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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서거한 날입니다. 


김창숙 선생은 구한말 을사늑약 반대와 친일파 타도에 앞장섰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중국 인사들의 한국 독립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오랜 기간을 일제에 항거하다 혹독한 고문과 오랜 옥살이로 인해 지체 부자유의 몸, 앉은뱅이로 여생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김창숙 선생 서거 55주기를 맞은 오늘, 그가 가졌던 올곧은 신념과 그가 우리 대한민국에 기여한 공로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해요.


▲심산 김창숙 선생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에서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8세 이후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기에 혈안이었는데, 선생은 여러 학자들이 구국책을 강구하지 않음을 탄식하였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논하는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족 문제에 해결에 앞장서는 선비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 경북 성주군 소재 김창숙 선생 생가


그런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은 바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박탈당한 시국에 분노한 선생은,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본의 방해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선생은 이 일로 8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선생은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1906년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김창숙 선생은 전국단연동맹회(금연운동 단체) 성주대표로 활동하며 힘을 보태는 한편,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향리에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선생은,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고 울분을 토로하며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로 작성하여 중추원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이 일로 선생은 일경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 파리 장서 발송을 위한 서명을 받기 위해 

각 지역에 파견될 대표를 협의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시간이 흘러 1919년 1월 21일, 일제에 강제 퇴위되었던 광무황제가 급작스럽게 붕어(崩御)하였고, 이를 두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고, 곧이어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종교계 인사들의 3·1독립선언이 가속화되었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민족대표에 유림계가 빠진 것에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선생은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독립청원서를 만드는 일을 계획합니다. 이것이 바로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작성된 한민족 자주독립 청원서 ‘파리 장서’입니다. (문서 내용이 길어 붙여진 이름)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에 관한 회의인 파리 강화 회의에 이 파리 장서를 제출하고자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 및 영사관,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습니다. 또, 한인동포들이 살고 있는 해외 각지에도 이 장서를 보내 우리 민족이 가진 독립에 대한 염원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장서의 원본은 김창숙 선생이 1919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습니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김창숙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구성에 참여하였습니다. 선생은 1919년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요. 5차회의에서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에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의 손문을 비롯하여 오산, 서겸, 장병린 등과 교류하면서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고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이 밖에도 상해, 북경을 옮겨 다니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선생은 북경에서 이회영 선생과 상의하여 중국 동삼성 일대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였으며,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하는데 힘썼습니다. 또한 김구, 이동녕, 유자명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이 다시금 촉발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 2011년 서울 서초구에 개관된 심산 김창숙 기념관 내 선생의 동상


상해에서 임시정부 재건에 매진하고 있던 1927년 어느 날, 김창숙 선생은 병환으로 상해 공동조계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일본 밀정에 발각되어 피체된 선생은 국내로 압송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너희들이 고문해서 정보를 얻어 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며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징역 14년을 언도받아 변호나 공소도 거부한 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선생은 병이 위중해져 출옥했습니다. 이때 선생은 일경의 심한 고문과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선생에게는 벽옹(躄翁: 앉은뱅이노인)이라는 별호가 붙기도 했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했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 10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또 다시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비상국민회의 최고 민중지도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를 조직하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 했습니다. 


광복 후, 김창숙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을 내었던 사건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기도 하는 등 김창숙 선생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습니다.


▲김창숙 선생의 시와 평(김창숙 선생이 고향을 기리며 의협심을 노래한 시


그렇게 한 평생을 독립운동과 국가 안정에 이바지했던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습니다. 같은 해 5월 10일, 김창숙 선생은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는데요. 정부는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며 선생의 공로를 예우하였습니다.


▲ 김창숙 선생의 가족사진(1962.3.1.)


정통 유학자로서 일제시대에는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의지를 보여주었고, 광복 후 이승만 독재 시절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직접 투쟁에 앞장섰던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그 분의 서거일인 오늘, 김창숙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 김창숙 선생, 대구형무소 옥중투쟁 중(19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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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물이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더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 아닐까요?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있었고, 한석봉의 어머니가 있었죠.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 곽낙원여사의 동상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위치)


곽씨 부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곽낙원 여사는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녀는 김구 선생이 어렸을 때 직접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과 <사서삼경> 등을 읽히며 아들의 교육에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김구 선생은 이러한 정국 속에서 안악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요. 선생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만나, 그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는 거사를 결행하면서 1897년 7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에 곽낙원 여사는 매일같이 아들을 찾아가 옥바라지를 하며 김구 선생을 격려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광무황제의 특별교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이 되지 않자, 이후 김구 선생은 탈옥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곽낙원 여사는 남편 김순영 선생과 함게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서 3개월 간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11년 김구 선생은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에서의 활동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게 되었는데요. 그러던 중 안명근 의사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의 계획이 탄로되자 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형을 언도받아, 총 17년형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의지가 꺾이는 것이 두려워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김구 선생을 위로하며  아들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


