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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시기 명문가로 칭송 받을 수 있는 가문은 부를 축적한 가문, 높은 권력을 지닌 가문이 아니다. 조선후기 외세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구국활동을 펼쳤거나 일제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가문이 바로 명문가다. 가풍에 의한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시기 가족 중 어느 누가 구국 또는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 나오면 그 가문의 구성원은 대체적으로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안중근 일가, 김구 일가, 이회영 일가가 그랬다.

 

 

대를 이은 독립운동 명문가 집안

이광민의 가문도 바로 그 대열에 설수 있는 명문가였다. 그의 작은할아버지 이승화(李承和)와 백부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한 3형제, 그리고 자신과 3명의 사촌 및 조카 병화(炳華)까지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니 한국근대사에서 그의 가문을 빼놓고 어찌 명문가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이광민은 1895년 예로부터 전통을 지키고 충절을 이어온 고장으로 이름 높은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아버지 봉희(鳳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수중에 넣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날뛰던 해였다. 이 해 일제는 황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며, 단발령을 반포해 한민족의 민족혼을 차단시키고자 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망동에 한민족은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한편, 계몽운동을 펼쳐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애국의 물결은 일제가 조선과 그 뒤를 이은 대한제국을 강압하면 할수록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의 대열에 이광민의 가문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된 백부 이상룡은 병서를 연구해 무장항일의 기초를 닦은 후, 1905년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구축했다. 이 일은 준비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기지를 습격 당하는 바람에 큰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의병항쟁이 어렵게 되자 이상룡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과 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에는 민족학교인 협동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해 활동했다. 물론 이 같은 활동에는 그의 첫째 동생인 상동(相東)과 광민의 부친이자 상룡의 막내 동생인 봉의, 두 형제들도 가담해 힘을 보탰다. 10대초반의 이광민도 이 협동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고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이 같은 애국활동을 보고 자란 이광민은 나라사랑 정신이 자연히 가슴 깊이 박혔다.

 

그러나 이광민 가문의 애국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침략자 일제의 마수를 견디지 못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당하고 말았다. 이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한민족은 나라가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깊은 시름에 잠겨 망국의 현실을 고민하던 백부 이상룡은 가족을 모아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떠날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잃고 맞는 첫 새해인 1911년 1월 6일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의 길을 나섰다. 물론 이 길에는 이제 막 16세가 된 이광민도 포함되었다.

 

 

백부 이상룡을 따라 16세에 만주로 이주

이상룡 일가는 엄동설한에 추풍령을 넘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삼엄한 일본 경찰들의 검문과 감시를 받고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들어섰다. 이어 압록강변을 따라 집안현까지 도보로 걸어 훗날 서간도 독립군기지의 본산이 될 유하현(柳河縣)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이 이동한 압록강변의 이 경로는 오늘날 차편으로 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길이다. 하물며 16세의 어린 이광민이 그 차가운 추위를 견디며 도보로 이동했으니 그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먼저 온 신민회 회원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힘을 합해 1911년 봄 서간도 이주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의 초대 사장은 이상룡이 되었다. 이 단체는 나라를 침략자들에게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 땅에까지 흘러온 이주한인들에게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경학사의 지도자들은 이상룡을 비롯해 이회영, 이동녕, 김창환, 주진수 등이었다. 모두가 굳건한 민족정신을 지닌 애국지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도를 받은 이주한인들은 척박한 만주땅에서 좌절하지 않고 안정감을 가지며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갔다. 이광민은 아직은 소년의 몸이었지만 마치 비서처럼 따라다니며 백부 이상룡을 보필하며 그의 애국애족활동을 배웠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하여 보다 강력한 결집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이상룡을 비롯한 서간도의 애국지사들은 한인사회 곳곳에 강습소를 만들어 한인 2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많은 애국청년들이 이 무관학교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을 대비해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이수하였다. 소년에서 청년기로 접어든 이광민도 신흥무관학교의 생도가 되어 자신의 역량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무관학교를 수료하고 난 뒤, 1916년에는 부민단의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通化縣三道溝)에 설립된 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가 되어 한인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임시정부 산하 무장세력 ‘서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였던 백부를 보필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발해 마침내 전민족적인 3·1만세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한국인들에게 전달되어 소식을 접한 해외한인들 또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지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광민이 독립군으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있는 서간도 독립군기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서간도 독립군기지의 독립운동지도자들과 이주한인들도 3월 12일부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여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해 4월 조국 독립을 실천할 기회가 도래했음을 간파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서간도 각 지역에 흩어져있는 민족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탄생시켰다.

 

한편 이 같은 한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기에 힘을 얻은 민족운동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조국의 독립운동을 총괄 지도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표기)는 행정과 입법 및 사법기관을 조직하여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10 여 년간 독립전쟁을 준비해 온 서북간도의 독립운동계에 연락을 취해 그들을 임정산하의 군사세력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따라서 임정과 협의한 서간도의 지도자들은 1919년 11월 17일 한족회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바꾸고 임정산하의 무장세력임을 천명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이끌 최고지도자인 독판에는 이광민의 백부인 이상룡이 선임되었고, 여준, 이탁, 김형식, 양규열, 지청천, 김동삼 등 쟁쟁한 독립군지도자들이 간부가 되었다.

