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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독립의 염원은 나이를 불문하고 한결같았습니다. 1940년대 초, 일제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학생들이 항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산 항일학생 의거’입니다.


오는 11월 23일, 부산 항일학생 의거 제77주년을 맞이하여 그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일명 ‘노다이 사건’의 배경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일제가 전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조선 학생들의 군사 교련 훈련도 강화되었죠.


▲ 일제강점기 구덕운동장 (출처: 부산시야구소프트볼협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구덕운동장)에는 부산, 마산, 진주 등 인근 지역 학생들이 참가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대회’(군사 훈련을 겸한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제1회 국방대회에서 조선인 학교인 동래중학교(현재 동래고등학교)가 우승했기 때문에, 일본인 학교 교관들은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전인 11월 21, 22일에 있었던 모의 야영전투훈련 중, 심판장이었던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에게는 고된 산지를 우회시키고 일본인 학생에게는 평지 전투 훈련을 시키는 등 편파적인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 부산광복기념관에 있는 부산항일학생운동 디오라마


또한, 노다이는 제2회 국방대회 당일에도 동래중학교가 경기에서 이기면 트집을 잡아 재시합을 시키거나, 반칙을 선언하는 등 조선인 학교의 성적을 부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학생들은 계속 항의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 동래중학교의 우승은 거의 확실했습니다. 마지막 장거리 구보 행군을 남겨둔 상태였죠. 만약 구보 행군에서 동래중학교가 실격하더라도 부산중학교를 0.5점 앞서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총점을 계산하니 뜻밖에도 부산중학교가 1위로 확인되었고, 이에 동래중학교의 김영근 교사와 학생들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에 격렬히 항의하였습니다. 이에 노다이는 “심판의 판정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하므로 판정을 따르라”며 일축하였습니다.


# 부정 심판에 분노한 학생들, 항일투쟁을 벌이다


▲ 부산 항일 학생 의거 상황 설명 모형


부정 심판과 민족적 차별에 분노한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은 폐회식 마지막 식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 때, 일본 국가 대신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여라!”, “왜놈 죽여라!”라고 절규하였습니다. 


두 학교의 학생들은 시내 시위 행진을 벌였고 4,5학년을 중심으로 400여 명의 학생들이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여 외등과 유리 창문을 깨뜨렸습니다.


▲ 일제강점기 학생 항일 운동 모습


오후 10시경 학생들은 해산하기 시작했으나 부산헌병대에서 각 경찰서에 긴급지시를 내려 귀가하는 학생들을 대거 검거,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 20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관헌의 압력에 못 이겨 두 학교는 자체적으로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의 처벌을 실시하였습니다.


# 부산항일학생운동, 그 이후


부산항일학생운동, 일명 ‘노다이 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일제 말기 삼엄한 전시 체제 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발휘한 대규모의 학생 운동이었습니다. 일제의 보도 통제로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약 보도가 되었다면 전국적으로 큰 파급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부산 항일학생 의거 기념 동상 (출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 부산 항일학생 의거 기념탑 (출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오는 11월 23일(목) 오전 11시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앞에서 <제77주년 부산 항일학생 의거 기념식>이 열립니다. 77년 전 학생들의 의기와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참고자료

- 사단법인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 http://i1123.org/

- 부산광복기념관 전시실

-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15143&cid=55783&categoryId=56443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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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 죽암 전명운 의사


1908년 3월 2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가 잘된 일이며, 일제의 통치만이 한국을 발전시킨다는 망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망언에 분노한 청년은 같은 해 3월 23일, 미국으로 가려는 스티븐스를 부두에서 저격하였습니다. 권총이 불발되자 그는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기까지 했죠. 부상을 입어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스티븐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죽암 전명운 의사입니다. 지난 11월 18일(토)은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했던 죽암 전명운 의사의 서거 70주기였습니다. 역사 교과서 어딘가에서 본 듯하지만, 독립을 위해 무슨 일을 했던 분인지는 모르는 분들도 많을 거에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명운 의사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전명운 선생은 1884년 6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맏형의 밑에서 자랐습니다. 1898년 10월, 선생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 민권을 확대하기 위해 개최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참관하였습니다. 이를 보며 선생은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느껴 관립 한성학교에 들어가 수업 과정을 마치게 되죠.


