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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늘은, 화창한 봄에 일어나 그 잔혹성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가슴 아픈 역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1919년 4월, 수원군(현재 경기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일본군이 폭력적으로 탄압한 사건,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원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3월 31일에는 제암리 인근 발안장터에서 약 1천 명의 시민들이 동참한 만세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4월 3일에는 수원군 최대 규모의 ‘우정면, 장안면 연합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헌병과 경찰은 시위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진압 과정에서 가옥들을 방화하여 제암리 사건 이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 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검거인원 442명에 이르는 등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만세운동의 주동자 색출을 위해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은 제암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며 20여명을 제암리 교회 예배당으로 몰아넣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도 만세운동 주도 인물인 김홍렬 선생 등 6명이 참살당했습니다.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은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보복성 학살사건이었으며, 죄 없는 목숨들이 스러져간 가슴 아픈 역사였습니다.


▲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일제의 제암리 방화, 학살 후 파괴된 민가 (출처: 독립기념관)



제암리의 독립운동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순국하신 홍원식 선생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홍원식 선생은 충남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914년 제암리에서 항일비밀결사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을 펼친 인물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수원군의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고, 일본인 상점에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홍원식 선생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제암교회에서 순국하였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제암교회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묻힐 뻔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과 기록을 남기고, 이를 탄압하는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세계에 알렸던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입니다.


▲ 스코필드 박사 (출처: 독립기념관)


영국 출신의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와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3.1운동의 중요성을 직감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선생은 제암리와 수촌리를 직접 찾아가 기록하였고, ‘제암리의 대학살’, ‘수촌 만행 보고서’ 등을 작성하여 사건을 널리 알렸습니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항일독립만세운동의 뜻을 기억하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가 4월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 열렸습니다. 


▲ 4.15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포스터 (출처: 화성시청)


99년 전 가슴 아픈 봄날, 만세운동에 동참한 분들과 제암·고주리에서 희생당한 순국선열을 추모합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따뜻한 봄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 참고 사이트 

- 국사편찬위원회 ‘불타버린 제암리 교회’

- 네이버 지식백과 ‘홍원식’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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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올해로 수립 9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 1919년, 미주 대한인국민회 발행 대한독립선언서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는 어떠한 역사를 겪어왔을까요? 오늘은 훈터 독자 여러분들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출처: 독립기념관)


 

역사의 시작,

중국 상해(상하이)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당시 상해는 프랑스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였기 때문에 외부와 연락이 쉽고 비교적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먼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운동 인사들이 상해로 모여 정부 조직에 대해 논의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국무총리와 내무부, 외무부 등 정부 조직이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상해에서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 교통국을 두고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주요 인사와 기관에 대한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라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 윤봉길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이동 시기


그러나, 의거 이후 심화된 일제의 감시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만 했고,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등 중국 대륙 곳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운하 위의 배를 거처로 삼는 등 피난 생활을 겪기도 했습니다.



▲ 1935년 진강,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처: 독립기념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였습니다.

 

 

다시 시작된 임시정부 정착 시기,

중국 중경(충칭)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도착한 곳은 중국 중경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부터 해방까지 약 5년 동안 중경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힘을 키우기 위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라는 통합 정당을 창당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 통합을 기반으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직할군대로서, 창설된 지 4개월만에 1백명이 넘는 병력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기념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에 대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임시정부는 기나긴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을 끝내고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 중경 청사에서 촬영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이후 집무실로 사용한 경교장 (출처 : 독립기념관)



오는 4월 13일, 국내외에서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립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염원하며 모두의 힘을 한데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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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농법

    2018.04.07 1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주관 할 자격이 없다. 본인은 수년에 걸처 수차례에 걸처 민원과 신문고, 정책제안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4월 13일이 아닌 4월 11일자 임을 설명하고 각종 근거를 밝혔다.
    먼저 4월 11일자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 보훈처가 99년도 임시정부법령집을 한시준교수의 책임연구자로 하여 정리 한바 있다. 임시헌장 선포문(1919. 4. 11자)에서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이라 하였다. 또한 제6회 의정원 회의 임시헌법(1919. 9. 11) 선언문 내용은 "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하야 원년 4월 11일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으로 삼아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동 헌법 제8장 보칙58조는 본임시헌법은 공포일보 부터 시행하고 원년 4월 11일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본 헌법 시행일로 부터 폐지 함, 또한 동 헌법에 대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회의 국무원 총무국 국무총리 이승만의 명의로 하여 발행하였으며 내용또한 동일하다. 또한 임시헌시약헌(1927, 4, 11) 제5장 보칙 5조의 내용에 대한민국 9년 4월 11일부터 시행하고 대한민국 4월 7일 공포한 임시헌법은 동시에 폐기함 등과 같이 4월 11일자에 공포(발포)등의 내용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명확히 하고 있으나 수차례의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임시정부 법령을 검토, 및 거론한 사실이 없이 중국 등지에서 이루어진 기사내용을 근거로 학술회의를 하고 있으니 국민을 설득하는 자료가 미흡다는 이유가 된다. 필자의 주장이 공무원의 책상속에 또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는 생각에 배심감과 모멸감이 앞선다. 국가보훈처의 직무유기, 독립기념관의 연구원들은 지금껏 무엇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을을 조선민족운동연감의 문헌를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 13일자는 한일관계사료집을 인용하였지만, 한일관계사료집의 4월 11일자에는 임시정부수립일의 내용이 들어 있다, 4월 13일자는 이현회 교수등 국사편찬위원회 자문단이 세심한 연구와 검토 없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선포(공포/발포)한 날이라 판단하고 각종 전문서적에 인용하여 고착화 된 날이다.

