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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상륙작전 당신 육군준장 휘트니,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육군소장 알먼드

(출처=두산대백과사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을 필두로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이 군사 작전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유명한 군사 작전 뒤엔 어린 영웅들의 희생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몇 해 전 학도의용군 이야기를 다룬 '포화 속으로' 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죠. 바로 이 학도의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 북한군의 시선을 따돌릴 목적으로 진행된 학도의용군의 장사상륙작전. 군복보다는 교복이 잘 어울렸을, 아직은 어린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도의용군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 위한 양동작전의 시작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계속되는 남진끝에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불리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되는데요, 작전의 성공을 위해 북한군의 거점지인 영덕군 장사리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장사상륙작전을 양동작전으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보안이 가장 중요한 작전이었기에 유격대원들에게 극비리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유격대원들이 바로 학도의용군인데요. 지원병, 피난민, 전쟁 고아 등 10대 소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어린 학생들은 본인의 키보다 큰 소련제 장총과 보급품 1kg 밀가루 6봉지를 받아 9월 13일 장사리로 가는 2,700톤급의 문산호에 몸을 싣게 됩니다. 



▲ 학도의용군을 수송하던 문산호 (출처=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좌초된 문산호와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


인천상륙작전과 장사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장사리로 향했던 학도병들은 채 도착도 하기 전에 태풍 케지아에 의해 문산호가 좌초되는 시련을 겪습니다. 학도병 일부는 수장되고 남은 학도병들은 겨우 밧줄에 의지한 채 장사리 땅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9월 14일 힘겹게 장사리에 도착한 학도병들을 맞이한 건 북한 2개 사단 정예부대의 집중 사격이었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고 학도병들의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학도의용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장사동 남쪽의 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학도의용군이 고지를 탈취하고 교전이 계속되자 북한군은 장사리로 병력지원을 요청했고 북한군 대부분의 병력이 장사리 인근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이렇게 북한군의 병력과 시선이 장사리로 향하는 동안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고 인천을 확보하고 서울을 탈환하며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게 됩니다. 


하지만 학도병들은 타고 온 배가 수장된 까닭에 장사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며칠을 굶주리며 버티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해군수송선이 학도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장사리 포구에 들어왔지만 총 공세를 펼치는 북한군의 총에 맞아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맙니다. 설상가상 북한군의 폭격이 함선에 집중되자 학도군들의 승선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수송선은 회항하고 맙니다. 이렇게 총 772명중 139명 전사, 92명 부상. 이 외 행방불명 다수라는 집계를 남긴 채 장사상륙작전은 마무리 됩니다. 

 


▲ 학도의용군 사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사상륙작전 당시 사진, 작전 후 철수 장면 (출처=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꼭 기억해야 할 학도의용군의 희생


6·25 전쟁 중 중요한 군사작전 중 하나였으나 많은 이들이 알지 못했던 장사상륙작전. 

하지만 좌초되었던 문산호가 1997년 3월 6일 해병대에 의해 갯벌 속에서 발견하면서 장사상륙작전과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은 문산호가 좌초되는 시련속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적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뒤에는 어리고 보호받아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현역 군인 이상의 투혼을 발휘한 학도의용군의 기개와 호국정신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군복으로 갈아입은 채 적진으로 향하던 우리의 학도의용군. 부모님의 품이 가장 그리운 어린 소년들이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성 속에서도 현역 군인 이상의 투혼을 발휘해 준 그들의 용기와 호국정신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나이 대에 우리가 편안히 학교를 다니고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따뜻한 유년시절을 지낼 수 있도록 밑거름을 준 것이 장사상륙작전입니다. 이러한 장사상륙작전에서의 학도의용군의 희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장사해수욕장 내에 위치한 장사상륙작전 전몰학도병 위령탑



<내용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홈페이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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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우연

    2014.06.12 0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그분들의 애국희생정신에 감사합니다 바로 이나라의 영웅들입니다

  2. 민일홍

    2014.06.21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3. 김경진

    2014.09.09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4. 유신

    2016.04.21 0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역사속에서 외세의침략 은 꾸준히 이어오고 나라가 위급시마다 우리의 선조분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이 나라를
    목숨으로 지키어 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주권을 가지고 이땅에서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희생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전세계를 호령하던 나라도 약소국 으로 전락되거나 없어졌지만 지금 우리는 세계속의 대한민국인 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며 이땅을 위하여 목숨 바친 선조분들을 결코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디 자녀분들 에게 라도 우리 선조분들이 오랜옛날 부터 근현대사 6.25 까지 무기가없어 낫,곡갱이 ,포탄을 들고 맨몸으로 적들과
    싸워 이 나라를지키 것에 대하여 알려주시어 이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5. 윤성민

    2016.07.29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물이 납니다.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연평도 포격도발 3주기, 국민의 하나된 힘이 최고의 안보입니다.