곽낙원 여사의 헌신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사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고, 남편 김순영 선생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며 어렵게 김구 선생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2년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곽낙원 여사도 상해로 갔는데요. 쓰레기더미에서 배추잎을 주워 끼니를 연명하면서도 찬거리를 줄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 앞줄 가운데 곽낙원 여사와 뒷줄 가운데 김구 선생


또 임시정부 단원과 김구 선생이 여사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려 할 때, 이런 사정을 눈치 챈 그녀는 “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준비하겠노라”며 돈을 받아 권총 두 자루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쓰라고 동지들을 격려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25년 12월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온 곽낙원 여사는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이를 피해 1934년 3월 19일 손자 김인과 김신을 데리고 상해로 다시 떠났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장손인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고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는 등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곽낙원 여사는 1940년 4월 26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사천성 중경에서 서거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하는 독립운동가 아들 곁에서 묵묵히 뒷바라지했던 곽낙원 여사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아들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늘 옆에서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곽낙원 여사. 그녀의 강한 신념과 인내심으로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더 위대했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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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한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 이상설 선생이 조직한 성명회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열강에 독립결의를 밝히고자 보낸 선언서


▲ 이상설 선생


오늘은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회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과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목적이었는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 헤이그로 보내진 특사 중 한 분이 바로 이상설 선생입니다.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7세 때에 동부승지였던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하여 서울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신학문을 접하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수학 등을 공부하였고,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명석했다고 전해집니다. 타고난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로 이상설 선생은 1894년 26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릅니다.


▲ 이상설 선생 생가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일제에 의해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1896년 1월 이상설 선생은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고, 이 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공부하였습니다. 6월에는 탁지부(현재의 기획재정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임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이상설 선생은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조약 반대 운동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을사늑약은 아직 황제의 인준 절차를 끝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선생은 관직과 목숨을 걸고 광무황제에게 무려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립니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한편, 을사늑약 체결 후 선생은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고,  북간도 중에서 한인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을 세워 한인들을 대상으로 재래식 구식 교육을 신식 학교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 당시 광무황제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받습니다. 광무황제는 이것이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겼기 때문에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907년 3월경 이상설 선생에게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칙명을 내립니다. 이후 선생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게 되었고 4월 20일자 고종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특사의 정사(正使)가 되어 5월 21일, 이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이범진과 협력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였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함께 세 밀사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 헤이그 특사 (좌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헤이그로 도착한 세 특사는 한국의 사절로서 당당하게 활동했습니다. 일본대표들은 한국의 사절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세 특사의 목적은 을사늑약의 파기와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드러내어 열강의 후원을 얻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한국 특사들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은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세 특사는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에게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을 항의하였으며, 일제의 한국주권 침해를 설명하며 의장 직권으로 회의 참석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특사들은 미국 대표를 비롯해 프랑스, 중국, 독일 등 각국 위원에게도 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협조를 구하였으나 실패합니다. 회의에 공식 참석을 거부당한 특사들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정확히 각국 대표에게 알림으로써 한국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시키려는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국의 외교적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으나, 구미 언론에서 한국 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게 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었습니다. 특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돋보였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이 모임에 이위종 선생과 함께 귀빈으로 초청되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이위종 선생이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며 국제여론에 한국의 독립 요구를 부각시켰고, 이를 들은 모든 참석자들이 감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7월 14일에 밀사 중 한 명인 이준 선생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고, 이후 7월 19일부터 두 특사는 영국,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 이상설 선생의 편지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사행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한민회 회장 김학만 등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하는데도 힘썼습니다. 또한 조국 병탄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병탄조약 무효를 선언할 항일단체로 ‘성명회’를 조직하고, 권업회를 창립하여 민족교육과 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습니다. 선생은 독립전쟁을 위한 광복군 양성에도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선생의 건강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 있을 당시 1916년 초부터 병석에 눕게 되었고, 기온이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했으나 병제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이상설 선생 순국 기사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서거하시는 순간까지도 조국의 광복을 기원했던 이상설 선생. 비록 헤이그에서 원하던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가 나라를 위해 했던 모든 일과  그 뜨거운 애국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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