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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을 위해 애쓴 수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억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일 텐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고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정정화 선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왼쪽 첫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기록원)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정화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910년 가을 대한협회의 회장을 지냈던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환과 혼인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출처 : 눈&귀 블로그)


개화파 집안에서 성장한 남편 김의환의 영향으로, 정정화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정정화 선생에게 우리나라에도 독립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민족의식이 일깨워진 계기가 되었는데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을 목도하고 그 이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환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면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선생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치며 열차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도착하게 되었는데요. 먼저 망명해 있던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임무를 받고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정정화 선생의 활약이 시작되었는데요. 선생은 일본의 감시가 비교적 심하지 않은 여성의 신분을 이용하여 무려 6번이나 국내를 왕복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게 됩니다.

 

▲ 정정화 선생과 그녀의 아들 (출처 : 국가기록원)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1922년 6월 중순, 세 번째로 밀파되어 압록강을 건너던 정정화 선생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던 것인데요. 조사를 받고 풀려난 정정화 선생은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다시 상해로 갔습니다.


1924년 12월, 정정화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듬해 6월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힘겨운 시기였지만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하고 부상을 돌보는 등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하며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요. 이 때 정정화 선생 가족 또한 이동녕, 김구, 엄항섭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따라 이동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과 정정화 선생 가족_앞줄 왼쪽 두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보훈처)

 

1934년 정정화 선생은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선생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요.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아래 있는 중경의 3.1유치원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당시 임시정부의 안살림은 정정화 선생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6월 각 당의 대표들이 남목청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정정화 선생은 이 때 총상을 입은 김구,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선생 등을 간호하며 뒷바라지하였습니다. 1940년 3월 초 임시정부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을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도 바로 정정화 선생이었습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기념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정정화 선생은 각 정파의 부인들과 함께 여성 차원의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대한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는데요. 훈련부장에 선출된 정정화 선생은 국내외 한인 부녀의 단결을 위해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 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였으며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해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정화 선생은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 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정정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그녀가 보여준 헌신은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김구 선생은 그녀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녹두꽃」에서 선생은,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안에 계시듯 조국은, 잃어버린 조국은 늘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임시정부에서 교육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정정화 선생. 그리고 힘겨운 시기에도 그녀가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조국,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이 되찾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44766&cid=40942&categoryId=34465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904&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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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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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이번 포스팅에서는 일제강점기 무력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박상진 의사 초상

 

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상진 선생은 1907년 우리나라 근대식 사립학교인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할 때까지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익혔습니다.


 

▲ 울산의 박상진의사 생가(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이후 선생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식민지의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사임합니다.

 

판사직을 사임한 박상진 선생은 이듬해 1911년 일제 치하에 고통 받는 조국을 향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중국 만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허위의 형인 허겸과 이상용, 김동삼, 김대락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고 모색하였습니다.

 

▲ 종숙 박시준에게 독립자금 부탁을 하는 편지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이 당시 중국에서는 민주혁명으로서 신해혁명이 진행 중이었는데요. 박상진 선생에게 만주에서의 활동은 잔존하고 있던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주의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린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해혁명을 목격한 박상진 선생은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선생의 개인적 경험은 선생이 독립·혁명 단체로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겉으로는 상업적 무역과 곡물상으로 위장하여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아 독립운동기지와 독립자금조달기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1915년 7월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을 맡게 됩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 서른둘이었습니다.

 

▲ 고헌 박상진 선생이 직접 쓴 엽서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로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기본강령을 바탕으로 그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나갔습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는데요. 그러나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친일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요.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박상진 선생은 군자금 강제모금의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서 무기를 구입하여 반입하기로 합니다. 선생은 1916년 무기를 만주에서 구입해 오던 중 서울에서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됩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 1920년 박상진 의사의 형판결문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출옥 후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하게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합니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되어 박상진 선생은 일경에 체포됩니다. 이후 선생은 사형을 언도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박상진 의사의 옥중시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두 번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이룩한 일 하나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청산은 비웃고 물길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구나
- 박상진 의사의 옥중 청취서 中

 

고헌 박상진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그마저도 ‘이룩한 일 하나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선생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선생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일 부호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 우리 민족정기가 건재함을 표출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이후 의열단 등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 울산에 위치한 박상진의사 동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지난 8월 15일(화)에 울산 송정동 소재 고헌 선생 생가에서 ‘고헌 박상진 의사 96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고헌 박상진 의사의 행동력과 그의 업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그를 기억해 주세요.

 

*참고사이트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http://www.goheon.or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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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7.08.1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와 문화, 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김준식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는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보훈인물(독립운동가+전쟁영웅)' 정책 홍보 카페의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 하면 그래도 대한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박상진 의사께서 대한민국 최초의 법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 분들께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나 경력 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관련 정보의 더욱 많은 발굴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상진 의사께서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보훈인물' 정책처럼 전쟁기념관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인물을 매월 선정하는 '이달의 호국인물' 정책의 올해 8월의 주인공이 되셨기 때문에 8월 중순인 지금, 이 글을 보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앞으로도 훈터 관계자 분들과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께서도 진정한 보훈의 의미를 많은 분들께 널리 알릴 수 있는 기사들로 네티즌 분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저의 글을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8. 17.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 문화, 나라사랑(보훈)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달의 보훈인물' 카페 고문-대학생, 김준식 드림.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전역에 태극기가 넘실거렸습니다.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는 8월 15일(화),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번 광복절을 맞이하여 국가보훈처에서 진행하는 독립유공자 포상과 각종 행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제72주년 광복절 계기 이영삼 선생 등 독립유공자 128명 포상


▲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애국인사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보훈처는 8월 15일(화)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1909년 전북 김제ㆍ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이영삼 선생 등 12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합니다. 이번에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63명(애국장 12명, 애족장 51명), 건국포장 16명, 대통령표창 49명입니다.


