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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다가오는 5월 18일은 제36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일인데요. 이를 맞아,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과 함성이 가득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함께 알아볼까요?


1980년 광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전남대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학생들 (출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 운동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전국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해 군사통치 시대로 재탈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반발하여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5•18 광주민주항쟁의 시작



5월 19일, 광주대동고등학교 정문 (출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신군부는 대규모 시위에도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대학들을 장악하고 휴교령을 내리는 등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습니다. 계엄군이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자 전남대 학생 200여명은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항의를 하며 학교 출입을 막고 있는 7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입니다.


이 때 부상을 당하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속출되자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고 시민들이 합세해 ‘계엄 철폐’,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함께 시위를 벌이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5월 20일 차량시위 (출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5월 20일, 시민들은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며 대항했고 계엄군은 모든 시외 전화를 두절시켜 광주를 고립시키고 말았습니다. 계엄군의 수위 높은 진압과 발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요. 시민들은 자신들을 시위군으로 칭하며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맞서기 위해 나주, 화순 등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시위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하고 말았던 거죠.


5•18수습대책위원회 구성 



탱크를 이끌고 시내를 장악하는 계엄군 (출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무기를 탈취한 시민들은 끝내 계엄군을 압박해 이들을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했습니다. 이후 22일, 더 이상의 피해를 확산시키지 않기 위해 종교인, 교수 등을 주축으로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고 무장해제를 시작하는 등 시위 수습에 나섰지만 계엄군이 이들의 요구조건을 거부하여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진압에 나섰습니다. 계엄군은 시내를 탈환하고 시위대를 진입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36년 전, 광주의 봄은



제 3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출처: 국가보훈처)


사실 5•18민주화운동은 시위 사실이 외부로 소문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접근을 차단하였으며 시위 기간 동안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시위 3일 째, 언론으로 보도되면서 1988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95년에는 ‘5•18특별법’ 제정, 1997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정식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5•18민주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민주•정의•인권의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5•18민정신으로 국민화합 꽃피우자’는 주제로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됩니다. 1980년 5월의 5•18민주화 운동은 계엄군의 진압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이는 “제5공화국”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켰으며 문민정부가 탄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5월 18일, 현재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희생해주신 민주영령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함께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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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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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따뜻해지는 4월, 봄 날씨를 즐기기 위해 나들이를 떠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대한민국에서는 국민의 주권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4ㆍ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다가오는 제56주년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조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 4ㆍ19혁명, ‘피의 화요일’이란 가슴 아픈 단어로 불리는 1960년의 그날로 돌아가볼까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자유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 발췌개헌 등의 불법적인 일은 1960년 3월 15일 정ㆍ부통령의 선거까지 이어졌습니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 수를 조작하는 등의 부정선거를 실시해 1960년 3월 15일, 장기집권에 성공했죠. 하지만, 마산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독재정권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 ( 출처 : 4·19혁명 홈페이지) 



이 사건이 바로 지난 번 소개해드렸던 3ㆍ15의거인데요. 총격과 폭력 등의 강제진압이 가해지면서 학생과 국민들 사이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3•15의거 자세히 보러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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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운동, 4ㆍ19혁명이 되다


시위대가 갈수록 확산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남 마산에서 최루탄을 발포하였습니다. 이후 마산시위에 나섰다가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2차 시위를 벌였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고려대학생 (출처: 4ㆍ19혁명 홈페이지)


4월 18일,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은 “지난날의 학생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멸공전선의 전위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한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으로 까지 진출하였으나 시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10여명의 학생들은 괴한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전국의 국민과 학생은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권 퇴진 시위는 1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되었고, 이는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서울 시내 모습 (출처: 4ㆍ19혁명 홈페이지)


4월 19일 화요일 오전 8시 50분, 서울역에서 중앙청 앞까지의 거리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과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아침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하지만 시위 중 경찰은 경무대로 통하는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이에 시위대와 경잘 간의 대치는 극에 달았고 서울 시내는 질서를 회복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독재규탄 및 민주수호,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의미인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계속되자 자유당 정권은 서울 지역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워 계엄군을 진주시켰고, 서울처럼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말았는데요. 4월 26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의 뜻을 밝힐 때까지 총 184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6000여 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4월 25일 교수단 시위 (출처: 4.19혁명 홈페이지)



다시 찾은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4월 25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는 각 대학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체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각 대학교수단’이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대법관 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시위는 자유당 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였습니다! (출처: 4ㆍ19혁명 홈페이지)


