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361,298
  • Today | 852
  • Yesterday | 2,475



 60여 년 전, 6∙25전쟁이 발발한 당시 대한민국을 도왔던 나라들에는 전쟁에 전투병력을 파견했던 병력 지원국 16개국뿐만 아니라 의료지원국 5개국, 물자지원국 39개국, 물자지원 의사 표명국 3개국까지 모두 63개국이 있는데요. 


이는 당시 유엔회원국 92개국 중 무려 63개국이 대한민국을 도와준 것입니다. 어떤 나라들이 있을지 아래 인포그래픽과 표를 통해 살펴볼까요?

             

              



 병력지원국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의료지원국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물자지원국

 과테말라, 도미니카, 서독, 라이베리아, 

리히텐슈타인, 레바논, 모나코, 멕시코, 미얀마, 

베네수엘라,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스위스, 아르헨티나,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이란, 이집트, 인도네시아, 일본, 아이티, 

에콰도르, 오스트리아, 우루과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자메이카, 대만, 칠레, 쿠바, 

캄보디아, 코스타리카, 파나마, 파라과이, 

파키스탄, 페루, 헝가리, 교황청

 물자지원 의사 표명국

 니카라콰, 브라질, 볼리비아




 국가의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함께 지켜주었던 나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나라들을 모두 기억하는 분은 거의 없을 텐데요. 하지만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 “어, 그런 나라도 있었어?” 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다고 여기는 나라들의 이야기를 준비했답니다.




물자지원국 총 39개국 중 4개국 : 라이베리아,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리히텐슈타인


 물자지원은 최초 전쟁 시작 직후부터 1952년 5월까지 한국민간구제단(CRIK)을 통해서 라이베리아, 레바논, 리히텐슈타인, 멕시코, 바티칸, 베네수엘라 등 19개국이 지원을 하였는데요. 1953년 12월까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통해서는 과테말라, 대만 등 13개국이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1956년 6월까지도 리히텐슈타인 등 4개국이 전후복구를 지원하였죠. 또한, 기타 유엔 긴급구제계획(ERP)에 의거 1956년 6월 30일까지는 서독 등 3개국이 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전후 복구기간까지 우리나라에 물자를 지원한 국가는 총 39개국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자를 지원해주었던 39개국 중 얼마나 많은 나라를 알고 계신가요?

물자를 지원한 나라들 중에는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라이베리아,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그리고 유럽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도 멀고, 이름도 어려운 이 나라들을 생소하게 느낄지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를 도왔던 나라들을 잘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라이베리아(Liberia)

 


 



 아프리카 중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이며 정식 명칭은 라이베리아 공화국입니다.

라이베리아의 면적은 11만 1400㎢로 한반도의 절반크기이며, 수도는 몬로비아입니다. 언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30여 개의 방언이 있죠. 

라이베리아에는 조지 웨아라는 축구 선수가 있는데요. 1995년 FIFA 올해의 선수이자 유럽과 남미 국적이 아닌 사람 중 유일한 FIFA 올해의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2> 온두라스(Honduras)

 


 



 중앙 아메리카 중부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온두라스 공화국입니다.

온두라스의 면적은 11만 2090㎢ 이며 수도는 테구시갈파입니다. 16세기 초 에스파냐에 정복되었고 1539년 이후 과테말라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가 1821년 독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의 공용어는 에스파냐어이며, 1821년에 건국되었습니다.

온두라스에는 카요스 코치노스라고 하는 유명 휴양지가 있는데요. 이 곳은 2개의 중심 섬과 아주 낮은 모래섬 11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면보다 높은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지는데 그 곳에는 양쪽에서 해류가 밀려와, 마치 두 개의 파도가 충돌하는 모습을 연출해내는 신비한 곳입니다.



<3> 엘살바도르(El Salvador)

  

 



 엘살바도르는 중앙 아메리카 북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엘살바도르 공화국입니다. 국명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세주’를 뜻하죠. 엘살바도르는 총 면적 2만 1041㎢이며 수도는 산살바도르입니다. 

엘살바도르와 한국은 1962년 8월 수교한 뒤로 정치, 경제 등 제반 분야에서 긴밀한 우호적 협력관계를 유지∙발전시켜 왔는데요. 또한, 엘살바도르는 UN 등 국제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왔습니다.



