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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일제강점기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기의 끝에서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줬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유관순 열사 생가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유관순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 유중권 선생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국권 회복을 위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이러한 부친의 가르침으로 유관순 선생은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해 갔는데요. 인정 많고 총명한 유관순 선생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샤프 선교사는 이화학당에 갈 것을 권유했고, 선교사의 추천으로 선생은 17살이 되던 해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 유학생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교비생: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


▲ 이화학당 수업 모습 (출처: 하루 블로그)


유관순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힘들어하는 동포들을 지켜보며 민족의 처지에 대해 인식하는 한편,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피어난 마음가짐으로 일제의 만행에도 이겨낼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당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 (출처: 최석호의 여가이야기)


이화학당에 들어간 선생은 한 해 먼저 입학한 사촌언니 유예도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와 친분을 쌓고,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화학당 생활 중에도 유관순 선생은 민족과 동포들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이문회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요. 유관순 선생 또한 들끓는 민족애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 고종황제 장례행렬 (출처: 이도경세 이의보본 블로그)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일제의 독살설이 돌고 있어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는데요. 참다못한 한국인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했고,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


▲ 서울 3.1만세운동 당시 모습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이때 이화학당 전교생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에 당시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였는데요. 열사는 친구들과 함께 소복을 입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만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학생들의 만세 운동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19년 3월 10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 선생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당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친구들은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대한 독립, 대한 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 이화학당 다닐 때 유관순 열사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브런치)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부친 유중권 선생과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습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보여주며, 천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열사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을 어른들께 이 소식을 전했고,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천안 일대에 봉화에 불을 지펴 만세시위 운동의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유관순 열사의 열변-


▲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선생은 유중권, 조인원, 유중무 등 가족 및 마을 어른들과 함께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의 선두에 섰는데요. 이 사건이 오늘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불리 우는 독립운동입니다. 


오전 9시, 약 3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 선생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선창하였습니다. 곧이어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고, 유관순 선생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대열의 선두에서 장터를 행진하였습니다.


▲ 아우내 장터의 현재 모습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게 됩니다. 이에 유관순 선생은 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는데요. 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습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들어가 숨어버렸고, 시위 군중은 조인원 선생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시위대에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시위 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총을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고 말았는데요.


오후 4시경, 선생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유관순 선생은 아우내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부모를 잃고,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는데요. 


그러나 선생은 갖은 고문에도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치고, 공주교도소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외치는 등 독립에 대한 당찬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에 쳐들어온 너희에게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나라에서 당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재판 중 유관순 열사의 발언


▲ 서대문형무소 현재 모습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 선생은 옥중에서도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에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그 만세 소리가 형무소 밖으로 까지 퍼지게 되어 형무소 주위 전차 동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 선생은 물론, 수감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일본에 거세게 항거했으나 결국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유관순 열사 수형 기록표 (출처: 보배드림 블로그)


유관순 선생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8세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생전의 고귀한 희생으로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 소리는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뜨거운 함성이 되었습니다.


오는 9월 28일(목) 오전 11시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유관순 열사 순국 97주기 추모제>가 거행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독립운동에 있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열여덟 소녀의 노력과 마음가짐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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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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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지 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한국광복군의 창설 과정과 활동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전국적으로 외교권 박탈에 대해 저항하는 수많은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일본은 이를 강하게 압박하였고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의 경술국치일을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1919년,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의장 이동녕 선생을 중심으로 안창호, 김규식 선생 등이 모여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군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수립 초기부터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등을 제정하고,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전쟁을 위한 군대 편성을 계획하였는데요.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등)에 대한 일본의 대대적인 탄압과, 1937년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 중국 각처로 옮겨 다니며 험난한 대장정을 펼쳤고,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전례를 가짐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당시 김구 선생이 발표한 <광복군 선언문> 중


▲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만든 한국광복군 영문약자 KIA(Korea Independence Army)

(출처: 독립기념관) 


# 한국광복군의 활약


광복군 창설 직후 편제된 지대는 병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총사령부 예하에 4개 부대를 편성하여 본격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출처: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블로그)


대원들은 중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광복군의 활동 취지를 알리며 병력을 모집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광복군은 창설 1년여 만에 12명의 인원에서 3백여 명의 병력으로 원대한 골격을 갖춰나갔습니다.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당시 연설을 하는 백범 김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한국광복군은 1941년 2월부터 기관지 <광복(光復)>을 발간하여, 선전과 홍보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로 발간하여 한국어본은 중국 내 교포들을 대상으로, 중국어본은 각급 행정기관과 학교, 군사기관, 언론기관 등에 배부하였습니다. 이를 전·후방에 확산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 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 한국광복군과 미군 (출처: 준형, 시현이네 퀴즈사랑)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전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지를 알림과 동시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ㆍ영ㆍ미ㆍ하ㆍ가ㆍ호(中ㆍ英ㆍ美ㆍ荷ㆍ加ㆍ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聲明)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一切)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음.


