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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의 업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신 분은 아마 많지 않을 듯한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오는 7월 19일(수)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 70주기를 기해, 대한민국 광복의 밑그림을 그린 선생의 삶을 짚어보겠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어렸을 적, 동학에 가담했던 조부 여규신과 종조부 여규덕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서울의 배재학당을 다니며 기독교를 접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성장 환경은 선생의 개혁적인 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부친 탈상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과감히 해방시키는 등 봉건 유습의 타파에 앞장섰습니다.


▲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 (경기 양평군 소재)


여운형 선생은 1907년부터 서울 종로의 승동교회에서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고, 같은해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생은 1910년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매진하였습니다.


▲ 몽양 여운형 선생


▲ 몽양 선생과 아이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난징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다시 1917년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1918년에 여운형 선생은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파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하였습니다. 여운형 선생 자신도 간도와 시베리아 방면으로 가 3.1독립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키는 등 대한민국 독립의 밑그림을 그려 나갔습니다.


▲ 상해시절 여운형 선생(맨 앞줄 가운데)


여운형 선생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같은해 11월에는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과의 여러 차례 회담을 거치며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강단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이는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상해에서 활동했을 당시, 인성학교를 설립하여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1920년 여운형 선생은 우리나라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하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을 당시,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였습니다. 같은해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 1929년 7월 국내로 압송되어 용산역에 도착한 몽양 선생


상해를 주무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여운형 선생은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는데요. 선생은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출옥하였습니다. 이후 1933년, 여운형 선생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


그리고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은 조선중앙일보사를 비롯한 당시 민간지들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는데요. 조선중앙일보사가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8월 13일자에 게재하면서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실은 것을 일본 관헌이 발견한 것입니다.


여운형 선생은 일명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습니다. 


1940년에서 1942년 간 여러 차례 동경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여운형 선생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광복을 준비해 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은 안재홍, 정백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 한지근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습니다.


▲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몽양 여운형 기념관 전경(출처: 뮤지엄 허브 양평)


▲ 작년 몽양 여운형 서거 69주기 당시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손자, ㈜대중기계 여인영 회장)


오는 7월 19일(수) 오후 2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0주기 추모식]이 열립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나가야겠습니다.


※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공훈록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10323&ipp=100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81208&cid=46626&categoryId=46626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111&cid=40942&categoryId=3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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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위 문구는 이준 열사의 유훈 중 일부입니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애쓰셨던 분입니다. 유훈에서도 이준 열사의 의지를 볼 수 있는 듯 한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오는 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나라를 위해 애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준 열사


이준 열사는 1859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 이병관공과 청주 이씨 모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마저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그는 당대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이준 선생은 1884년 함경도시(咸鏡道試)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이후 1895년 처음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고위 관료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나섰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 일성 이준 열사 동상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이후 그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를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02년에는 이상재, 민영환,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였는데요.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 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열사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04년 12월, ‘공진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는 등 구국활동에 적극 임하다가 일제에 의해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


1905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하고,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준 열사는 동지들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여 을사늑약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과, 시민들과 투석전을 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이준 열사는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에 들어가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와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그것이 확대개편된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준 열사는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주위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인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고종은 이에 동의하여 극비리에 정사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이 임명하였는데요. 이어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낼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습니다.   


▲ 헤이그특사 신임장 (출처: 독립기념관)


이상설 선생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있었고, 이위종 선생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 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습니다.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는데요.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선생을 만나 밀사 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 선생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습니다.


