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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처음으로 방한했던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들

(출처: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9월 18일(월)부터 23일(토)까지 5박 6일 동안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참전용사,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 그리고 그 가족 등 100여 명을 초청합니다.

‘푸에르토리코’라는 나라에 대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 해의 작은 섬으로, 제주도의 5배 정도 되는 면적에 약 370만 명의 주민이 사는 미국의 자치령입니다. 67년 전, 푸에르토리코가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은인이라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 푸에르토리코와 우리나라의 인연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에 병력과 의료, 물자 등을 지원해 주었는데요. 당시 푸에르토리코도 미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습니다. 

                           

▲ 종군기자가 찍은 장진호 전투 실제 사진


당시 6.25전쟁에 참전했던 푸에르토리코 부대는 제65보병연대로, 전쟁에 참전한 6만1천여 명 중 4만3천여 명이 이 부대 소속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1950년 9월 23일, 처음으로 부산에 상륙한 이래로 미 육군 제3보병사단에 배속되어 6.25전쟁의 9개 주요 전투에 참가하였는데요. 같은 해 12월 미 해병대의 장진호 철수 작전 시,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을 엄호하여 장진호 전투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푸에르토리코, 한국 재방문의 의미


▲ (출처: 국가보훈처)


이번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의 방한은 조금 특별합니다. 2016년 9월에 처음으로 방한했던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환영 관련 기사가 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한국 방문을 희망하는 사람이 증가하여 국가보훈처는 초청 대상을 확대하였는데요. 


이번에 방한하는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 이스마엘 네바레즈(Ismael Nevarez)씨는 6.25전쟁 당시 형과 함께 65연대 보병연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적으로 둘러싸인 대대에서 미 공군전투기가 적군을 공습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적의 위치를 알려준 공로를 인정받아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는데요. 이후 그는 21년간 미국 육군으로 명예롭게 근무하였으며, 그의 딸도 미 공군에 입대하여 첫 히스패닉계 여성 전투기 조종사로 24년을 복무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처음 방문하게 되어 감격스럽고 기대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장진호 전투 당시 일병으로 참전했던 미국 참전용사 딕 트롬(Dick Throm) 씨 또한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인데요. 그는 장진호 근처 유담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한 7해병3대대 중대소속으로, 6.25전쟁을 떠올리면 당시 치열했던 중공군과의 교전 중 심각한 부상을 당했던 친구(밥 맥넬리, Bob McNally)를 열악한 상황에서 간호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67년이 지난 후의 대한민국 모습은 어떨지 무척 궁금하고, 목숨 걸고 지켰던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전해왔습니다.


▲ (출처: 국가보훈처)


# 참전용사의 재방한과 국가보훈처가 전하는 감사의 메시지


국가보훈처는 이번 초청 사업을 통해 유엔 참전용사 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공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그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알리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 (출처: 국가보훈처)


5박 6일 간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18일(월)에 입국하여 23일(토)에 출국하기까지, 참전용사 분들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여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예정인데요. 이와 더불어 인사동과 한국민속촌, 창덕궁 등을 방문하여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체험할 예정입니다.

지금도 많은 푸에르토리코 병사들이 주한미군에 소속되어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데요. 6.25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복무하였던 6만1천여 명의 푸에르토리코 병사들 중 756명이 전사하였고, 100여명 이상은 아직 실종 상태입니다. 


67년 전 젊은 시절을 바쳐 6.25전쟁에 참전했던 장병들은 노인이 되어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땅을 다시금 밟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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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수세에 몰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는데요.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호국영웅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게 뒷받침해준, 엑스레이 작전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 6.25전쟁의 대반전, 인천상륙작전


▲ 인천에 상륙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들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지만 끊임없이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방어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요.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적진지의 배후, 인천을 칠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이 같은 그의 결정에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는데요.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 에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불리한 요건은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상륙작전 개시 시기인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작전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연합군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두 번째로는 인천항이 대규모의 함대가 자리 잡기에는 협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인천항에 앞서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했으므로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이를 극복해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선택한 것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이유가 적군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국군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북한군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공격하면 전략적으로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인천 지역에 허술한 방비태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 인천시내에 들어온 연합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치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여 명이 넘는 인원으로 이들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내는 등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약 3일 후에는 김포와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하여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국군은 서울 이남의 모든 지역을 되찾았고, 북으로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겨진 사전작전, X-RAY작전


▲ 켈로부대 대원들 (출처: 브런치 블로그)


그러나 이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가 시행되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의 계획을 세우던 중, 인천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급제동이 걸리게 되었는데요.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당시 해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에게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의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밀물과 썰물 때의 해안 길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상황 등을 탐지해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 엑스레이 작전(X-Ray Operation)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작전에서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KLO)부대는 인천에 잠입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켈로(KLO)부대는 ‘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1949년 주한미군이 전투 병력을 철수하면서 첩보 수집을 위해 창설한 비정규전 부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켈로부대는 첩보부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국군 간의 의사소통도 담당하는 중요역할을 했습니다.


