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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북한군은 불법 남침을 감행했고 이것으로 한반도에 3년간의 악몽, 6.25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전쟁 초기,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우월했던 북한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6.25전쟁과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타국에서 유엔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왔습니다. 


그들은 남한이 패전 위기에 놓인 순간 반격의 힘을 실어주었고, 의료지원을 통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치유해주었습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아 먼 나라까지 찾아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한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유엔의 파병 결정과 유엔군의 활약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이튿날인 6월 26일,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한국으로의 파병을 최종 결정합니다.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출처: 전쟁기념관)


1950년 7월 5일, 미군 스미스 특수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6개 유엔 회원국이 대한민국에 전투 병력을 파병했고, 우리 국군 역시 유엔군 총사령부의 지휘 아래 편입되어 전투를 치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한의 기습에 국군은 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말았고, 국군과 유엔군은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나 있었습니다.


▲ 폐허가 된 서울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우리 군은 유엔군과 힘을 합쳐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8월과 9월에 걸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당시 전 병력을 이곳에 집중시켰던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력이 크게 약화됐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며 전쟁 발발 3개월 만인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 인천 폭격을 지켜보는 맥아더 원수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정전협정 체결 과정


1951년, 남한과 북한은 엎치락뒤치락하기를 거듭하며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고, 이후부터는 38선 근처에서 지지부진한 전투만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일방에 의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확산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참전국들의 인적, 물적 피해도 커졌고, 이에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 헬리콥터를 타고 개성에 도착한 유엔군 대표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휴전회담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합니다. 가장 큰 난제는 포로 문제였습니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북․중 연합군은 강제송환을 주장하며 대치했습니다.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전선의 병력들은 회담장과 전방을 주시하면서 전투를 수행하

정전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중요한 고지의 경우,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2년 여간 이어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북한군과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발발한 지 3년 1개월 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일어난 길고 긴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6.25전쟁 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도움의 손길을 보낸 유엔 참전국은 총 몇 개 국일까요? 

지난 6월, 의료지원국 지위를 인정받은 독일까지 총 22개국입니다. 전쟁 당시 16개국이 병력을, 6개국은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해 왔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유엔군의 인적, 물적 피해 역시 상당했습니다. 200만여 명의 유엔참전용사 중 4만여 명이 전사하였고, 1만여 명은 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 6.25전쟁 참전국


정부는 유엔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하는 법률을 공포하면서 이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7월 27일(금) 10시,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유엔군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는 것은 이 땅에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요?


▲ 전쟁 속에 꽃핀 전우애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낯선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참전한 유엔 참전용사들. 그들의 헌신 덕분에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참고 사이트

전쟁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국방부 공식 블로그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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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을 지나 어느덧 7월 중순이 됐습니다. 하지만 호국보훈의 달이 지났다고 해도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애쓴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고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은데요.

오늘은 6.25전쟁 당시 머나먼 땅, 대한민국에 도움의 손길을 보낸 유엔군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21개국(전투지원국 16개국, 의료지원국 5개국)의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지난 2018년 6월, 독일이 의료지원국으로 포함되어 이제는 공식적으로 22개국이 유엔참전국으로 등록되었습니다.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을 계기로 유엔참전국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는 시간!

6.25전쟁 당시 독일이 대한민국에 보내온 따스한 손길에서부터 올해 의료지원국 지위를 인정받은 이야기까지. 저와 함께 살펴볼까요?


# 독일, 6.25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나라가 전투 병력과 의료․시설을 지원해 왔습니다.

독일은 1953년 5월,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해 야전병원 파견 의사를 유엔 본부에 보냈고, 이듬해 80여 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부산으로 파견했습니다. 

독일 의료지원단은 1954년 5월부터 1959년 3월까지, 독일적십자병원에서 30만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6천여 명의 출산을 도왔으며, 의료진 양성에도 기여했습니다.


▲ 환자를 돌보는 독일 의료지원단 (출처: 국방부)

▲ 독일 의료지원단의 활동 모습 (출처: 국방부)


#대한민국, 독일의 손길을 기억하다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하며 6.25전쟁 당시 독일 의료지원단의 기술자로 활동했던 칼 하우저 씨와 의료지원단의 후손들을 만났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칼 하우저 씨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으며 한국 초청의 뜻을 밝혔습니다.


▲ 독일 의료지원단 단원, 후손을 만난 문재인 대통령 (출처: 대한민국 청와대)


#독일 의료지원단, 대한민국을 다시 찾다


이후 11월, 국가보훈처는 턴투워드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을 계기로 6.25전쟁 유엔참전용사와 유가족들을 초청하였는데요. 이 때 칼 하우저 씨와 독일 의료지원단의 가족 및 후손이 대한민국을 찾았습니다.