 

자신의 백부가 서간도 항일 무장세력을 이끌 최고지도자가 되자 그 누구보다 열혈한 애국심을 가진 이광민도 바빠졌다. 서로군정서 성립 초기 이광민은 조직내의 특별한 직책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독판에 선임되던 그 시기 이미 이상룡은 60세를 넘긴 고령이었다. 따라서 이광민은 자신이 하나의 고유 업무를 담당하기 보다는 막중한 업무를 감당해야 할 고령의 백부를 철저히 보필하고자 했던 것이다.

 

명문가 집안으로 대를 이어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 임청각 전경.


성립 이후 서로군정서는 짜임새있는 독립군단으로 성장해 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중간간부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온 청년들을 독립군병사로 입대시켜 편제를 갖추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간부출신이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독립군 지도자들은 이들을 주야로 훈련시켜 능력있는 독립군요원으로 양성해 갔다. 또 러시아 연해주로 장정들을 파견해 이들이 항일전에 사용할 무기를 구입해 들였다. 이 모든 것은 이회영, 이시영 일가가 지출한 자금과 독판 이상룡이 고향인 안동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으로 행해졌다.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이상룡은 이광민의 사촌형이자 자신의 아들인 준형을 안동으로 보내 전답을 팔아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준비를 거쳐 서로군정서는 소속 독립군들을 국내로 파견해 일제의 침략기관과 침략자들을 공격하는 유격전을 전개했다.

 

 

일제의 간도참변 단행으로 독립군기지 초토화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들의 이 같은 국내진입전에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1920년 10월 초, 약 2만의 대규모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 침략군을 맞아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힘을 합해 같은 해 10월 21일부터 약 1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대첩 후 독립군들은 일시적으로 일제와의 항전을 피하고 진영을 정비하기 위해 북만주 또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런가하면 일부는 서북간도의 오지로 피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산리에서 대대적으로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를 초토화시키는 ‘간도참변’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서북간도에 만들어진 모든 한인사회를 공격하였지만 특히 주대상으로 한 곳은 민족운동자들이 독립군기지로 건립한 지역이었다. 당연히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서간도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총지휘한 이상룡의 거주지는 일제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그 때도 지극정성으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서 백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광민은 신속히 이상룡을 산간오지의 깊숙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셨다.

 

일제의 간도침략으로 10 여 년간 민족운동자들이 일군 서간도 독립군기지는 초토화되었다. 침략자 일본군들이 철수하고 난 뒤 산속 깊은 밀림으로 피해있던 한인들이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왔을 때 한인사회는 마치 전쟁이 끝난 자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다시 힘을 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재건하였다. 20대 중반으로 이제 한인사회 내에서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계에서도 중추적 인물이 된 이광민도 동포들을 이끌고 한인사회 재건에 앞장섰다.

 

 

간도참변 후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대동통합 이끌어

간도참변을 겪고 난 뒤 몇 년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중반에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하였다. 대한통의부는 김동삼을 비롯한 채상덕, 고할신, 현정경, 김창환 등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 대한통의부의 총장인 김동삼은 이광민과 같은 안동인으로, 일찍이 고향에서 민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해 애국인재를 양성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협동학교 졸업생인 이광민에게 김동삼은 스승이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김동삼은 이상룡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자 가장 아끼는 고향 후배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자신이 신뢰하는 김동삼이 대한통의부를 이끌어가자 이미 60대 중반의 고령이 된 이상룡은 조직에서 한 발 물러나 아무 직책도 맡지 않았다. 단지 항시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믿음직한 조카 광민을 통해 단체의 나갈 길을 제시해 주는 역할은 계속하였다.

 

그러나 남만주 독립운동계의 온 여망을 받고 성립한 대한통의부는 성립 후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조직내부의 이념상의 문제로 나뉘어져 1924년 초에는 채찬, 김명봉 등 세력이 무장투쟁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참의부(參議部)를 성립시켜 분리되었다. 대한통의부의 인사들은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합운동을 전개했다. 이 통합운동부터 이광민은 백부 이상룡의 곁을 떠나 독립운동계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상룡은 광민이 연륜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이제 자신을 떠나 독립운동계 전면에 나서 활동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년시기 자신을 따라 서간도로 와 반평생을 자신을 따라다니며 독립군기지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상을 배운 조카였다. 이제 그만하면 30세인 이광민이 남만주 독립운동계를 이끌고 일제를 상대로 투쟁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광민은 서로군정서의 대표로 활약하며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4년 7월부터 시작된 통합운동에는 최종적으로 대한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 광정단(光正團), 의성단(義成團),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고본계(固本稧),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등 8개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그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참의부, 신민부(新民府) 등과 함께 3부의 시대를 이끌며, 남만주 한인사회 및 항일무장투쟁을 이끌 정의부가 성립된 것이었다.

