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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 매천 황현 선생, [자식들에게 남기는 글]


오늘은 국난에 자결로 항거했던 매천 황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구한말 사대부 집안에 선비로 태어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상황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 매천 황현 선생 초상 (출처: 독립기념관)


매천 황현 선생은 세도 정치가 한창이던 1855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이후 구례로 이사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선생은 유서 깊은 장수 황씨 집안 출신으로, 그의 선조 중에는 조선시대 4대 명재상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황희 선생,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 장군,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을 지낸 황위 장군이 있습니다. 그러나 황현 선생이 태어났을 즈음에 그의 집안은 몰락한 시골의 양반 가문으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황현 선생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글을 배우며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하는 등 매우 총명했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글재주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 성균관 강의실 명륜당 (출처: 서원연합회)


청년 시절, 황현 선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여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들을 만나 견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1883년에 치른 과거시험, 선생은 28세의 나이로 과거 시험에 1등으로 뽑혔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에 황현 선생은 조정의 부패를 뼈저리게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황현 선생은 부친의 뜻에 따라 다시 상경하여 과거 시험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장원급제하는 영예를 안고 1888년 34세의 나이에 성균관의 생원이 되었으나, 선생은 곧 부정부패가 극심한 관료계의 현실에 신물을 느껴 관직을 내려놓고 다시 귀향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포기하고 재야인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황현 선생은 구례에 작은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두고 독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선생은 특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즐겨 그들의 서적을 탐독했고, 이외에도 시문과 역사,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학문을 닦았습니다.


▲ 황현선생 시비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매천 황현 선생 하면 떠오르는 서적이 바로「매천야록」인데요. 이 책은 언제 쓰여졌을까요?


황현 선생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있었을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참다 못한 백성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 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우리나라의 영토를 전쟁터로 사용하는 등 점점 국운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도하던 황현 선생은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주기 위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하였습니다. 「매천야록」은 고종 원년(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 전반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오하기문」은 선생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입니다. 「매천야록」의 경우,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들어 있어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읽어야 할 정도로 그 가치가 높은데요. 「오하기문」은 「매천야록」과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많지만,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1905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여러 관리들이 자결하자, 황현 선생은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그들의 우국충정을 기렸습니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아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 현재 호양학교 터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국력을 키우려는 사람들과 함께 2년 간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하여, 고향인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신학문을 보급하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했는데요. 그러나 호양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재정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황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맞게 됩니다. 선생은 동생 황원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는데요.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 황현 선생의 절명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구궐(久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능히 윤곡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 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 4수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9일, 소주에 다량의 아편을 타서 마시고 그 다음날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매천 황현 선생 동상


▲ 매천 황현 문화제 진행 모습

(출처: 사단법인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오는 9월 22일(금) 오후 2시, 구례군 구례섬진아트홀에서 <제9회 매천 황현 문화제>가 열립니다. 


황현 선생은 전통질서를 지키고 그것을 이어가기 위한 온건적 개혁을 지지했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통렬히 비판하며 과거 낡은 선비정신을 뛰어넘었던 분이었습니다. 황현 선생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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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의 유언 중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민족의 청년들을 걱정했던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위 말은 조선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던 강우규 의사가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는데요. 9월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98주년을 맞이하여 강우규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강우규 의사 초상 (출처: 국가보훈처)

 

강우규 의사는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고, 의기 또한 대범하여 주변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술을 배워 살림을 꾸려 나갑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서양문물을 접한 그는 전통적 학문으로는 조국의 근대화를 실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개화사상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또한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면서 당시 서학을 배척했던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이 심해짐에 따라 고향 덕천을 떠나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1883년 홍원으로 이주를 한 선생은 친형으로부터 배운 한의술을 이용하여 읍내에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는데요. 강 의사는 모은 재산을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민족의 교육과 계몽을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합니다.

 

▲ 성재 이동휘 선생 초상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1910년 8월 국운은 계속 기울어 급기야 경술국치를 맞게 되고, 이때부터 일제의 침탈이 시작되게 됩니다. 민중의 계몽과 교육이 국권 강화의 힘이라 믿었던 강우규 의사는 경술국치로 인해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요.

 

선생은 이듬해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으로 망명하여 민족계몽운동 당시 친분을 쌓았던 이동휘 , 박은식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러시아 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강우규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한인 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선생은 이곳에서 3가지 일을 추진했습니다. 첫 번째는 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신흥동을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성장시키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대한국민노인동맹단명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런 가운데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요. 신흥동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강우규 선생은 동포들을 모아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주요 활동 방침은 실전에 참여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청년 못지않게 가슴 속에 일제를 향한 분노로 뜨거운 피가 흐르던 강우규 의사는 이 같은 방법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3.1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일본은 조선 총독을 교체하고,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강우규 선생은 일본의 정책 변화에 대해 3.1운동을 무마하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술수임을 꿰뚫어 보고, 새로운 조선 총독의 처단을 결심하게 됩니다.

