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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국가 수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10건

  1. 2010.09.08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 윤희순
  2. 2009.06.01 6.25와 '아리랑'의 아주 특별한 인연을 소개합니다. (1)



윤희순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였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많은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 일본군에게 경고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윤희순(尹熙順)선생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다.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다. 이후 강원도 춘천 남면 발산리에서 거주하였다. 이곳은 고흥 유씨 집안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고 화서학파 제2대 종주인 성제 유중교의 종손이다.

 

외당 유홍석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아버지 윤익상은 외당과 함께 수학한 사이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집안은 사돈 지간이 되었다. 선생은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유씨 가문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 중에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춘천에 있던 시아버지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섰다. 선생이 의병운동에 뜻을 둔 것은 이 때부터였다. 유홍석이 의병활동으로 10달간 집을 비운 사이 선생은 매일 아침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의병의 전승을 기원하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선생은 기꺼이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그 날 저녁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강성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쉽게 이를 물리칠 수 있다.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며 만일 금수 같은 일본인들에게 붙잡히면 시중을 어떻게 들 것이냐며 의병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생의 열성에 친척들이 먼저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차츰 반대하는 사람들도 찬성하게 되어 의병들이 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선생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30여 명의 여성의병 조직

1907년 일본이 한국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은 춘천에서 유중악, 유영석, 유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후기 춘천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집하였다. 이 자금으로 가정리 여의내 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였다. 이것으로 탄환, 유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였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 훈련에도 참가하였다. 선생은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유홍석은 크게 낙담하여 가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입헌선생과 아들 유제원이 적극 만류하며 요동으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중국으로 먼저 떠났다. 선생은 가산을 정리한 다음 뒤를 따라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이들은 선생에게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다. 선생이 모른다고 하자 어린 아들 돈상을 매질했다. 하지만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 일 하시는 시아버지를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 경찰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보급

선생은 여성의병단 조직, 탄약제조소 운영 등의 적극적 의병운동 지원에 힘썼을 뿐 아니라,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노래’ 등을 지어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게 “우리나라 좀 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나 쫓는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군을 좀벌레로 취급하였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에게도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다지도 모르는가”라며 힐책했다. 청년들에게는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하여 나라 찾자, 조선의기 청년들아, 빨리 나와 의병하여 보세, 아낙네들 나와 의병을 돕는데 하물며 우리 청년들아 나라 잃고 가만히 있을 소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라며 구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의병을 돕는 일도 고생스러웠지만 의병가, 경고문 등을 가사로 지어 노래 부르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남자들이 모르게 하느라 근심이 더 많았다고 밝혔다. 당시 선생은 밤낮없이 자신이 지은 의병가와 경고문을 불러 자녀들, 마을 청년들, 새댁들이 모두 의병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길 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덧 선생이 지은 가사를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노래 부르기 전략은 많은 사람들을 의병운동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으로 망명, 노학당을 설립하여 항일인재양성에 나서다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요동지구를 떠돌아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홍석의 제종제인 의병장 유인석은 1911년 유씨네 처갓집, 친척, 부하, 문인, 제자, 친구들 모두 40~50가구를 중국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로 이사시켰는데, 선생 역시 의병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선생에게 맡기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관전, 환인, 봉성 등지에서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아들과 함께 항일의병 조직에 전념하였다. 남자들이 모두 의병운동을 하러 집을 떠나자 초막집에는 노약자, 어린 아이들, 여성들뿐이었다. 선생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산에 올라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인들에게도 찾아가 식량을 구걸하여 도움을 받았다. 의병가족들은 이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선생은 이웃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항일운동단체에 전달하였다.

 

강원도 춘천시 춘천시립도서관에 위치한 선생의 동상.


1912년 초에는 환인현 팔리전자진 취리두 남산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항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개발하였고, 중국인들에게도 이러한 수전농법을 보급시켰다. 또한 선생은 이웃 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창립하였다. 이곳에 노학당을 설립한 것은 조선인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살았고 반일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학교운영자금은 선생과 학생들이 환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서 모금한 것으로 충당하였다.