 

 

정의부에서 중앙의회 의원 선거 및 지방자치 시행업무 맡아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 남만주의 광활한 지역 곳곳에 형성된 한인사회를 관할해 한인들의 자치를 지원하는 한편, 독립군들로 의용대를 편성해 무장투쟁을 실천한 군정부(軍政府)였다. 즉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 삶의 터전을 잡은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고, 그를 바탕으로 구축된 역량으로 무장력을 갖추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정의부가 관할 대상으로 한 남만주지역 거주 한인은 15,300여 호에 76,800여 명이었다. 성립 초기 정의부의 조직은 중앙행정위원회, 민사위원회, 군사위원회, 법무위원회, 학무위원회, 재무위원회, 교통위원회, 생계위원회, 외무위원회 등의 행정기관과, 사법적 기능을 가진 중앙심판원,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수행할 사령부도 따로 구성되었다. 즉 영토와 주권을 가진 완전한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만주지역 한인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는 한편 조국독립운동을 수행할 준정부적 구조를 갖추었던 것이다.

 

성립초기 이광민은 민사위원회 소속 민사부의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가 맡은 서무과는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의원을 선거하는 업무와 지방자치를 시행해 이를 운영하는 업무를 주관하였다. 관할지역내의 이주한인의 가가호호를 조사해 호적을 작성하고, 그를 토대로 독립군요원을 징병하는 업무도 시행하였다. 그리고 남만지역 각 한인사회에 지방행정 조직망을 갖추어 거기에 소속된 한인들이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까지 주관하였다. 민사부 서무과의 이 같은 업무는 이주 한인사회 구성원들 하나하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수행하기 어려운 업무들이었다. 따라서 1911년 이른 시기 서간도로 이주하여 이주한인사회 성립초기부터 10여 년이 넘도록 한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광민에게 이 업무를 책임지도록 했던 것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백부를 보필

그런데 정의부가 남만 한인사회를 이 같이 관할하며 독립운동을 수행하고 있던 1925년 5월 임정의 법무총장인 오영선과 내무총장인 이유필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이들 두 파견원들은 정의부 중앙간부들을 만나, 지금 임정이 상당히 어려운 처지이므로 임정의 최고책임자를 정의부 측에서 추천해주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정의부 간부들은 행정기관인 중앙행정위원회에서 논의한 뒤, 중앙의회에 안을 상정하여 파견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정 최고책임자로는 그들이 언제나 스승과 어버이처럼 따르는 이상룡을 추천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앙간부들의 보고를 받은 이상룡은 한동안 고민하였다. 지금 정의부의 아무 직책도 맡고 있지 않지만 그는 아직도 남만주의 모든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지도자였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 상해로 가도 남만주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갈 것인지 어쩔지를 고뇌하고 또 고뇌하였다. 그러다 결국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이 어디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효과적인 활동을 벌여 조국광복을 되찾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만주는 이제 정의부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한인들을 관할하며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독립운동계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임정이 혼란스럽다면 그 또한 침략자 일제만 좋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린 이상룡은 이제 독립운동계 지도자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조카 이광민을 대동하고 1925년 8월 하순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안동(지금의 단동시)에서 영국 선박 애인호를 타고 상해로 가는 배 안에서 이상룡은 언제나 자신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는 조카 광민을 보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고향 안동에서 아무 걱정 없이 책이나 보면서 한평생 편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망명이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10대의 어린 나이에 큰아버지를 따라 이 척박한 서간도에 와서 모진 고생을 이겨낸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백부 이상룡선생.

 

상해에 도착한 이상룡은 그 해 9월 24일 임정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된 이상룡은 노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임정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가 1962년 2월 조카 광민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광민은 정의부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같은 고향 출신의 동지인 김응섭과 1924년 11월 4일 반석현 부태하에서 한족노동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성립초기부터 이광민은 한족노동당의 선전부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의부보다 약 20일 빨리 조직된 이 단체는 서간도로 이주해 만주 독립운동계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젊은 인사들이 간부가 되어 한족노동당을 이끌었지만 만주 독립운동계에서는 실질적인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광민을 비롯한 김응섭, 김경달, 박동초 등 이 단체의 간부들은 약 20일 늦게 성립된 남만의 통합군정부인 정의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의부에 가담하면서도 한족노동당의 조직은 계속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참여

상해에서 돌아온 이광민은 새로 개편된 정의부 조직에 의해 재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독립운동단체의 재무위원장이란 인물의 명성이나 항일투쟁력만 가지고 맡겨지는 직책이 아니다. 그 조직의 살림은 물론이고 항일활동을 위한 무력을 갖추는 일까지 총괄해서 책임지는 직책이 재무위원장인 것이다. 거기에 정의부는 이주한인사회의 자치까지 관할해야하는 단체였기에, 다른 어느 직책보다 더 신망 받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수행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던 것이다. 이 같이 막중한 직책을 맡은 이광민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재무위원장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의 사심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정의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관할 한인들을 지원하며, 항일무장활동을 훌륭히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1927년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계에 민족유일당운동의 바람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상해와 북경 등에서 활동하던 홍진, 안창호 등이 일으킨 것으로 만주의 독립운동계도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민족유일당운동이란 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고집하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침략자 일제를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이 운동이 전개되자 이광민은 처음부터 적극 참여하였다.