만민공동회

▲ 만민공동회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이후 1903년 1월, 전명운 선생은 신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미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9월 중국 상해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한 전명운 선생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을 했습니다. 학업을 잠시 미룬 와중에도 선생은 꾸준히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1905년 4월 안창호 선생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청년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을사늑약 한국어본

▲ 을사늑약 한국어본 (출처:독립기념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명운 선생은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 대한제국 친일 외교고문 더램 스티븐스

한편, 당시 일제는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램 스티븐스는 일제가 한국을 속국으로 삼기 위해 파견한 ‘외교고문’이었습니다. 이 친일파 미국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 등 한국 식민지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일본인보다 더 공헌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정책 실현에 앞장섰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스티븐스의 공로를 인정하여 여러 차례 훈장과 표창, 보상금을 제공하였죠.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예전 정부의 학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


더램 스티븐스

▲ 더램 스티븐스 (출처: 치콜 블로그)


위는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램 스티븐스가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등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 망언입니다.


전명운 선생 친필 서한

▲ 전명운 선생 친필 서한 (출처: 국가보훈처)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이러한 망언이 보도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공동회를 개최하여 이에 항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표단으로 선정된 최정익, 정재관, 문양목, 이학현 선생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호텔에 방문하여 이 망언에 대한 해명과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를 묵살하고 또다시 다음과 같은 망언을 남겼습니다.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오, 동양에 대행(大幸)이라. 고종은 실덕(失德)이 태심(太甚)하고 수구당은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백성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에 강탈하지 아니하면 러시아에 빼앗겼을 것이다.”

 

항의 대표단은 이에 격분하여 스티븐스를 집단 구타한 뒤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공동회에 보고하였고, 재미 한인동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습니다.

전명운 선생은 이 때 개인적으로 스티븐스를 찾아가 항의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면회 요청은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공동회에 참석하여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전명운 선생은 모욕감과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죠.

 

#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스티븐스를 저격한 두 사람 - 전명운, 장인환 의사


장인환 선생 출감 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앞에서 전명운 선생(좌)과 장인환 선생(우)

▲ 장인환 선생 출감 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앞에서 전명운 선생(좌)과 장인환 선생(우)

 
전명운 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통감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자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무기를 구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선생은 1908년 3월 23일,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나타난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권총이 불발되었고 선생은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동보국회 회원, 장인환 선생의 권총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 중 다른 한 발이 전명운 선생의 어깨를 관통하였고, 선생은 총탄 세례를 받은 스티븐스와 함께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스티븐스는 이틀 후에 사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전명운 선생은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신문 전문

▲ 샌프란시스코 신문 전문 (출처: 스탐노스블로그)

전명운, 장인환 선생의 의거 사실이 알려지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두 의사에 대한 후원회를 결성하여 재판 지원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공리(公理)의 적’, 일본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두 의사의 의거를 민족의 자유 쟁취를 위한 전쟁, 즉 ‘독립전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를 비롯한 미국의 신문들도 일제히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적(公敵)'이라는 제목으로 두 의사의 친일 미국인 처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당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대다수 미국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동정을 표했으며 국내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약 한 달에 걸쳐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 일제의 공작에도 불구, 무죄 석방된 전명운 의사
1908년 4월 3일, 전명운 선생은 법정에 출두하여 다음과 같이 의거의 소신을 밝혔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우리 국권을 빼앗고, 우리 재정을 흡수하고, 우리 관직을 차지하며, 헌병 순사가 전국에 가득 찼다. 그러므로 내가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 국가에 헌신하려던 것인데 지금 스티븐스가 각처에 통신하여 말하기를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하고 일본인에게 감복한다'고 하니 이것은 속이고 업신여기기도 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도적을 죽이려 한 것이다." 
 