 

선생이 거주하던 취리두 남산은 학교와 25km 떨어져 있었다. 취리두는 마차나 달구지도 들어가기 힘든 산속이었으므로 매일 몇 십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학교운영에 사용할 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폐교되어 버렸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 조직

이렇게 힘든 항일운동을 하는 와중에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가족을 잃고 노학당까지 폐교당한 이곳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었던 선생은 1915년 막내 아들 교상을 데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생은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독립단은 선생의 뒷받침하에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선생과 유돈상은 항일선전을 강화하여 중국인들을 각성시켜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조선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하였다. 하여 유돈상은 만주와 몽고에 흩어져 있는 유홍석의 문인, 친지들, 항일운동가들을 찾아 다니며 180여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동지로 모집하였다. 또한 항일운동가 양성을 위해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에 대해 강의를 했다.

 

조선독립단 학생들은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무순 포가둔 북산 마을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 외 선생은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고 부대원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지도자가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한다면서 백발을 휘날리며 포가둔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에 참가하였다. 이 지역 주민은 “그 때 우리는 조선독립단 가족 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중에 산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윤할머니는 이따금 우리 중국 사람을 찾아와서 같이 일본놈을 쳐부수자고 선전하였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독립운동으로 아들이 숨진 후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다

1930년대 초 선생은 요녕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질렀다. 모든 살림과, 서적, 사당이 불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조선독립단원들은 산속에 숨어 지냈으며, 여자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선생은 석방 된 후 중국인의 주선으로 작은 집을 얻어 지냈다. 얼마 후 아들 유돈상과 유교상이 찾아왔다. 며칠간 친척집으로 가서 지내다 아들 돈상은 조선독립단으로 가고 다른 가족들과는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이 된 후 자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선생은 ‘신세타령’이라는 가사를 지어 당시의 어려운 정황을 묘사했다. 가사 속에서 일본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고 갈 곳도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항일여성운동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 눈 쇠경이요 들리는 귀 막혔구나, 말하는 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보이나니 까마기라, 우리조선 어디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우리인군 어디가고 왜놈대장 활기치나, 우리의병 어디가고 왜놈군대 득실하니, 이내몸이 어이할고 어디간 들 반겨줄까, 어디간 들 반겨줄까”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자신의 신세만을 언제까지 한탄할 수 없었다. 현실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중국인의 집과 친척 집을 돌며 피신하다 해성현 묘관둔으로 이사했다. 다시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아들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선생의 품 안에서 순국하였다. 선생도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유돈상이 숨진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7 여성의병 조직, 부녀자 군자금 모금 활동
1912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 설립
1915 조선독립단, 조선독립단학교 설립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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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아리랑’의 아주 특별한 인연

 

6·25 때 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아리랑’의 재즈 버전

‘아-디-동 블루스’를 아십니까 (AH-DEE-DONG BLUES) ???

 


 

 


‘사발 그릇이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강원도 산골 정선 할머니들이 부른, ‘38선 아리랑’의 가사다. 아마도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시작된 시기부터
 불려온 사설일 것이다.

어떤 시인이 있어 이토록 소박한 논리로, 나직한 목소리로 통일의 당위성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아리랑’은 이렇게 외세가 그어 놓은  38선을 일찍부터 깨뜨려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렇지 못할 때 더 큰 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한 것이 아리랑의 숙명이었다.

아리랑의 그 숙명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된 6·25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전장에서는 군가나 의식음악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휴식을 돕고 향수를 달래기 위해 진중가요와 함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민요도 긴요하게 쓰인다.

이들 노래는 때론 적군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의지를 꺽는 심리전 도구로 돌변한다.

 

유감스럽게도 7,000만 민족이 즐겨 부르는 민요 아리랑이 그랬다.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심리전 무기로 쓰였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6·25 당시 전선의 소식을 전하는 한 신문(조선일보, 1951년 1월12일자)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100%’
-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중부전선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본시 아리랑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해

강원도 정선에 은거하던 절의신(絶義臣)들과

그 영수였던 목은 이색(李穡) 등이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고 한시로 애소(哀訴)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듯 아리랑은 ‘절의와 저항의 노래’로 태어나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의 주제가로 쓰이면서

 ‘항일,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한다. 이런 역사성과 위상을 지닌 아리랑이
 
동족 간에 전혀 다른 목적과 기능으로 쓰였다.,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품도 ‘아리랑’ 악보>


그런데 이 아리랑은 6·25 때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다.

