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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국가 수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47건

  1. 2014.06.09 독립군의 용맹스러운 기세, 봉오동 전투!!
  2. 2014.06.09 10일간 12차례의 공방전, 백마고지전투
  3. 2014.05.22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용문산 전투

 

 

1920년 6월 우리나라 항일무장 투쟁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전투가 있었습니다.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인데요. 이 전투의 이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봉오동 전투’입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독립군이 결성되어 활발한 항일 무장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는데요. 1919년 만주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분위기에 대한 일본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제는 국내뿐 아니라 만주지역의 독립군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시작되자 1920년 5월부터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쳤습니다.

 

 

 


▲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_ 문화원형백과 한민족전투)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연합독립군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 더 강력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습니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습격을 당한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고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출처 : 두산백과사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한다는 소식은 독립군 부대에게도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대대를 이끌고 진격할 당시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 산지에 매복하면서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고 홍범도 장군은 공격을 명령하였습니다. 독립군은 3면에서 협공을 했고 독립군의 기습에 일본군은 제대로 힘을 써 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150여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독립군은 4명의 전사자와 약간의 부상자만을 냈습니다.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던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대승을 이루어낸 것이죠.

 

 

 

 
▲ 홍범도 장군 (출처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이후 1920년대 독립전쟁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원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구사 등 여러 가지를 뽑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가장 큰 승리의 요인은 조국독립에 대한 강인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6월 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봉오동 전투 전승 94주년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는데요. 매년 6월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념하고 봉오동 전투가 무장독립투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재조명하여 국민들에게 역사의식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매년 진행되고 있습니다. 94년 전 6월 조국독립을 쟁취하고자 총과 칼을 들고 싸웠던 선열들의 강인한 투쟁정신을 기억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대한 독립군의 빛나는 업적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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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전쟁을 멈춘 1953년 이곳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2011년 7월 개봉된 영화 [고지전]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인데요.  장훈감독의 영화 [고지전]의 배경이 된 전투가 바로 오늘 소개할 ‘백마고지 전투’입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당시 보병 제9사단이 철원평야 북단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인데요. 모두가 전쟁을 멈추었던 그 시기, 10일간 12차례의 공방전을 펼쳤던 백마고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군사적 요충지 철원 395고지를 지켜라.
 

 

 


(백마고지의 모습 /사진출처: 국가보훈처 카페)

 

 


강원도 철원에 있는 395고지는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였습니다.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보병사단과 114 보병사단이 포진하고 있었고 예비 부대로 112보병사단이 후방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 당시 모습 / 사진출처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습니다.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격퇴하였습니다. 그 후 며칠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우리 국군은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현장 / 출처: 국가보훈처 카페)

 

 

 

10월 15일 마침내 중공군을 격퇴하다.


10월 11일 395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지만 12일 아침 국군이 반격을 가하여 고지를 재탈환하였고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고지를 빼앗겼습니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제29연대가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10월 15일 오전 국군의 승리로 ‘백마고지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이런 치열한 전투로 인해 고지는 산등성이가 하얗게 벗겨졌는데요. 이를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다고 하여 이 고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마고지전적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6∙25전쟁 속 가장 치열했던 전투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에는 피의 능선, M-1고지, 베티고지, 영통고지 등 고지를 사수하기 위한 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6월 나라사랑 호국보훈의 달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수 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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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 전 5월 우리나라는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전국에는 총소리와 포탄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 1년 후인 1951년 5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산에서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사주방어의 신화로 역사 속에 기록된 ‘용문산 전투’가 바로 그 전투인데요.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양평 북방 용문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 중이던 국군6사단 지역에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이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용문산전투 전적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 한번의 패배는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승리뿐이다.


당시 중공군의 5차 공세(1921.4.22~6.10)가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최대 병력과 장비를 투입한 마지막 공세였습니다. 용문산 전투에 투입된 중공군63군은 잇따른 전투의 승리로 인해 사기가 매우 높았던 부대였습니다. 이로인해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맞서 싸운 국군제6사단은 1951년 4월에는 중공군의 공세에 사단 전체가 도망을 치면서 패배한 일이 있어 당시 미군에게까지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국군6사단은 용문산 전투에서 앞의 전투에서 얻은 모든 불명예를 한번에 씻어버리는 전과를 거두게 됩니다.  
 

 

 


결사라는 글자를 새긴 머리띠를 둘러맨 제19연대 2대대병사들의 모습

(출처; 국방부 6.25전쟁 제 60주년 사업단)

 

 

제6사단은 용문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제19연대를, 동쪽에는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전 병력의 3분의 1인 2연대를 주 방어라인의 앞쪽에 배치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전투를 기다리던 장병들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 ‘결사’라고 쓴 머리띠를 착용하였습니다. 앞선 전투의 패배를 되새기며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하고 결전을 기다렸습니다. 
 

 

 

 


용문산 전투가 끝난 후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소대 장병들의 기념사진

(출처 ; 유용원의 군사세계)

 

 


용문산 전투의 시작과 극적인 승리


5월 18일 중공군 63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2연대는 공격을 퍼붓고 427고지로 후퇴합니다. 여기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요. 뒤로 빠져야 할 2연대의 1,2대대가 427고지에 틀어박혀 방어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2연대의 철저한 방어전에 공군과 포병의 지원이 가해지면서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중공군은 2연대가 지키고 있는 곳이 국군의 주 방어선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합니다.


이런 와중에 2연대는 뛰어난 전술과 포병, 공군의 지원으로 철통방어를 전개하며 중공군의 병력을 와해시키기 시작합니다. 전투의 흐름이 2연대 쪽으로 흐르자 주 방어라인에 있던 7연대와 19연대, UN군이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을 개시합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은 중공군은 자신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 후퇴하게 됩니다.


중공군 3개사단의 병력이 2개연대 병력에 패주를 하게 된 것이죠. 승세를 타고 국군은 중공군에 추격을 개시하는데요. 중공군은 북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춘천-화천까지 80km정도를 쫓기며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후 화천저수지(현재 파로호)에 이르러서 궤멸되고 말죠. 당시 화천 저수지에는 중공군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용문산전투 청성군인 동산(사진출처: 두산백과)

 

 

용문산 전투는 6•25전투 중에서도 큰 파장을 가져왔던 전투인 만큼 역사적인 의의도 굉장히 깊은데요. 유엔군과 국군의 거센 반격에 중공군은 사기를 잃게 되면서 용문산 전투는 결국 중공군이 휴전협정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문산 전투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치밀한 작전과 여러 병력의 협력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와 결심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며 물러서지 않고 우리나라를 지켰던 우리 국군의 강인한 기세가 가장 강력한 전술이자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뒤면 6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3년 전 5월, 뜨거웠던 용문산 전투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과 참전유공자들의 헌신을 기억해주세요.  수 많은 순국선열들을 기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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