선생의 이처럼 애국심에 불타는 의거의 동기는 미국의 각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 내의 한인 동포들은 물론, 미국인들까지도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게 하였습니다. 일제가 선생을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도록 공작을 부렸지만, 선생은 1908년 6월 28일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 끝나지 않은 독립을 향한 염원
이후 전명운 선생은 재미 일본인들에 의한 위해(危害) 가능성을 고려하여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안중근 의사를 만났고, 안중근 의사가 조직한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 안중근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이후 1909년 7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전명운 선생은 그의 의거를 계기로 출범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 직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매년 3.1절이 되면 재미교포 사회에서 개최하는 강연회의 초청 강사로 참석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의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된 전명운 선생의 묘

▲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된 전명운 선생의 묘

 

전명운 선생은 1947년 11월 18일, 미국에서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1994년 4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지난 11월 18일(토)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죽암 전명운 의사 70주기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명운 의사를 추모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통감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온갖 망언을 일삼았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 의사를 기억해 주시고, 그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 속에 간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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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5주기,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의 헌신


11월 17일, 훈터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오늘이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위훈을 기리는 ‘순국선열의 날’이라는 걸 아실 거에요.


이와 더불어 오늘은, 평생을 구국운동에 헌신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 85주기’이기도 합니다.  이회영 선생과 일가족은 장래가 보장된 명문가의 자손이었지만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 85주기를 맞이하여, 선생이 실천했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생애에 대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9대가 정승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손

1910년 겨울 압록강을 넘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일가입니다.


▲ 백사 이항복 선생

(출처: 일장복 블로그)


이회영 선생은 1867년 3월 17일, 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 선생이었습니다. 이항복 선생 이래 이회영 선생의 아버지, 이유승 선생에 이르기까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였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우당 이회영 선생과 형제(형 건영, 석영, 철영과 아우인 시영, 호영 등) 50여 가족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힘쓰다

만주로 망명 당시 처분한 재산은 40만원 정도였는데 이는 현재의 기준으로 약 600억 원에 이르며,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의 헌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주와 상해 등지에서 이회영 선생 형제가 독립투쟁을 하는 동안 가족들이 겪은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죠.


▲ 이회영 선생 생전 모습(왼쪽, 출처 : 아쫑 아쫑 블로그)과, 이시영 선생(오른쪽, 출처 : 독립기념관)


광복 이후 아우 이시영 선생이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이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간 지나온 세월이 이회영 선생 일가에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집안의 노비를 평민으로 풀어주는 등 봉건적인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인 성정의 사람이었고 그의 형 이석영 선생 또한, 6천 석의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습니다.


#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다


▲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모습

(출처: YCY블로그)


망명 이후 만주 삼원보 지역에 정착한 이회영 선생은, 1912년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이동녕, 이상룡 선생 등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前身)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습니다.


▲ 청산리 대첩 후 모습

(출처: 아주먼이야기블로그)


신흥무관학교는 훗날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곳이죠. 이곳은 학생들에게 중등 교육과정과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 또한 이회영 선생의 가문에서 비용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의 학비와 생활비는 모두 무료였습니다.

 

#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


▲ 북경 시절 이회영 선생

(출처: YCY블로그)


이회영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전 상해에서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1924년 4월 류자명, 이을규, 백정기 선생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기 위해 「정의공보」를 간행하였습니다.


1928년 6월, 이회영 선생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논문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보내 한국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고 이후 1930년, 아들 이규창 선생과 함께 상해의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였습니다.

(* 남화한인청년연맹 : 1930년 4월 20일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운동단체)


# 65세의 나이에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 추진하다 체포되어 순국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년 중국의 동지들과 만주에서 연락근거지를 마련하고, 한·중 연합의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이회영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형 집행을 당했던 여순 감옥에서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받고 11월 17일, 6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게 되어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 서울 명동에 위치한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출처: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요즘입니다.

11월 17일, 제78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뜨거운 애국심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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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기찬

    2017.11.17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신 선생님의
    큰뜻을 마음에 새기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7.12.14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기찬 님^^ 에고ㅠ 이 댓글을 왜 이제 봤을까요.. 저도 오늘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숭고한 뜻을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 블로그 많이 방문해 주시고, 추운 겨울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2. 이유진

    2017.11.19 2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립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7.12.14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이유진 님^^ 앞으로도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 분들의 소식 많이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 블로그에 관심 가져주시고, 추운 겨울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3. 이상민

    2017.12.13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주이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참 자랑스럽습니다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7.12.14 09: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이상민 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 기리겠습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 블로그 많이 방문해 주시고, 추운 겨울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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