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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독립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59건

  1. 2009.05.20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모 김마리아
  2. 2009.05.19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김원봉, 우린 왜 모르지?
  3. 2009.05.19 독립협회 [獨立協會]

애국 부인회·여전도회 등 국내외 여성운동 이끌어

성경적 국가관·미래상 고취, 신사참배 거부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할 이유가 있소?"

 

1919년, 모진 고문과 핍박 속에서도 취조하는 일제 경찰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여성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사진), 그는 여성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한 선구자였고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서 근대교육 받아

 

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마을 대지주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한글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서상륜·서경조 형제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소래교회)가 설립된 곳이었다.

 

마리아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개화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는 임종하는 순간에도 딸의 교육을 부탁했다. 소래학교 시절 마리아는 남복을 입고 하인들이 베는 보교(步轎)를 타고 등·하교했으며 졸업할 때까지 줄곧 모범학생으로 우등을 했다. 매사에 신중을 기하며 사내 같은 포부를 지녔던 그는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서구적 근대교육과 기독교적 인생관을 교육받았다.

 

정신여학교를 다닐 때는 안창호 김규힉과 절친한 숙부 김필순과 고모 김순애의 영향을 받아 남다른 민족의식을 형성했는데, 작문시간에 그는 항일적은 글을 곧잘 써서 당시 일본의 탄압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마리아는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기숙사 21호 독방을 썼는데 틈만나면 기도실에 가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어 모세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보내주시고 하루 속히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일본 유학시절 2·8독립선언 준비

 

마리아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재일본유학생들이 추진하고 있던 2·8독립선언 등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였다. 루이스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유학을 떠난 그는 1916년 고모 김필례가 재학중인 동경의 여자학원 대학부 영문과에 들어갔다.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있기는 했으나 국내와 같지는 않았으므로, 유학생들은 비교적 자유로이 구국독립에 대한 연설과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재미동포 이승만 등 민족대표 3인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을 그들은 민족 전체의 의사를 표시할 거족적인 일대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2·8독립선언운동을 치밀하게 준비해갔다. 그곳에는 동경여자 유학생친목회장으로 활동했던 마리아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을 단 한 명도 없었다. 마리아는 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독립 거사에 참여할 수 없는지를 몇 번이고 자신에게 되물었고 항일독립운동에서의 부녀자들의 참여확대 문제를 더욱 절실히 생각하게 되었다.

 

졸업을 눈앞에 둔 마리아는 독립운동을 국내로 확대시키기 위해 독립선언문을 기모노의 허리띠에 숨겨 1919년 2월 중순경 귀국했다. 그때까지 여자 유학생에 대한 일제 경찰의 감시가 느슨했기에 그는 "여성들이 단체를 만들어 남자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남자단체의 활동이 어려울 때는 여자단체가 대신하자"고 주장했다.

 

부산에 도착한 마리아는 학교와 교회, 여성계 인산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의 때가 왔음을 알리고 그때 함께 궐기하도록 당부했다. 지방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을 고취하던 그는 황해도 봉산에서 3·1운동 발발의 소식을 듣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3월 5일 정신여학교 기숙하에서 곧바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둑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대로 다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하고 생각했어."

 

고문 후 독방에 갇힌 그는 성경을 외우고 하나님께 조국독립을 호소하는 기도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올렸다. 특히 국민의 절반이 되는 여자들이 국민 된 의무와 권리를 자각하게 해 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 그럴 수록 마리아에게는 기울어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여야 할 책임감이 가슴 깊은 데서부터 끓어올랐고, 구약 성경 시편 23편은 외로운 감옥생활에서도 주께서 항상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독립운동가

 

"우리는 지금까지 독립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껏 독립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더욱 더 노력해야 합니다."

 

6개월 동안 갖은 고문을 당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마리아는 출감 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19년 9월 19일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20여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비밀로 결성했다.

 

"옛말에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 사랑하듯 하라 하였거니와… 국민 모두가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아,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

 

전국적인 항일여성조직으로 확대된 애국부인회는 국내를 두루 돌아다니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며 구국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동지의 배반으로 그해 11월 일제경찰의 검거망에 걸려들었고 마리아는 다시 투옥되고 말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대의원, 국민대표회의 여성계 대표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많은 날을 별으로 고통하며 지냈다. 그러나 민족지도자로서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 더 큰 배움이 필요했던 마리아는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도 교포들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지역들을 돌면서 독립운동의 상황을 자세히 알리고 교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0여 년간 시카고대 콜롬비아대 뉴욕신학원 등에서 사회학, 교육행정학, 종교교육학을 공부했고 뜻밖에 만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다시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했다.

