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946,877
  • Today | 743
  • Yesterday | 2,998

“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不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순국 당시 선생의 유언 중-

 

 

식년문과 급제 후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

 

 

선비가 불의와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처신하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불의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거의론(擧義論)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며 도(道)를 지키는 거수론(去守論)이요, 마지막 하나는 목숨을 바쳐 불의에 저항하는 치명론(致命論)이다. 한말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거의론은 의병항쟁으로, 거수론은 전통 한학의 전수를 통한 민족교육운동으로, 치명론은 의열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의열투쟁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침략자와 그 앞잡이를 처단하거나, 침략 행위에 대해 항거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독립운동 방략을 말한다. 국망의 위기 속에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한국 병탄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홍범식, 황현, 김도현, 이만도김석진, 송병순, 그리고 장태수(張泰秀, 1841. 12. 24~1910. 11. 27)선생의 의열투쟁도 그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하였고, 그럼으로써 의열투쟁은 물론 구국운동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장태수 선생은 1841년 12월 24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서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인동,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남강거사(南岡居士)이다. 부친은 장한두(張漢斗)로 첨중추(僉中樞)를 지냈다. 1861년 선생은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선생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한학의 수준도 매우 높았던 것 같다. 과거 급제 후 선생은 외교문서를 작성, 보관하던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이후 선생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령, 예조정랑 등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그리고 1867년에는 목민관인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민생안정에 힘쓰고, 부국양병에 주력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한 공이 있었다. 이 같은 공덕으로 통정대부에 오른 선생은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개성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선생은 병조참의, 동부승지, 춘추관 수찬관을 지내는 등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외직인 고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선생을 고산 현감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칙지(1984년).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에 항거하여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

그 해 6월 21일 일제는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곧 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여 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反)외세, 반(反)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한국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봉쇄하고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을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따라서 개항 이후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양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승전의 도취감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할양 받은 요동(遼東)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같은 일제의 위약성을 간파한 민씨세력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이이제이식(以夷制夷式)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여 갔다. 이에 일제는 지속적인 자국 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1895년 8월 20일 반일의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뒤따라 일제가 친일 김홍집 내각을 사주하여 그해 11월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이에 항거하여 선생은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스스로 남강거사를 칭하며 은거하였다.

 

 

관직 복귀 후 목도한 경술국치, 또 다시 낙향

그러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 일제가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여 가자 선생은 다시 관계로 나갔다. 조정에서 복귀에 대한 여러 번의 권유도 있었지만, 국망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는 선생의 의지가 작용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원 부경이 되었고, 종묘와 사직을 보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선생의 시문집을 필사하여 엮은 일유재고(一逌齋稿)


그러나 1905년 11월,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대신들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리게 된다. 그리고 중추원 의관으로 전임되어서도 ‘을사5적’의 처단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이완용 매국 내각의 책동으로 경술국치의 비극을 당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犬馬猶能懷主德 賊臣何忍賣君欺)”

경술국치 후 선생은 통곡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하였다. 또한 의관을 정제하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이 지냈다고 한다.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단식 순국하다

당시 일제는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것을 수여하여 한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회유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획책하였다. 선생에게도 일제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고 호통하여 쫓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헌병이 찾아와 위협하며 은사금 받기를 강권하였지만, 선생은 끝내 항거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말과 함께 곡기를 끊고 단식을 결행하였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不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이 말에는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던 선비가 그것을 모두 잃었다고 하는 자괴감과 일제에 대한 분노가 잘 드러나 보인다. 결국 선생은 단식 24일만인, 1910년 11월 27일 순국하고 말았다. 단식 순국을 통해 선생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선비로서 충과 효를 다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위치한 남강정사(南崗精舍).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여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약력

1867~1895 양산군수, 동부승지 등 역임
1910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했던 선생은 일제강점 이후 궁궐에서 나와 근대교육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3.1 운동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을 때 이들을 간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는 어려운 생계와 양육 문제를 홀로 해결하면서 신채호 선생의 독립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궁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은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인 부친이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10년 간을 궁궐에서 보낸 선생은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다.

 

선생이 이러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해서였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는 ‘황실령 제34호’로 ‘이왕직관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을 해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궁녀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고, 함께 나인 견습생 생활을 한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선생은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다녔다. 그가 이곳에 입학한 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자립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교사와 의료인을 제외하고 직조업, 바느질 품, 마전장사, 유모, 양잠, 홍삼직공, 수놓는 직공, 굴 따는 여자, 기생, 쌀 고르기, 여고원, 연초직공, 광주리장사, 음식장사, 아이돌보기, 길삼, 수모 등이었다. 이러한 직업은 대우가 좋지 못했다. 궁녀라는 것은 전통시대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선생도 궁녀라는 직업을 가졌다가 해고당한 뒤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산파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여성에게 괜찮은 편에 속했다. 나중에 조산원을 개원할 수도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간이 생리학, 간이 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운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하였다.

  

 

간우회 조직과 3.1만세운동의 참여

선생이 3년여 이상을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서는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은 3개월 이상 전개되었고.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생을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익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과에는 김영오가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선생도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간우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의사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선생과 뜻을 같이한 간호사들과 함께 3월 10일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경에게 체포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지고 유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덕분에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두기로 한다.

