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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개봉하면서, 실제 박열 선생의 삶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박열 선생의 공적과 더불어 정신적 동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 등, 박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 역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인물 역시 이번 영화로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바로, 박열 선생 재판에서 변론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입니다.


스크린에서 그는 단지 식민지 청년에게 연민을 느끼는 선한 심성의 소유자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동정심이나 인권 의식을 뛰어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군국주의 반대 투쟁을 펼친 강골이었습니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후세 다쓰지. 오늘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까 합니다. 함께 살펴보시죠.


▲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시보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껴 1903년 변호사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11년,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하여 일본 검찰의 밤샘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론을 무료로 맡았는데요. 그의 도움으로 당시 최팔용 선생 등 많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후세 변호사는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평생 서겠다”는 뜻을 담은 글 ‘자기 혁명의 고백’을 언론에 배포하기에 이릅니다. 1923년 8월에는 서울을 처음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자 후세 변호사는 이듬해 독자적인 조사 보고서를 내는 등, 진상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의 내용처럼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가 일왕 폭살 혐의, 이른바 ‘대역죄’로 기소되자,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조작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는데요. 재판에서는 물증도 없이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를 거세게 비판하였습니다.


▲ 가네코 후미코(좌)와 박열 선생(우)


후세 변호사는 재판 이후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의 옥중 결혼도 도왔으며, 가네코 여사의 유골을 발굴해 화장한 뒤 박열 선생의 형에게 전해주었는데요. 덕분에 가네코 여사는 먼 길을 돌아 박열 선생의 고향, 문경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 왼쪽에서 2번째가 박열 의사, 맨 오른쪽이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많은 조선인들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 왕궁 바로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도와 사형을 피하게 도와주었고, 1925년 을축대홍수 때는 조선 수재민 구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으로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자 다시 조선을 찾아와 중재를 이끌었습니다. 이 때 궁삼면 일대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을 정도로 그는 조선인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이어 김재봉, 강달영 등이 조직을 재건하려다 붙잡힌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후세 변호사는 광복 후에도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을 펼치고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 일행에게 자신이 쓴 ‘조선건국 헌법초안 사고’를 선물로 건네며 대한민국의 부흥과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일제 치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을 변호해 주었던 후세 다쓰지는 1953년 9월 13일 타계했는데요. 그의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죠.


2004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이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에 헌신했던 그동안의 노력과 공적들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 훈장 추서는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는데요. 그 당시 건국훈장을 받았던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기록되었죠.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합니다.”

- 후세 다쓰지 -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 유일하게 사죄를 한 일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홀로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일왕을 신격화하며 맹목적으로 숭배할 때 군국주의 반대에 앞장섰으며,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억울하게 기소된 민중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변호사. 그가 보여준 평등한 자애심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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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현석

    2017.07.07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세 변호사와 박열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일본인 소설가인 나카니시 이노스케인 듯합니다. 이번 영화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그 역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인을 주인공 삼아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소설,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모델로 한 소설, 불령선인은 일제에 의해 날조된 말이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소설 3편을 썼는데, 이는 그의 조선과 관련된 3부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도 친분이 있던 사람으로, 그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일본인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저항시인으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오는 6월 29일(목) 오후 4시 서울 종로구의 AW컨벤션센터에서, 한용운 선생의 서거 제73주기를 기리는 ‘만해 추모재’가 열리는데요. 독립운동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애와 업적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분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 추모재(追慕齋) : 불교 용어로, 고인을 그리며 명복을 비는 불공을 말함.


▲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그는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그는 돌연 속세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1896년 집을 나선 선생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습니다. 불교 서적을 탐문하며 수도하던 그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잠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는데요. 1905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본격적으로 승려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


1910년 선생은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혁하는 방법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해 1913년 발간함으로서 불교계의 일대 혁신을 일으킵니다. 또한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과의 합병 발표에 거세게 반대하여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를 거침없이 규탄하였습니다. 또한 한용운 선생은 1914년부터 1918년에 걸쳐 많은 불교 서적을 발간하면서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용운 선생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탭니다. 그는 불교 측 승려 자격으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나아가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3월 1일 오후, 민족선언서가 시내 일원에 배포됐고,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개최했습니다.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습니다.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의 수형기록표 (출처: 독립기념관)


그리고 곧바로 출동한 일경에 의해 체포된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선생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는데요. 그는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합니다. 또,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한 뒤, 총독부에 대해 정교의 분립을 주장하면서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하는 등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돌리는데 매진했습니다. 


