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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국가 수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27건

  1. 2013.02.20 졸업시즌, 우리의 학도병을 잊지 말아주세요. (7)
  2. 2012.09.07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14)
  3. 2012.07.20 6.25 전쟁 정전협정 59주년, '종전'이 아닌 '정전'의 의미 (8)


축하와 감사의 인사가 오가는 졸업시즌이 다가왔습니다! 각 학교에서는 졸업식이 열리고, 학생들은 학사모를 쓰고 활짝 핀 얼굴로 사진을 찍곤 하는데요. 졸업식은 학생과 선생님, 부모님 모두에게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런 날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즐거운 졸업시즌이지만 우리에게는 잊지 말아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학생의 신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과 딸, 학도병입니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연필 대신 총을 집은 학도병들의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학도병이란 누굴 의미하는 걸까요?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요. 정부수립도 국군 창군도 몇 년 되지 않은 상태에 국군의 무기도 북한군에 비하여 열악하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 전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아직 기반이 다 잡히지 않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평범한 학생들도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는데요. 이분들이 바로 학도병입니다.

 

최초에 학도병은 바로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위문품을 전달하거나 부상병 치료를 보조하는 일을 했었는데요.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등 위기 상황이 닥치자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조직하고 이들을 전선에 투입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학생들은 학도병이 되어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죠.


학도병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요?




1950년 7월, 학도병 7백여 명이 부산에서 학도의용군을 조직 편성하여 전라도로 출진하였고, 대구에서는 제3사단 산하 학도의용군에 600여명이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대전에서는 1천여 명의 학도병들이 대전에 비상학도병을 조직하였고, 인천에서도 약 1천여 명의 남∙여 학도병들이 전투에서 버리고 간 무기와 장비를 갖고 인천방위를 결의하였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학도병의 수는 정확히 몇 명인지 파악하기 어려운데요. 다만 약 27,700여 명의 학도병들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죠? 이 수 많은 학생들이 바로 나라를 위해 싸운 학도병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들이랍니다!



학도병의 기록, 포항여중전투





학도병은 1950년 8월 11일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군의 편지가 정훈장교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요. 당시 이우근군의 편지는 피로 얼룩져 내용을 알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에는 당시 급박했던 전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돼 있는데요. 전장에 있었던 학도병들의 마음이 지금까지 느껴지는 듯 합니다.


포항 전투는 6∙25 전쟁 당시 71명의 학도병과 조선인민군 육군 766 유경대가 벌인 전투인데요. 이 때 학도병 48명이 전사했으며, 북한군은 6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영화 ‘포화속으로’]



특히 이우근군의 편지는 포항여중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토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 전투에서 학도병들이 활약한 덕분에 20만여 명에 달하는 피란민이 남쪽으로 대피했으며, 제 3사단의 보급품을 무사히 전달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행정기관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답니다. 또한 8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으며, 포항 전투를 계기로 북한군의 공격 속도는 늦춰지게 됐죠.





학도병을 기리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포항시 용흥동 탑산에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 곳에는 당시 학도병들이 사용했던 무기와 유품을 비롯해 인물모형, 디오라마 등 학도병 관련 전시물 총 95점이 전시돼 있어, 학도병들의 혼을 기리고 6∙25 전쟁 당시 참상을 일깨워주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을 텐데요. 졸업시즌을 맞아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서 학도병들의 용기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지금까지 학도병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우리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을 지켜 준 학도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올해 졸업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리고요. 학도병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잊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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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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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한명

    2013.02.20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도병, 그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학생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대한민국 교육 발전의 큰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큰 발전을 이룩하는데 큰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업적을 기억해야 할 차례입니다. 학도병,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이지연

    2013.02.21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랑스런..대한의 아들딸....
    우리가 이렇게 현재 행복하게 살수있는건 모두 이분들의 희생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한걸거예요...
    감사합니다....

  3. 2013.10.08 2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4. 신현승

    2014.05.17 1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학여행 가다가 세월호 사고를 만나 죽은 어린 학생들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도 끓어봅시다^^

  5. karmazzi@naver.co.

