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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태평양 전쟁에서 우리나라의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음날인 12월 10일,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후, 이들을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기 위해 훈련과 교육을 실시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고, 다음날 미국이 곧바로 일본에 대한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에 중국은 빠르게 대일선전포고를 이어갔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준비했습니다.

 

▲ 대일 선전 성명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ㆍ영ㆍ미ㆍ하ㆍ가ㆍ호(中ㆍ英ㆍ美ㆍ荷ㆍ加ㆍ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聲明)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一切)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음.

 

1941년 12월 10일,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외부무장 조소앙 선생은 대일 선전 포고 성명서에 각각 도장을 찍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알리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인도에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은 즉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군와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당시의 버마·인도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죠. 단순한 전투 이외에도 포로심문, 암호해석, 선전 전단 작성, 등의 심리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12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76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학생 대표가 대일선전성명서를 낭독했고, 기념식이 끝날 때는 모두 일어나 만세 삼창을 외치며 광복군을 기렸습니다.

 

일제에 당당히 선전포고를 했던 76년 전의 12월 10일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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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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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구한말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외치며 일제에 맞서 고령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최익현 선생의 초상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면암 최익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14세 때 성리학의 대가인 이항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을 배웠고, ‘나라를 항상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라’는 이 정신은 최익현 선생에게 평생의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3세 때에 관직생활을 시작한 면암 선생은 재임 내내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선생의 강직한 성품은 상대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결같았습니다. 조선 후기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가 하면, 1868년 무리하게 경복궁을 재건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요.

 

 

▲ 최익현 선생의 면암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전개한 항일운동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최익현 선생은 조약이 체결되는 데에 일조한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을사늑약에 대해서는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고, 각국의 공관들이 철수하기 전에 무효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은 면암 선생이 당시 올린 상소문, ‘청토오적소’의 내용입니다.

 

 "······을미 사변 때의 역적이 실로 만고의 대역적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이 을사 5적들은 죄가 오히려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지금 이런 대역적들을 오히려 용납하여 일시라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살아 있게 할 것이겠습니까. 저 5적들이 비록 외세에 의지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하는 것이나 역시 폐하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 역적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을 이고 아직도 처벌을 내리지 않나이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죽어 가는 말이라고 하여 귀에 흘려 버리지 마시고, 속히 국적을 토멸하는 동시에 허위 조약을 거부하라는 신의 요청을 단행하여 국가의 멸망을 돌이켜 다시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 신은 통곡하여 숨이 끊길 듯함을 어쩔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이만 아룁니다."

 

▲ 무장한 의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상소를 올리는 것만으로는 항일투쟁의 성과를 올리기가 어려웠지요. 이후 면암 선생은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습니다. 당시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였지만, 선생의 국권 회복을 향한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기개였습니다.1906년 3월 24일, 최익현 선생의 의진은 포천을 벗어나 태인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4월 13일, 선생은 무성서원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선생은 일본영사관에 16개항의 죄목을 들어 규탄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선생이 거느린 의병의 수는 점점 늘어나 5백여 명을 넘게 되었고, 정읍에 무혈입성하게 된 의병들은 거침없는 기세로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칙지와 고시문을 보내왔습니다. 면암 선생은 실망감을 숨기고 이미 기병소를 올렸으니 관찰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답을 보냈습니다.


이후 남원 진입을 꾀하던 최익현 선생은 남원을 지키는 부대가 일본군이 아닌 우리측 진위대라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습니다. 결국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의병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되었지요. 선생과 의병 일행은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 대마도 유배와 선생의 올곧은 신념

 

▲ 태인의병 후 대마도로 압송되는 최익현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의 유배 생활 중 ‘굶어 죽을지언정, 왜놈의 밥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함께 유배된 의사들이 울면서 식사를 권하여 단식은 중단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에 의병 생활과 유배, 단식 등으로 받은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충격으로 1906년 11월 17일, 면암 최익현 선생은 유배지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경기 포천시에 위치한 최익현 선생의 동상
(출처: 포천 홈페이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을 전후로 많은 분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순국하였으므로,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현재 ‘순국선열의 날’의 효시죠.
 
최익현 선생이 순국하신 날짜와 을사늑약일, ‘순국선열의 날’이 모두 11월 17일인 것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우국애민의 정신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던 면암 선생의 애국심을 기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65&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9328&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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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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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의 발발 당일, 북한군의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국토 수호를 위해 적에게 저항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이었던 감봉룡 경찰 경감이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1946년 경찰 창설 1주년 기념 시가 행진

(출처: 국방일보DB)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 지역의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개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죠.


▲ 서울에 진입하는 북한군 보병부대

(출처: 연합DB)


새벽 4시경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2연대는 북한군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김포 반도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감봉룡 경감이 근무하고 있던 개성경찰서의 병력 또한 국군과 함께 철수했죠.


▲ 6.25전쟁 당시 국군

(출처: 육군 공식블로그 동고동락)


그러나 감봉룡 경감은 그가 지휘하는 50명의 철도경찰대원과 함께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주요 요충지들을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추었습니다.


▲ 6.25전쟁 중 시가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감봉룡 경감이 이끄는 철도경찰대는 북한군의 공세에 완강히 저항했고, 개전 이후 처음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다른 통로로 진출하던 전차 5대까지 동원하여 본부 건물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은 우월한 자동화기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습니다. 총탄이 떨어지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도 감봉룡 경감과 대원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돌격하여 장렬히 산화하였습니다. 


▲ 감봉룡 경감


애초에 북한군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지만, 이들의 저항은 전쟁 초기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면서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숭고한 희생이었습니다.


정부는 감봉룡 경감의 고귀한 뜻을 기리어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국토 수호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뜻 깊은 12월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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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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