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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초기,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다부동, 포항 일대에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 통일을 이룩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군과 유엔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대거 개입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이른바 ‘인해전술’로 1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계속해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 지역을 점령했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 남진하는 중공군의 모습 (출처: 중국해방군화보사)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 중 일어났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장진호의 한파 속에서 전개된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물자의 주요 이동경로를 차단했고, 북한군 병력은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북진하던 미군 제1해병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독 추운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무려 영하 40도에 달했던 강추위로 물과 식량이 얼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하였습니다. 차량과 탱크의 기름도 얼어붙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설상가상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은 11월 27일, 미 제1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군은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11월 30일 장진호 근처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하갈우리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한 중공군이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출처: 국방부 공식 블로그)

 

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가며 가까스로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함흥 지역에 모두 진입하면서 장진호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1만 5천여 명의 미군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켰던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 부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죠.

또한, 6.25전쟁 3대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는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던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한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장진호 전투중 국군의 모습 (출처: EBS다큐멘터리)


67년 전 극한의 추위 속에서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 이 전투에서 스러져간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숨 바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국군과 유엔군의 명복을 빕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8591&cid=46628&categoryId=4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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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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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3일 서해의 작은 섬, 연평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꽃게잡이에, 주민들은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인근 부대에서는 해상 사격 훈련이 한창이었죠.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던 오후 2시 30분경, 이 평화로운 연평도에 굉음이 들리며 삽시간에 섬 일대에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7년 전의 일이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 바로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입니다.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의 7주기를 앞둔 오늘, 그 날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훈련 종료 10분만에 연평도에서 터진 굉음
 

▲ 한미합동훈련 중인 모습 (출처: 해군작전사령부)

 

2010년 11월 23일, 당시 연평부대에서는 해상 사격 훈련이 한창이었습니다. 오전부터 시작된 훈련은 오후 2시 24분에 끝이 났습니다.
오후 2시 34분, 훈련이 종료된 지 10분 만에 ‘펑’하는 굉음과 함께 북한의 무차별적인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가옥 십여 채가 파손되고 연평도 일대는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 민가에 떨어진 북한군의 포탄

 

마을에까지 포격이 진행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군은 13분간 대피한 후, 2시 47분부터 곧장 대응 포격을 개시하여 1차 50발을 사격했습니다. 그러나 3시 11분부터 북한은 2차 포격을 실시했고, 연평부대는 3시 25분부터 30여 발을 추가로 사격하며 치열한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 해병대 연평도 대응 사격 모습 (출처: 대한민국 국군)

 

3시 41분, 북한의 포격 중지로 치열했던 교전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포탄이 무려 170여 발이 떨어졌죠. 이 교전에서 우리 해병대원 고(故) 서정우 하사와 고(故) 문광욱 일병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마을 주민 2명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 북한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민가

 

# 연평도를 지켜낸 두 명의 호국영웅

 

포탄이 빗발치고,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국군 장병들은 침착하게 대응사격을 하여 적에 대항하였습니다.
평소 해병대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고(故) 서정우 하사는 포격 당일, 제대 전 마지막 휴가를 떠나기 위해 여객선에 탑승하던 중 연평도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려 복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북한의 2차 포격이 있었고, 복귀 중이던 서정우 하사는 그 자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 국립대전현충원의 고(故) 서정우 하사와 고(故) 문광욱 일병의 묘역

 

고(故) 문광욱 일병은 2010년 8월에 자원 입대한 신병이었습니다. 평상시 그는 친구에게 조국의 평화는 자신이 지킨다며 군대에 올 필요가 없다는 농담을 하는 등 해병으로서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죠.
입대한 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문 일병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일, 포탄이 쏟아지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작전을 수행하다가 포탄의 파편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 2017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 7주기>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우리의 영토를 직접 타격하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같은 해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8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러, 현재 연평도는 그 때의 아픔을 간직한 채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그리고 연평도 포격 도발까지 세 차례에 걸친 북한의 도발과, 목숨 바쳐 우리의 영토를 수호한 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23일(목), <연평도 포격 도발 7주기>를 맞아, 고(故) 서정우 하사와 고(故) 문광욱 일병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참고사이트
연평도 http://www.yeonpyeongdo.com/
네이버 지식백과 https://goo.gl/Suo7F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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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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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도를 표합니다

    2017.11.23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습니다. 조국수호에 몸 바친 영령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6·25전쟁에서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프랑스 참전용사 고(故) 쟝 르우(Jean Le Houx)씨의 유해 봉환식과 안장식을 오는 11월 1일(수)과 2일(목)에 거행합니다.


