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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당시,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일대 지역을 사수했던 전투가 있습니다. 바로 영천지구전투인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낸, 9월 5일부터 13일까지 벌어진 9일 간의 치열했던 영천지구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열차를 타고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는 신병들 (출처: 국방일보)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했는데요.

 

▲ 전선에서 전투 중인 국군의 모습 (출처: 군포시민신문)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약 한 달여간 영천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보현산지구 전투, 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신녕 화산지구 전투 그리고 영천지구 전투가 있습니다. 영천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들은 국군의 대승을 이뤄냈고,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국군이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보현산지구 전투에서 국군은 무려 22일 동안 북한군의 공격을 견제했는데요. 이 전투는 영천지구 전투의 전초전으로 북한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보다 국군의 공격 전환을 위한 준비단계였습니다.

 

▲ 영천전투 승리 직후 8사단 21연대 장교들의 모습 (출처: 국방일보)

 

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신녕 화산지구 전투는 북한군의 공격 준비단계를 수포화시켰고, 국군의 사기를 충전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들로 인해 사기가 충전된 국군은 그 힘을 영천지구 전투에서 발휘하여 영천 일대를 사수하고, 낙동강 전선을 지켜냄과 동시에 낙동강 일대까지 내려온 북한군으로부터 국군이 반격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 9일 간의 공방전, 영천지구 전투

 

▲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왼쪽) (출처: august 의 軍史世界 블로그)

 

1950년 9월 5일 벌어진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군 제15사단이 5개 연대와 전차를 앞세워 국군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하겠다는 의도였는데요. 당시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을 필두로 제8사단의 증원 부대들이 사수하고 있었던 영천 지역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였는데요. 영천 지역을 통해 북한군이 대구로 진출하게 된다면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 영천지구 전투 모습 (출처: 비겐의 무기사진 전문 이글루입니다 블로그)


이에 국군은 7개 연대 병력과 곡사포, 대전차포 등의 중화기로 맞섰습니다. 포항 전선에 참여했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에 복귀하여 작전에 참여했는데요. 제8사단장의 이성규 준장은 영천 북쪽에 21연대와 6사단의 16연대를 배치해 적의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시켰습니다. 또한 영천의 아화리와 유상리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북한군 1사단 16연대와 11연대를 공격했습니다. 2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영천지구 전투의 의의

 

국군은 9일간의 공방전 끝에 영천을 탈환하는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습니다. 또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전차 및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도 거두었는데요.

 

▲ 영천지구 전투 중 국군의 모습 (출처: 비겐의 무기사진 전문 이글루입니다 블로그)

 

이로 인해 북한군은 영천을 탈환하여 낙동강 전선을 무너뜨리고 부산까지 진격하기로 한 애초의 계획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9월 공세에 실패하게 됩니다.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마지막 대전투였던  영천지구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 영천지구전투를 기억하며

 

▲ 영천지구 전적비 (출처 :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

 

1980년 10월 7일, 영천지구전투에서의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영천지구 전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에 적혀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구의 무리들이 영천벌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용용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나가 둑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 기룡산은 이~ 금호강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

 

9월, 치열했던 영천지구 전투와 전장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운 호국영령들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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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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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대항하여 수많은 전투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그 중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일대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는데요. 그 중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전투, 기계-안강지구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 국군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국군 수도사단이 1950년 8월 9일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약 한 달여간 안강, 포항, 경주 일대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 전투입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지만 전세는 쉽게 역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일대까지 영토를 내어주고 말았고,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 왔습니다.

 

▲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

 

이때 중동부전선을 담당하던 국군 제1군단은 북한군 주력이 안동-의성-영천 접근로에 투입될 것으로 판단하고 각 사단을 그 일대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은 8월 5일을 기해 낙동강 일대의 모든 전선에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예상을 벗어난 공격을 받은 국군은 방어선 곳곳이 와해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중인 군인들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블로그)

 

이로 인해 마산과 영덕에 이르는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수도사단 방어진지가 속수무책으로 와해되며 청송과 기계 방어선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 북한군의 기계 점령과 국군의 탈환 작전

 

▲ 낙동강 방어전 당시 국군 (출처 : 미디어위키)

 

북한군은 무방비 상태가 된 방어선을 통해 격전 없이 남하하였고, 8월 초 기계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로써 북한군이 기계 지역의 남쪽인 안강과 경주로 침투할 여지가 다분해졌는데요. 만약 이 침투가 성공할 경우에는 국군의 방어선이 동서로 나뉘어 대구와 포항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육군본부는 급하게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의성에 집결해 있던 수도사단을 안강 지역으로 이동시켰는데요. 현동으로 진출한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는 기계 일대에 있던 북한군을 남북 양쪽에서 포위하였습니다. 그러자 퇴로 차단의 위협을 느낀 북한군은 비학산 일대로 퇴각하였고, 국군 수도사단은 기계 지역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비학산 일대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병력을 보충한 북한군은 8월 말 야간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기계 지역을 재점령하였는데요. 이때부터 기계-안강 일대에서는 9월까지 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격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수도사단이 기계 지역 남쪽 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은 9월 초 다시금 공격해 왔습니다. 적은 전차를 선두로 한 일부 병력으로 국군 제18연대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국군 방어선이 돌파되어 수도사단은 안강 남쪽의 곤계봉~호명리 일대로의 철수를 결정하였습니다. 국군이 기갑연대와 국군 제3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방어력을 강화하는 도중, 안강에 집결한 북한군은 경주를 향해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사단은 적의 집중된 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되는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즉시 기갑연대 제3대대와 제17연대로 역습을 전개해 진지를 회복하고 북한군의 돌파구가 확대되는 것을 막아 냈습니다. 그 이후부터 국군과 북한군은 곤계봉 확보에 성패를 걸고 치열한 쟁탈전을 전개하게 되는데요.