 

강우규 선생은 거사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미리 구입해둔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끼고 일경의 눈을 피해 1919년 8월 5일, 무사히 국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고 다니던 중, 선생은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고, 매일같이 남대문역 앞에 나아가 답사하면서 폭탄을 투척할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 제3대, 5대 조선총독을 맡은 사이토 마코토 (출처: 고구려역사저널)

 

1919년 9월 2일 거사 당일, 선생은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맨 뒤,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폭탄을 가리는 동시에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강우규 선생은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습니다.

 

▲ 강우규 의사 의거지_현 서울역 광장 (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오후 5시, 강우규 선생은 남대문역에서 환영행사를 마치고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을 담은 폭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터진 폭탄은 일대가 진동하듯 그 위력이 대단했으나 사이토 마코토 총장을 폭살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혼란스러운 군중의 틈을 의연하게 빠져나온 그는 결연한 의지로 또다른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폭살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강 의사의 은거지인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붙잡히게 됩니다.

 

▲ 강우규 의사의 사형 선고 사진과 관련한 보도기사 (출처: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강우규 선생은 일제의 법정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는데요. 선생의 기개와 인격에 압도된 일본인 판사는 ‘피고’라는 말 대신 ‘강선생’ 혹은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습니다. 이는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토 총독 암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고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최자남, 허형, 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법정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항소를 한 것은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자남 등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요. 그리고 검사가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니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요. (중략)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폭탄의 위력을 몰랐소. 내가 왜 그 불쌍한 신문기자나 사진반을 죽이겠소.”

 

* 매명한 : 재물이나 권리를 얻으려고 자기의 이름이나 명예를 팔다.

 

하지만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강우규 선생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기개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강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는 날에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時)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강우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의거를 행했던 백발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대한의 청년들의 교육을 염려했으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 서울역 광장에 설치된 강우규 의사 동상 (출처: 중구 문화관광)

 

9월 2일(토) 오전 11시, 강우규 의사의 의거가 이루어졌던 서울역 광장에서 <강우규 의사 의거 98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강우규 의사 동상은 서울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보실 수 있는데요. 강우규 의사를 생각해 보며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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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국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갈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 독립선언서 中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3.1운동에서 낭독되었고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독립선언서는 어디에서 인쇄되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ㆍ배포하고,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 (출처 : 태안군)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고 불릴 정도로 영특하여 온 마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일찍이 학문을 익혀 15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1882년 8월, 이종일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선생은 유교사상을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있었던 선생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고, 1898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1898년, 선생이 중추원 의관을 지내고 있을 때의 대한제국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워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세계 열강들의 침략에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 이종일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10개월 말에 의관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이종일 선생은 인재양성이 국력을 키우는 힘이라 생각하여 민영환 선생 등과 함께 1898년에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진작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신문 (출처 : 위키백과)

 

특히 이종일 선생은 실학운동의 재현수단으로, 언론에 선생의 사상을 전개해 갔는데요. 1898년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뎨국신문 (출처 : 샘이 깊은 물 블로그)

 

이종일 선생은 1910년까지 10여 년간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민중의 개화와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선생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요. 필화사건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 필화 : 언론매체 등에 당시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불이익을 받는 것을 뜻함.)

 

그러던 중 1919년 1월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는데요. 이후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자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이 높아져, 적대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기운이 감돌던 2월,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의 항일운동진영들은 종교 단체들과 유림, 학생 진영과 연합하여 거국적인 구국시위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독립선언식에 관한 계획을 듣게 된 이종일 선생은 자신도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고, 2월 20일부터 그가 사장으로 있던 수송동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인쇄소 안에서 선생은 공장 감독 김홍규, 보성사 총무인 장효근, 신영구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한 장 한 장 평판인쇄기에 찍어 냈습니다. 그렇게 인쇄된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는 각계의 동지들에게 돌려졌습니다.

 

▲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 (출처 : 쇼콜라 블로그)

 

2월 28일 밤, 민족대표 33인은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생 역시 민족대표로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이종일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이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된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 이종일 선생과 보성사 직원들이 선언한 자주독립선언문

 (출처 :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도 이종일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세웠는데요. 1922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그때 낭독할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 김홍규 선생에게 인쇄하도록 지시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사전에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종일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평생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동상 (출처 : 태안군)

 

8월 31일(목), 옥파 이종일 선생의 서거 92주기를 기해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에서 추모제향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청껏 부르짖었던 때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이면에는 이종일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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