    2014.06.05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이 대한민국에 살고있읍니다
    정말감사합니다

  6. 2014.06.12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

    2014.06.15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전쟁을 진정한 영웅은 학도병들입니다.
    고등학생 공부해야돼는나이에 교과서 대신
    총을 들고 저 원수들로 부터 조국을 지키기위해 죽어나가셨습니다.

오는 15일이면 인천상륙작전 승전 62주년을 맞습니다. 62년 전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으로 나라가 없어질 뻔 했죠.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이 반격의 돌파구를 연 것도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국군의 반격은 불가능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어떻게 전개됐는지 되돌아봅니다.

 

상륙지점 결정

 

개전 후 파죽지세로 진격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국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뒤이은 UN군 참전과 해공군의 우세가 북한의 진격을 막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아군도 낙동강까지 내려 온 북한군을 밀어내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에 유엔군 수뇌부는 비밀리에 후방상륙작전을 계획합니다.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상륙작전의 후보지로 인천을 고집했는데요. 미 합참 등이 후보지로 거론했던 전북 군산에 대해 “상륙에는 유리하지만 북한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효과는 미미하다”는 판단에서였죠.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항구로 상륙작전을 진행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그럼에도 인천이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판단,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명명한 인천상륙작전을 명령합니다.

 

“우리가 이 작전이 성공할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적도 상륙작전을 예상치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전은 감행되어야 한다.”
 
맥아더의 이러한 주장은 미 국방장관과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고, 8월 30일 작전 명령이 하달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진행

 

작전이 결정되자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은 9월 초 이희정 중령, 함명수 소령에게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지시, 인천상륙작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한편 유엔군은 군함 미주리호를 강원 삼척 앞바다에 파견, 공습을 통해 북한군을 기만시켰고, 유엔군이 군산에 상륙한다는 거짓 정보로 북한군의 정보망을 혼란시켰습니다. 작전 D-1, 9월 14일에는 경북 영덕군에서 학도병 772명이 투입된 양동작전 장사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시선을 완전히 인천에서 배제시켰죠.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중상을 입은 학도병의 희생을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9월 14일 19시, 한국과 미국 특공대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15일 0시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날 늦은 저녁, 최규봉 대장과 클라크 대위 외 4명의 특공대는 명령을 받은 즉시 팔미도 탈환을 위한 비밀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작은 보트를 타고 영흥도에서 팔미도로 향했습니다.

 

팔미도에 침투한 특공대는 5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는데 성공하였고, 부상에도 불구하고 특공대는 명령된 시간에 맞춰 등대를 밝히기 위해 등대로 올라갔습니다. 9월 15일 0시 12분, 등대의 불이 켜짐과 동시에 261척의 유엔군의 함정이 인천만으로 무사히 진입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5일 새벽 5시 인천앞바다에 공격준비사격이 몰아쳤습니다.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에 상륙하면서 1단계 작전은 성공합니다. 이어 국군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이 인천반도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유엔군은 인천항의 높은 방파제를 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 개를 공수했는데요. 이 작전은 맥아더 원수와 손원일 제독의 지휘로 이뤄졌습니다. 전투를 지휘하던 손 제독은 전투 도중 기함을 나와 소총을 들고 해병대 상륙을 지휘해 미군 장성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죠.

 

 

 

작전 중 미 해병대 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수류탄을 투척하려던 중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수류탄을 떨어뜨리는데요. 로페즈 중위는 떨어진 수류탄을 온 몸으로 막아 소대원을 구하고 죽었습니다. 미국은 로페즈 중위의 전공을 기려 사후 미군 최고 영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을 진수했습니다. 위 사진은 로페즈 중위가 죽기 바로 몇 분전 사진입니다.

 

서울을 수복하라

 

인천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이어서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목표는 바로 서울 수복에 있었습니다. 9월 17일,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18일에는 영등포까지 진출하였고, 19일에는 한강을 도하하였습니다.