이준 열사를 포함한 세 특사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받았고, 1907년 6월 25일경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공식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1907년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 [일인불법행위]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자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는데요. 세 특사는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던

빈넨호프 왕궁의 기사홀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이 이어졌고,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까지 더해져 특사들의 뜻은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 특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 1907년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광경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세 특사들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성토했고 그 결과, 장서의 전문이 평화회의보에 게재되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7월 9일에는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이상설 선생과 이위종 선생이 귀빈으로 초청되어 을사늑약 무효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 선생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요. 이는 언론인들과 각국 인사들에게 귀감을 주었고, 그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헤이그 특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청원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 헤이그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던 호소문 (출처: 독립기념관)


이준 열사는 이에 분개하여 연일 통탄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는데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 1907.7.15일자 기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의 입장과 일제의 침략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이준 열사.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1963년,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현재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선열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 이준 열사의 묘역

                       


▲ 이준 열사 기념관(출처: 독립기념관)


오는 7월 14일(금) 오전 10시 서울 수유동의 이준 열사 묘소에서, ‘일성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 추념제전’이 열리는데요. 이준 열사가 낯선 땅에서 나라를 위해 펼쳤던 노력과 용기를 기억하고, 그 강직한 성품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던 이준 열사의 유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던 이준 열사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자료출처

네이버캐스트(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905&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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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개봉하면서, 실제 박열 선생의 삶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박열 선생의 공적과 더불어 정신적 동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 등, 박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 역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인물 역시 이번 영화로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바로, 박열 선생 재판에서 변론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입니다.


스크린에서 그는 단지 식민지 청년에게 연민을 느끼는 선한 심성의 소유자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동정심이나 인권 의식을 뛰어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군국주의 반대 투쟁을 펼친 강골이었습니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후세 다쓰지. 오늘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까 합니다. 함께 살펴보시죠.


▲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시보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껴 1903년 변호사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11년,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하여 일본 검찰의 밤샘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론을 무료로 맡았는데요. 그의 도움으로 당시 최팔용 선생 등 많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후세 변호사는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평생 서겠다”는 뜻을 담은 글 ‘자기 혁명의 고백’을 언론에 배포하기에 이릅니다. 1923년 8월에는 서울을 처음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자 후세 변호사는 이듬해 독자적인 조사 보고서를 내는 등, 진상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의 내용처럼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가 일왕 폭살 혐의, 이른바 ‘대역죄’로 기소되자,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조작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는데요. 재판에서는 물증도 없이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를 거세게 비판하였습니다.


▲ 가네코 후미코(좌)와 박열 선생(우)


후세 변호사는 재판 이후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의 옥중 결혼도 도왔으며, 가네코 여사의 유골을 발굴해 화장한 뒤 박열 선생의 형에게 전해주었는데요. 덕분에 가네코 여사는 먼 길을 돌아 박열 선생의 고향, 문경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 왼쪽에서 2번째가 박열 의사, 맨 오른쪽이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많은 조선인들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 왕궁 바로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도와 사형을 피하게 도와주었고, 1925년 을축대홍수 때는 조선 수재민 구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으로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자 다시 조선을 찾아와 중재를 이끌었습니다. 이 때 궁삼면 일대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을 정도로 그는 조선인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이어 김재봉, 강달영 등이 조직을 재건하려다 붙잡힌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후세 변호사는 광복 후에도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을 펼치고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 일행에게 자신이 쓴 ‘조선건국 헌법초안 사고’를 선물로 건네며 대한민국의 부흥과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일제 치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을 변호해 주었던 후세 다쓰지는 1953년 9월 13일 타계했는데요. 그의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죠.


2004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이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에 헌신했던 그동안의 노력과 공적들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 훈장 추서는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는데요. 그 당시 건국훈장을 받았던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기록되었죠.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합니다.”

- 후세 다쓰지 -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 유일하게 사죄를 한 일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홀로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일왕을 신격화하며 맹목적으로 숭배할 때 군국주의 반대에 앞장섰으며,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억울하게 기소된 민중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변호사. 그가 보여준 평등한 자애심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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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현석

    2017.07.07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세 변호사와 박열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일본인 소설가인 나카니시 이노스케인 듯합니다. 이번 영화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그 역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인을 주인공 삼아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소설,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모델로 한 소설, 불령선인은 일제에 의해 날조된 말이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소설 3편을 썼는데, 이는 그의 조선과 관련된 3부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도 친분이 있던 사람으로, 그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일본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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