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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오는 10월 24일(화)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국제연합일이라고도 불리는 이 날은 1945년 10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이 조직된 것을 세계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유엔의 날>인데요. 국가보훈처는 <유엔의 날>을 맞이하여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도왔던 유엔참전용사들을 초청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합니다. 어떤 행사인지 함께 살펴보시죠!


#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등 미 참전용사(가족) 60여명, 67년 만에 한국 방문

▲ 지난 9월 진행한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당시 모습


국가보훈처는 10월 22일(일)부터 27일(금)까지 5박 6일 동안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참전용사(가족) 등 60여 명을 초청하는데요.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공헌에 감사하는 우리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전하고, 그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알리는 행사를 가질 예정입니다.



10월 22일(일) 입국한 참전용사와 가족들은 23일(월) 오전에 재방한 사업 등 국제보훈사업에 대한 소개와 함께 한국 전통문화 및 한복 체험시간을 가진 이후, 오후에는 부산으로 이동합니다.

24일(화) 오전에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전우들의 묘역에 헌화 참배를 하고 부산광역시에서 주관하는 ‘제72주년 유엔의 날’ 기념식과 부산광역시장이 주관하는 감사오찬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또, 25일(수) 오전에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여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기리고, 오후에는 올해로 2번째로 거행되는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는다고 합니다.

26일(목) 오전에는 남북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주관하는 감사만찬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방한하는 미 참전용사 진 폴 화이트(Jean Paul White)씨는 6.25전쟁 당시 미해병대 병장으로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및 장진호 전투에 참전 후 해병대 중령으로 전역하였으며, 현재 장진호 참전협회 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그는 25일(수)에 거행되는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에서 본인이 겪었던 장진호 전투와 자신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방한 소감을 얘기할 계획입니다.


▲ 지난 9월 진행한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당시,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 앞에서 헌화하는 유엔참전용사의 모습


유엔 참전용사 등 재방한 사업은 1975년 민간단체 주관으로 시작되어 2010년 6.25전쟁 60주년 사업을 계기로 국가보훈처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는데요. 이 사업으로 지난해까지 3만 1천여 명의 유엔참전용사와 가족이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유엔군.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는 현재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기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번 방한행사에 국민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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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8일은 고당 조만식 선생 순국 67주기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 국권 회복을 향한 심어준 분인데요. 뿐만 아니라 신간회 결성, 반탁운동 등 폭넓은 영역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조만식 선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만식 선생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여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고자 1905년, 23세 만학의 나이로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졸업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한 조만식 선생은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했습니다.


#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이후 조만식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의 초청으로 1913년,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였는데요. 2년 후에는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 포부를 가졌다는 점을 인정받아 교장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민족적인 긍지를 갖고 국산품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만식 선생은 교장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조직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 오산학교(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을 펼치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맡은 조만식 선생은 1922년 7월, 민족 경제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게 되고 각 지방에서도 지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교육 운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만식 선생은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1927년 2월, 선생은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발기했으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습니다.


▲ 물산장려운동 관련 인쇄물

(출처: 아이티탑부동산)


▲ 동아일보에 실린 물산장려운동 기사(출처: 동아일보)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만식 선생은 신간회 중앙 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12월 13일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선생은 해외에 있는 우리 국민의 권익 보호에도 힘썼는데요. 1931년 7월 만주에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자 동지들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중심으로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보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1932년에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신문사를 수습하고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부는 조만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조만식 선생의 노년 모습(출처: 뉴스천지)


▲ 조만식 선생 동상(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소재)


지난 10월 18일, 서울YWCA(서울 중구 명동)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순국 67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교육과 권익 보호에 평생을 바친 고당 조만식 선생. 일제에 항거하여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대항을 펼치신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선생을 담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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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 1930년 장진홍 의사, 순국하기 전 옥중에서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10월 18일, 여러분들은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장진홍 의사가 대구에서 폭탄의거를 실행에 옮긴 지 90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장진홍 선생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있을 듯한데요. 장진홍 선생은 경북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하고 제2의 의거를 준비하다 피체된 인물입니다. 


#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까지


▲ 장진홍 선생 (출처: 네이버캐스트)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난 장진홍 선생은 어려서부터 애국계몽운동가 장지필 선생의 가르침 아래 구국항쟁과 애국심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1914년 3월, 선생은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였으나 일제 치하에 있던 군대에 복무한다는 것이 더 이상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1916년에 제대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장진홍 선생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는데요. 이때, 향리 출신인 이내성의 권유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점점 강화되는 일경의 감시에 광복단 활동을 이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장진홍 선생은 그 곳에서 조선광복단 소속 이국필, 김정묵 등과 교류하며 보다 과감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명을 규합해 군내 내무서 보병조전을 설치하고 몇 달 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심화된 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해 활동하기 어려워져 장진홍 선생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고국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장진홍 선생이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학살하고 진압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진홍 선생은 이 사실을 세계 만방에 알려야겠다고 판단, 동생을 설득해 땅 약 천 평을 팔아 목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서적 행상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만행을 낱낱이 적어 경북 출신 승무원 하사관 김상철에게 조사서를 전달하며 그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해 줄 것을 요청하였죠.