▲ 만해 기념관의 한용운 선생 흉상

(경기 광주시 중부면 소재)


선생은 문학사에도 큰 획을 그었는데요. 근대적 시인, 3.1운동 세대의 저항시인으로 활약했죠.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첫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는 한편, 시조와 한시를 포함해 300여 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세간에 선보였습니다. 물론, 평가하는 이들에 따라 한용운 선생이 쓴 시의 대상이 조국 혹은 불교적 대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지만 독립을 염원하던 그의 삶을 따져보면 분명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던 자신의 심증을 드러낸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독립 의지는 일제 말기까지 이어졌습니다. 1940년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4년 6월 29일, 한용운 선생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토록 바라던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입적에 들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한용운 선생과 관련해 다양한 일화가 있습니다. 3.1 독립선언에 합류한 33인 중 1인이었던 최남선이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자, 선생은 최남선이 죽었다며 장례를 치러버렸다고 하죠. 또, 그가 1944년 마지막까지 살았던 성북동 심우장(사택)이 북향을 향해 지은 까닭은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서였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독립을 향한 간절한 염원으로 한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는데요. 오늘 날, 만해 한용운 선생이 종교를 떠나 민족의 지도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건, 그의 행동 저변에 깔려있는, 진실된 애국심일 것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서거 제73주기인 6월 29일, 한용운 선생의 유명한 시, ‘님의 침묵’을 읽으며 그의 올곧은 정신을 기억해 봅시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만해 한용운 기념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소재)


▲ 만해 한용운의 처소 ‘심우장’ 


참고 사이트

네이버 캐스트


제10기 훈남훈녀 온라인 기자단이 찾은 한용운 선생 생가

http://mpva.tistory.com/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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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의 재판 과정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개봉됩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박열’에 대해 ‘90% 고증’했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만큼,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실제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이번 영화로 인해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박열 선생


박열 선생은 1902년 2월 3일,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이 민족의식을 확립하고 반일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조선인 교사의 고백 이후부터였습니다. 4년제 보통학교에 통학하던 박열 선생은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교사가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했다는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는 것을 목도합니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당시 3.1운동에 참여하다가 퇴학당한 선생은,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인 문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하였지만,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그해 10월경, 일본의 도쿄로 건너갔습니다.


도쿄에 도착한 박열 선생은 다른 조선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고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요. 생활고 속에서도 그는 학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당시 저명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교류하며 그들의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반제국주의 이론을 수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아나키즘사상에 고무되었던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그는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습니다. 선생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며 응징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거침없이 친일파를 규탄하였습니다.


▲ 가네코 후미코(좌)와 박열 선생(우)


그리고 1922년 2월 경, 박열 선생은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어린시절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겪으며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일본인 여성이었는데요. 그녀는 우연히 조선 잡지에 실린 박열 선생의 자작시를 보고 감동을 받아 선생을 흠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네코 여사는 박열 선생이 지은 시를 보고 “그의 시 속에서 오랫동안 찾고 있던 것을 찾았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두 사람은 곧 만나게 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한편, 박열 선생은 도쿄에서 김약수, 조봉암, 김종범 등과 흑도회를 조직하였으나 김약수, 조봉암 등의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대립한 끝에 해산하고 맙니다. 대신 자신과 뜻이 맞는 장상중, 홍진유 등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선생은 1923년 4월 중순경,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는데요. 흑우회의 정기모임에서는 주로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외에도 박열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1923년 9월에 이르러서는 조국을 위해 보다 큰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본 천황을 비롯하여 황족과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일 1월 21일자 신문


하지만, 거사를 위한 폭탄을 구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동지 김중한을 보내려던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졌습니다. 결국 일본에게 피체된 그는 재판 중 그의 일본국왕 폭살 시도가 밝혀지는 바람에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열 선생의 행동은 일본을 한차례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선생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인 것인데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또한, 박열 선생은 조사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혀 일본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형 판결이 난 후에도 선생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습니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만에 특별 감형시킨다는 발표를 합니다. 이는 일본 스스로 조작사건을 인정한 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이후까지도 박열 선생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선생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인데요.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되었던 박열 선생은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 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습니다. 22년 2개월이라는, 실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인데요. 정부는 박열 선생의 애국정신과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출옥한 박열 선생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촬영한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박열의사기념관(경북 문경시 소재)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고 말했던 박열 선생. 그의 항일투쟁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이번 포스팅을 통해 시대를 앞서간 독립운동가였던 박열 선생과, 그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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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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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11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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