 

1932년 7월, 40세의 나이로 그리던 조국에 온 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교육 양성하던 중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제 7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상을 통탄하면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통해 조국애와 민족애를 심어 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의 좋은 날을 바라보게 했다.

 

일제가 모든 공식적인 모임에서 국민의례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그가 이끄는 여전도회는 공식적 모임을 회피함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강건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집요한 총독부의 공작과 회유 등으로 흔들리기 마련이었지만 그는 눈을 감을 때까지 오직 한 길만을 생각했고, 마침내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어진 병고로 조국광복을 1년 앞둔 1944 3월, 52년간의 일생을 마치고 영면했다. 그가 떠나자 도산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국 일념 미혼으로 수저 한벌로 마쳐

 

 

김마리아는 규모 있고 정돈되며 분명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양녀 배학복 여사는 "선생님은 6시 반에 아침, 12시 반에 점심, 5시 반에 저녁 식사를 어기지 않고 하셨다."면서 "모든 일에는 성심을 다했는데 특히 성경강의를 할 때는 주제가 같아도 그 내용은 매번 새로이 연구해서 꼭 새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연옥 회장은 "김마리아 선생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았던 뿌리는 바로 깊은 신앙심이었다."며 "그의 삶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올바른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오늘날 새삼 일깨워 준다." 고 말해ㅔㅆ다.

 

조국이 암울했던 시절 갸냘픈 여성의 몸으로 결혼도 뒤로 미룬 채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살다간 열사(烈士) 김마리아. 그가 남긴 유품은 오로지 수저 한 벌이지만 그의 위대한 정신은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영원한 횃불로 남아 지금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신문영기자

 

 

 

 

 

 

 

재판관 : 너는 조선의 독립을 언제부터 생각해왔나.

김마리아 :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재판관 :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김마리아 : 세상이란 모두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도 또한 남녀가 협력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재판관 : 어째서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김마리아 : 나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것이다.

 

재판관 : 한일 합방과 일본의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김마리아 : 조선은 결코 일본에게 합병된 것이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은 마치 독일이 그들의 속지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야말로 정의와 인도에 반하는 것이다.

 

재판관 :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었나.

김마리아 : 첫째는, 조선의 행복을 위하는것. 조선과 일본은 역사와 풍속, 언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일본에 동화할 수 없고, 우리의 고종황제와 일반국민은 전혀 합병을 원하지 않았고 장래의 독립을 위해서 남녀노소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지금의 고통을 견디어 왔다.

 

둘째는, 일본의 행복을 위한 것. 우리 만족은 일본의 지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어떤 압제를 가하더라도 끝까지 반항할 것이며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셋째는, 세계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두 나라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동안은 동양의 평화는 있을 수 없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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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좌)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우)
<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1898~1958?)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직책들이다. 묵직한 그의 직위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열정과 투지가 묻어 나온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맞춰 그의 평전이 나왔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최근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을 펴낸 것.

 

김 관장은 평전에서 김원봉 선생 앞에 접두사 같은 몇 가지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대표적 혁명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운'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등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중국 관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우파의 백범 김구 선생과 좌파의 김원봉 선생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김원봉 선생이 낯선 이유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기만 한 것일까? 평전은 이 같은 의문을 추적한다. 우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항일투쟁의 업적'을 확인시킨다.

 

그가 선택한 독립운동 방법은 '폭렬투쟁(暴烈鬪爭)'이다. '자유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1920~30년대 민족운동단체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가장 긴 활동단체로 기록된다. 그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에 감격하면서도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정신으로 전개된 데 대해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훗날 신채호 선생도 김원봉 선생의 간청으로 쓴 <조선의열단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 한다면서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외국, 심지어 적국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세력'을 성토하기도 했다.

 

이는 김원봉 선생이 폭력투쟁과 무력항쟁, 유격전 등을 벌이는 의열단을 조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위임통치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된 폭렬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아도 독립이 올까?