6·25 때 미군과 국군은 세계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모험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그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그 결과 서울을 수복한 것은 물론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할 수 있었으니,

남측으로서는 인천상륙작전이 6·25 최대의 전승 기록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주력 부대인 미 7사단 사단장에게
 
치하와 함께 기념품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승전 기념 선물이 아리랑이었다. 이부란(프란체스카) 여사가
 
전통 자수방식으로 수놓은 아리랑 악보와 가사였던 것이다.

이후 1956년 다시 김흥산(金興山)이 행진곡풍으로 편곡한 악보가 W. 켈러웨이 사단장에게 전달돼

미 7사단의 정식 군가로 채택되고, 이는 다시 사단가인 ‘대검가’(大劍歌)를
 
아리랑 곡조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는 아리랑을 참으로 특별한 의미의 노래로 변신시킨 것이다.

 

6·25 당시 이 같은 아리랑의 쓰임새가 최고의 빛을 발한 것은 휴전회담과 포로 교환 때였다.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이에 따른 단계적 결실 중 하나였던
 
포로 교환이 있을 때 양측 가운데 한 곳에서는

반드시 아리랑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회담 조인식에서 벌어졌다.

 

<휴전회담 조인 직후 울려퍼진 ‘아리랑’>


알려진 바대로 남측은 이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못했다.

2년 간의 휴전 줄다리기와 3년1개월의 전쟁을 중지하는 역사적 회담 조인식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 대표만이 전쟁 당사국으로서 서명한 것이다.

웃음은커녕 악수나 박수도 없이 한글로 된 정본과 영어·중국어본 협정서에 서명하고,

양측 대표들이 동서 양쪽 문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조인식은 끝났다.

아무리 전쟁의 뒤끝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쓸쓸하고 씁쓸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양측 대표가 각자 문을 나서는 순간 이런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도열해 있던 양측 군악대가 대표들의 사열을 받으면서 동시에 주악을 연주했는데,
 
연주곡이 남북 똑같이 아리랑이었다.

서로 약속한 바도 없었는데 그 중요하고 엄숙한 순간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이 민족 전체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비록 휴전회담의 형식은 반쪽이었지만, 그 최종 의식(儀式)에서

아리랑을 통해 ‘민족적 통일’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6·25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실로 6·25전쟁 덕에 세계에서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국가에 전파된 우리의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쟁은 말 그대로 교류의 장일 수밖에 없다. 이 땅의 6·25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16개국이 참전해 남한을 도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북한 역시 러시아의 배후 지원을 받았고, 중국은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직접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니 6·25는 20여 국에 달하는 사상 유례없는 인종과 문화가 대규모로 교류한 전쟁이었다.

 

당시 참전 유엔군을 위문하기 위해 세계적인 연예인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다.

특히 유엔군의 주력이 미군들이어서인지 웬만한 미국의 연예인들은 대부분 한 번 이상 방한했다.

배우 마릴린 먼로,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 코미디언 밥 호프 등 300여 명의 미국 연예인이

한국을 찾았던 것으로 한국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뮤지션들도 끼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을 팝(pop)음악의 세계적 시장으로 변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대신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이들에 의해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다.

또한 참전한 20여 국 군인들을 통해 그들 나라에도 아리랑은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전쟁과 고아의 나라’의 상징처럼 부정적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지만,

의외로 음악성을 인정받는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해 세계적 수준의 노래로 전파된 예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 예가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의 ‘아 디 동 블루스’(AH DEE DONG BLUES)다.

오스카 페티포트는 당시 재즈계의 신화적 인물로, 1951년 위문공연차 인천에 잠시 기착했다.

그때 우연히 아리랑을 접하고 직접 편곡, 연주해 재즈 전문 레이블인 ‘로열 루츠(ROYAL ROOST)사를 통해

1952년 SP 음반으로 발매함으로써 탄생한 재즈 버전의 새로운 아리랑이 ‘아 디 동 블루스’였던 것이다.

 

 

                                                                                             출처 : 2004년 월간중앙 6월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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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수열정

    2010.10.31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리랑을 어릴적,.극으로,.드라마로 한것을 본것이 기억이 남는데,.정선하면,.아리랑,.
    아리랑을 일제시대,.힘든것을 격을때,.불렀던 곡인줄 알았는데,.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일제시대,6,25때 힘든 고난과 역경을 격으면서,.애환을 달래주던,.참으로 고마운 노래이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왜 애착을 가지는 노래인지,.처음 알게 되었던,.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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