<4>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리히텐슈타인은 유럽 중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리히텐슈타인 공국입니다.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6번째로 작은 나라로 면적이 160㎢이며 수도는 파두츠입니다. 1719년에 셸렌베르크 공국과 파두츠 공국이 합쳐져 리히텐슈타인이 되었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떨어져나와 1815년 독일 연방으로 있다가 1866년에 독립하였습니다. 리히텐슈타인과 한국은 1993년 6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UN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 등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자지원 의사 표명국 총 3개국 중 1개국 : 니카라과


6∙25전쟁을 지원하고자 의사를 표명했던 나라들에는 3개국이 있는데요. 니카라과는 쌀과 주정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수송문제로 인해 지원이 제한되었고, 볼리비아는 구호전문장교 30명의 파견을 제의하였지만 유엔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브라질은 유엔의 요청에 따라 270만 달러 상당의 물자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1958년까지 국내문제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했던 3개국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니카라과”가 어떤 나라인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니카라과(Nicaragua)



 



카라과는 중앙 아메리카 중부에 있는 나라로 정식 명칭은 니카라과 공화국입니다. 

면적은 13만 370㎢으로 한반도의 3/5크기에 해당되며 수도는 마나과입니다. 1502년 콜럼버스에 의해 해안부가 발견되어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다가, 1821년 9월 독립을 선언하고 1838년 독립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국명은 니카라과호 호반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 니카라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요. 니카라과인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믿으며 각시에는 그들만의 수호 성인이 있는데, 이들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60여 년 전 대한민국을 도왔던, 하지만 이름이 생소한 나라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는데요. 소개해드린 나라말고도 생소하다고 여겨지는 나라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호천사들과 함께 우리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터키군, 대한민국의 수호천사가 되다.


 터키는 한때 중립을 표방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 측에 합류하면서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는데요. 북한의 남침 직후에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원조 결의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4천5백 명 규모의 파병을 신속히 결정하였습니다. 터키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최초 계획을 훨씬 상회한 1만 5천명이 지원을 하였습니다. 파병이 다소 늦어지게 되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하면서 데모를 벌이기도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터키군은 육군 위주의 부대를 파견하면서 보병 외에 공병·수송·의무·병기·병과 부대를 포괄하는 전투단을 구성함으로써 독립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편성을 유지하였는데요. 그리하여 터키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러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 지도에서 터키와 대한민국을 찾아보세요



터키가 대한민국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터키에 간다면, 비행시간만 대략 반나절(12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여객기가 보편화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타국으로 이동할 때는 배를 주로 이용하였죠.

터키군은 21일간의 긴 항해 끝에 1950년 10월 17일에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현지 적응을 위해 한시적으로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경계임무 수행을 하며 한편으로는 생소한 미제 무기의 사용법과 실탄사격 등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의 진출이 저지당하게 되는데요.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월터 중장은 미 제9군단에게 전선 진출을 명령합니다. 이에 따라 미 제9군단에 배속된 터키군도 전선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26일부터 터키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백병전으로 활로를 개척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혈투를 벌였습니다. 26일부터 28일 저녁에는 와원리에서, 28일 밤부터 29일 오후까지는 신립리에서, 29일 저녁부터 30일 새벽까지는 봉오리와 군우리 간의 철수로에서, 그리고 30일 아침부터 12월 1일까지는 군우리-평양 간 철수로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터키 여단은 1950년 중공군의 11월 공세당시, 미 제2사단의 우익부대로 군우리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터기군 장병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착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해 부대의 강한 군기를 보여 주었죠. 



▲ 군우리 전투 직후, Walker 중장으로부터 무력훈장을 받은 터키장병들



이후 터키 여단은 군우리 전투의 손실을 보충하고 미군의 울프하운드 작전, 선더볼트 작전 중 수리산 전투와 김량장 전투에서 자신들의 사상자에 비해 적에게 10배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전과를 올려 유엔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김량장 전투 및 151고지 전투를 통해 터키군의 활약상을 만나보시겠습니다.