 

민족유일당 재만촉성회조직동맹 선언(1928.5.26).

 

 

1927년 4월 15일부터 길림현 신안둔에서 개최된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운동에 이광민은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운동계 선배들과 정의부 대표로 참여하였다. 52명의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참여해 4일간에 걸쳐 개최된 이 회의를 시초로 이후 만주 독립운동계의 유일당운동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첫 회의에서 대표들은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기 위한 강령과 서약문을 합의해 작성하였다. 그리고 유일당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세부지침 연구기관인 시사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광민을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에 의해 이후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서북간도를 포함한 남북만주 전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운동으로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3부는 물론이고 만주 여기저기에 조직된 군소단체라 할지라도 이들 모두는 제각기 이념과 노선을 가졌기에 이를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년이 넘게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 독립운동계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와 전민족유일당협의회 등 두 파로 나뉘고 말았다. 촉성회의 주장은 독립운동계를 통합시킬 유일당에는 지금까지 가담했던 단체를 완전히 버리고 구성원 하나하나가 개인의 자격으로 유일당에 가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의회의 주장은 현재의 단체를 그대로 존속시켜 단체와 단체가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안이 나온 뒤에도 만주독립운동계는 상당기간 방법의 차이를 없애고 유일당을 성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끝내는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다. 남만지역 한인사회를 관할하며 자치와 군사적인 면에서 큰 세력을 가진 정의부는 협의회를 지지하였다. 그렇지만 재무위원장 이광민은 정의부의 논리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 흑룡강성에 본부를 둔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가 되어 촉성회를 지지하였다. 이 두 파는 이후 촉성회는 북만주를 근거지로 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협의회는 남만주를 근거지로 해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성립시켜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운명

조국 독립운동전선에서 이광민이 이 같이 활약하고 있을 때 백부 이상룡이 위독하다는 전문이 왔다. 70대의 고령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광민의 가족은 그를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오지인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 모셨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별이 온 것이다. 광민은 만사를 제쳐두고 백부께 달려갔다. 백부 이상룡은 오늘날 이광민이 독립운동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한 스승이자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이상룡은 거의 운명직전이었다. 이후 며칠간의 병고를 겪은 이상룡은 자신의 아들이자 이광민의 사촌형인 이준형과 가솔들에게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이 때가 1932년 5월 12일로 이상룡의 나이 만 74세였다. 이준형과 광민 등은 유언대로 우선 그곳 소고전자에 가묘를 만들어 이상룡을 모셨다.

 

이광민 묘소(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제1묘역 23번).


이상룡이 서거한 뒤 광민의 일가 대부분은 국내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자신을 이끌어 준 백부 이상룡이 이 세상에 없다고 하여 광민은 만주에서의 독립투쟁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끝까지 만주 땅을 떠나지 않고 동지들을 이끌고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어떤 면에서 16세 되던 해에 조국을 떠나 이곳 만주에서 잔뼈가 굳었으니 그에게는 만주가 고향과도 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그가 조국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는 동안에도 침략자 일제는 세력을 키워 만주를 삼킨 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중국 대륙을 향해 점점 침략전을 확대해갔다. 이에 광민은 조국이 독립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1938년 하얼빈의 동취원창에 토지를 구입해 가족묘를 조성하고 이상룡의 유해를 이장하였다.

 

이 같이 고향 안동에서의 어린 시기를 빼고 한평생을 만주에서 조국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광민은 그 곳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다. 꿈에도 바랐던 해방을 맞아 단숨에 조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 척박한 땅에서 고생한 이광민은 그 기쁨의 순간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던 이광민은 애석하게도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 약 두 달 만인 1945년 10월 18일 만주 땅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회 전문위원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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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변란, 즉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를 계기로 봉기한 의병전쟁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은 지속성과 광범성, 근대성과 다양성, 그리고 강력한 투쟁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국내는 물론 국외 각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성을 가졌고, 대한제국시대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을 가졌다. 또한 운동 노선과 이념의 다양성 또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매우 격렬하게 전개된 한국독립운동, 목숨을 바치는 의열투쟁도 있어