한편 인천에서는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하면서 서울 수복을 위한 작전에 투입됩니다. 국군과 UN군의 진격에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려던 부대와 신규 편성한 부대, 심지어 낙동강 전선에 있는 부대 일부까지 급히 돌려 저지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연희고지 일대에서는 수일 간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습니다. 북한군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미 제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동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동,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저지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습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결국 국군과 UN군은 북한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928일 서울 수복에 성공, 국군 해병대에 의하여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929일 정오, 중앙청에서는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맥아더 원수는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계했으며,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일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는 일입니다. 북한군 남침 3일 만에 그들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는 감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손원일 제독은 국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포고문을 남깁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이와 함께 손 제독은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이라도 협박에 못 이겨 단순협조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면서 작전 성공은 물론 각 수복한 수도 서울의 민심이 동요하지 않게 수습합니다. 이렇게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해병대를 진두지휘한 손원일 제독은 뒤에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과 함께 미국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 받습니다.

 

서울수복까지 완료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군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됐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보급로가 차단되며 크게 동요했고, 국군과 UN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개시해 영토를 수복했습니다. 북한군 병력은 2만 명 정도만 후퇴하고, 강제 징집당한 의용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남은 북한군은 포로가 되거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으며,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국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 진수한 이오지마급 강습상륙함 12번함을 인천함으로 명명합니다. 인천함은 레바논과 소말리아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95년 기뢰제거를 위한 소해함으로 개조되었고, 2002년 취역 해제되었습니다.

 

우리 해군도 내년 취역 예정인 차기 호위함의 1번함의 이름을 인천함으로 지었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해5도 사수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이자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손원일 제독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 해군이 고입한 214급 잠수함의 1번함은 손원일함으로 명명되어 우리 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국군과 UN군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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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07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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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9.10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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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9.10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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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9.15 1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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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9.15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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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장세명

    2012.10.05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항구로 상륙작전을 진행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그럼에도 인천이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판단,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명명한 인천상륙작전을 명령합니다.

    한편 유엔군은 군함 미주리호를 강원 삼척 앞바다에 파견, 공습을 통해 북한군을 기만시켰고, 유엔군이 군산에 상륙한다는 거짓 정보로 북한군의 정보망을 혼란시켰습니다. 작전 D-1, 9월 14일에는 경북 영덕군에서 학도병 772명이 투입된 양동작전 장사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시선을 완전히 인천에서 배제시켰죠.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중상을 입은 학도병의 희생을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팔미도에 침투한 특공대는 5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는데 성공하였고, 부상에도 불구하고 특공대는 명령된 시간에 맞춰 등대를 밝히기 위해 등대로 올라갔습니다. 9월 15일 0시 12분, 등대의 불이 켜짐과 동시에 261척의 유엔군의 함정이 인천만으로 무사히 진입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인천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이어서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목표는 바로 서울 수복에 있었습니다. 9월 17일,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18일에는 영등포까지 진출하였고, 19일에는 한강을 도하하였습니다

    북한군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미 제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동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동,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저지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습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일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는 일입니다. 북한군 남침 3일 만에 그들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는 감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국군과 UN군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함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12. 장은숙

    2012.10.08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천상륙작전에 재일학도의용군도 함께 했는데 그런얘긴 전혀 없고 학도병으로 뭉뚱구렸네요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루어 주셨으면합니다 중학교때 어렴푸시 기억나는데 무슨전쟁 인지는 기억않나는데 이스라엘은 전쟁이 나니깐 유학생등 해외에 나가 있는사람은 자기나라로 전쟁에 참여하려 귀국했고 중동인지 그상대는 전쟁에 참여하려 할까봐 도망갔다고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면서 우리나라 재외국민은 한줄 그런얘기가 없더라구요 이스라엘 국민성만 위대한거구 우리나라 국민성은 아무것도아니지??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2.10.08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은숙님 안녕하세요. 지난 9월 27일에 훈터 블로그에 게재된 '재일학도의용군'관련 콘텐츠를 주소입니다.
      세계최초 재외국민 참전부대 재일학도의용군▶ http://mpva.tistory.com/1930

727일이 어떤 날인지 알고 계세요? 59년 전 이날, 6.25전쟁의 정전협정이 체결됐죠. 이 날 이후 3년간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던 전쟁의 총성은 멎었지만, 어디까지나 종전이 아닌 ‘정’, 즉 전쟁을 잠시 중단한, 평화가 정착하지 않은 채로 59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분단 체제의 고착을 가져 온 정전협정은 과연 어떻게 체결되었으며 우리에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1950625,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전쟁 초기 북한의 압도적 우세로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며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자유 우방국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며 통일을 눈앞에 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고, 1951년 여름 이후 전쟁은 38선 근처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며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해 6.25전쟁의 정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제의에 따라 정전회담 개최를 요구합니다. 이후 리지웨이 사령관은 북한의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 사령관에게 정전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북한 측이 수락함으로써 7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710일부터는 본회담을 개시하면서 정전회담이 진행됩니다.

