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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독립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49건

  1. 2009.02.13 1920년대 일제 통치-문화정치
  2. 2009.02.13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2
  3. 2009.02.13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3

3·1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1)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대응 일제는 한국민족의 전민족적 3·1운동에 의하여 큰 타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대책에 부심하였다. 3·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다음 세가지 방향의 변동을 보였다.

 

첫째는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정책을 통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전선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일제의 문화정치의 내용은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총독을 임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文官)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론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한국에서 쫓겨날 때까지 총독을 단 한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또한, 1920년에 ≪조선일보≫(3월 5일), ≪동아일보≫(4월 1일), ≪시사신보≫(친일신문, 4월 1일)의 창간을 허가하였으나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검열은 매우 심하였는데, 삭제·압수·과료처분·정간·폐간 등의 탄압이 극심하여 매월 평균 5, 6건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한 것도 친일파와 자치운동파를 육성하여 종래 완전독립·절대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절대독립의 독립운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둘째는 경찰관의 수를 대폭증가시키고 독립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이것은 제복과 제도만을 형식상 바꾼 것이고 여전히 헌병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보통경찰관이 되도록 하였으며, 경찰관서의 수는 1911년 1,602개소(헌병주재소 포함)에서 1920년에는 2,761개소로 격증하고, 경찰관의 수도 1911년 1만3971명(헌병 포함)에서 1920년에는 1만8400명으로 격증하였다.

 

일제는 극악한 무단탄압 밑에서도 한국민족이 맨손으로도 3·1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하고 한국민족을 내심으로 두려워하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1920년 10∼12월의 간도일대의 한국인 1만여명에 대한 학살(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과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때 2만여명의 재일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와 지식인·학생들에 대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는 식량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공업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조선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일제의 이 정책은 목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미곡생산량이 1920년 1270만석에서 1928년에는 1730만석으로 36.2%밖에 증가하지 않았으나, 일본으로의 미곡의 수탈량은 1920년 185만석에서 1928년에는 742만석으로 301.1%나 격증하였다.

 

그 결과, 미곡의 한국인 국내소비량은 1920년 1085만석에서 1928년에는 988만석으로 10%나 감소되어 한국인은 더욱 부족한 식량을 만주로부터 잡곡을 수입하여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부문에서도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은 192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3·1운동 이후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였으므로 일제는 1920년대에 한국민족의 기세에 밀려 할 수없이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하기에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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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2)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

 

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3·1운동에 고취된 한국민족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에서 한성정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3개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하나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체를 채택하여 의정원과 국무원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계승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것만으로도 한국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비밀연락망으로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여 국내통치권을 일부 행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국내로부터 공급받았다. 연통제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군감 등의 비밀 행정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내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인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유럽에서의 외교활동과 미국에 구미위원회를 두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게 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② 독립군 무장투쟁의 발전:한국민족은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① 대한독립군, ② 군무도독부, ③ 북로군정서, ④ 국민회군, ⑤ 의군부, ⑥ 대한정의군정사, ⑦ 한민회군, ⑧ 조선독립군, ⑨ 의단, ⑩ 대한독립군비단, ⑪ 광복회군, ⑫ 의민단, ⑬ 흥업단, ⑭ 신민단, ⑮ 광정단, 야단, 혼춘군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① 1919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②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③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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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鳳梧洞)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0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 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하여 패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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