게다가 한국독립운동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작부터가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은 한말 국민적 의병전쟁을 거쳐 1920년대 만주·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30·40년대 항일 빨치산투쟁이나 조선의용대(군),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투쟁성의 상징으로 무장 독립투쟁의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었고, 무장 독립투쟁은 여러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의 원천이자 동력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한국독립운동의 독특한 방략인 의열투쟁도 있었다. 이는 자신의 한목숨을 바쳐 온 인류에게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 매우 다르다. 우선 목적부터 큰 차이가 있다. 테러는 개인이나 일부 집단 혹은 단체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의열투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공격대상 또한 테러는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크지만, 의열투쟁은 침략 원흉이나 공공의 적 또는 식민기관이나 단체 등으로 특정한다. 또한 의열투쟁은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이유∙주체를 밝히지만, 테러는 그렇지 않다. 달리 말하면 의열투쟁은 부귀와 영화를 위한 것도,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한목숨을 던져 민족의 대의를 구현하고, 역사를 바꾸고,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의열투쟁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기에는 의사와 열사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사상과 철학, 조국애와 민족혼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의열단 출신의 김익상

김익상은 의열단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폭파와 상해 황포탄 의거를 결행한 독립운동가이자 천추에 길이 남을 의사(義士)이다. 의사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922년 상해 황포탄 의거 당시 나이가 28세로 보도된 사실을 감안하면, 1895년생으로 생각된다. 의사의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 공덕리(孔德里) 286번지로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이다.

 

김익상의 정확한 생몰연대와 고향이 언급되어 있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문자료나 재판 자료를 통해 현재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조실부모한 의사는 넉넉하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삼호보성소학교(三湖普成小學校)에 재학 중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의사는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호구지책을 삼았다. 1919년경에는 서울 교북동(橋北洞)에 있던 연초회사인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司)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1921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의사는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중국으로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는 비행기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천진과 상해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廣東)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사는 크게 낙심하여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인생의 큰 전기가 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창단된 이후 본격적으로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을 계획하여 실천하고 있었다. 원봉은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한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암살․파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민중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이성우∙곽경(곽재기)∙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다. 여기서 김원봉과 동지들은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열단 공약 10조]를 결의하였다.

 

①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하지(何時何地)에서나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하지에서나 부르면 반드시 응함
⑧ 피사(避死)치 아니하며 단의에 진(盡)함
⑨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를 배반하는 자는 처단하여 죽임

 

이 같은 공약을 결정하여 동지적 결합과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이들은 김원봉을 의열단의 의백, 즉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같은 해 9월 14일 박재혁(朴載赫)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또 12월 27일에는 최수봉(崔壽鳳)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에는 더욱 대담하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때 의사는 김원봉을 북경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은 2천만 민족의 10분지 8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때에 선두에 나아가 희생이 됨이 마땅하다.”는 김원봉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는 의열단에 가입한 뒤, 조선총독부 폭파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일제의 문화통치가 허황된 것임을 세상에 알리다

의사는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 받고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하기 위해 나섰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의사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에 북경을 떠나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도 의사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 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다.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는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이태원(梨泰院)에 살던 아우 김준상(金俊相)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이날 밤 아우와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던 부인 송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다음날 아침 의사는 일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 그리고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會計課)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 왔다. 의사는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이날의 거사는 대단하였다. 우선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맹렬하게 폭발하여 15센티나 되는 깊이로 마룻바닥이 팼고, 파편은 벽과 아래층으로 튀어 응접용 탁자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파손되는 등 조선총독부 청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물샐틈없는 경비가 한순간에 뚫려 식민통치의 심장부가 공격당한 사실이었다. 이로써 일제가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펴 식민통치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수그러져가고 있다는 선전이 허황된 사실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의거 직후 의사는 이태원의 아우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이튿날 평양(平壤)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다시 일본 의복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벗어난 뒤, 9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김약산을 만나 의거 사실을 보고하였다.

 

 

상해 황포탄 의거를 통해, 의열투쟁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반성하는 기색이 없자 의사는 재차 의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1922년 2월 3일에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김원봉과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의사는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는데, 그때 마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해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의사는 크게 기뻐하여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상해 황포탄 의거를 함께한 김익상과 오성륜(왼쪽), 황포탄 부두 자리(오른쪽).

 

 

다나카는 장주(長州, 조슈)군벌의 우두머리로 일제 군부의 거물이며, 평소 대외 침략정책을 강력히 주장하는 침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사는 물론 동지들인 오성륜과 이종암이 서로 다나카 처단 의거를 결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김원봉과 논의 끝에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그리고 의사가 제2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제3선에서 순차적으로 권총과 폭탄으로 다나카를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상해 황포탄 세관 부두에서 먼저 오성륜이 다나카에게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으나 앞서 나오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맞고 말았다. 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망치자 두 번째로 의사가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지만, 모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의사는 다시 폭탄을 다나카에게 던졌으나 폭발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던진 폭탄조차 바로 터지지 않자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 넣어 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의사는 피신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게 붙잡혔고,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피신 중에 벌어졌던 일화는 의열투쟁이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사는 피신 중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그에게 총탄을 발사하였는데, 그것은 그를 향해 발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발사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를 의사는 재판정에서,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하기 위하여 쏜 것이오. 하늘을 향해 쏘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그때 총 쏜 흉내를 내며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장이 “오성륜의 탄환이 전중 대장에게 맞았으면 그대는 폭탄을 던지지 아니할 생각이었느냐고 물으매, 아니오, 탄환이 맞더라도 나는 나의 폭탄을 전중에게 던지려고 작정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이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바로 의열투쟁인 것이다.