지난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평온했던 인천광역시 연평도의 민간인 마을과 우리 해병대 기지에 방사포 170여 발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는 NLL부근에서 K-9 자주포 해상사격훈련 중이었는데, 북한은 이를 침략 행위로 규탄해 도발을 가한 것입니다. 이 훈련은 기존에도 하고 있었던 훈련의 일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는 6∙25 전쟁 이후 최초로 북한이 우리 영토를 공격한 것입니다. 평화롭던 연평도는 포연으로 가득 차 마치 63년 전 전시상황을 보는 듯 했습니다. 





우리 해병대는 첫 피격 13분 후 북한의 무도 포진지에 50발, 개머리 포진지에 30발 총 80여 발을 대응사격 하였습니다. 이후 백령도 부근 북한 해안포 기지에서 해안포 입구 개방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연평도 포격도발은 해군만이 도발 대상이었던 1, 2차 연평해전이나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과다르게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포격을 가하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했습니다.





북한이 우리에게 발사한 포탄은 총 170여 발. 비록 절반 가량은 바다에 떨어졌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소중한 국민을 잃게 되었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로 해병대 장병 중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 중 姑문광욱 이병과 姑서정우 병장이 병원으로 이송 중 끝내 전사하였습니다. 특히 서정우 병장의 경우 말년 휴가를 나가기 위해 여객선을 타려다 포격이 시작 돼 부대로 돌아가던 중 파편에 맞아 전사하였음이 알려지며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이후 이 두 명은 각각 문광욱 일병과 서정우 하사로 일계급 특진이 추서되었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문광욱 일병과 서정우 하사 외에도 16명의 장병들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故 서정우 하사와 故 문광욱 일병]



이 뿐만 아니라 연평도 포격도발은 민간 인명피해도 남겼습니다. 故김치백, 故배복철씨가 이 사건으로 사망하였고 3명의 민간인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많은 사람들이 재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평도를 떠났던 주민들도 이제는 다시 연평도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데요. 3년 전 그날의 공포가 쉽사리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매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에는 주요 정부인사와 장병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석하는데요. 특히 전사 장병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유족들의 모습은 3년 전의 무자비한 도발 사건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을 안겨주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합니다.





올해 연평도 포격 도발 3주기 행사는 11월 23일 오전 10시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국민의 하나된 힘이 최고의 안보입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우리 영토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북한의 만행을 국민과 함께 상기하고 전사 장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려, 국민의 안보의지를 다지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는 전사자 유가족을 포함해 정부 주요인사, 부대원, 시민 등 총 4,000여 명이 참석 하였는데요. 식전행사로 유가족 및 부상자 환담과 전사자 명비 참배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번 행사에는 80개의 북으로 당시 상황을 표현한 ‘그날의 기억’을 시작으로 박애리와 팝핀현준이 펼치는 추모의 무대 ‘호국의 별이 되어’ 그리고 해병대 출신 성악가 안갑성이 선도하는 대합장 ‘우리 모두 다함께’가 진행되었는데요. 단순한 추모 행사에서 나아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사 장병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되는 연평도 포격도발 3주기 행사 외에도 전사자 출신학교별 추모식, 전사자 묘역 참배행사, 특별사진전 등 다양한 추모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데요. 특히 11월 한 달 동안은 시민들이 운집하는 서울 광화문 거리와 지하철 역사 등 주요 거점에 ‘연평도 포격도발 특별사진전’이 개최 돼 북한의 도발 만행을 상기시키고, 안보의식을 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이 외에도 국가보훈처는 온라인을 통해서 다양한 추모 캠페인을 진행 중인데요. 여러분이 계시는 바로 여기 훈터에서는 연평도 포격도발 3주기 추모 헌정 플래시몹을 공유하는 캠페인이, 국가보훈처 공식 페이스북에서는 故서정우 하사와 故문광욱 일병을 추모하는 헌화 캠페인을 진행 중입니다.

[연평도 포격도발 3주기 추모 플래시몹 공유하기 캠페인] 

[진정한 영웅을 기억하며, 평화의 꽃을 피웁니다 캠페인] 
PC로 참여하기 ▶ http://goo.gl/cWBdTr
모바일로 참여하기 ▶ http://goo.gl/jEotsR


11월 23일.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우리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북한의 기습적인 포격 도발에도 용감히 싸웠던 故서정우 하사와 故문광욱 일병을 기리는 것은 물론 북한의 도발로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된 연평도 주민 故김치백, 故배복철씨까지도 추모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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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병흥

    2013.11.27 1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평도 도발 3주기]

    詩人·靑山 손병흥

    연평도 무차별 포격도발한지 3주기가 되던 날
    나라 위해 헌신하다 유명 달리했던 그들의 희생
    가슴 새겨 호국영령 고인들에게 애도를 표하고서
    일련의 주변 강대국들이 영해놓고 벌이는 행위 속
    방공식별구역의 선포로 마찰 가능성마저도 팽배해
    영공문제와 유감표명 국익극대화 방법 찾아봐가며
    동아시아 영토분쟁 심각하게 우려하며 고심해보다
    혼란한 시국논란조차 솔로몬왕의 지혜로 잠재우고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핵심이익사수 입장표명할 시기

훈터 가족 여러분은 다들 부대찌개 좋아하시나요? 부대찌개는 햄과 소시지, 라면과 떡 등을 넣고 끓여 먹는 얼큰한 국물 요리입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 도는 부대찌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 이러한 부대찌개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 다들 아셨나요? 잠시 63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펑!! 펑!! 우르르… 피융~ 빵! 


