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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독립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81건

  1. 2010.08.31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2. 2010.08.30 27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정정화
  3. 2010.08.27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학생시절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고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권기옥 선생은 청년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 항공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한 선생은 어린 시절 품었던 비행사의 꿈을 이루며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가로 활동하였다. 결혼 후에도 독립운동가였던 남편 이상정과 함께 독립을 위한 여러 활동에 가담하였던 선생은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숭의여학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

권기옥(權基玉, 1901.1.11~1988.4.19)선생은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권돈각(權敦珏)과 장문명(張文明)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에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날려 선생이 4살 되던 해에는 남의 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 11살 되던 해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돕던 선생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운영하던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선생은 수학 교사 박현숙(朴賢淑)의 권고로 당시 숭의여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으로부터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박현숙의 지휘 아래 한선부(韓善富), 김순복(金順福), 차진희(車鎭姬), 최순덕(崔順德), 김명덕(金明德), 장성심(張聖心) 등과 함께 기숙사의 일본인 사감 호시코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찰리(大察里)의 어느 집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 두었다가 치마 속에 감추어 숭덕(崇德)학교 지하실로 운반하였다. 3월 1일 숭덕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강규찬(姜奎燦) 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김선주(金善柱) 목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곽건응(郭權應)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교정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3월 4일 교사 박현숙이 체포되고 학교 주변에 형사들이 깔린 가운데 선생은 한선부, 김순복 등 20여 명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불렀다. 며칠 후 선생은 이 일로 길을 가다 형사에게 붙잡혀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

  

 

평양청년회 김재덕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체포

유치장에서 풀려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 김정직(金鼎稷), 김순일(金淳一), 김재덕(金在德)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를 잘라 판 돈을 가져오거나 어머니의 패물을 판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김재덕(金在德)으로부터 평양 근교 30리 밖 과수원에 가서 권총을 찾아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생으로부터 그 일을 부탁 받은 선생의 동생 기복(基福)이 권총을 발목에 노끈으로 묶고 그 위에 대님을 맨 다음 자전거를 타고 가져왔고, 선생의 어머니가 김재덕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김재덕이 권총을 시험하다 오발하여 총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선생은 평양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끈질기게 미행하는 형사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유치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물을 먹여 수십 번을 졸도하였다. 일본인 다나까(田中) 형사는 검찰에 송치되는 선생의 심문조서에 “이 여자는 지독해서 도무지 말을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기 바란다”는 쪽지를 곁들여 보냈다. 검찰에서도 혐의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어 집행유예 정도로 그칠 수 있었으나 다나까의 쪽지 때문에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죄목은 제령위반(制令違反)이었는데, 제령이란 일본의 법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된 부분에 대하여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

6개월 형기를 보내고 출옥한 선생은 1920년 8월에 문일민(文一民), 장덕진(張德震) 등으로부터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할 것이니 도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선생은 그들을 만나고 숭현소학교 수위의 도움으로 숭현소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 폭탄을 제조하였다. 며칠 후 평남 도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폭파범은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는 브람스 밴드를 연주하는 전도대가 있었는데, 선생은 이 전도대의 리더인 차광석(車光錫)의 조언을 듣고 한선부, 차순석, 차묘석 등을 구성원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을 조직하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동지들과의 연락을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첫 전도회를 장대현교회에서 열고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자 경찰의 감시가 시작되었고, 선생은 전도대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어 시말서를 쓰곤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 감시가 심해지고, 재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음을 미리 알게 된 선생은 1920년 9월에 발동기 없는 목선을 타고 멸치잡이 배에 숨어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孫貞道) 의장 집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남경(南京)에서 80명의 한국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金圭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의 소개장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홍도(弘道) 여자중학을 찾아갔다. 21살에 다시 시작한 학업은 처음에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2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추천으로 중국의 항공학교 입학

졸업 후 선생은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에 중국의 변방인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항공학교 입학은 선생의 소녀시절의 꿈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16세 되던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의 곡예 비행사인 스미스(A. Smith)가 처음으로 선보인 곡예비행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과학에 대하여 눈뜨게 하였고, 청소년들에게는 창공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갖게 하였다. 선생도 당시 비행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항공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각오를 하였다. 입학 동기로는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등이 있었다.

