951년, 남한과 북한은 엎치락뒤치락하기를 거듭하며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고, 이후부터는 38선 근처에서 지지부진한 전투만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일방에 의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확산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참전국들의 인적, 물적 피해도 커졌고, 이에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 헬리콥터를 타고 개성에 도착한 유엔군 대표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휴전회담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합니다. 가장 큰 난제는 포로 문제였습니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북․중 연합군은 강제송환을 주장하며 대치했습니다.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전선의 병력들은 회담장과 전방을 주시하면서 전투를 수행하

정전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중요한 고지의 경우,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2년 여간 이어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북한군과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발발한 지 3년 1개월 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일어난 길고 긴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6.25전쟁 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도움의 손길을 보낸 유엔 참전국은 총 몇 개 국일까요? 

지난 6월, 의료지원국 지위를 인정받은 독일까지 총 22개국입니다. 전쟁 당시 16개국이 병력을, 6개국은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해 왔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유엔군의 인적, 물적 피해 역시 상당했습니다. 200만여 명의 유엔참전용사 중 4만여 명이 전사하였고, 1만여 명은 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 6.25전쟁 참전국


정부는 유엔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하는 법률을 공포하면서 이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7월 27일(금) 10시,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유엔군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는 것은 이 땅에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요?


▲ 전쟁 속에 꽃핀 전우애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낯선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참전한 유엔 참전용사들. 그들의 헌신 덕분에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참고 사이트

전쟁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국방부 공식 블로그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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