김량장 및 151고지 전투(1951.1.25~27)


이 전투는 터기 제1여단이 중공군 제50군 예하 제149사단 447연대 및 제 150사단 448연대와 치른 전투입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인해전술 공격으로 후퇴만 하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저지한 후 1951년 1월 15일부로 공세로 전환하였는데요.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Methew B. Ridgeway)중장은 중공군의 방어선 위치와 규모를 탐색하고 중동부전선에서의 적의 압력을 제거하며, 저하된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유엔군의 대규모 수색작전을 지시하였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미 제25사단에 의해 울프하운드 작전이 실시되었으며, 뒤이어 1월 25일부터 각 군단별로 증강된 사단규모 이상의 병력으로 인접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면서 시차를 두고 반격하는 썬더볼트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썬더볼트작전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전차로 증강된 미군 1개 사단과 군단장의 판단에 따라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 1월 25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한강까지 수색작전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날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후퇴작전을 계속해 오던 아군이 재반격으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미8군사령관은 작전부대간의 연결을 유지하고 공격제대의 안전한 진출을 보장하기 위하여 군단지역 전방에 8km간격으로 5개의 작전통제선(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설치하는 가상선)을 설정하였고, 통제선 통과는 군단장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전부대에 충분한 화력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5공군이 25일부터 이틀 동안 근접항공지원(헬리콥터, 전투기 등의 항공기로 하여금 공습을 하여 지상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전술)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인천 외항에 있는 미 제95기동함대의 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으로부터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각 군단의 공격제대는 최종목표인 한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이미 수색이 완료된 방어선 전방의 서해안-오산-여주를 연하는 공격개시선을 점령하였습니다.

터키 여단이 소속된 미 제1군단 25사단은 1월 25일 좌전방 39번 도로와 1번 도로 사이에 제35연대를, 우전방 55번 도로에는 터키 여단으로 공격제대를 편성하고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울프하운드작전으로 수색이 완료된 지역이어서 적진과 근접하는 것이 용이하였고, 쉽게 제1통제선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전방 48km 지역에 중공군 제50군 예하 2개 사단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들의 전초진지는 3~8km 북쪽에 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이 위치는 공교롭게도 수원에서 20번 도로를 따라 여주 북쪽의 한강변에 이르는 아군의 제2통제선과 일치하였습니다. 군단이 제2통제선으로 공격을 재개하자 적의 저항이 점차 완강해졌고, 우전방의 터키 여단은 신갈 부근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 여단은 수원 동쪽 20km 지점의 김량장과 그 8km 전방에 위치한 151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실시하였습니다.


터키 여단은 안성-송전 선에 전개하여 12km나 되는 광정면을 공격하기 위해 2개 공격 제대로 나누어 제2대대가 김량장을 제1,3대대가 151고지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중공군도 이 선에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결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김량장 전투에서는 고착된 상황을 개척하려는 터키군과 결사적으로 현 진지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중공군간에 격전이 계속되었는데요. 미 전폭기의 항공지원에 힘입은 터키 여단 제1대대는 시가지 중심부로 돌진해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1월 26일 일몰직전에 김량장을 탈환하였습니다.



▲ 미 제89전차 대대 D중대의 M-4전차의 지원하에 적군을 공격하는 터키군



그리고 151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1월 25일에 185고지를 점령한 후, 계속해서 최종 목표인 151고지로 향했습니다. 26일 제1대대와 제3대대가 고매리 부근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151고지로 접근하였습니다.

이 때 공격의 선봉에 나섰던 제3대대는 군우리 전투에서 명령 없이 철수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이 때문에 얻게 된 치욕적인 불명예를 이번 기회에 만회하기 위해 탄막 속을 뚫고 용감하게 전진하였습니다.

후에 확인되었지만 적은 이 고지에 아군의 직사포 사격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고, 진지마다 기관총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주 강력한 요새였는데요. 이러한 곳을 제3대대는 포병의 지원사격 아래 그들이 믿는 ‘알라’를 외치면서 돌격하였고, 마침내 백병전으로 고지를 탈환하고 중공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터키 여단 제3대대는 군우리에서의 불명예를 한번에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설의 백병전, 터키군의 용감함은 길이 빛나리!


김량장 및 151고지 전투에서 터키 장병들은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1명 당 40명의 적을 무찔렀습니다. 이 사실이 믿겨지시나요? 보통 17대 1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17대 1도 아닌, 터키 장병들은 40대 1의 싸움에서 이긴 셈입니다. 

3일간의 전투에서 확인한 중공군의 시체만도 김량장 전투에서 77명, 151고지 전투에서 397명 등 474명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백병전하면 터키군을 연상시키게 되었으며, 터키군의 용감함은 각 유엔참전국의 귀감이 되었는데요. 