 

운남육군항공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20대의 비행기에 2명의 프랑스 교관이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맹훈련을 하였다. 선생은 인내를 갖고 열심히 조종술을 익혔고, 기초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끝낸 후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雙葉) 훈련기를 처음 타보았다. 여류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것이 한국 여학생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관헌은 한 한국인 청년을 매수하여 선생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이영무, 장지일 등과 함께 그 청년을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사살하였다. 그 후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길거리 어디서든 선생을 만나면 사살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따라서 그 후 선생은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복무

여성비행사 권기옥을 소개하는 당시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6년 5월 21일자).


1925년 3월에 선생은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26년 5월 21일 <동아일보>는 중국 군민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선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중국창공(中國蒼空)에 조선(朝鮮)의 붕익(鵬翼), 중국하늘을 뎡복하는 조선용사 그 중에서 꼿가튼 녀류용사도 잇서. 안창남(安昌男), 최용덕(崔用德), 여류비행가(女流飛行家) 권기옥(權基玉) 등 국민군(國民軍)에서 활약.” 1927년 8월 28일자 <중외일보>도 선생과 안창남, 최용태, 권태용 등 조선인 비행가들이 중국혁명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게재하였다.

 

선생은 1927년에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북벌(北伐)을 할 때,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과 함께 참여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첫 출전에서 계급이 빨리 올라 소령, 중령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대위가 되었다. 중국의 혁명공군 초창기에 공군을 선정하는 임무를 가졌으며, 기금을 모으고 선전을 위해 중국인 여자 혁명가 한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 중국을 일주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 군인 신분으로 그 군대의 훈련 과정으로 비행과정만을 마쳤기 때문에 비행사로서 자격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한국인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일컬어진다.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 후 함께 활동

1928년 5월에는 남경(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8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와 <중외일보>, 동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와 7월 3일자 <중외일보>에 의하면 선생은 손두환(孫斗煥)과 함께 남경에서 공산당 혐의로 체포되어 원적지로 호송될 뻔하였는데 중국인의 주선으로 상해 일본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후 풀려났다고 한다. 이 해에 선생은 이상정(李相定)과 결혼하였다. 선생과 이상정의 만남은 풍옥상 휘하 군에서 같이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던 이상정은 1926년부터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32년에는 남창(南昌)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정부의 피난 명령에 의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관련자 등 약 90여 명과 함께 11월에 남경을 출발한 선생은 이듬해인 1938년 3월에 중경에 도착하였다. 이후 중경(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영어, 일어와 함께 일본인 식별법, 일본인 성격 등에 대하여 가르쳤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망원경>에는 선생 부부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곤명(昆明)으로 향하였다는 등의 기사가 게재되곤 하였다. 이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맡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상정이 1936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던 것에서 그 활동이 한국이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11월에 행해진 이초생(李初生)의 심문기록을 보면 선생은 임국영(林國英)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애국부인회 재조직 후 사교부장으로 활동

1943년에 선생은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金淳愛), 방순희(方順熙), 최선엽(崔善燁), 최애림(崔愛林), 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한 선생은 한국여성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키고 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43년 2월에 작성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문.

 

 

광복을 맞이한 이후 1948년 8월에 귀국한 선생은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 연감(年鑑)>발행인, 1966년부터 1975년까지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부인회 고문도 맡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하였고, 1977년에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서울 장충동 2가 191의 4의 낡은 목조건물 2층 마루방에서 여생을 보낸 선생은 1988년에 사망하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약력

1919년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 참가
1920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 후 중국군에 근무하며 독립운동 지원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사교부장으로 활동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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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시절을 보살피다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리하여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이 있는 자는 정성으로” 독립운동은 전개되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현 여사는 여자의 몸으로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무찔렀고,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쓰러졌다. 이 밖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독립을 갈구하며 산화하였던 것이다.

