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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국가 수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43건

  1. 2014.05.02 포탄을 안은 채 적 진지에 뛰어든 육탄10용사 (1)
  2. 2014.04.24 한국에 파병 보낸 형제의 나라, 필리핀!
  3. 2013.12.31 6·25전쟁 속 임시수도 정부청사 부산의 과거와 현재

 

 

올해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64년이 됩니다.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태로웠을 때 많은 군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싸웠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하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과 유엔군은 빗발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두 어깨에는 조국의 안위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죠. 오늘 훈터에서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이었던 1949년 5월 4일 북한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 채 적 진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산화한 10명의 군인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육탄 10용사 현충비                                ▲통일공원에 있는 육탄10용사 충용탑

 

(출처-국가보훈처 현충시설 통합정보)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전면전을 예고하는 소규모 전투가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일어났는데요. 특히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는 그 횟수가 잦았습니다. 1949년 4월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은 병력 1천여 명을 개성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월 3일 새벽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하여 38선 남방 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습니다. 

 

1949년 5월 4일, 국군은 북한군에게 빼앗긴 개성 송악산 일대 4개 고지(292, 155, 유엔, 비둘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수십차례 전투를 펼쳤지만 수적열세와 적의 토치카(tochka, 지하 참호)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공격으로 인해 고지탈환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송악산 능선에 버티고 있는 북한군의 토치카 10개소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했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손을 들고 특공대로 자원한 것은 연대 하사관교육대의 서부덕 이등상사였습니다. 이후 김종해 상병 등 인원이 가세하여 10명의 특공대가 이 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부덕 이등상사를 대장으로 하여 10명의 특공대들은 81mm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한 급조 폭발물을 가슴에 안고 적진으로 돌격했습니다.

 

적의 포화를 뚫고 돌진하는 동안 그들의 몸은 포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결국 10개의 토치카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 국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돌격하여 4개의 고지를 탈환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는데 이를 ‘송악산 전투’라고 부릅니다. 정부에서는 열 명의 용사를 '육탄 10용사'로 명명하고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부덕 상사는 소위로, 다른 9명은 상사로 특진시키는 동시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육탄10용사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육탄 10용사]


서부덕 소위, 박창근 상사, 황금재 상사, 윤옥춘 상사, 윤승원 상사,

김종해 상사, 이희복 상사, 오제룡 상사, 양용순 상사, 박평서 상사

 


 

  

         

 

 ▲육탄 10용사의 모습(사진출처: 전쟁기념관)

 

 

 

 

비둘기 고지에는 초목도 운다
적탄의 비 오던 날 아군의 용전
들었나 포연 속의 적군의 얼굴
서상사는 원합니다. 특별 공격을
부대장을 울려주던 애원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유엔 고지에는 적구도 운다
토치카 파괴하던 십삼시 이십분
붉고 검은 얼굴 위에 방긋 웃었고
내 한 젊음 장한다짐 최후의 부탁
지축을 흔드는 폭발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 군가 <육탄10용사> 가사

 


5월 7일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육탄10용사 통일공원에서 「 육탄10용사 제65주기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온몸에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산화한 육탄10용사의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65년 전, 조국을 위해 죽음의 두려움과 당당히 맞섰던 육탄10용사의 애국심과 용기를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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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일진

    2016.06.15 1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의 아버지가 위 분들의 시체를 수습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6.25발발까지 국방경비대 11연대 소송으로 송악산에 근무하셨죠.

 

 

6•25전쟁이 일어난 지 64년이 지났습니다. 북한의 남침에 의해서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당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들과 자유 우방이 우리나라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였습니다. 미국의 육•해•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이후 16개국이 전투부대 파병을, 5개국이 의료지원을, 39개국이 물리지원을 통해 대한민국을 도왔습니다. 


최근 필리핀 노병이 우리나라 아라우 부대에게 감사편지를 전했다는 훈훈한 사연이 들려왔는데요. 그 노병은 6•25전쟁 당시에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6•25참전용사로 이름은 소피오 로브리고입니다. 올해 여든의 나이가 훌쩍 지난 로브리고씨는 손수 쓴 편지를 아라우 부대에 직접 찾아가 전했다고 합니다. 아라우 부대는 지난해 11월 태풍 ‘하이옌’으로 피해를 입은 필리핀을 돕기 위해 파견된 부대인데요. 소피오 로브리고 씨가 아라우부대를 방문하고 감사편지를 전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로브리고씨는 편지를 전하면서 필리핀을 위해서 한국군을 파병해준 대한민국과 대통령에게 감사하며,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면서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아라우 부대의 도움도 필리핀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 거라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고 하는데요. 과연, 로브리고 노병의 젊은 날은 어떠했으며, 6•25전쟁에서 필리핀은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요? 
 

 


▲부산에 도착한 첫 필리핀군대

 

 


필리핀은 6•25전쟁 당시에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파병을 보낸 국가입니다. 필리핀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아로요 대통령의 부친인 마카파갈 전 대통령이 상원 외교위원장으로서 참전안을 의회에 상정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라모스 전 대통령 역시 6•25전쟁 참전용사인데요. 전 대통령이 참전용사가 될 정도로 필리핀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지금도 굉장히 우호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필리핀은 우리에게 7,420명을 파견하였습니다. 
   

 

 

 

 

 ▲필리핀군 참전비

 

 


필리핀군은 1950년 9월 20일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는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반격 작전이 수행되면서 병력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죠. 