▲ 임병래 중위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켈로부대는 임병래 중위를 포함한 해군 장교와 민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수정예부대로, 인천 인근에 배치된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바다에 떠 있는 지뢰를 제거했으며,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파악했습니다. 정보를 모으기 위해 부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북한군으로 위장하거나 민간인 인척 시내에 잠입했습니다. 또한 해안의 북한군 방어 태세 확인을 위해 어부로 가장하기도 했는데요. 


▲ 홍시욱 하사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잠입했던 부대원들은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14일, ‘모든 일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을 받고 인천 영흥도에서 철수 준비를 하던 중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 중 부대원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 포위되고 마는데요. 이에 임중위와 홍하사는 자신이 잡히면 기밀이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팔미도 등대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첩보부대원들의 작전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닌데요. 인천상륙작전 당일, 켈로부대의 부대장 최규봉 대장은 켈로부대를 이끌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 팔미도에 잠입하여 등대를 사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등대의 연료탱크와 등불 받침을 연결하는 중요 부품이 사라져 불을 켤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약 2시간에 걸친 수색 작업에도 사라진 부품은 찾을 수 없었으나 기적적으로 어둠속에서 부품을 발견하면서 등대의 불을 밝혀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 수만 명을 태운 함대가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67년 전 오늘은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보통 ‘인천상륙작전’ 하면 맥아더 장군이나 연합군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성공 확률이 5000:1로 매우 희박했던 이 작전의 배후에는 목숨을 걸고 노력했던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 또 이들을 도우며 영흥도에서 활약했던 무명 용사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나라의 숨은 영웅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참고자료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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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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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개전 3일 만에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북한군은 포항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조금 더 후퇴하면 부산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 속, 국군과 북한군은 포항의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밀려오는 적의 공격, 국군은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형산강을 두고 역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를 펼쳤는데요. 이것이 바로, 형산강 도하 작전입니다.


# 형산강 도하 작전이 일어나기까지


▲ 적군을 향해 총탄을 겨누고 있는 국군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1950년 8월 초, 동부전선의 청송지역으로 진출했던 북한군 12사단이 경주 방어의 요충지였던 기계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낙동강 방어선이 흔들리자 적군은 8월 11일에 포항일대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국군 3사단은 고립되고, 경주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북한군은 포항 일대를 점령한 뒤, 쉬지 않고 경주 일대로 진출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였던 형산강 도하 작전을 서두르게 되는데요. 이에 북한군 5사단, 12사단, 그리고 유격부대인 766부대를 작전에 투입시킵니다. 북한군 제766부대는 영덕에서 기계-안강 일대를 향해 서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동해안에서는 제5사단이 영덕에서 해안지대를 따라 계속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의 움직임에 국군 제3사단은 적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영덕 지역에서 남쪽 10km 지점인 장사동 일대로 전진하여 북한군 제5사단과 맞서게 됩니다. 


국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8월 11일 새벽 4시경, 북한병력의 일부가 침입함에 따라 포항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은 포항 탈환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3개 독립부대를 투입하여 북한군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작전을 모색하게 됩니다.


# 포항을 되찾기 위한 형산강 도하 작전


▲ 전투에 투입중인 국군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이슈 블로그)


형산강 도하 작전은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지속된 형산강 방어 전투에서 시행되었던 작전입니다. 당시 형산강 남쪽으로 영일군과 구룡반도가 위치해 있었고, 만약 북한군이 인근의 영일 비행장을 차지하게 된다면 우리 공군의 출격이 저지당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형산강 북쪽으로는 강을 건너 공격하는 국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군의 김일성 직속 충견전대, 그리고 5사단 10연대 11연대의 기관총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북한군을 막기 위한 국군의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요. 그야말로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치상황이 이어졌습니다. 

 

▲ 6.25전쟁 당시 적진으로 향하는 모습 

(출처: 칼칼의 밀리터리와 모형 그리고 풍경 블로그)


▲ 연제근 이등상사 (출처: 예.아-YEAH-그 환한 빛 블로그)


국군 제3사단 22연대 1대대의 분대장이었던 연제근 이등상사는 특공대를 결성하여 1950년 9월 17일, 12명의 돌격대원을 이끌고 포항을 탈환하기 위한 형산강 도하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연제근 이등상사와 특공대원들은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물이 불어서 가슴 높이까지 오는 물살을 헤치며 형산강의 도하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북한군의 무차별적인 사격이 이어졌지만, 연제근 이등상사와 대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중포복까지 감행하며 한발 한발 전진하였습니다. 도하 도중, 연제근 이등상사는 북한군의 사격으로 어깨가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게 되는데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전진하여 수류탄 3발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뒤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 연제근 상사 특공대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북한군은 막아냈지만, 안타깝게도 연제근 이등상사를 포함한 9명의 특공대원들은 적탄에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했던 형산강 도하 작전은 국군 22연대가 형산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했으며, 나아가 포항을 수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요.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든 국군 장병들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9월의 초입에서, 포항의 형산강을 건너 우리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참고자료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들, 불꽃처럼 타오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Ynfp4KK9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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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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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수

    2017.09.15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해 된 간수의 유족은 보복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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