# 폭탄 전문가를 만나 폭탄의거 계획을 세우다


1927년 4월경 장진홍 선생은 광복단 동지 이내성의 소개로, 폭탄전문가인 일본인 굴절무삼랑(掘切茂三郞)을 만나게 됩니다. 장진홍 선생은 그에게서 확보한 폭탄을 가지고 일제의 관공서, 은행 등의 공공기관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선생은 폭탄의거를 위해 추가적으로 폭탄을 더 확보하는 한편, 함께 의거를 추진할 동지들을 규합하고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선산의 산중 협곡에서 폭파 시험을 해 보는 등 폭탄의거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해 10월 17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그는 그동안 결심했던 폭탄 의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계획인 자동차를 통한 폭탄 투척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방법을 바꾸어 폭탄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거를 실행하기로 했죠. 다음 날인 10월 18일 아침, 장진홍 선생은 인근 상점의 점원으로 위장하여 의거지 주변 한 여관에 잠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관 사환에게 벌꿀선물 상자로 위장한 폭탄을 건네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의 순서대로 급히 배달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출처: 국가보훈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예정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도착한 사환은 어떤 사람의 선물이라며 벌꿀선물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선물을 받은 일본인 은행원은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전달한 벌꿀선물상자에서 화약 냄새까지 나자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죠. 상자를 개봉한 은행원은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은행 밖으로 이 상자를 급히 옮겨두었습니다. 이내, 은행 주변에는 큰 굉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은행원, 경찰관 등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전파되었습니다. 이 유리 파편은 인근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위의 전선이 모두 끊어지는 등 실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습니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하던 사환을 급히 체포해 폭탄 운반 경위를 조사하고 장진홍 선생이 묵었던 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장진홍 선생은 이미 변장하여 피신한 상태였고, 난감해진 일경은 경북 지역의 의심 가는 인물들을 모두 수색하고 검거하는 등 조사에 박차를 가했지만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경은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악독한 고문을 자행하여 자백을 받아 진범으로 꾸미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일로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이원록 선생이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죠.


▲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제2의 거사의 준비, 그리고 일경에 체포된 장 의사


한편, 자신이 의도한 폭탄 의거가 뜻대로 성사되지 못함을 알게 된 안 장진홍 선생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제2의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927년 11월 안동군에 있는 친족 장용희를 설득하여 안동의 경찰서, 은행을 폭파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1928년 1월 20일, 장용희를 대신하여 폭탄을 투척할 사람을 찾아 폭탄을 다시 투척하기로 계획했으나 일경의 수사망이 점차적으로 좁혀져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선생은 그해 2월경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일제의 중의원 및 경시청에 폭탄을 투척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오사카에 거주하는 동생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경에 의해 장 의사의 동생이 수 년 전 일본에 건너가 있다는 소식을 입수한 상태였죠. 결국 장진홍 의사는 동생의 집을 포위하고 있던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2월 19일 대구에 압송된 의사는 일경의 심문에 자신의 거사 일체를 시인하는 한편 “일제가 한국을 독립시켜주지 않는다면 일본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와 폭탄을 던진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라고 크게 호통친 다음 “한국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광복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 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꾸짖는 등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또한 모진 고문에도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만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피체된 지 반년 만인 1930년 2월 17일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습니다. 그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역시 사형이 언도되자 의사는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은 다음 품에 간직하고 있던 돌을 꺼내 재판장을 향해 던지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삼창한 다음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사형이 확정된 장진홍 의사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자고 결심하고 1930년 6월 5일(음) 무더운 여름밤에 자결 순국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경북 칠곡군 석적면 남률의 한 언덕에 매장되었습니다. 친족이나 동지들조차 영결 장소에 입회하지 못한 무덤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15년간 그의 무덤 곁을 지나는 행인들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며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순국의사 장진홍 선생 기념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 소재)

(출처: 국가보훈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10월 18일(수) 오전 10시 경북 구미의 왕산허위기념관에서, <장진홍 의사 대구 의거 90주년 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각계인사,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하여 장진홍 의사의 불굴의 항일정신을 되새겼는데요.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와 독립의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들도 장진홍 의사를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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