칼 하우저 씨를 비롯한 유엔참전용사와 유족들은 2017년 11월 11일 독일적십자병원 터를 찾아 기념비에 헌화 및 분향을 하며, 6.25전쟁의 참상으로 시름하던 대한민국에서 독일이 보여준 인류애와 희생정신을 기렸습니다.


▲ 한국을 찾은 6.25전쟁 참전용사 유족 및 독일 의료지원단과 가족들

▲ 칼 하우저 씨가 독일적십자병원터 기념비에 헌화를 하고 있다.


# 독일, 의료지원국으로 포함되다


이전까지 독일은 정전협정 이후인 1954년에 의료지원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의료지원국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올해 6월, 독일이 정전협정 체결 이전인 1953년 5월 즉, 전쟁 기간 중 유엔에 의료 지원 의사를 전했고, 전후 구호가 아닌 유엔군 지원을 목표로 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독일의 의료지원단은 유엔군 산하 의료기관으로서 활동했고, 기존 물자지원국의 기준도 정전 이후 활동을 포함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6.25전쟁 의료지원국에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 독일 의료지원단의 지원 활동 (출처: 국방부)


1950년대의 대한민국은 6.25전쟁의 고통으로 시름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를 치유하기 위해 22개 유엔참전국의 인류애가 있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늦었지만 독일 의료지원단의 숭고한 희생과 봉사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6.25전쟁 유엔참전국 이야기 2편, 전투 병력을 지원했던 에티오피아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참고사이트

대한민국 청와대

국방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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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은 숨가쁘게 지나갔지만 7월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바로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인데요, 


혹시 여러분은 유엔군의 첫 전투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오늘은 오산 죽미령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 유엔, 대한민국에 파병을 결정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감행하며 6.25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전쟁 상황에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곧 한반도 전체가 위기에 빠집니다.


전쟁 발발 당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였고 이튿날인 6월 26일,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6.26결의에 따라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어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6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했습니다.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출처: 국가기록원)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출처: 전쟁기념관)


# 스미스 부대,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결의가 채택됐을 그 때, 대한민국은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거침없는 공세가 이어지는 위기의 순간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유엔군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됩니다.


▲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에 처음 도착한 스미스 부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스미스 부대는 제21연대 제1대대 B, C 중대와 제52포병대대 A포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후 기차를 이용해 대전으로 이동했다가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전차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을 사람을 위쪽에 배치하는 것이다.”라는 극동 미군 사령부 전방지휘소의 처치 장군의 명령에 따라 7월 5일 3시에 죽미령에 진지를 편성하였습니다.


7월 5일 오전 7시경, 스미스 중령은 북한군 전차가 수원에서 남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선두전차가 병점리의 만곡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린 끝에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 전차들에 집중사격을 개시합니다. 치열한 공격으로 2대의 진군을 막아 세우는데 성공했으나 33대의 전차들은 후방으로 통과하여 지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스미스 부대는 20여명의 전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전차 공격 때문에 전화선이 끊겨 보병과 포병 진지 간의 연결이 끊기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어 10시경, 스미스 부대원들은 3대의 전차를 필두로 몰려오는, 수km에 달하는 북한군의 행렬을 발견합니다. 이들은 북한군 제4사단의 제 16, 18연대였습니다. 11시 45분경에 북한군이 900m 전방까지 접근해왔을 때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 기관총을 동원해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러자 적의 전차는 전차포, 기관총으로 스미스 부대에 응전합니다.


오후 2시가 되자 북한군은 보병진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일부는 후방에까지 침입합니다. 항공지원은 물론 통신 두절로 인해 포병지원도 받을 수 없던 상황. 2시 30분을 기해 스미스 중령은 철수를 결심합니다.

 

▲ 죽미령 전투 (출처: 유엔군 초전 기념관)

▲ 수원에서 죽미령에 이르는 도로 (출처: 전쟁기념관)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성과를 냅니다.

애당초 평택까지 진출하려했던 북한군은 5일 오후 6시에야 수원 서정리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미 제34연대가 전투 준비 시간을 확보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유엔군의 첫 전투를 기억하다


죽미령 전투가 벌어졌던 경기도 오산에는 스미스 부대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된 유엔군 초전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앞에 우뚝 서있는 유엔군 초전 기념비는 전사한 스미스 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용맹함을 기리고 있습니다.


▲ 유엔군 초전 기념비 (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유엔의 깃발 아래 치러진 첫 전투, 오산 죽미령 전투.

6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도, 와본 적도 없던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유엔군의 헌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했던 유엔군을 기억해 주세요.


*참고 사이트

전쟁기념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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