 

이후 의열단은 폭탄 국내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

찰서 폭파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조선식산 은행 습격 의거 등 항일운동에 큰 행적을 남겼다. 일제에게 의열단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제에게 의열단은 끔찍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중략) …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의 창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조선의용대는 나라가 망한 뒤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혁명가들 조차 '조선의용대를 학습하자'는 글을 게재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전을 지원하고 일본혁명가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는 일본 혁명 투쟁운동 역사상 유례 없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조선의용대 창설일, 고딕체로 기록해야" 

 

김 관장은 평전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1938년 10월 10일과 관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고딕체로 기록되어야 할 날"이라며 "근현대사 교과서나 대부분 독립운동사 자료에 이 날이

기록돼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라고 지적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 공산당인 연안 쪽으로 넘어간 이후였지만 이는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간 대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아 싸우다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그를 소외시켰고 귀국 또한 김구 주석 등 다른 임시정부요인 15명 보다 열흘 가까이 늦게 2진으로 들어왔다. 이는 1진의 탑승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일자 김원봉 선생이 스스로 2진으로 양보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1진으로 도착한 '김구=임정'이라는 등식을 구축하게 했다. '민혁당과 김원봉'은 자연스럽게 가려져 임정 내 2인자임에도 당시 4인자로 소개됐다.

 

김원봉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미군정에 협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했다.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한 이유

 

하지만 그는 정작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과 대면했다. 1947년,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피체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그는 "내가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며 통곡했다 한다. 

 

가시나무를 심고 계수나무를 뽑는다(樹楱拔柱)

봉황새를 가두고 닭 따위를 귀히 여긴다(水鳳寵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해 조선인민공화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꾀했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화되자 북한에 남아 초대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하지만 이 때문에 6·25 한국전쟁에서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죽게 되는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선생은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후 이듬해 9월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졌다. 김 관장은 그의 숙청설과 은퇴설· 자살설 중 숙청설에 무게를 실었다. 저자는 외세의 간섭 없는 중세중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납북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모으다 처형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인이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해방 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던 김원봉 선생.

 

평전의 끝자락에서 김 관장은 독자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그가 저승에서라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 관장은 답변대신 마지막 글귀를 이렇게 적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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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獨立協會]

2009.05.19 13:49
출처 카페 > 대한민국을 지킨 진정한 스타.. | 독립영웅
원문 http://cafe.naver.com/bohunstar/4462

189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정치단체.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에 의해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창립과 발전과정〕

 

(1) 독립협회의 창립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해 민주주의와 근대 문명을 익혔다.

의사생활을 하고 있던 중,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반역죄가 사면되고 개화정부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서재필은 조국에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포부를 안고 11년 만에 환국하였다.

서재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으로 민중을 계발하고자 하였다. 자각된 민중의 힘으로 조국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서재필이 같은 목적에서 창간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 창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주독립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강령을 내걸었다. 구미파의 총본산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 갑오개혁의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建陽協會) 세력, 자주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급 중견관료층 세력 등, 당시 형성되고 있던 각계각층의 신흥 사회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신지식층이었다. 개항 이래로 해외 시찰·해외 유학·신교육·신문과 서적 등을 통해, 근대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 체계를 가진 신지식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근대시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구적 지식층과 동도서기사상(東道西器思想)에서 발전한 개신유학적 지식층으로 구분된다.

다른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시민층이었다. 이 무렵 시전(市廛) 상인은 근대 상인으로 개편되어갔다. 또 각종 상회와 회사가 출현하면서 시민층이 대두, 성장해갔다. 이 시민층은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고,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농민층도 19세기 이래로 거듭되어온 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반봉건·반침략의식이 강화되어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를 이루었다. 또한 광산이 개발되고 개항장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광산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등 임금 노동자들이 열강의 경제적 침탈을 체험하면서 저항의식이 높아져 또 다른 신흥 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신흥 사회세력 가운데 독립협회의 지도적 구실을 담당한 것은 신지식층이었다. 서구 시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재필·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 등이 최고 지도층을 이루었고, 개신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남궁 억(南宮檍)·정교(鄭喬) 등이 중간 간부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대변지인 ≪독립신문≫·≪독립협회회보≫·≪황성신문≫, 그리고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을 계몽, 포용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가며 독립협회를 민중단체로 발전시켜 나갔다.

 

(2) 독립협회운동의 발전과정 독립협회운동은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의 창립으로부터 토론회를 개최하기 이전인 1897년 8월 28일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창립사업기 또는 고급관료 주도기이다.

서재필의 지도 아래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조성 등 창립사업에 주력하던 시기이다. 자주독립의 기념물 건립을 위한 창립사업은 커다란 공감을 일으켰다. 독립협회는 사회 일반의 참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짧은 기간에 거대한 사회단체로 부각되었다.

1896년 말에는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일반민중 회원은 아직 표면에 나서지 못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와 보수파 고급관료의 주도 하에 있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고급관료의 사교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정기적인 토론회를 시작한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구국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로, 민중계몽기 또는 민중진출기이다.