 

▲ 낙동강 방어전 당시 투입 준비 중인 국군 (출처 : august 의 軍史世界 블로그)

 

북한군은 폭우를 틈타 공격을 개시하여 곤계봉을 다시 장악했고, 옥녀봉과 운제산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에 국군 제18연대는 운제산에서 적의 경주 진출을, 제26연대는 적의 비행장 방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9월 중순에 곤계봉 탈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이후 국군은 안강 남쪽의 주저항선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낙동강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기계-안강지구 전투
 

▲ 기계-안강지구 전투 전적비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중순까지 계속 되었던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뺏고 뺏기는 격전 끝에 국군이 기계 지역을 탈환하면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낙동강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방어선이 무너지고 진지가 돌파되는 등의 위기를 공세 전환의 기회로 승화시킨 것으로, 그 의미가 큰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면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동부지역을 돌파하는 작전에 실패하였고, 국군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 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적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의 반격 작전을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우리 국토의 대부분을 내어줘야 했던 암울한 상황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로 버텼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전투 중에서도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린 기계-안강지구 전투는 국군의 일대 위기를 극복한 의미가 깊은 전투였습니다. 기계-안강지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 국군 장병과 학도의용군을 기억해 주시기 바라며 이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9519&cid=46628&categoryId=4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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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산당전멸

    2017.09.20 08: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영면하소서


1950년 6월 25일은 우리 민족에게 뼈아픈 슬픔을 안겨준 날의 시작입니다. 6.25전쟁, 이 전쟁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과의 전투를 역전시킨 작전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인데요. 하지만 유엔군과 한국군의 합작 작전 전에 한국군이 단독으로 감행한 전투가 있습니다.

 

바로 통영상륙작전인데요.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6.25전쟁 중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입니다. 오늘은 한국 해병대의 위엄을 보여준 통영상륙작전에 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 6.25전쟁의 시작과 북한군의 전세

 

▲ 통영상륙작전 전투지 앞바다 (출처 : 국가보훈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발발한지 두 달여 만인 8월에 접어들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으로 인해 전선은 남측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남한 측은 낙동강에 가까스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이미 국토의 90% 이상을 점령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그만큼 모든 전력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상태였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통영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통영을 점령하자 북한군은 후속부대를 계속해서 투입하여 통영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북한군의 통영반도 점령은 낙동강 방어선의 무력화 때문이었는데요. 낙동강 군병력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거제도와 그 일대인 마산, 진해까지 봉쇄하는데 통영이 최적의 거점지였기 때문입니다.


# 북한군의 통영반도 점령과 국군의 움직임

 

▲ 당시 작전 상황도(출처 : 통영상륙작전기념관)

 

통영반도의 점령을 시작으로 북한군 7사단이 거제까지 침입해오자 한국군은 거제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를 출동시키게 됩니다.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합니다. 
 

▲ 故 김성은 중장 (출처 : 에코비전21)

 

김성은 부대는 해군의 엄호 사격 속에 다음 날 아침까지 통영항구 정면에서 육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고, 거제도 방어를 위해 투입된 김성은 부대는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그 일대를 탈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여 오히려 통영을 직접 탈환하겠다는 공격 작전을 상부에 건의했습니다.

 

▲ 통영반도 지도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이에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 함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쪽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의 진격을 차단했습니다. 또한 통영일대의 시야가 확보되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하여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북한군 100여 명을 사살, 통영을 완전히 탈환하게 됩니다.

 

# 6.25전쟁 최초 단독 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의 의의


▲ 통영상륙작전 기념비 (출처 : 국가보훈처)

 

이 전투는 유엔군 등의 도움 없이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으로 수행한 상륙작전이자, 지역탈환상륙작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전투이며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또한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로 후에 6.25전쟁 역사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맥아더 장군은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군사병력을 차출하여 선봉대로 투입시켰습니다. 이들은 서울수복작전에서도 그 공을 세워 한국전쟁을 국군에게 유리한 전세로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를 취재하던 당시 뉴욕타임즈의 외신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김성은 부대에 대해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기사를 전했고, 이로 인해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붙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출처 :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6.25전쟁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자, 대한민국 해병대의 위용을 높이는 칭호까지 얻게 된 통영상륙작전의 성공은 무더운 이 여름, 호국영웅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외신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한국전쟁의 판도는 바뀌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호국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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