제72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의병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이영삼 선생


합장부(전주형무소, 1916).
이영삼 선생이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0225일 순국하였고,
다음날(226) 가매장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 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이영삼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이영삼 선생은 전북 임피(현재 군산) 출신으로 1909년 (음력) 7월 8일 박찬중(朴贊仲) 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함열(현재 익산), 전주, 금구(현재 김제) 일대에서 의병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영삼 선생의 옥중 순국은 일제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비전투 의병에게도 예외 없이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전주형무소, 1916)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감된 지 5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 합장부 - 일제하 형무소에 수감 중 사망한 사람들을 가매장·합장한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 문건)

 

# 대학 재학 중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김태술 선생


매일신보 191948일자.
평양 만세시위 주도자 김태술 선생 등이 미국 선교사 집에 은신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태술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에 소재한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무황제 봉도회(奉悼會)에 참가하여 참여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요. 3월 15일 경에는 독립만세운동 선전을 위해 일제에 보내는 2∼3건의 「경고문」을 작성하고, 인쇄하였습니다. 활동 직후에는 미국인 선교사 집에 피신해 있던 중 체포되었는데요. 이는 선교사들의 3.1운동 지원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 강화도에서 만세시위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계기봉 선생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12. 18.)
계기봉 선생이 1919318일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소재 시장에서 1만여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계기봉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19년 3월 경기도 강화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았습니다. 이 시위는 강화도의 최대 규모(참가인원 1만여 명)였는데요. 계기봉 선생이 받은 태형은 반인간적이고 잔인한 형벌 형태의 피해 사례에 해당됩니다.

 

#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한 열혈 여학생, 최윤숙 선생


출옥 당시 최윤숙 선생과 함께 활동한 여학생들의 사진, 맨 오른쪽이 최윤숙 선생.
(동아일보出獄女學生, 1930. 3. 26.)

 

1930년 초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최윤숙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최윤숙 선생은 1930년 1월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학생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최윤숙 선생 등은 광주학생운동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과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요. 선생의 활약상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동조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의 참여 방식과 활동 양상을 잘 보여줍니다.

 

#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선 미주 독립운동계 대모 박영숙 선생

 

미국에서 여러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지원에 앞장선 박영숙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됩니다.
박영숙 선생은 1919년 3월 신한부인회 서기,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 1922년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총부 재무, 1943년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 지부 단장 등 독립운동단체 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선생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며,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 ‘의무금’, ‘특별연’, ‘3.1절 기념금’, ‘국치기념금’, ‘독립금’, ‘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광복군 등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는데요.
박영숙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과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한 한시대(’95 독립장) 선생의 부인으로, 부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신한민보에 보도된 대한여자애국단 델리노 지방회의 광복군 축하식 (1940. 11. 7.)

 

# 식민지 본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독립을 절규한 윤구용 선생

 

윤구용 선생이 부친께 보낸 편지(1931. 2. 28.)

 

일본에서 반제 항일운동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윤구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윤구용 선생은 1929년 경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체류하던 중 1933년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활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여 동안 유치되었습니다. 이듬해 2월, 선생은 반제 동경지방조직(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병 보석으로 석방 직후 서거하였는데요. 선생에 대한 포상은 󰡔특고월보󰡕(1934.1∼1937.12) 기사 및 동경 체류 중 국내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활동내용 등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2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됩니다.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760명, 건국포장 1,212명, 대통령표창 2,807명 등 총 14,779명인데요.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예정입니다.


특히,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노력해나갈 계획입니다.

 

# 광복 72주년을 기념하는 국가보훈처의 행사

 

 

▲ () 지난 811() 입국하여 13() 오전 독립기념관을 찾은 독립유공자 후손들.
(아래)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 선생과 손자부 헬렌 안 선생. (출처 :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이번 제72주년 광복절을 계기로,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을 비롯하여 미국과 중국 등 6개국에서 38명의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을 초청하여 6박 7일간 독립운동의 현장을 돌아보고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특별행사를 진행합니다.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는 1995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매년 개최하는 행사로, 올해 행사에서는 외국인 독립유공자와 여성 독립유공자, 부부 독립유공자 후손을 발굴하여 특별 초청하였습니다.

 

#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캠페인

 

또한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으로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드리지 못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고 있습니다.

 

위 이미지 클릭시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명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단에 등록된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경우, 국가보훈처로 후손 신청을 하시면 되는데요. 족보, 제적등본(가족관계증명서), 당안ㆍ호구부(중국), 출생ㆍ사망증명서 등 독립유공자와의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국가보훈처로 제출하면 후손 확인 후 훈장을 전수받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044-202-5457)로 문의해주세요.


아직 전하지 못한 5,469개 훈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캠페인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는 8월 15일(화)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거행됩니다. 그외에도 지방 곳곳에서 광복절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니 태극기를 게양하고 광복절 행사에도 참여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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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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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창용

    2017.08.15 0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유복〇
    참으로 꿈이외라. 〇〇〇의 추〇를 듯, 오늘 또 풍수군의 타롭을 박하노니 기구한 운명의 복〇에 〇〇자실하〇나이라.
    함〇하였으나 그 납목 할 만한 의약한 신체를 보면서도 무슨 병이란 것을 확언하지 못합되라. 그 뼈만 남은 신체노인 같은 기침. 말하지 악하〇율〇〇

    윤구용 선생이 부친께 보낸 편지를 해독하려고 했으나.. 알아보기 힘들어서 더 이상은...
    나와 이름이 무려 66%나 같아서 더 애착이 가는데...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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