이 소리는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폭탄 소리, 비행기 폭격소리입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 곳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몸에 지닐 수 있을 만큼의 짐만을 챙겨 피난을 갔죠.

그 난리 속에서 모든 가족이 함께 떠나기도 했지만, 가족 중 몇 사람만 떠나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며칠이면 전쟁이 끝날 거라 믿었죠. 하지만 그 때 헤어진 채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습니다. 길을 떠나다가 빈 집이 보이면 들어가서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또한 잠잘 곳도 없어 아무데나 천막을 치고 잠을 청했습니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떠난 그들에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과 편히 쉴 수 있는 집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렇게 사람들은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도착한 피난처에는 피난민들을 위한 피난민촌이 있었는데요. 밤에는 그 곳에서 지내다가 아침이 오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가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많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하루에 한끼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답니다...ㅜ_ㅜ 


그리고 전쟁이 끝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요. 하지만 전쟁이 휩쓸고 간 그 곳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폭격을 받아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 곳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죠. 

6·25전쟁 이후 우리에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후세대에 태어난 훈터 가족 여러분들이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요.

오늘은 6·25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너무나 맛있게 먹고 있는 부대찌개와 같은 음식 사실 슬픈 사연이 담겨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전쟁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음식, 부대찌개




▲ 군대의 찌개였던 오늘 날의 부대찌개



그렇다면 부대찌개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그 유래를 아시나요? 부대찌개는 ‘군대의 찌개’라는 뜻인데요. 부대찌개는 전쟁 속에서 태어난 요리랍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사람들은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전쟁 직후에는 먹을 거리도, 입을 거리도 모든 것이 부족했는데요.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져다 썼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남은 햄과 소시지 등을 이용해서 끓여 먹었던 이 찌개는 미군 부대가 많이 밀집되어 있던 의정부 지역에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가리켜 유엔탕, 꿀꿀이죽이라고도 불렀고, 미국에서는 흔한 성인 스미스를 붙여서 스미스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먹었던 부대찌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부대찌개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점차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고추장과 김치 등을 넣어서 매콤하게 만들어 먹었습니다.

또한, 부대찌개는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성을 따서 존슨탕이라고도 불리었는데요. 존슨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직접 방문했던 수원의 부대 앞에는 지금도 존슨탕을 파는 곳이 있으며, 존슨 고개라는 지명도 있답니다.




저렴하면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 떡볶이


떡볶이는 본래 궁중에서 만들던 음식인데요. 간장에 재워놓은 쇠고기를 떡과 함께 볶은 것으로 ‘간장 떡볶이’ 또는 ‘궁중 떡볶이’라고 부르죠. 이 궁중 떡볶이는 궁중에서 왕자와 공주들의 간식이나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떡볶이입니다. 보통 우리들이 즐겨 먹는 매운맛의 떡볶이는 6·25전쟁 이후에 등장한 것인데요.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죠...


누군가가 시장에서 떡을 꼬치에 꿰어 구워서 팔기 시작했죠. 가격도 싸고 간편했던 떡꼬치가 잘 팔리자 거기에 양념을 더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어묵과 대파 등으로 맛을 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의 떡볶이로 탄생하게 되었죠!!




 ▲ 햄과 어묵을 넣고 요리한 고추장 떡볶이



요즘에는 매운맛의 고추장 떡볶이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형태의 떡볶이가 등장했는데요. 개인의 기호에 맞게 라면, 우동, 치즈, 햄, 튀김 등의 사리를 넣어 즉석에서 조리하여 먹는 즉석 떡볶이가 인기죠. 떡볶이 양념을 아예 다르게 하여 만든 짜장 떡볶이, 카레 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 등 형태로 즐기는 떡볶이는 이제 우리가 손쉽게 즐겨 찾는 음식이 됐습니다. ^^




이제는 부산의 전통음식이 된, 부산 밀면


밀면은 밀가루로 만든 면요리로 냉면과 비슷한 음식입니다. 밀가루와 전분을 반죽하여 만든 면을 고기뼈를 고아서 낸 육수에 말아 먹는 부산의 전통 음식이죠. 지금은 부산에 가면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명물인데요. 밀면은 6·25전쟁 당시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들 중에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고향에서 먹던 냉면을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로 만들어 먹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밀면은 시원하게 먹는 물밀면, 비빔 밀면과 따뜻하게 먹는 온밀면 등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유엔연합군의 보급품으로 허기를 달래는 피난민의 모습



지금까지 훈터지기와 함께 6·25전쟁 이후, 가난 속에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었던 음식들을 만나보셨는데요.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너무나 익숙해서 설마! 이런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하셨나요? 


직접 겪지 못한 전쟁일지라도 알게모르게 우리의 곳곳에 전쟁의 흔적과 기억들은 남아 있습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 보세요. 그 곳이 어디든지 우리의 땅은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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