서재필·윤치호의 지도 아래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 회원들에게 효과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과 민주적인 행동 성향을 체득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을 새로운 지식과 교양으로 적극 계몽하여, 독립협회 안에 민중의 진출이 뚜렷해진 시기이다.

특히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7년 말기에는 독립협회 토론회와 ≪독립신문≫은 러시아인 재정고문 고용문제와 관련해 보수파 정권의 외세의존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보수적 관료층은 독립협회에서 점차 이탈하게 되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 관료들과 재야·신지식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전환되어갔다. 또한 직제도 크게 개편되었다. 위원장제를 없애고 회장·부회장·서기·회계·제의(提議) 등 상설 직제를 두고, 상임집행부의 기구와 권한을 강화하여 바로 회중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는 운동의 제1기와 제2기를 통해 창립사업과정에서 민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그 표현기관인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 등 언론과 출판 활동으로 여론 조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협성회·광무협회같은 학생단체에 의한 대중동원 체제를 확보했으며, 토론회·강연회를 활성화하여 국권·민권·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단계의 민중의 정치운동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민중 계몽·민력 조성·민력 단합의 길을 닦아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 두 시기의 독립협회는 사회계몽단체 또는 관민합동의 애국단체였다고 하겠다.

제3기는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 21일부터 김홍륙독다사건(金鴻陸毒茶事件) 이전인 그 해 9월 10일까지로, 민중운동기 또는 민중주도기이다.

구국운동을 선언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독립협회가 민중의 정치활동을 통해 민의를 국가 정책에 반영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외세의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민중의 힘으로 배제하려는 국익·국권·국토 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등 인권을 보장하려는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민권의 신장과 국권의 강화를 위해 관민의 합력기구로서 의회 설립을 추구한 국민참정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관료층이 대거 퇴진하고 재야인사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임원진도 개편되어 회장에 이완용(전라도관찰사로 전임), 부회장 겸 회장 대리에 윤치호, 서기에 남궁 억, 회계에 이상재·윤효정(尹孝定), 제의에 정교·양홍묵(梁弘默)·이건호(李建鎬), 사법위원에 안영수(安寧洙)·강화석(姜華錫)·홍긍섭(洪肯燮) 등 개혁파 중심 체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권·민권 운동의 담당 세력도 만민공동회를 계기로 독립협회 회원 중심에서 민중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었다. 집요한 민중운동은 정부와의 대립 의식을 발생시켜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 당시의 독립협회는 정치집단으로서 재야정치세력의 선도적 구실을 담당했으나,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민권을 쟁취하려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부와 협력하여 외세를 막고 관인을 깨우쳐 민권을 보호하려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 때에 앞서의 협성회와 광무협회 외에도 공주의 독립협회, 인천의 박문협회(博文協會)·찬양회(贊襄會)·보민협회(保民協會)·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 등 다수의 독립협회 지지단체들이 설립되었고, 독립협회의 반대세력인 황국협회(皇國協會)도 등장하였다.

제4기는 김홍륙독다사건이 발생된 1898년 9월 11일부터 민회 금압령이 내려진 그 해 12월 25일까지로, 민중투쟁기 또는 민권투쟁기이다.

독립협회·황국중앙총상회·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이 김홍륙 일당의 고종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국왕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쟁취하고 입헌대의정치를 추구했던 관권 대 민권의 투쟁기였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민중과 더불어 ①보수내각을 붕괴시키고 진보내각을 구성하도록 했으며, ②언론·집회 자유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열어 인민헌의안(人民獻議案)을 수락하게 하였고, ③민선의회(民選議會)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관제를 공포케 하여 인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하는 등 민권투쟁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공화제 추진설을 거짓 유포한 보수파의 반동적인 익명서 사건(匿名書事件)으로, 개혁내각이 붕괴되고 의회 설립운동이 좌절되면서 민중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졌다.

이에 국왕이 개혁정치의 실천을 약속했으나 그 실천이 지연되어 민중의 국왕에 대한 불신감도 생겼다. 따라서 만민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극한 투쟁을 벌여 자못 혁명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재야인사 중 소장층의 강경파가 행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임원진도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 서기에 박치훈·한만용(韓晩容), 회계에 이일상, 사법위원에 남궁 억·정교, 그리고 평의원 20명 등으로 구성되어, 민중을 대변하는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 때에는 종로 인화문 앞, 각 부 문전 등 옥외가 주된 활동무대였고, 독립관과 광통교 사무실은 옥외 투쟁의 기획실처럼 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4,000여명의 회원과 전국적인 지회, 각종의 민권단체와 수많은 민중의 열띤 지지와 호응을 받은 전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공인되었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압력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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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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