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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늘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좌우익 합작 민족운동단체 ‘신간회’가 창립된 지 9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운동을 펼쳤던 신간회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 신간회 신의주지부 창립 1주년 기념촬영. (출처: 신간회기념사업회)

 

#1. 신간회, 민족 단결을 목표로 결성되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신석우, 백관수, 유억겸, 권동진 등 당시 좌우익 인사 34명이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입니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던 독립운동계에서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이념을 초월하여 힘을 하나로 모았던 것입니다.

 

▲ 호외로 발행된 신간회 기사. (출처: 독립기념관)

 

신간회가 창립되고 초대 회장으로는 이상재 선생이 추대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평생을 민족운동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선생은 당시 이미 고령의 나이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사회운동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회장직을 역임했습니다. 

 

신간회의 부회장으로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대한협회의 부회장 등을 역임한 권동진 선생이 추대되었습니다.

 

▲ 이상재 선생(왼쪽), 권동진 선생(오른쪽) (출처: 독립기념관)

 

#2. 민중을 위해 활동하다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를 주장하고,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을 지원했고, 파벌주의 타파·동양척식회사 반대·근검절약운동을 전개하며 전국에 지회를 조직했습니다. 

 

1930년경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를 설립하고 3만 9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활동 범위를 넓혀 일본에 지회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민중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신간회 강령>

첫째,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둘째,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셋째,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배격한다.

 

#3.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진상규명을 추진하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해가던 신간회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학생운동 탄압에 대해 엄중 항의했습니다. 또한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비타협 민족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계획했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 1929년 10월 광주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일본인 학생이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일본 경찰의 차별 조치에 대해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항일운동.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인 이광춘 박기옥 / 1930년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출처: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신간회의 간부인 조병옥, 이관용, 이원혁 등 주요인사 44명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뿌리가 흔들리게 된 신간회는 결국 1931년 5월 해산되었습니다.

 

#4. 신간회, 창립 91주년을 맞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정치·이념을 초월한 좌우익 합작 민족협동전선의 최고기관으로 일제강점기뿐만이 아닌 오늘날까지 그 의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신간회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신간회 창립 91주년 기념식'이 어제 오전 11시 서울 YMCA회관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기념식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하여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광복회원, 학생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간회 강령 및 약사 낭독, 기념사, 청소년 대표의 선열께 드리는 감사편지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신간회 창립일인 오늘, 시대적 위기와 고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여 힘을 모았던 선열들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참고문헌]

-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5119&cid=40942&categoryId=35591)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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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여러분! 오늘은 바로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선포된 지 9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8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점이었음은 물론,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의미 깊은 선언이었는데요. 2.8독립선언의 전개 과정과 의미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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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인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행된 독립선언서에는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였는데요,

1919년 2월 8일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 명이 선언식에 참석하여 동경 한복판에서 조국 독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


▲ 2.8 독립선언 주도 인물들. (출처: 독립기념관)


▲ 2·8 독립선언서 (출처 : 독립기념관)


2.8독립선언서에서는 한국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의 부당성과 합방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한 후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된 조국이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일본경찰은 선언식의 해산을 요구하고 탄압을 시작하였고, 2.8독립운동대표와 주도 학생 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2.8독립선언 소식은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유학생들이 일본에서도 조국을 위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국내의 시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3.1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1917년 4월 촬영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육상운동회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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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경의 제지로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는 국내에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1920년대 청년, 학생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2.8독립선언 99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재일본한국 YMCA 한국문화관에서 ‘동경 2.8독립선언 선포 제99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 2018년 2월 8일 거행된 <동경 2.8독립선언 선포 제98주년 기념식>


일본에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일본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최된 이번 기념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이찬범 주일대사관 총영사, 광복회원, 애국지사 유가족 등 250여 명이 참석하여 2.8독립선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 행사를 가졌습니다.


전날인 2월 7일,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은 일본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인 ‘이봉창 의사 순국비’를 방문하여 참배하였습니다.


▲ 이봉창 의사 순국비에 방문한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과 참석자들의 기념사진 (왼쪽) / 이봉창 의사 순국비 (오른쪽)


국가보훈처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해외 13개국에서 열리는 38여 개의 국외 독립운동 기념행사를 지원해 나갈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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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며칠째 이어지는 미세먼지 소식에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들 많으시죠. 오늘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통쾌한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김상옥 의사 (출처 :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1923년 1월 12일, 세상을 뒤흔든 의거를 감행하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쪽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부,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바로 한지 김상옥 의사였습니다.

식민통치의 중심에서 과감하게 의거를 실행했고, 이후 일본 경찰들과 ‘400대 1’의 총격전을 벌였던 김상옥 의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1. 식민지시대의 소년, 민족운동가로 자라다


김상옥 의사는 1889년 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8세 때는 쳇불공장(체의 그물) 직공으로, 14세 때는 말발굽제조 직공 등으로 일하며 어려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상옥 의사는 17세 무렵에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했고, 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는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 광복단을 조직한 채기중(왼쪽), 한훈(오른쪽) 선생.


20대에 약행상을 하며 전국 각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던 김 의사는 1913년 경북 지역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선생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경제적인 독립을 이룬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3.1운동 후 해산하는 여학생을 치려는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칼. (출처 : 독립기념관)


#2. 비밀결사 ‘혁신단’과 ‘암살단’을 조직하다


김상옥 의사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해산하는 여학생을 위협하는 일본 경찰을 맨손으로 때려 눕히고 군도를 빼앗았던 일화는 유명하죠.

의사는 같은 해 4월 1일,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합니다. 혁신단은 각지의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가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신문 발행은 중지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이후로 김 의사는 평화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죠.


1920년 봄, 김상옥 의사는 만주 소재 독립군 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 선생을 만나 무력을 통한 항일운동을 구상하고, 같은 해 4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한 것이죠.

의사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김 의사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워 나갔습니다.


#3. 다시 서울, 의거를 준비하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의열투쟁의 뜻을 굳힌 김상옥 의사는 안흥한 선생 등과 함께 폭탄, 권총, 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1922년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와 거사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종로경찰서 폭파’, 그리고 ‘조선총독 제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주요 수단이었던 경찰력의 중심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곳으로,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지에 설치된 표지석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김상옥 의사는 서울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회의를 거듭하며 활동자금을 모으고 거사용 폭탄을 마련해나갔습니다. 또한, 거사에 임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의 말을 남겼습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4. 종로경찰서에 던져진 폭탄, 일제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쪽 모퉁이에서 경찰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창문에 적중하여 굉음과 함께 터졌습니다. 김 의사는 이후 용산에 거주하던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폭탄투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지만 의사의 행방은 물론 인적사항조차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반면 김상옥 의사는 다음 목표인 조선총독 저격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서울역을 답사하는 등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그러나 밀정에 의해 며칠 뒤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무장한 순사 14명이 은신처를 포위하였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의사는 뛰어난 사격술로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승복을 입고 변장한 채 의사는 다시 동지들과 재회하여 조선총독 암살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일경은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함)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경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수백 명의 일경과 접전을 벌이던 중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시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출처 : 독립기념관)


#5.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했고, 무장한 일경을 대상으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 

그는 어린 시절 생활고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2018년 1월 22일(월) 오후 4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 인사, 유족, 시민 등이 참석하여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던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기릴 예정입니다. 


▲ 김상옥 의사 순국지 (『조선일보』, 1923년 3월 14일, 출처 : 독립기념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34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삶을 살다 가신 김상옥 의사를 함께 기억하는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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