    근거적 이유는 조선민족운동 연감의 4월 10일자와 11일자의 내용은 제1회의정원 회의 내용과 뒤바뀐 사실이며, 4월 13일자는 임시의정원 소집일 아니라는 점이다. 4월 13일자의 기록은 제2회, 제3회의정원 회의 내용이 기록 되어있다. 내용이 변질 된사실은 제2회의정원회의 ( 4월 22일자 ) 안건에 본국에서 국민대회를 개초하니 이미 상해에서 임시정부(의정원)의 성립을 알려야 한다는 결의 내용이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13일자에 내외에 독립정부성립을 선언하고 라고 기록하였고 이를 학자들이 세심한 검토없이 해석하여 공포일이라 설명하고 있다 , 이현회교수와 일부교수, 보훈처 마져 4월 11일은 제정일이고 4월 13일은 공포한 날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수차례 근거문헌과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보냈지만 무지한 학자들의 의견만 고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올해 1~2월중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법제처의 검토, 행자부의 협조등의 절차를 걸처 국무회의에 통과 되어야 한다고 절차를 설명하였고 2019년 달력과 각종 수첩이 제작 되기 전인 3월 전에 꼭 행정절차의 필요성까지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민원인의 노력을 무시하고 올해도 4월 13일자에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진행하겠다는 사실로 보아 담당공무원이 무능한것인지, 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는건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뭇 궁금하다,
    지난 3월 26일 귀처주관 독립기념관 주관으로 국회소회의실에서 학술회의를 진행 하였지만 그동안 한시준교수의 주장에 1922년 월력(달력)과 사진의 근거가 전부였다, 다행이도 이만열 교수가 보창로 329호 청사에서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국호와 관제,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는 논고를 발표 하였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와 한시준교수는 보창로 329호 청사를 부인하고 있었기에 반가운 내용이였다. 한시준 교수는 2004년 12월에 독립기념관의 학술용역으로 보창로329호 청사를 부인하는 용역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편협한 내용, 제한된 자료, 문화부, 독립기념돤의 보고서를 필요한 내용만 인용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학술용역의 저의를 의심하도록 기술되어 있다.

    본인을 비롯한 이수봉교수등은 각종 문헌에 보창로 329호청사가 임시정부최초청사임을 확인 할수 있는데 어찌하여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한시준 교수는 이러헌 내용을 찿아 볼수 없다.
    상해임시정부수리기념일의 장소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여 야한다. 이러한 내용은 임시정부수립 100주년를 정점으로 소상히 밝혀 주기 바란다.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의 법적인 근거는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의 각조문을 검토하시고, 잘못된 사실을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장은 공동으로 사과를 해야 하며, 빠른 시일에 행정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8주기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약 5개월 뒤인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는데요.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는 투옥에서부터 사형 집행까지,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요.

오늘 훈터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삶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 안중근 의거 기록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주도 인물이자 만주 침략의 계획을 세우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판·검사, 변호사, 통역관, 방청인 등이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법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고 밝히며, 이토의 죄상 15가지를 낱낱이 밝혔습니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발언은 큰 화제가 되어 재판정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여론이 일본에 등을 돌리자, 일제는 졸렬하게도 이후의 재판을 비공개로 바꾸었고 같은 해 2월 14일의 공판에서, 그들이 원하던 대로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당부


사형 선고 이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여순감옥으로 면회를 가는 안 의사의 형제들에게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습니다. 


또한, 변호사를 통해 "국가를 위하여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선생에게 수의를 지어 보냈습니다. 


▲ 안중근 의사와 형제들의 면회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과 옥중 유묵


안중근 의사는 의거를 행하기 전인 1909년, 항일투사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혈서로 '대한독립'을 쓰며 단지동맹을 맺고,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칠 것을 다짐했습니다.


▲ 대한독립이 쓰인 태극기.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의지가 담긴 손가락은 여순감옥 수감 당시에 유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약 200여 점에 달하는 유묵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중에서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유묵 한 점을 소개해 드립니다. 


▲ ‘인내’ 유묵. 보물 제569-18호. (출처: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형이 선고된 이후, 안 의사는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을 따라 공소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며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밝히고, 동양의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자 했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이 3월 26일 월요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립니다. 


이날 추모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안중근 의사의 유족(외손녀 황은주 씨, 증손자 안도용 씨), 안중근함 부함장 정창식 중령 및 많은 시민들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있고,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는 교수, 변호사 등 30여 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 2017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3월 26일, 독립을 열망하고 동양의 평화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랐던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참고 사이트

안중근의사숭모회 http://www.patriot.or.kr/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www.ahnjunggeun.or.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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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34

    2018.03.23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디 쥐새끼들 모조리 처단해 주세요.

  2. 2018.03.23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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