 

정정화(鄭靖和, 1900. 8. 3~1991. 11. 2) 선생도 그런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었다. 하지만 선생의 운동 방식은 달랐다.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선생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중경),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의 주된 활동 영역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이것이 바로 선생의 본분이나 다름없었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李東寧), 성재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선생이 있음으로써 위안이 되었고, 나아가 27년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의 역사도 선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시아버지 김가진, 남편 김의한과 함께 떠난 망명길

선생은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귀여움뿐 아니라 두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부친의 완고한 반대로 어깨너머로 밖에 할 수 없었던 공부였지만, 어려서 한학을 익혀 신문 정도는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선생 자신도 “나는 원래 둔한 편은 아니어서 여섯 살 때 이미 두 살 위의 작은 오라버니를 따라 몰래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떼었고, 시집가기 약 1년 전부터는 오라버니를 가르치던 선생님으로부터 다시 글을 배울 기회를 얻어 [소학]까지는 떼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 정도를 읽는 데는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11살이 된 1910년 가을 김가진(金嘉鎭)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하였다.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선생은 세상 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다. 김의한은 1914년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를 선생에게 자주 해주었다. 즉 선생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특히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그 와중에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망명한 사건은 선생의 생애에서 하나의 큰 전기였다. 이를 계기로 선생 또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상해와 국내를 수차례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

서울에서 의주, 봉천, 천진, 남경, 상해까지 연이어 열차를 갈아타면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닿은 것은 1월 중순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하여 재회의 기쁨도 맛보기 전에 선생은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다. 당시 임정 법무총장으로 있던 예관 신규식(申圭植)과 시아버님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0년 3월 초순 상해를 출발하여 국내로 향했다. 국내 잠입 경로는 1919년 7월 시행되어 국내외에 가동되고 있던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 행정 및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따랐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로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상해에서 만주 안동현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편을 이용하였다. 당시 안동에는 우강 최석순이 임정의 연락책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일경으로 위장해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내왕을 도왔는데, 선생은 그의 누이동생을 가장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선생은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가장 유능한 젊은 산부인과 의사였던 신필호는 신규식의 장조카였기 때문에 그 집을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선 것이다.

 

선생은 20일 가량 서울에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뒤, 그 돈을 전대 깊숙이 간직한 채 4월 초 상해로 귀환하였다. 첫 번째 독립운동 자금 조달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어 1921년 늦은 봄 두 번째로 국내에 밀파됐는데, 그 출발 동기 자체가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있었다. 선생은 국내에 들어와 곧바로 예산의 친정 집으로 내려가 친정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런 다음 개성을 거쳐 우사 김규식의 이질(姨姪)인 서재현을 대동하고 상해로 귀환함으로써 두 번째 임무도 완수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6월 중순 선생은 세 번째로 국내로 밀파되었다. 이번 국내 잠입의 목적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해에서 배편으로 산동반도의 청도를 거쳐 안동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동행인 이욱(李昱)이 워낙 자신 있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열차가 아니라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러다가 선생 일행은 압록강 철교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결국 신의주 경찰서로 끌려 가 이틀 동안 심문을 받은 끝에 신분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국 광복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망명하였던 김가진이 1922년 7월 4일 불귀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시동생 김용한을 대동하고 다시 상해로 갔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임정요원들을 위해 헌신

선생은 그 해 10월 다시 한번 네 번째로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7월 상해로 귀환하였다. 1924년 12월에도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로 잠입한 뒤, 이듬해 6월까지 약 6개월간 주로 예산의 친정 집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 시기 임정은 그야말로 간판만 있는 형세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정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 동포들의 임정에 대한 재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임정은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사면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의 외면으로 정부 조각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근근이 임정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선생은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도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할 때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면서 찾아오곤 하였다. 가장 어렵고 배고팠던 시기를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같이 보냈던 것이다.

 

3.1 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 사진(1941년 10월 10일, 중국 중경). 뒷줄 맨 오른쪽이 정정화 선생.