참전국들은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터키군의 전공’ 이라는 극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터키군이 151고지에서 압승했던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U.P.I 기자에 의해 전세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여단은 이로써 1951년 7월 6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1952년 9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당시 터키군은 미군과의 연합작전에서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데요. 언어소통문제는 급변하는 전쟁 상황에서 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터키군은 큰 손실을 입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각 전투에서 자신의 사상자에 비해 적에게는 10배가 넘는 사상자를 내게 하였습니다. 40대 1이라는 전설의 백병전으로 터키군은 ‘용감한 터키군’의 진면목을 전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처럼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013년 7월 27일에는 정전협정을 맺은 지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님에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야’ 라고 생각하며 우리들은 ‘그 날’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잊어서는 안될 ‘그 날’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한 ‘그 분’ 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 

동방의 이름도 낯선 나라까지 와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함께 싸웠던 에티오피아.

 


동병상련의 아픔을 간직한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해왔던 나라입니다. 3천년 동안 고유한 문자와 국가체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아, 황제가 예루살렘으로 망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41년에서야 영국의 도움으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었습니다.

이처럼,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당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에 'UN이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평화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결의를 보였습니다.



  

▲ UN군 참전기념 에티오피아 우표 (1951)



그리하여 한반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이레 셀라시” 황제근위대로 편성된 육군 1개 대대 규모의 에티오피아 6∙25참전군 제 1차 부대 1,300여 명은 1951년 4월 16일 본국을 출발하여, 21일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대대는 1951년 5월 7일 한국에 도착해 미군이 제공하는 무기로 재무장하였고, 6주간의 비교적 긴 적응훈련 기간을 거쳤습니다. 

6∙25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대대는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미 제 7사단 32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권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것입니다.



내 평생 이렇게 추운 곳은 처음일세!



 

                           ▲ 아디스아바바의 고원지대                          ▲ 아디스아바바의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에티오피아는 대체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같은 고원지대는 고산기후로 연중 기온 16도 정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쾌적한 날씨랍니다. 우기에는 0도까지 떨어지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겨울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어느 나라든 자신이 살던 나라보다 추운 지역에서는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들다고 하는데요.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은 대한민국에서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위와 배고픔까지 견뎌냈습니다.

또한, 에티오피아군은 산악지형에 적응이 빨랐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주로 최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군은 화천, 금화, 양구, 철원 등 강원도의 최전방지역에서 공산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겪어보는 추위와 싸우며 희생했습니다.

총 참전 병력이 3,518명에 이르는 에티오피아군은 전투에서 253전 무패를 기록하였습니다.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하였으며, 단 한 명의 포로도 없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에티오피아 대대



▲ 한국에서 겨울을 나던 에티오피아 칵뉴대대



1951년_ 제 1차 대대

에티오피아의 제1차 대대는 1951년 4월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거행된 부대 편성식에서 “칵뉴”부대로 명명되어 4월 16일 미국 수송선으로 한국을 향해 출항, 21일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1951년 5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는데요. 에티오피아의 칵뉴 대대는 즉시 부산 동래에서 6주간의 추가 군사 훈련을 받은 다음 경기도 가평에 주둔 중인 미 제 7사단 제 32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캭뉴 대대는 1951년 8월 2일 첫 전투를 개시하여 화천 북방 산양리에 적근산 지역에서 치열한 격전을 가졌습니다. 칵뉴 대대는 계속하여 춘천 북방의 산악 고지인 문등리 지역과 단장의 능선 등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1951년 12월 18일 생애 첫 눈을 맞이하였습니다.


1952년_ 제 2차 대대

1952년 3월 9일 부산항에 도착하고 동래 훈련소에서 전열을 정비한 "칵뉴"대대는 4월 12일 가평 미 제 7사단에 배속되어 6월 2일부터 작전에 들어갔으며, 주로 강원도의 철의 삼각지(철원, 평강, 금화) 지역의 동쪽 고지전선 공방전에서 격전하였습니다.


1953년_ 제 3차 대대


 


제 3차 대대는 1953년 4월 16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10일 후 중서부전선 철의 삼각지에 배속되었습니다. 제 3차 대대는 철원 서북방 "YOKE" 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으며 동지역(폭찹고지)를 사수하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을 맞이하였습니다. 정전 후 에티오피아 대대는 연천과 동두천 지역에 주둔하면서 철원 지역의 휴전선 경비를 담당 하였으며 한국 고아들을 돌보아 고아원 지원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1954년_ 제 4차 대대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의 정전 이후에도 한국의 휴전선 경비 임무를 위하여 계속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제 4차 대대는 54년 6월 30일 인천항으로 도착하고 7월 10일 금화지역에서 정식 부대 교대식을 가졌습니다. 이 부대 역시 한국 주둔 기간중 한국 고아원 후원 사업을 계속 하였습니다.