 

 

 

 

양측은 본 회담 개시 17일 만에 의사일정을 합의하고, 1027일부터는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 확정문제는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결국 1127일 현재의 양측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내용에 합의합니다. 이 군사분계선은 30일 이내에 정전이 성립되지 않으면서 효력을 잃지만, 이후 어느 정도 수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군사분계선의 기준으로 확정됩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못지않은 난제가 바로 포로송환 문제였는데요, 일반적 전쟁이라면 국제법에 따라 포로송환이 이루어지면 되지만, 6.25전쟁은 같은 민족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들도 이념에 따라 갈라져 있었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도 많았기에 이 문제로 정전협상은 난항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1953, 미국에서는 6.25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하고, 소련에서도 정전에 미온적이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정전협상 재개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중국에서도 주은래 수상이 이해 330일 북경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부상포로 우선 송환 및 포로송환을 위한 중립국감시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57일 북한과 중국이 제시한 포로송환원칙에 대해 525일 유엔군이 수락하면서 정전회담은 재개되고, 포로송환 합의도 이뤄지게 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포로송환 협상을 거부하고 유엔군 측 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하고,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합니다. 이 일로 한때 미국과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 정전 이후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됩니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에도 정전협상은 계속 진행되어 1953727일 오전 10시 정각 제159차 본회의장인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유엔군 측과 북한, 중공군 측이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갑니다. 한국 정부는 최덕신 육군 소장을 배석만 시킨 채 협정문에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종식이 아닌 정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전협정 후에는 완전한 평화정착을 위한 평화협정이 이어지는데요. 한반도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북한은 대한민국 대표가 정전협정문에 사인하지 않았으므로 평화협정 협상 대상에 대한민국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와 유엔군은 대한민국도 당연히 평화협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협상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나 DMZ의 산발적 교전, NLL 해상 도발 등 남북간 국지전이 멈추지 않으며 전선의 긴장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평화의 완전한 정착을 위하여 정전이 아닌, 종전협정이 체결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한민국을 평화협정에서 배제하려는 북한의 주장은 바뀌어야 하며, 무력 도발의 완전한 중단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도 어디까지나 정전상태라는 걸 명심하고, 항상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전쟁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전협정일을 특별히 기념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37천명의 미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20096.25전쟁 정전협정일을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 정전일로 제정하여 조기를 게양하고 이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 역시, 2009년 취임 이후 해마다 한국전 정전기념일 포고문을 발표하여 6.25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참전용사의 노고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올해 727일에도 미국 전역에는 성조기가 조기로 일제히 게양된다고 합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미국을 방문하여 오는 27일 미국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거행될 정전협정 59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페네타 미국 국방장관과 함께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하고, 하루 전날인 26일에는 에릭 신세키 보훈부장관과 내년 정전협정 6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사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예정입니다.

 

내년이면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 됩니다. 언젠가 정전이 아닌 종전이 될 날을 기대하면서도, 전쟁을 잊지 말고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걸 명심하고, 그 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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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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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24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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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우식

    2012.07.24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정전협정 59주년이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가 1950년도에 태어났으니 전쟁통에 살아남은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 집니다. 그후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경제대국으로
    발전한것은 꿈만같은 현실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더욱 온국민이 단결해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3. 유충재

    2012.07.24 2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1948.11월에 입대하여 1사단12연대 2사단31연대 9사단28연대에 전전 재배치됨으로서 1953.7.27일 휴전협정시까지 철원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다 1964년 육군군수학교에서 연구교관을 끝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4. 2012.07.25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2012.07.26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2015.08.03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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