 

 

법정투쟁과 순국, 그리고 불타는 독립의지

피체된 의사에 대한 제1회 공판은 1922년 6월 30일 오전 9시 40분경에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마츠타(松田) 재판장과 이시카와(石川) 검사 입회 아래 열렸다. 이때에도 의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법정에 섰다. 당시 재판광경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푸른 미결수의 옷을 입고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의기가 충천한 듯한 태도로 앉아서 자주 방청석과 신문기자 좌석을 돌아보며 은근히 눈인사를 했다.”라고 한다. 또 재판정을 들고날 때, 의사는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나는 2년 전에 경성에서 철공장 직공 노릇을 하였는데,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을 말함)에 가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금년 정월에 상해로 와서 일본의 동지에게 전중 대장이 상해로 온다는 말을 듣고 암살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 동지는 3백 50명 가량인데 일본의 대관과 군인 윗 두목 가는 자를 암살할 목적이라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 일이라.”라고 당당하게 밝혔으니, 그 담대함과 불타는 독립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더욱이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무리 문화 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나의 이번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고 하여,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러니 일제가 ‘의열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율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과언은 아니다.

 

나아가 일본인 검사 미요시(三好)가 “피고의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朝鮮獨立義勇軍)을 위시하여 독립단이 뒤를 이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경한 형벌에 처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니 극형에 처하여 달라고 구형”을 하니, 의사는 태연히 웃으며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치 않는다.”라고 공술하였다. 결국 의사는 9월 25일 나카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마츠타(松田) 재판장에 의해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에 불복한 검사 측의 공소로 11월 6일 오후 1시 열린 나카사키 공소원의 공소공판에서 모리(森) 재판장에 의해 사형을 받았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그랬던 것처럼 각본대로 진행되는 일제의 재판에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었고, 또 자신의 한목숨을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치기로 작정하여 추호의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상고를 포기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의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렀다. 그래서 의사는 28세의 나이로 의거를 결행한 뒤,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노년에 접어든 50세의 나이에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신문 보도 내용에 따르면, 김익상 의사는 법정에서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에 광분하던 일제가 의사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의사가 귀향하고 얼마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니, 어디선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의사는 불우한 처지에서 성장하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철공소 공원과 연초회사 직원으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품었던 비행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이라는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원하여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결행하였고, 또 상해 황포탄 의거를 단행하였다. 의사는 의거 후 법정에서도 자신의 의거가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의사는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에 의해 암살되어 순국하고 말았지만,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은 ‘유방백세(遺芳百世)’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895년 경기도 고양군(현 서울시 마포구)에서 출생
1919년 광성연초공사 근무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가입.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1922년 상해 황포탄 의거. 피체되어, 사형을 선고 받음
1943년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르고 귀향, 암살당함

 

 

 

  김용달 /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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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심(吳光心 1910~1976) 선생은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은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남다른 민족의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교편 잡고 민족교육에 전념

선생은 조선혁명당과 군이 창설되던 1929년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교사가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 20세 때였다. 1930년 통화현(通化縣) 반납배(半拉背)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倍達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 학교는 남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韓族會)에서 설립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1931년에는 재만 항일근거지인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동명중학(東明中學)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2세 여학생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동명중학도 화흥학교와 마찬가지로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행하는 정의부 소속 학교였다.

 

선생은 배달학교 교사 시절인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정세가 매우 급하게 돌아가자 교직을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에 가담, 처음에는 사령부 군수처(軍需處)에서 복무했고 나아가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하여 주로 지하연락 활동을 맡았다.


 

 

 

 

 

교직을 접고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일생의 배필 만나

조선혁명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도중, 남편인 김학규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지하연락 활동 중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선생은 김학규의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참모이자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1900년 평남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난 김학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속성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역임하다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직을 접었다. 선생이 김학규와 결혼할 무렵은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의 참모장이자 맹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가운데 1932년 4월 29일 상해(上海)에서 경천동지할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가 발발하였다.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과 중국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위원장의 합작으로 하남성 낙양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이 결정됐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서 악전고투하는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의 관내지역 이동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일부 장령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1933년 말 관내지역으로 이동했다. 애초 조선혁명군은 관내지역으로의 완전한 이동보다는 이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는 부족한 인력∙물자를 보충받기 위해 대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대표로 김학규가 선발되어 남경(南京)에 파견됐고, 선생도 동행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찾아 남경으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노래로 표현

선생은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님 찾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어 비장한 심경의 일단을 토로하였다.

 

님 찾아가는 길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이 노랫말 속의 ‘님’은 임시정부이자 나아가 조국광복을 의미하였다.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는 선생의 굳건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다.