이후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1943년부터 1945년에 걸쳐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고, 이후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과 연합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하며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는데요. 일본이 패망의 길로 접어든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군과 손잡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로 했는데요.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한미연합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 OSS 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들


국내진공 침투작전의 실시 일자는 1945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8월 15일, 아쉽게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한국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면서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는데요. 


▲ 조선의 독립에 환호하는 모습 (출처: 국가기록원)


오는 9월 14일(목) 오전 11시,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사)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이영수) 주관으로 <한국광복군 창군 제77주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이날 행사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광복군동지회원,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입니다. 


비록 이들이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안위를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헌신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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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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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21 1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황청묵

    2017.09.23 0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오늘 고엽제전우회 국가보훈정책 ?(양승조,이완영,홍철호)토론회에 참석하여 10시부터 13시30분간 자리를 지켜 발제자의 주제발표에 점심도 시간경과로 먹지못헸다, 국가보훈의 정책 방향에 우선되여야 한다고 공감하였다,월남전에도 파병의 임무수행도 무사히 끝마치고 지금은 건강상태도 고엽제의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한국 광복군 창군77주년 창설과 활약상에 의미심장해하며, 공감했다, 동참하였다, 국가안보를 휴전선언이후 남북관계는 북한의 핵무기화를 선어하여 국민의 정치적 국가안보를 위협한다, 뉴스보도및 문재인 대통령 유엔연설에서도 평화를 외쳤다, 구한말의 선비 매천 황현 선생을 귀감으로 생각한다, 경제적 발전은 국가경제에 지속가능하다고 본다,
    국위선양과 민주국가의 세계화에 동참하는 월남전참전에 희생하였던 국가유공자의 참전전투수당지급을 긴급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3. 황청묵

    2017.09.23 0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년 9월22일 국회의원회관 토론회 참석하다, (양승조국회의원 제안법률안)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 매천 황현 선생, [자식들에게 남기는 글]


오늘은 국난에 자결로 항거했던 매천 황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구한말 사대부 집안에 선비로 태어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상황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 매천 황현 선생 초상 (출처: 독립기념관)


매천 황현 선생은 세도 정치가 한창이던 1855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이후 구례로 이사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선생은 유서 깊은 장수 황씨 집안 출신으로, 그의 선조 중에는 조선시대 4대 명재상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황희 선생,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 장군,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을 지낸 황위 장군이 있습니다. 그러나 황현 선생이 태어났을 즈음에 그의 집안은 몰락한 시골의 양반 가문으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황현 선생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글을 배우며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하는 등 매우 총명했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글재주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 성균관 강의실 명륜당 (출처: 서원연합회)


청년 시절, 황현 선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여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들을 만나 견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1883년에 치른 과거시험, 선생은 28세의 나이로 과거 시험에 1등으로 뽑혔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에 황현 선생은 조정의 부패를 뼈저리게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황현 선생은 부친의 뜻에 따라 다시 상경하여 과거 시험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장원급제하는 영예를 안고 1888년 34세의 나이에 성균관의 생원이 되었으나, 선생은 곧 부정부패가 극심한 관료계의 현실에 신물을 느껴 관직을 내려놓고 다시 귀향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포기하고 재야인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황현 선생은 구례에 작은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두고 독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선생은 특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즐겨 그들의 서적을 탐독했고, 이외에도 시문과 역사,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학문을 닦았습니다.


▲ 황현선생 시비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매천 황현 선생 하면 떠오르는 서적이 바로「매천야록」인데요. 이 책은 언제 쓰여졌을까요?


황현 선생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있었을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참다 못한 백성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 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우리나라의 영토를 전쟁터로 사용하는 등 점점 국운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도하던 황현 선생은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주기 위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하였습니다. 「매천야록」은 고종 원년(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 전반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오하기문」은 선생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입니다. 「매천야록」의 경우,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들어 있어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읽어야 할 정도로 그 가치가 높은데요. 「오하기문」은 「매천야록」과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많지만,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1905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여러 관리들이 자결하자, 황현 선생은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그들의 우국충정을 기렸습니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아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 현재 호양학교 터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국력을 키우려는 사람들과 함께 2년 간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하여, 고향인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신학문을 보급하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했는데요. 그러나 호양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재정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황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맞게 됩니다. 선생은 동생 황원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는데요.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 황현 선생의 절명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구궐(久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능히 윤곡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 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 4수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9일, 소주에 다량의 아편을 타서 마시고 그 다음날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매천 황현 선생 동상


▲ 매천 황현 문화제 진행 모습

(출처: 사단법인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오는 9월 22일(금) 오후 2시, 구례군 구례섬진아트홀에서 <제9회 매천 황현 문화제>가 열립니다. 


황현 선생은 전통질서를 지키고 그것을 이어가기 위한 온건적 개혁을 지지했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통렬히 비판하며 과거 낡은 선비정신을 뛰어넘었던 분이었습니다. 황현 선생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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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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