필리핀 대대는 10여일 간의 적응 훈련을 마치고 후방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고, 1•4후퇴 뒤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다시 전개되자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필리핀군은 특히 전곡 진상리 전투(51년 4월 11일), 연천 율동 전투(51년 4월 22일), 적성 설마리 글로스터대대 구출작전(51년 4월 24일), 철원 에리고지 전투(52년 5월 18일), 양구 크리스마스고지 전투(53년 7월 15일)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외로웠던 시절, 함께 싸웠기에 버틸 수 있었던 그 날의 기억!
 

 

 

▲부산에 도착한 미 해군 병원선 선장에게 환영의 꽃다발 주는 김활란

 

 

한반도에서의 6•25전쟁은 참혹했습니다. 1951년의 크리스마스는 춥고 배고팠으며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휴전선을 설정하는 문제가 있었을 당시, UN군과 중공군은 극적으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데 합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강원도 양구군에 위치하고 있는 1090고지에서 포탄의 강력한 폭발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총 400여발이 되는 포탄이 집중 투하된 것인데요. 중공군들이 조건부 분계선 설정 합의를 한 내용을 무시하고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고지는 이후 4일 동안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는 상황이 전개 됩니다. 유난히 추웠던 이 겨울, 크리스마스의 고지는 아름다운 트리 대신에 끔찍한 피가 물들게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군을 도와주고자 했던 필리핀의 참전용사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 국군과 함께 싸워주었고, 12월 28일에 기습공격으로 중공군을 격퇴시키고 전초기지를 사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의 이름이 사라질뻔한 6•25전쟁 당시에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준 필리핀 참전용사들의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을 우리는 지금도 잊지 않았습니다.리나라는 그 시절 우리를 도와준 필리핀에게 보은을 하기 위해 아라우 부대를 만들어 파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헌신적으로 서로를 도운 필리핀과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우정을 앞으로도 고귀하게 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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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가족 여러분, 아마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는 사실은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1394년 조선의 새 도읍지가 된 이후로 대한민국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는 서울. 하지만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 아닌 부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지금부터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된 배경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드리겠습니다. 




6·25전쟁 발발과 제1차 임시수도로의 이전



▲ 6·25전쟁 당시 북한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남침함으로써 6·25전쟁이 시작됩니다. 

당시 북한군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따라 아직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은 부산을 제1차 임시수도로 지정하게 되었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후 2달여 만인 1950년 8월 18일의 일입니다.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됨으로써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경상도청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임시정부 청사 및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인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번지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라의 중심이었던 수도를 떠나 부산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 건 큰 비극이었으나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의 평양점령 이후 10월 27일 한국정부는 서울로 1차 환도를 하게 됩니다.  

  


▲ 6·25전쟁 당시 부산 임시 정부청사 모습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제2차 임시수도 지정과 서울로의 2차 환도 


부산에서 서울로 1차 환도가 되었지만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으로 다시금 대한민국 정부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중공군의 6개 군단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다시금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하고 1951년 1월 4일 제2차 임시수도로 지정하였고 주요 정부부처들이 이전하였습니다. 

                          


▲ 6·25전쟁 당시 부산의 피난민촌 모습 (출처=6·25전쟁 60주년 사진집)



이후 중공군과 북한군의 남침은 거세졌고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쟁 직전 40만 명 정도였던 부산의 인구가 1․4 후퇴 후 84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수치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모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피난민이 몰려드니 사회시설 또한 풍족할 리 없었습니다. 정부와 부산시가 1차 임시수도 이전과 환도 이후 피난민 수용소를 동별로 배치하고 급하게 수용소를 마련하였지만 피난민의 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부족한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해 거주지를 마련하지 못한 피난민들은 빈 땅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런 판잣집에 거주하는 피난민들을 더욱 괴롭게 한건 바로 화재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부산시민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국제시장 화재, 부산역전 화재는 피난민들의 판잣집 철거의 이유가 되었고 많은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떠나 이재민이 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렇듯 고단한 전쟁 속에서 피난민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953년 8월 15일 정부 임시수도는 부산에서 서울로 제2차 환도를 하게 됩니다. 



전쟁 이후의 부산


6·25전쟁 이후 부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북한군의 기세에 후퇴하게 된 아픔의 장소였기 때문일까요,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일까요.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로 환도 하였지만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사람들,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부산에 남아있었습니다.


전쟁 직후 부산의 인구는 100만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부산 토박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쟁을 피해 피난을 온 피난민들이었습니다. 이 피난민들은 앞으로의 삶과 미래를 위해 부산에서 고군분투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혼란스러워진 도시를 지금의 부산이 있게끔 그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바로 우리가 부산과 6·25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 현재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건물원경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였던 건물은 휴전협정 이후 다시 경상남도청이 되었으며 이후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실미도, 하류인생과 같은 유명 영화 촬영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2007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이전해왔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 사회적 변화를 그대로 품고 있는 건물로 임시수도 기념관과 함께 위치해있습니다. 


 현재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대한민국의 제일가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많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 내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제시장, 해운대, 광안리와 같은 대표적 관광지 이외 임시수도 기념관과 정부청사를 방문해보신분은 많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6·25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부산 임시정부 청사 및 기념관에서 피난민들의 아픔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서러움과 한을 다시금 기억하고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용 출처> 

문화재청 

두산대백과 

현충시설통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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