 

 

남경에서 만주까지, 위험한 전령의 소임을 다해

선생과 김학규가 남경에 도착할 무렵 남경에는 이미 남경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 등이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라는 전선통일을 위한 기구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김학규로서는 관내지역 독립운동단체 간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보다 효과적으로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만큼 남경 등 관내지역의 제반 상황을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에 신속하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김학규는 본부에 제출할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를 가지고 만주의 당 본부에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 임무는 선생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김학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휴대한 채 다시 만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선생은 아예 이 보고서를 통째로 외운 다음 1934년 7월 15일 남경에서 출발하여 만주로 향했다.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는 선생의 구술 보고에 대단히 만족하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 본부에서는 당 간부 몇 명이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二道溝)의 한 한인의 집에서 남경에 보낼 비밀 지령문을 작성하였다. 그때 변절자의 방화로 가옥이 불타면서 겨우 3명만이 살아나왔는데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천행으로 살아남았지만 심한 화상으로 3개월 동안 만주 산간의 바위굴에서 치료했다. 1935년 1월 선생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남경으로 가 조선혁명당과 군이 남경에서 추진하는 단일당 조직운동에 대한 당과 군의 비준서를 전달하였다.

 

이로써 조선혁명당 대표 김학규와 최동오(崔東吾)는 한국독립당(대표 金枓奉, 趙素昻)∙의열단(대표 石正, 陳義櫓)∙한국독립당(대표 尹琦燮, 이청천) 및 미주 대한인독립단(대표 金奎植, 申翼熙)의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로 1935년 7월 4일 단일대당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설됐다.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그의 참모이자 동지로서 적지 않은 구실을 한 선생은 민족혁명당에서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한국독립당 계열과 이청천, 최동오 등 만주세력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계열의 ‘전횡’에 반발, 탈당하면서 좌파적 성격을 띠게 되자 선생은 부녀부에서의 활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를 따라 광서성 유주로 가, 청년공작대로 활동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중일전쟁의 개전과 더불어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패색이 짙어졌고, 남경이 일본군에 점령되기 직전인 1937년 11월에 중국 정부의 이동과 함께 임시정부도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를 거쳐, 그 이듬해 2월에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로 옮겨갔다. 그리고 장사 지역 역시 일본군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되자 임시정부는 7월에 다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이 광동 지역에 상륙하여 광주를 위협하게 됨에 따라 10월에 서쪽으로 철수하여 남해(南海)를 거쳐 11월에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는 1939년 2월 광서성 유주에 머무는 동안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청년공작대의 대장은 고운기(高雲起)였다. 대원 총수는 34명이고 남자 대원들은 대개 낙양군관학교 출신의 청년 군사간부들 위주였다. 그리고 대원의 1/3에 해당하는 11명이 여자였는데 대개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한 3당의 부인들과 여식들이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다른 여자 대원들과는 달리 조선혁명당 당원으로서 이미 만주에서 5년간의 항일전투 경험이 있었고, 남경에서 추진되었던 전선통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전의 투사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의 대원으로 활동한 오광심 선생과 남편인 김학규 선생, 그리고 서파.

 

그러나 유주도 임시정부가 안주할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1939년 5월에 사천성(四川省) 남부의 기강(綦江), 이어 1940년에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重慶)에 최종적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중국 내지를 전전하면서 자체 무력단체 창설을 준비해왔던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의 임무 수행

1940년 9월 17일 이른 새벽 중경의 가릉빈관(嘉陵濱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가릉빈관은 중경시를 끼고 흐르는 가릉강(嘉陵江) 기슭에 있는 호텔로 연합국의 중경주재 서방 기자들이 활동하던 일종의 프레스센터였다. 이날 행사에는 내외에서 2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총사령부 직원들을 비롯하여 김구∙홍진(洪震)∙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등 임시정부∙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 요인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선생도 이날 광복군 창립식에 김정숙(金貞淑)∙지복영(池復榮)∙조순옥(越順玉) 등의 여군과 사복을 입은 신순호(申順浩)∙민영주(閔泳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직후 선생은 주로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광복군 총사령부는 실제적인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 전방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여자 광복군 대원인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도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부관처장(副官處長) 황학수(黃學秀)를 비롯한 중경의 총사령부 인원은 1940년 11월 17일 중경을 출발하여 동월 29일 서안에 도착하여 시내 이부가(二府街) 4호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선생이 소속된 서안 총사령부의 선전조는 광복군에 대한 홍보와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우선 광복군의 기관지 간행을 준비하였다. 총사령부에는 광복군 기관지 간행을 위하여 정훈처(政訓處)를 두고 조경한을 정훈처장에 임명하고 편집은 김광이 담당하였다. 또한 원고작성과 편집은 선생을 비롯하여 지복영∙조순옥 등 여자 대원이 주로 담당하였다. 준비작업을 거쳐 광복군 기관지는 1941년 2월 1일 자로 [광복(光復)]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광복]은 한국어본과 중국어본의 두 종류로 간행되었다. 중국어본은 현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한국어본은 국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의 이청천∙황학수∙김학규∙이복원∙김광 등이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을 실었다.

