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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8주기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약 5개월 뒤인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는데요.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는 투옥에서부터 사형 집행까지,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요.

오늘 훈터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삶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 안중근 의거 기록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주도 인물이자 만주 침략의 계획을 세우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판·검사, 변호사, 통역관, 방청인 등이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법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고 밝히며, 이토의 죄상 15가지를 낱낱이 밝혔습니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발언은 큰 화제가 되어 재판정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여론이 일본에 등을 돌리자, 일제는 졸렬하게도 이후의 재판을 비공개로 바꾸었고 같은 해 2월 14일의 공판에서, 그들이 원하던 대로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당부


사형 선고 이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여순감옥으로 면회를 가는 안 의사의 형제들에게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습니다. 


또한, 변호사를 통해 "국가를 위하여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선생에게 수의를 지어 보냈습니다. 


▲ 안중근 의사와 형제들의 면회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과 옥중 유묵


안중근 의사는 의거를 행하기 전인 1909년, 항일투사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혈서로 '대한독립'을 쓰며 단지동맹을 맺고,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칠 것을 다짐했습니다.


▲ 대한독립이 쓰인 태극기.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의지가 담긴 손가락은 여순감옥 수감 당시에 유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약 200여 점에 달하는 유묵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중에서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유묵 한 점을 소개해 드립니다. 


▲ ‘인내’ 유묵. 보물 제569-18호. (출처: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형이 선고된 이후, 안 의사는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을 따라 공소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며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밝히고, 동양의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자 했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이 3월 26일 월요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립니다. 


이날 추모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안중근 의사의 유족(외손녀 황은주 씨, 증손자 안도용 씨), 안중근함 부함장 정창식 중령 및 많은 시민들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있고,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는 교수, 변호사 등 30여 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 2017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3월 26일, 독립을 열망하고 동양의 평화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랐던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참고 사이트

안중근의사숭모회 http://www.patriot.or.kr/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www.ahnjunggeun.or.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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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34

    2018.03.23 0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디 쥐새끼들 모조리 처단해 주세요.

  2. 2018.03.23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일제의 침략 행위에 앞장선 이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 장인환(좌), 전명운(우) 의사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당시 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였습니다.

그는 을사늑약 및 정미7조약 등 한국 식민지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이로 인해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섯 차례나 훈장과 표창을 받은 바 있는 일제의 앞잡이였습니다.


▲ 스티븐스(Durham W.Stevens) (출처: 우리역사넷)


스티븐스가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령을 수행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3월 21일,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라는 망언을 하였습니다.


스티븐스의 망언은 다음 날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재미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는 긴급히 '한인공동회'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습니다.


공동회의 회의 끝에 네 명의 총대가 선정되어 망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스티븐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들에게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또 다시 망언을 했습니다.


한인들의 항의에도 스티븐스의 망언이 반복되자, 공동회는 스티븐스를 살려 보낼 수 없다는 분위기로 팽배해졌습니다.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공립협회 회관 터 (출처: 독립기념관)


장인환 선생은 1904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와서 철도건설 현장, 농장, 식당 등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멤버가 되고, 대동보국회에 가입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갔습니다.


전명운 선생은 미국에서 학업을 닦아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에 헌신하기를 바라며 1903년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선생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19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대동보국회, 공립협회 회원으로 한인공동회에 참가했던 장인환, 전명운 선생은 계속 망언을 저지르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동시에 갖게 된 것입니다.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스티븐스는 급히 워싱턴에 가기 위해 페리 부두 인근으로 이동, 페리빌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명운 선생이 먼저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 샌프란시스코항의 전경과 페리 부두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나 전명운 선생의 권총은 불발하고 말았고, 이에 선생이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머리를 내려치는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순간, 역시 권총을 들고 이들을 지켜보던 장인환 선생이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세 번 당겼습니다. 첫발은 빗나가 전명운 선생의 어깨에 맞았으나, 제2, 3발은 스티븐스의 등과 허리에 명중하였습니다. 