1955년_ 제 5차 대대

대대병력 편성에서 중대병력으로 축소된 에티오피아군은 1955년 6월 28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금화지역에서 7월 9일 정식 부대 교대식을 가지게 됩니다. 휴전선 경비 업무를 수행한 에티오피아 중대는 후방에 주둔 시 보화(BOWHA) 고아원을 운영하며 한국의 전쟁 고아를 돌보았으며 1956년 3월 연락 장교단을 남기고 부대가 완전히 철수합니다.




에티오피아는 지금…

에티오피아는 현재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구가 6,500만명이 넘고, 면적이 한반도의 6배 정도가 될 뿐 아니라 자원이 풍부하여 커다란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또한, 아프리카 53개국이 전부 가입한 ‘아프리카연합(AU)’과 유엔의 경제 사회이사회의 지역기구인 ‘유엔아프리카경제위원회(UNECA)’가 소재하고 있는 등 동부아프리카의 중심국가입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1974년부터 멩기스투 공산독재주의, 소말리아와의 전쟁, 내전 및 에리트리아와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되었고, 가뭄으로 인해 다수 국민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어 국제사회의 지원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극빈층에 속하지만 그 중에서도 6∙25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의 가족은 최극빈층에 속한다고 하는데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였던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은 1974년에 들어선 공산정권에 의해 냉대를 받으며 살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은 자유와 평화 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고 있는데요. 이들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시에서 30분 거리의 외곽지역 보레다에  'KOREAN VILLAGE(코리안 빌리지)’라는 마을에 형성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 곳은 참전 후 황제가 하사한 땅이었다고 하는데요. 1974년 이후 그들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고, 연금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1991년 과도정부의 수립으로 연금이 다시 지급되었지만, 여전히 냉대의 눈초리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에티오피아가 60여 년 전 UN의 일원으로 병력을 지원했던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지상군으로 참전하였던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와 그의 가족에게 보은하기 위해, 1996년 6월 20일에는 이들을 후원하는 후원회가 발족되었는데요. 그 때부터 현재까지 1,571세대의 생계지원과 의료 지원 사업 등을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국가보훈처에서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영예금 지급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데요. 2010년부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현지 장학사업을 진행하여 연인원 6,236명이 혜택을 받고 있고요. 2012년에는 우리은행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여 3억원을 기부하였답니다. 그리고 국제NGO조직 월드투게더에 위탁하여 2012년 7월부터 참전용사 본인 생계비를 현지 지부 사무실과 가정방문을 통해 지급하고 있어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한국 땅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은 대한민국을 위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형제로 여기며, 대한민국을 함께 지켰던 것을 여전히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가는 그 분들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도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유엔군참전·정전6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서는 에티오피아에서 생활고를 겪고있는 참전용사에게 500만원을 기부하는 캠페인을 포털사이트 다음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60년 전 대한민국을 위해 함께 싸운 유엔참전국과 유엔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작성해 주세요. 여러분의 감사 메시지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분들에게 큰 희망이 되어서 돌아가리라 생각됩니다. 캠페인은 7월 28일까지 진행되니 60년 전 낯선 환경에서도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었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희생을 생각하며 꼭 참여해 주세요! 

 

 

<유엔군참전·정전60주년 캠페인 "함께 지켜온 60년, 함께 나아갈 60년" ☜클릭>

 

출처:이디오피아 한국전 참전 용사 후원회

http://www.myethio.net/index.php

국가기록원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경훈

    2013.11.25 2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2. 돌강아지

    2013.12.23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3. 섬소년

    2014.01.07 2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르고있었는데,이렇게 알고나니 가슴이 짠해지네요!
    생명이 얼마나 귀한가!나라가얼마나 소중한가를 느꼈습니다!
    진실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에티오피아 좋은일들 가득하고 잘사는 나라로 거듭나길 바래봅니다!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 호..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턴투워드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 11월 11일 11시, 전 세계가 부산을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 감사댓글 이벤트
6.25참전 프랑스 참전용사, 대한민국의 품에 잠들다
[제10기 훈남훈녀 기자단 팀미션 - 1조] 전쟁기념관에서 ‘턴투워드 부산’을 외치다!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