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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오는 12월 19일(화)은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를 기해, 윤 의사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윤봉길 의사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윤 의사는 11세가 되던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인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이후 윤봉길 의사는 사설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습니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민족잡지 [개벽] 등을 구독하던 윤 의사는 그 때부터 민족운동의 방향을 차근차근 정립해 갔습니다. 


1926년의 어느 날, 윤 의사는 산책길에서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를 뽑아들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의사는 무식이 나라를 잃게 한 적이라고 생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죠.


▲ 「농민독본」 2권 표지와 내용 (출처 :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지역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학생들의 수가 늘어나자, 그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을 교육하는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윤 의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7년 「농민독본」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는「농민독본」에서 허례허식을 지양하고 주체적인 민족정신의 확립, 근검절약에 대한 의식을 표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정신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윤봉길 의사는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 1929년, 윤봉길이 농촌부흥을 위해 조직한 월진회 창립취지서

(출처 : 독립기념관)


윤 의사는 월진회를 통해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농촌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봉길 의사는 일제 식민 통치 아래 농촌 운동은 개량과 개혁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윤 의사는 이러한 농민 계몽, 농촌개혁 운동이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떠나기 전, 윤봉길 의사가 남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에서 그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집니다.


1931년,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어 일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 이봉창 의사 (출처 : 독립기념관)


당시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첫 결실은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의거로 나타나게 되었죠. 비록 폭탄의 불발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의거는 윤봉길 의사에게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 1931년 윤봉길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선언분 사본(오른쪽)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합니다. 윤 의사는 그날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의 수뇌부들이 식장에 모일 예정이기 때문에, 그 원흉들을 제거한다면 한인 동포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습니다. 4월 29일에 치를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죠. 


마침내 거사일 당일인 4월 29일 아침, 윤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전달 받았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도 자신의 새 시계를 김구 선생의 헌 것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시계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쳐졌습니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중앙에, 그 좌우로는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주중공사 시게미쓰·거류민단장 카와바다, 주중 총영사 무라이·민단 간부 도모노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의거 장면 (출처 :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폭탄은 굉음과 함께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게 됩니다.


▲ 윤 의사의 의거 직후 홍구공원의 모습


윤봉길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후 5월 25일, 윤 의사는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기개를 잃지 않았습니다.


▲ 상해의거 직후 언론에 보도된 윤봉길 가족사진 (동아일보, 1932년 5월 3일)

(출처 : 독립기념관)


이후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의거를 앞두고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유서를 대신하여 쓴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출처 : 독립기념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오는 12월 19일(화)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의 윤봉길 의사 묘전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기념사업회원, 시민 등이 참석하여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릴 예정입니다. 


12월 19일, 일평생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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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유진

    2017.12.19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 기억하겠습니당!!!

  2. 김기성

    2017.12.20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모식이 12월19일 되어있는데. 29일날 하지 않나요?

  3. 2017.12.23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941년 12월,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태평양 전쟁에서 우리나라의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음날인 12월 10일,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후, 이들을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기 위해 훈련과 교육을 실시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고, 다음날 미국이 곧바로 일본에 대한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에 중국은 빠르게 대일선전포고를 이어갔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준비했습니다.

 

▲ 대일 선전 성명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ㆍ영ㆍ미ㆍ하ㆍ가ㆍ호(中ㆍ英ㆍ美ㆍ荷ㆍ加ㆍ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聲明)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一切)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음.

 

1941년 12월 10일,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외부무장 조소앙 선생은 대일 선전 포고 성명서에 각각 도장을 찍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알리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인도에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은 즉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군와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당시의 버마·인도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죠. 단순한 전투 이외에도 포로심문, 암호해석, 선전 전단 작성, 등의 심리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12월 8일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76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학생 대표가 대일선전성명서를 낭독했고, 기념식이 끝날 때는 모두 일어나 만세 삼창을 외치며 광복군을 기렸습니다.

 

일제에 당당히 선전포고를 했던 76년 전의 12월 10일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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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구한말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외치며 일제에 맞서 고령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최익현 선생의 초상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면암 최익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14세 때 성리학의 대가인 이항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을 배웠고, ‘나라를 항상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라’는 이 정신은 최익현 선생에게 평생의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23세 때에 관직생활을 시작한 면암 선생은 재임 내내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선생의 강직한 성품은 상대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결같았습니다. 조선 후기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가 하면, 1868년 무리하게 경복궁을 재건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요.

 

 

▲ 최익현 선생의 면암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전개한 항일운동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최익현 선생은 조약이 체결되는 데에 일조한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을사늑약에 대해서는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고, 각국의 공관들이 철수하기 전에 무효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은 면암 선생이 당시 올린 상소문, ‘청토오적소’의 내용입니다.

 

 "······을미 사변 때의 역적이 실로 만고의 대역적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이 을사 5적들은 죄가 오히려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지금 이런 대역적들을 오히려 용납하여 일시라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살아 있게 할 것이겠습니까. 저 5적들이 비록 외세에 의지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하는 것이나 역시 폐하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 역적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을 이고 아직도 처벌을 내리지 않나이까···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죽어 가는 말이라고 하여 귀에 흘려 버리지 마시고, 속히 국적을 토멸하는 동시에 허위 조약을 거부하라는 신의 요청을 단행하여 국가의 멸망을 돌이켜 다시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 신은 통곡하여 숨이 끊길 듯함을 어쩔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이만 아룁니다."

 

▲ 무장한 의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상소를 올리는 것만으로는 항일투쟁의 성과를 올리기가 어려웠지요. 이후 면암 선생은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습니다. 당시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였지만, 선생의 국권 회복을 향한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기개였습니다.1906년 3월 24일, 최익현 선생의 의진은 포천을 벗어나 태인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4월 13일, 선생은 무성서원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선생은 일본영사관에 16개항의 죄목을 들어 규탄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선생이 거느린 의병의 수는 점점 늘어나 5백여 명을 넘게 되었고, 정읍에 무혈입성하게 된 의병들은 거침없는 기세로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칙지와 고시문을 보내왔습니다. 면암 선생은 실망감을 숨기고 이미 기병소를 올렸으니 관찰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답을 보냈습니다.


이후 남원 진입을 꾀하던 최익현 선생은 남원을 지키는 부대가 일본군이 아닌 우리측 진위대라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습니다. 결국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의병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되었지요. 선생과 의병 일행은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이후 대마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 대마도 유배와 선생의 올곧은 신념

 

▲ 태인의병 후 대마도로 압송되는 최익현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의 유배 생활 중 ‘굶어 죽을지언정, 왜놈의 밥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함께 유배된 의사들이 울면서 식사를 권하여 단식은 중단되었으나, 고령의 나이에 의병 생활과 유배, 단식 등으로 받은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충격으로 1906년 11월 17일, 면암 최익현 선생은 유배지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경기 포천시에 위치한 최익현 선생의 동상
(출처: 포천 홈페이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을 전후로 많은 분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순국하였으므로,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현재 ‘순국선열의 날’의 효시죠.
 
최익현 선생이 순국하신 날짜와 을사늑약일, ‘순국선열의 날’이 모두 11월 17일인 것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우국애민의 정신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던 면암 선생의 애국심을 기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65&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9328&cid=46623&categoryId=46623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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