 

 

그리고 서른 살이 되던 해인 1929년 7월 선생은 10년 전 망명길에 오른 후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고, 이후 1년 6개월간 국내에서 체류하기도 하였다. 1931년 초 선생은 다시 상해로 망명하면서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직후부터 주변 정세가 변화하였고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931년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요인이었다. 7월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간에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이간책과 악선전으로 국내 각 도시에서 중국인들을 습격 살해하는 일이 빈발하였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중국인들이 귀국하였고, 그로 인해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행위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감행된 일제의 만주침략도 독립운동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이 일제의 힘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렵게 된 것이다.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나 한·중 양 민족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 사변 이후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한·중 양민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말 임정의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김구가 그 단장을 맡았던 것이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는 한인애국단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이들 의거로 말미암아 한·중 양민간의 갈등과 대립은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여러 해 동안 상해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었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상해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상태에서 윤봉길 의거가 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승전 축하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윤봉길 의거는 이제 더 이상 프랑스 조계 당국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즉시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하였던 것이다.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

5월 1일 선생 가족은 상해를 떠나 기차 편으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선생은 석오 이동녕 등 임정요인들을 모시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한때 신강성 성장을 지낸 임긍(林兢)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임긍은 선생의 남편인 김의한을 전원공서에 취직시켰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행정 관리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가족은 1934년 봄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豊城縣)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가족은 1년쯤 있다가 다시 무령현(武寧縣)으로 이주하여 3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1935년 11월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하였다. “내가 독립운동 단체에 적(籍)을 두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라는 말처럼 선생이 공식적으로 처음 가입한 단체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침략을 감행하자, 독립운동계에서는 항일투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의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여 갔다. 나아가 이 동맹은 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폐지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임시정부사수를 주장하던 김구, 이동녕, 조성환, 조완구 등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적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또한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자 독립운동 정당으로써 아래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다.

 

1.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 집결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4.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5.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6.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임정요원들의 부상을 돌보고 임종을 지켰던 선생

1938년 2월 선생의 가족은 강서성 무령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가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하였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서 선생의 역할은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결성이었다.

 

이 같은 좌우익의 분열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때문에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통합논의를 위해 우익 3당의 대표들이 1938년 5월 6일 남목청(楠木廳)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던 중 비극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운환(李雲煥)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백범이 맨 먼저 가슴에 총을 맞았고,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등이 잇따라 총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그로 인해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백범과 춘교는 상아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이때에도 이들의 뒷바라지는 선생의 몫이었다.

 

특히 1938년 9월 초, 광주시에 연락처만 남겨놓은 채 대부분의 임정 식구들이 그곳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불산으로 옮겨갔는데, 이때부터 임정의 안살림은 선생이 도맡게 되었다. 이후 광서성 유주와 귀주성 귀양을 거쳐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현에 도착한 1939년 4월말에 이르러서도 선생의 안주인 역할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 3월 임정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이동녕이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한국애국부인회의 집행부 일원으로 활동

한편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활동기반을 갖추어 갔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중경)을 창당하고, 9월에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이때 선생 또한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기강에서 창립될 때, 선생은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임정의 안주인으로 1941년 1월 기강에서 중경 근처의 토교로 임정 가족들이 이사할 때, 이를 주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오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성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훈련부 주임, 김순애는 주석,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ㆍ김운택ㆍ연미당ㆍ강영파ㆍ권기옥 등이 각 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이 집행부의 일원을 맡은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다. 그런 다음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 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년 6월 17일).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선생.

 

 

광복 후 김구 선생과 한국독립당 신(新)국가 건설 노선 지지

그러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선생은 8․15광복을 토교에서 맞이하였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에서 20여일 지체한 후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뒤에도 토교에 남아 12월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하순 상해로 갔다. 그 뒤 5월 9일 선생 일행은 상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LST라는 수송선을 타고 사흘 만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환국 이후 선생은 일체의 정치 활동을 피하였다. 하지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전개하던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신(新)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부통령에 취임한 성재 이시영이 선생을 사정기관인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으로 추천하였지만 취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약력

1920 중국으로 망명, 1차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
1920~1930 독립운동자금 모집 임정에 전달
1940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
1943 한국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으로 활동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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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민족의식을 함양

유관순(柳寬順) 선생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柳重權), 모친은 이소제(李少梯)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선생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8년 봄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의 발판 마련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과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인 이승훈(李昇薰), 양전백(梁甸伯)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 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게 된다.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3.1운동의 시작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학생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 시위에 참가

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갔다. 이로써 선생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 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유관순 열사의 연설로 더욱 고취된 만세 운동의 열기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의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 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중 부친과 모친을 눈 앞에서 모두 잃어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육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게 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됨에 따라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복심법원 판결문.

약력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 참여
            충남 천안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
            옥중에서 만세 항쟁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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