 

선생은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 ‘한국(韓國) 여성동지(女性同志)들에게 일언(一言)을 들림’이라는 문장을 게재하였다. 이 문장에는 선생의 항일독립사상과 평등 여권의 실현 방략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선생은 한국여성의 존재를 20억 세계인 가운데 절반이 되는 10억 세계 여성 인구의 구성으로 보고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국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세계 흥망과 민족 존망의 책임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서반아(스페인) 여성들은 자국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남자 못지않게 싸웠으며, 중국여성들도 맹렬하게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실제적인 사례를 밝혔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볼 때에 국망 30년 동안 조국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국내와 만주 및 관내에서 맹렬한 활동을 한 것은 주로 남자 동지들이고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평등과 여권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져야만 하며, 바로 지금 여자들에게 그 기회가 왔음을 강조하였다.

 

 

안휘성 부양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의 모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이처럼 선생은 서안에서 1년 반 동안 [광복] 기관지 간행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선생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는 초모공작(招募工作), 즉 모병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서안에서 제3지대를 편성하였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군무부는 선생으로 하여금 김학규 등과 함께 서안보다 더 전선과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서 초모공작을 할 것을 명하였다. 1942년 2월 제3지대는 처음 징모처(徵募處) 제6분처(第6分處)라는 이름으로 서안에서 머나먼 그렇지만 조국과 가까운 산동반도를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하였다.

 

선생은 부군인 김학규 선생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어, 초모공작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제3지대의 공작지점으로 예정된 산동반도는 화북의 요충지이자 국내와 만주지역의 교포들과 상호연락이 용이한 지점이었다. 산동반도를 향해 서안을 출발한 김학규 일행은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그 중간지점인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정착하고 말았다. 산동반도의 전세가 매우 급하여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제3지대는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 두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부양은 지형상으로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던,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적후에서의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데는 더 없이 유리한 지점이기도 했다.

 

제3지대는 부양 시내 호정원항(胡井院巷)에 ‘한국광복군 초모위원회(韓國光復軍招募委員會)’라는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제3지대에서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의 대원 관리 능력은 매우 세심하고 철저하였다. 새로운 대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선생은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때 광복군에 참여하였던 대원들의 회고에 의하면, 광복군에 투신하였던 대원들은 선생의 자상한 보살핌과 배려에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제3지대의 초기 활동은 지하공작을 통해 적 점령 지구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안휘성을 비롯하여 강소성(江蘇省)∙하남성∙하북성(河北省) 등이 주요 공작지역이었고, 서파(徐波)∙김광산(金光山)∙신규섭(申奎燮)이 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초모공작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모공작이 현저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44년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전개된 지하활동을 통해 적점령지구에 있는 교포 청년들이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배치된 한인 학도병들이 대거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1944년 1월 20일 ‘반도인 학도육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학도병들이 2월 중순경 서주(徐州) 등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들이 연이어 일본군을 탈출한 것이다. 초모된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은 광복군 지하 공작원들을 통해, 또는 중국 국민군 유격대의 협조와 안내를 받아 부양으로 집결하였다. 1944년 9월경에 이르면 그 숫자는 기존의 기간요원들을 포함하여 7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일부는 중경 총사령부로 갈 것을 지망하였고, 남은 일부는 잔류하여 제3지대의 골간이 되었다. 이들은 본부요원과 신입대원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적 점령지역으로 나가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지하공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초모공작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 기념 사진(1945년 6월)

 

제3지대의 초모활동은 군무부에서도 극찬을 할 정도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군무부장은 임시의정원에 대한 보고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제3지대의 인원을 관좌(官佐) 4명, 대원 112명, 사병 3명 등 모두 119명으로 보고하였다. 1944년 11월 한군 광복군훈련반(약칭, 한광반) 출신을 비롯하여 모두 53명을 중경으로 이송한 것까지 포함한다면, 제3지대는 3년여 동안 거의 160여 명의 인원을 초모 확보한 셈이다. 군무부에서 1945년 3월 말 현재 초모공작에 의해 규합한 인원을 339명으로 보고한 것으로 보면, 160여 명을 초모한 제3지대가 광복군 전체에서 규합한 인원의 약 절반을 초모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처음 8명으로 출발한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해방 후 상해에서 교민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다

광복 후 선생은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 진출하였다. 김학규는 상해에 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를 설치하고 판사처 처장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김학규를 도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상해에 모여 있던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데 진력하였다. 선생은 1946년 가을 김학규와 함께 상해에서 만주 심양(沈陽)으로 진출하였다. 선생의 만주행은 1934년 김학규와 함께 농사꾼 부부로 위장하여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지 12년 만이었다. 선생은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심양이 중국공산당의 공세에 함락 위기에 처하던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선생은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 출생
1929년 화흥중학부설 사범과 졸업, 이후 민족교육에 전념
1930년 배달학교 교사, 조선혁명당에 가입
1931년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 근무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무 및 선전사업
1942년 안휘성에서 모병 임무 수행
1946년 만주 심양, 애국부인회 위원장
1948년 4월 조국으로 귀국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김광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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