참전용사 고(故) 쟝 르우(Jean Le Houx)씨는 19살이던 1951년 12월, 프랑스 참전대대 병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1952년 T-Bone 전투에서 2차례 부상을 입었으나 같은 해 10월 화살머리 전투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고인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7월 31일에 전역하였습니다.


▲ 고(故) 쟝 르우 씨의 6.25전쟁 당시(좌)와 최근 모습(우)


이 분과 우리나라의 인연은 전쟁 이후에도 이어졌는데요. 고인은 2007년 국가보훈처 재방한 초청사업으로 방한하였습니다. 54년여 만에 한국에 방문한 고(故) 쟝 르우 씨는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처럼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스무 살의 나와 전우들이 피 흘리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전적지에

나의 유해를 뿌려주시오.”


이후 고인은 “스무 살의 자신과 동료 전우들이 피 흘리며 치열하게 전투했던 전적지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2016년 12월 30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프랑스참전협회 총무가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으로 유해 안장 요청을 하였고, 한국대사관에서 국가보훈처로 연락하여 국가보훈처와 주한프랑스대사관은 유해봉환의 전반을 논의하였습니다. 안장 장소는 주한프랑스대사관과 국방부가 합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고(故) 쟝 르우 씨의 유해는 오는 11월 1일(수) 오전 8시경 인천국제공항을 거쳐 국립서울현충원 봉안당에 임시 안치된 후, 2일(목) 오전 11시 30분에는 전우들과 치열하게 전투했던 화살머리 전투지역 인근에 있는 5사단 내 프랑스 참전비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 지난 9월 25일(월) 거행되었던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 씨의 유해봉환식


1일(수) 유해 봉환식은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국가보훈처장 주관으로 거행될 예정인데요. 봉환식에는 주한 프랑스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와, 고인의 유족을 대표하여 프랑스 참전협회장이면서 현 생 망데시장으로 있는 패트릭 보두앵씨를 비롯한 동료 참전용사(가족) 등 11명의 프랑스 방한단 등이 참석하며, 국방부 의장대가 함께하여 품격있는 의식으로 진행됩니다.


11월 1일(수) 입국하여 5일(일)에 출국하는 프랑스 참전용사 등 방한단의 4박 5일 간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일(목) 5사단내 프랑스 참전비에서 거행되는 안장식에는 주한 프랑스대사, 프랑스 방한단, 국가보훈처와 5사단관계자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날 안장식에서는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결코 잊지 않고 예우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하여 대통령 명의의 근조화환도 헌화될 계획입니다.


▲ 지난 9월 27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거행되었던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 씨의 안장식


6.25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군의 참전 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외인부대 장군이었고 중장으로 예편했던 몽끌라르 장군은 프랑스 정부에서 대대급 규모의 6.25전쟁 파병을 결정하자,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현역에 복귀하여 참전하였고 대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1950년 11월, 순수 지원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군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이후로 그들은 수원에 주둔하는 미국 제2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들은 쌍터널 전투, 지평리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유엔참전용사들은 전쟁 당시 폐허에서 경이롭게 발전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고 6.25전쟁 참전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참전했던 어느 국가에서도 대한민국처럼 유엔참전용사를 초청해 주는 나라는 없다며 오히려 우리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십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유엔 참전용사가 한국으로의 사후 안장을 희망할 경우, 정부 차원의 의전과 예우를 지원할 것이며 참전국과의 혈맹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고 세대를 이어 참전용사 후손들과의 유대관계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한, 유엔 참전용사 초청사업, 참전용사 유해 봉환식 등 유엔 21개 참전국과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보훈사업을 더욱 발전시켜 60여 년 전,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유엔군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대한민국 이미지와 품격 제고에 지속적으로 기여해 나갈 예정입니다.


▲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


이번에 우리나라에 안장되는 고(故) 쟝 르우 씨가 6.25전쟁에 참전했던 나이는 불과 19세였습니다. 전쟁 당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동료 전우들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고인께서 목숨 걸고 지켜냈던 바로 이 대한민국에서, 편안히 잠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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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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