이후 4월 26일,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주선으로 학생과 시민대표 5명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하야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국회에 ‘대통령사임서’를 정식적으로 제출하였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4ㆍ19혁명의 역사



제 51주년 4ㆍ19혁명 기념식 (출처: 국립4ㆍ19민주묘지 홈페이지)


정권 장악을 위해 부패를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항거. 4ㆍ19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4ㆍ19혁명의 승리는 희생정신을 가지고 싸운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만들어낸 소중한 산물이며 현재 우리 국민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 속에는 조국을 위해 싸운 열사들의 숭고한 혼이 담겨있습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매년 4월 19일 국립4ㆍ19민주묘지에서는 희생자 영령 추모제전과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4월 19일, 봄나들이 대신 이곳에서 그날의 뜨거웠던 열기를 직접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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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ennyli_0127

    2016.09.01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19혁명 참가했던 그 당시 학생들은 지금 거의 80세 되여가실텐데 아픔과 희열이 교차 하겠네요



[제56주년 3•15의거] 민주주의를 위한 뜨거운 함성, 3•15의거


60년대의 민주화 운동, 하면 대부분 4•19혁명을 떠올리실 텐데요, 부정선거와 권력만을 앞세운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 그 시발점이 된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산에서 있었던 3•15의거입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마산의 3•15의거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5 의거는 왜 일어난 걸까요? 

- 3•15 의거와 ‘사사오입 개헌’ 


1954년 5.20총선에서 제1당이 된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인 의원 정수 2/3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이때 의결 정족수는 135.333…명으로 136명이 찬성이 있어야 했으나 찬성표가 135표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자유당은 4사5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135.333…의 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화시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인데요. 이로 인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3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부정과 계속되는 가난, 권력과 유착한 재벌에 대한 특혜, 경찰의 탄압 이 계속되자 국민들은 더 이상 집권당을 지지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선거가 바로 4.19혁명의 직접적인 불을 붙이게 된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입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와 3•15의거


정부통령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자유당은 위조 투표지, 3~5명이 함께 들어가서 하는 단체투표 등의 부정선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 치료 차 미국으로 건너가자 정•부통령 선거일을 앞당겼고, 병세가 악화된 조병옥 후보가 서거하게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단일 후보로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당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까지 함께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습니다. 



민주당 대표 후보였던 조병옥 선생(출처: 국가보훈처 블로그) 


1960년 3월 3일 자유당은 4할(40%)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완장부대를 동원한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 계산서 조작 등 온갖 부정 선거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가오게 된 정•부통령 선서 날.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마산의 시위는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되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저녁 7시 30분쯤부터 개표장 근처에서 2차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정전이 되면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인해 마산중학교 3학년 김영호 학생이 최초로 희생되었고 총 8명이 숨지고, 80명이 다쳤으며 200여명이 연행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죽었다” 


이 외침은 3월 15일 마산 일대에 크게 외쳐졌고, 16일 안동국 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고등학생이 주축이 된 500여명이 ‘독재정치 배격한다’며 시위를 벌였고, 17일 성남고 학생 400여명이 ‘정부는 마산 학생 8명을 죽인 책임을 지라’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지방의 소도시에서도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줄을 이었습니다.  


3·15의거 시위 현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19혁명의 발판이 되었던 3•15의거


이 후 4월 11일, 3•15 의거 시위에 참석하여 28일 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군의 시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경찰의 소행인 것으로 알려졌고,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해 도립 마산병원 앞에는 무려 3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3일에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로 인해 마산의 공공시설이 다수 파괴되었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당국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마산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끝내 4•19혁명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김주열 열사 (출처 : 마산 3·15의거 기념사업회)



마산 중앙부두에 떠있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체(출처 : 마산 3·15의거 기념사업회)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3월 12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정부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지금 마산에서는 3•15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3월 15일을 전후하여 마라톤 대회, 전국 웅변대회, 백일장 등 행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전 10시 3•15아트센터(마산)에서 ‘3•15정신 그리고 국민의 단합된 힘, 내일로 가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라는 주제로 ‘제56주년 3•15의거 기념식’을 진행하여 3•15의거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집니다. 


단순히 부정부패와 독재정권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들의 함성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만큼, 민주주의를 위해 외침과 희생이 따랐던 용기를 3•15의거 관련 행사에 참석하여 직접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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