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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여러분! 오늘은 바로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선포된 지 9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8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점이었음은 물론,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의미 깊은 선언이었는데요. 2.8독립선언의 전개 과정과 의미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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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인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행된 독립선언서에는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였는데요,

1919년 2월 8일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 명이 선언식에 참석하여 동경 한복판에서 조국 독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


▲ 2.8 독립선언 주도 인물들. (출처: 독립기념관)


▲ 2·8 독립선언서 (출처 : 독립기념관)


2.8독립선언서에서는 한국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의 부당성과 합방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한 후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된 조국이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일본경찰은 선언식의 해산을 요구하고 탄압을 시작하였고, 2.8독립운동대표와 주도 학생 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2.8독립선언 소식은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유학생들이 일본에서도 조국을 위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국내의 시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3.1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1917년 4월 촬영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육상운동회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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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경의 제지로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는 국내에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1920년대 청년, 학생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2.8독립선언 99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재일본한국 YMCA 한국문화관에서 ‘동경 2.8독립선언 선포 제99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 2018년 2월 8일 거행된 <동경 2.8독립선언 선포 제99주년 기념식>


일본에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일본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최된 이번 기념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이찬범 주일대사관 총영사, 광복회원, 애국지사 유가족 등 250여 명이 참석하여 2.8독립선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 행사를 가졌습니다.


전날인 2월 7일,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은 일본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인 ‘이봉창 의사 순국비’를 방문하여 참배하였습니다.


▲ 이봉창 의사 순국비에 방문한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과 참석자들의 기념사진 (왼쪽) / 이봉창 의사 순국비 (오른쪽)


국가보훈처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해외 13개국에서 열리는 38여 개의 국외 독립운동 기념행사를 지원해 나갈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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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며칠째 이어지는 미세먼지 소식에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들 많으시죠. 오늘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통쾌한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김상옥 의사 (출처 :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1923년 1월 12일, 세상을 뒤흔든 의거를 감행하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쪽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부,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바로 한지 김상옥 의사였습니다.

식민통치의 중심에서 과감하게 의거를 실행했고, 이후 일본 경찰들과 ‘400대 1’의 총격전을 벌였던 김상옥 의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1. 식민지시대의 소년, 민족운동가로 자라다


김상옥 의사는 1889년 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8세 때는 쳇불공장(체의 그물) 직공으로, 14세 때는 말발굽제조 직공 등으로 일하며 어려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상옥 의사는 17세 무렵에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했고, 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는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 광복단을 조직한 채기중(왼쪽), 한훈(오른쪽) 선생.


20대에 약행상을 하며 전국 각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던 김 의사는 1913년 경북 지역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선생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경제적인 독립을 이룬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3.1운동 후 해산하는 여학생을 치려는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칼. (출처 : 독립기념관)


#2. 비밀결사 ‘혁신단’과 ‘암살단’을 조직하다


김상옥 의사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해산하는 여학생을 위협하는 일본 경찰을 맨손으로 때려 눕히고 군도를 빼앗았던 일화는 유명하죠.

의사는 같은 해 4월 1일,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합니다. 혁신단은 각지의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가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신문 발행은 중지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이후로 김 의사는 평화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죠.


1920년 봄, 김상옥 의사는 만주 소재 독립군 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 선생을 만나 무력을 통한 항일운동을 구상하고, 같은 해 4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한 것이죠.

의사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김 의사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워 나갔습니다.


#3. 다시 서울, 의거를 준비하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의열투쟁의 뜻을 굳힌 김상옥 의사는 안흥한 선생 등과 함께 폭탄, 권총, 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1922년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와 거사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종로경찰서 폭파’, 그리고 ‘조선총독 제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주요 수단이었던 경찰력의 중심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곳으로,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지에 설치된 표지석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김상옥 의사는 서울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회의를 거듭하며 활동자금을 모으고 거사용 폭탄을 마련해나갔습니다. 또한, 거사에 임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의 말을 남겼습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4. 종로경찰서에 던져진 폭탄, 일제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쪽 모퉁이에서 경찰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창문에 적중하여 굉음과 함께 터졌습니다. 김 의사는 이후 용산에 거주하던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폭탄투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지만 의사의 행방은 물론 인적사항조차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반면 김상옥 의사는 다음 목표인 조선총독 저격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서울역을 답사하는 등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그러나 밀정에 의해 며칠 뒤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무장한 순사 14명이 은신처를 포위하였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의사는 뛰어난 사격술로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승복을 입고 변장한 채 의사는 다시 동지들과 재회하여 조선총독 암살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일경은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함)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경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수백 명의 일경과 접전을 벌이던 중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시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출처 : 독립기념관)


#5.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했고, 무장한 일경을 대상으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 

그는 어린 시절 생활고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2018년 1월 22일(월) 오후 4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 인사, 유족, 시민 등이 참석하여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던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기릴 예정입니다. 


▲ 김상옥 의사 순국지 (『조선일보』, 1923년 3월 14일, 출처 : 독립기념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34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삶을 살다 가신 김상옥 의사를 함께 기억하는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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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1월 17일, 오늘은 일왕 암살 누명으로 체포되어 긴 시간 수감생활을 했던 박열 의사의 서거 44주기입니다. 

지난 여름, 박열 의사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어 세간의 관심을 얻기도 했었죠.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독립 의지를 가진 박열 의사의 삶을 함께 들여다볼까요?


▲ 박열 의사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1. 독립운동에 눈 뜨다


1902년 경북 문경시에서 태어난 박열 의사는 소년 시절 한 교사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사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일본의 요구에 맞추어 거짓교육을 시켜왔다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이에 박열 의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며 민족을 위한 큰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박열 의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2.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그리고 흑도회와 블령사 활동


박열 의사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박열 의사의 자작시를 접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그의 사상에 공감하여 민족적 차이를 넘어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어려운 생활에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정열을 쏟아 붓는 청년 박열의 내면을 보았다’

- 1922년 박열의 시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의 감상



▲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3. 일왕 폭살 계획, 세상에 드러나다


1923년 4월, 박열 의사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보다 적극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도쿄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습니다. 

일제는 그간 항일 활동을 벌여왔던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을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을 별다른 근거 없이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시켜 버렸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폭탄 구입 계획이 밝혀졌고, 박열 의사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 여론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이 사건을 ‘대지진을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하며 ‘대역사건’으로 비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박열 의사는 의거 계획이 밝혀진 이후에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재판에서는 ‘죄인취급을 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재판장에서는 미리 써 두었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김구(가운데), 양근환(왼쪽), 박열 선생(오른쪽)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4. 꺾이지 않은 독립 의지


‘저들은 내가 불령(不逞) 불경(不敬)하다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세상에서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박열


1926년 3월, 일본 정부는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이는 스스로 조작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3개월 후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유해는 박열 의사의 가족들이 일본에서 경북 문경시 문경읍으로 옮겨와 안장하였습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 의사는 1945년 10월 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습니다.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열 의사는 일본에서 순국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봉환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작년에 거행되었던 <박열 의사 43주기 추모제>


#5. 박열 의사 서거 44주기 추모제


1월 17일(수) 오전 11시, 경북 문경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에서 <박열 의사 서거 44주기 추모제>가 거행되었습니다.  


박열 의사의 서거일인 오늘, 암울한 시대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그의 삶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 참고사이트

박열의사기념관 http://www.parkyeol.com/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303&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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