의거 직후,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한인사회는 다시 제2의 공동회를 개최하여 두 의사의 공판에 대비했습니다. 두 의사의 공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국은 물론 국내, 중국, 멕시코 등 각지의 동포들로부터 7,390달러나 모였습니다. 


스티븐스 처단 의거에 대한 공판이 열렸고, 전명운 선생은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찬조하여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였기에 애국심을 가지고 의거를 실행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일제는 선생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도록 책동하였지만 선생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장인환 선생은 1909년 1월까지 약 280일간 공판을 받았습니다. 검사와 일제 측은 선생을 일등 살인법으로 몰았으나, 변호인은 선생의 총격이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닌 애국심으로 인한 범죄이므로 애국지사로서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판은 한국측의 승리로 끝나 선생은 2급 살인죄를 받고 25년 형을 받았으나, 선생의 모범적인 복역과 미주 한인사회의 석방운동으로 10년만인 1919년 1월 방면되었습니다. 


▲ 장인환 의사가 출옥한 직후 촬영된 전명운(좌), 장인환(우) 의사의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장인환, 전명운 선생의 의거는 국내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여론에 보여줄 수 있었고, 국내와 해외의 항일민족운동이 통합되었으며 안중근 의사, 이재명 의사 등 많은 의열투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일제의 하수인에 대한 의거를 단행한 장인환, 전명운 의거. 두 의사의 의거는 의열투쟁으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흩어져 있던 해외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결속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기억하며,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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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늘 소개해 드릴 분은 2.8독립선언을 국내로 전파하여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입니다. 




▲ 지난 3월 1일, 제99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제99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광복은 우리 선조들이 ‘최후의 일각’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싸워 이뤄낸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곽낙원 여사, 남자현 여사, 박차정 열사, 정정화 의사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차례로 언급하며 “3.1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약 백 년 전, 일제의 탄압은 물론 오늘 날보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나 어려움이 더 많았던 시대에 김마리아 선생은 독립운동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의 삶을 함께 알아볼까요?


▲ 김마리아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1892년, 김마리아 선생은 민족계몽운동에 힘쓰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펼치는 아버지 슬하에서 독립운동가 김필순 선생을 삼촌으로, 김순애 선생을 고모로 두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키우게 되었습니다.


▲ 김순애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이 정신여학교에 진학하던 시기,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1905년)되었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계몽운동이 맹렬한 기세로 펼쳐졌습니다. 이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김마리아 선생 또한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일본의 선진 학문을 습득하기 위하여 동경여자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시기인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하였고, 일본의 한인 유학생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는 ‘2.8독립선언’을 발표합니다.


김마리아 선생과 황애덕 선생 등 여성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독립선언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선생을 비롯한 수십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2.8독립선언을 국내로 전파할 결심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2.8독립선언 때 발표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부산, 대구, 광주 등지를 거치며 여성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 2.8 독립선언서 (출처  독립기념관)


드디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시작된 날에도 선생은 황해도 등지를 돌며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고, 3월 5일에 서울에 상경한 선생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학생 독립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겪었습니다.


▲ 3.1운동 당시 모습(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김마리아 선생은 출감한 후에 선생의 모교인 정신여학교의 학생 및 기독교계 여성 등이 모여 감옥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를 도왔던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더욱 체계화, 활성화하여 전국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혁신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정신여학교의 모습(왼쪽)와 현재의 모습(오른쪽)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서울, 대구를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그 해 11월까지 6천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활동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재미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어려운 해외 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한 시도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 서울 보라매 공원에 위치한 김마리아 선생 동상

(출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1933년 늦은 봄, 13년 동안의 망명 생활 이후 국내로 귀국한 선생은 일제의 감시 하에도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전개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습니다.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설립 취지문 중


오늘 2018년 3월 13일은 김마리아 선생의 순국 74주기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시대적, 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희생과 헌신을 보여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의 삶을 기억하며 많은 용기와 배움을 얻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참고 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s://goo.gl/YQvdLQ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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