 

선생은 만주에 있는 지인을 찾아갈 요량으로 병원에는 2주간의 휴가를 내놓고 서울역으로 가서 봉천행열차를 탔다. 그는 봉천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석운 우응규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여 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 있는 인사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 통과 노자를 마련해주었다. 선생은 즉시 봉천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신채호와의 만남과 의열단 활동

남편 신채호 선생.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난 것은 북경에서 생활한지 약 1년이 지난 1920년 봄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당시 우당 이회영의 부름으로 북경에 막 도착하였는데,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둘을 중매해 준 것이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한 뒤 10년간을 독신으로 지냈던 신채호 선생과 당시 24살이었던 박자혜 선생은 이렇게 해서 함께 북경 금시방가(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21년 음력 1월 선생은 첫 아들 수범을 출산하였다. 신채호 선생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는 약간의 원고료와 후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항상 하는 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1922년 선생이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신채호 선생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 때 선생은 5개월 된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 두 번 째 아들은 국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둘째 아들 두범은 1927년에 출생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남편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가족들이 국내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지내는 동안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능한 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탄사건 때에도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선생이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힘겨운 삶

선생은 당시에 많은 독립운동가 아내들처럼 남편의 독립활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보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이 전부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의 산파업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당시에는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찾아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달이 가도 손님 한 사람 찾아오지 않아 선생 집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 중 4, 5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끼니를 못 때우는 날이 많아 대련의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신채호 선생이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 중에도 선생은 아들 수범의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겨우 구입해서 교동 보통학교에 보냈다. 아들도 거의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 같은 환경에서 선생은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대련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신채호 선생이 너무 추워 선생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해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선생이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솜옷 하나 해줄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매달 육원 오십전 하는 방 한 칸의 월세마저도 제때 못 내어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살았다. 

 

산파업이 제대로 안 되어 선생은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동아일보>에서는 선생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전국에서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그리고 1929년에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선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사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선생은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큰 아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자혜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보인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자)

 

 

1943년 홀로 셋방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다

선생이 신채호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선생과 아들은 3, 4일에 걸쳐 북경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채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세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하지만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8년 4월경 신채호 선생은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대만 기륭항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였지만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석방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아들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선생은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남편 신채호 선생을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였다. 선생은 24일 ‘노조마열차’로 남편의 유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서춘, 안재홍, 김형원, 박돈서, 신상우,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이대위, 김약수, 현동완, 주익, 유진태, 서정희, 김동완 등이었다. 이중에 원세훈은 청주군 남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250원, 송진우 50원, 여운형 50원, 조선일보 방응보 20원, 삼천리사 김동완 1,000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박자혜 선생은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남편의 석방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선생에게 남편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실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 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선생의 [절명시] 중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선생에게 사사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2. 11 ~ 1910. 9. 10)선생은 장수 황씨 황시묵을 아버지로, 풍천 노씨를 어머니로 하여 세도 정치기가 한창인 1855년(철종 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卿)이다. 선생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황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여 그는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를 스승으로 하여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왕석보는 1816년에 태어나 1868년 사망한 학자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황현 선생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이 유명하다.



 
 

 

선생은 후일 스승에 대하여 평하기를, “호남 동쪽에 봉성현이 있는데 전 성 중에 탄환만한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선생이 나온 이후로 전 성이 봉성을 시향(詩鄕)으로 추켜 올렸다.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시파(詩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사 같은 분이야말로 한 지방의 풍기(風氣)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라 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역사서 저술에 몰두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를 보았다.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그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부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선생은 이후 처사형 선비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황현은 거듭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선생의 동생 황원은 “평생 문학적인 사귐은 영재, 창강 두 분이 제일이었지만 영재에게 더욱 쏠리어 꿈에도 1년에 늘 수십 번을 만났다. 늙어서는 조금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내 평소에 선생의 문장을 좋아하였다”고 하면서 “아! 조선조의 문장은 선생에 이르러 볼 만한 것이 그쳤다”라 하여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서적도 탐독하였다. 그는 다산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선생은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16년 여 살면서 선생은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 데 몰두하였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이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특히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이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순국지사들을 애도하다

선생은 1902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다. 조병세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1906년 작성한 다른 시에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인사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풍자하였다. 반면, 같은 해 민영환을 추모하는 [혈죽(血竹)]이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영환의 숭고한 생애와 혈죽으로 환생하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후손들에게 나라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하다

선생의 시문집인 [매천시집]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자 목숨을 끊으며 남긴 절명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의연금을 모집하여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한 적도 있었다. 이후 중국에 망명했던 친구 김택영이 잠시 서울에 돌아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1909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입도(入都)]라는 시에서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였다. “남산에 올라 한 번 굽어 본 서울 땅/보는 것마다 더욱 처량하고 혼미해라/큰 거리는 수레바퀴로 가을 먼지만 그득하고/두 대궐은 침침해서 대낮도 짧은 듯하다/폐백으로 맹세했던 벼슬아치들 잘 못 되어가고/서울거리 탈이 없지만 판국이 벌써 글렀구나/예전에 망한 나라가 다 이 모양이었던가/망한 것이 분명하니 슬플 수도 없구나.”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서울로 보이겠지만 그 뒷모습에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이 보였기에, 선생은 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죽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동생 황원(黃瑗)에게 한 말]에서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 하여 이미 자신이 순국을 결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더 이상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위로는 상도(常道)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결국 그가 우려한 바대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게 되었다. 그는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고,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생은 [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서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라 하였다. 결국 황현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선생의 절명시.

선생의 시에서 언급한 윤곡은 몽고 침입 때 자결한 사람이고, 진동은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무장투쟁 내지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스스로 죽어감을 아쉬워하였던 것이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선생의 자결을 애도하였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899 언사소를 올려 국정개혁을 주장
1905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애국시 발표
1910 한일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

 

 

 

  조재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연구과장)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영웅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6월 호국보훈의 달 감사댓글 이벤트, '호국보훈의 달, 한 방에 정리!'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강화, ‘국가유공자 사망시 대통령 명의의 근조기를 증정합니다’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에서, 한훈 선생과 광복단 결사대의 투신을 알아보다
'호국보훈의 달', 기억하고 감사하고 추모하는 6월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