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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요?

 

55년 전 마산에서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뜨거운 함성이 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여러분은 1960315일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55주년 3·15의거일을 맞아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의연히 일어났던 마산 시민들의 기상과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참 뜻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협작선거 물리치라!!”


 

 제1~3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뽑히기 위해 부정선거를 시도하게 됩니다.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가 저질러졌고, 처음에는 대구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2·28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4대 대통령 선거당일인 1960315일 공공연히 자행되는 부정행위를 참을 수 없었던 마산 시민들은 평화적인 시위대를 구축하여 협작선거 물리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외침이 바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의 시작이었습니다.

 

 

3·15의거 마산의 학생들 [출처: 3 15의거 기념사업회]

 

 

 당시 마산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는데요. 경찰들은 이들을 빠르게 해산시키려 했고,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인 발포를 감행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국회의원들의 자택을 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과 총에 맞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4·19혁명의 도화선 오! 김주열


 

 1차 의거가 발생한지 27일이 지난 뒤, 마산 중앙부두에서 1차 의거 당시 경찰의 최루탄에 눈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남원에 살던 김주열 열사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전액장학금을 준다는 마산 상업 고등학교의 입시를 치른 상태였습니다. 합격자 발표 날이었던 14일에 맞춰 마산을 찾았던 것인데요. 3·15의거로 인해 교육청에서 발표를 316일로 연기하게 되었고 김주열 열사는 315일 마산에 머물다 3·15의거 시위대에 합류하였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본 시민들은 분개하여 2차 의거를 일으키게 되는데요. 2차 의거는 4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3·15의거 이후 4·19혁명이 일어났고, 1960419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죽어서 흙밥이 될 바에는 무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살아생전 사람노릇을 해서 이름을 남겨놔야죠.”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의 기사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현재까지 3·15정신은 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3·15의거의 의미를 기억하고 독재와 부정에 대항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마산시민과 김주열 열사를 기리기 위해 마산에서는 매년 315일을 전후하여 기념마라톤 대회, 전국웅변대회, 백일장 등 문화체육행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는데요. 315일 당일 3·15아트센터에는 제55주년 3·15의거 기념식이 ‘3·15정신으로 갈등과 분열을 넘어 미래로 통일로라는 주제로 거행됩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민주주의. 하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1960년 마산시민들과 학생들은 많은 위협을 이겨내며 민주주의를 목 놓아 외쳤습니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315일 마산에서 울려 퍼졌던 민주주의의 함성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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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지영

    2015.03.12 2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15의거는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이번 주말에 화이트데이만 생각했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이 있었는데...
    반성해야겠어요...

  2. 2015.03.14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가정의 달 5월에는 유독 기억해야 할 날이 많습니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그 중에서도 우리가 꼭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바로 5∙18민주화 운동 기념일인데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였던 많은 분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 오늘 훈터에서는 34년 전 5월 18일 광주로 떠나보고자 합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이는 모습(사진출처 ; 5.18기록관)

 

 


5∙18민주화 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

 

5∙18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5∙18민주화 운동의 발생 배경과 전개과정을 알고 넘어가야 하는데요. 먼저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지만, 그에 비해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에 반발하여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이자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시킵니다.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출처: 5∙18기념재단)

 

 

광주에서도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진행되었는데요. 1980년 5월 17일, 전남대에 진주한 비상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고 다음날인 18일 전남대 학생 200여 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7공수부대 사이에 투석전(*돌을 던지면서 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봄 광주에서 있었던 10일간의 항쟁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이 속출하자, 학생들은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고 이후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됩니다. 시위가 점점 격화되면서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워 시민들을 진압하기에 이르렀고, 시민들도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며 대항했습니다. 이로 인해 광주시의 모든 통신이 끊기면서 광주는 고립되었고 21일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발포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월 20일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차량시위 현장(사진출처: 5•18 기록관)

 

 

이후에도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발포와 수위 높은 진압은 계속되었습니다. 집단발포 이후 시위대는 이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탈취해 계엄군과 대립하면서 민주화 운동은 무력항쟁으로 변하고 말았는데요. 23일,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수습에 나섰지만 계엄군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습위원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눠지게 됩니다. 온건파는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강경파는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민들과 계엄군의 대립은 계속됐고, 결국 1980년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대대적인 무력진압으로 5∙18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의 경우 시위 기간 동안에는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외부로 소문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인데요. 처음에는 북한 무장 간첩의 만행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3일째 되는 날부터는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론 보도 초기에는 계엄사가 이 사태를 폭동화 시켰지만,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의 충돌로 시작된 5∙18민주화 운동은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항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광주의 5월에 있었던 10일간의 항쟁은 겉으로 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문민정부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제33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식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5.18민주화 운동. 다가오는 5월 18일 「제34주년 5∙18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되는데요. 34년 전 광주의 봄에 외쳤던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희생했던 많은 민주영령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5월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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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ㄴㅂ더

    2014.05.17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18은 북한이 개입한 사태이지 운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광주의 신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어텋케 민주화 운동이 된건지??

  2. zzz

    2014.06.01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따 좌좀성님덜 달려드는거보소 ㅋㅋ 뭐만하면 일베 ㅋㅋㅋ

  3. 세금먹는광주충

    2014.06.01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저런 폭도들이 우리세금을 먹고 산다니 소름이 돋네요 정말. 북한의 개입으로 인한 폭동이었는데 저런 폭도들과 폭도들의 자식들을 6.25 참전용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주고. 나라 꼴이 참 우습네요.

  4. 우흥우흥

    2014.06.01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탄창 결합! 탄알 일발 장전! 사격 개시! 따당따당따다당!!

  5. 일베는 국민인가요?

    2014.06.01 1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희 두환이한테 그러케 당하고도 정신못차리는 우파시끼들 ㅋㅋ 할짓없나

  6. wooh530

    2014.06.09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9는그당시온국민이분노하고 군부 하나회조차들썩이자 전두환 노태우 당시인기부장세명이 모의조작한것입니다

  7. 위대한 박정희

    2015.08.23 2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민족반역자로 같은 민족의 등에 칼을 꽃던 위대한 박정희와 그 수하 전두환으로 얼마나 나라에 문제가 생겼는데... 박정희가 경제 성장을 시킨게 아니라 미국이 만든 경제 개혁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위대하신 분을 지지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얻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2014년의 시작에 앞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민주주의. 그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될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촉발한 3·15의거, 민주주의를 지키다 


광복 이후 3년만인 1948년. 유엔의 결의와 국민의 열망에 따라 국민의 투표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이 선출되어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신집권을 노린 이승만의 부정선거가 자행되게 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입니다. 


마산 시민들은 3·15 부정선거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지만 경찰은 이들에게 부차별 발포를 했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인해 많은 마산 시민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이에 맞서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3·15의거입니다. 



▲ 3·15 부정선거 개표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산 앞바다에 3·15의거에 참여했던 학생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당시 마산상고 1학년의 신분으로 3·15의거에 참여했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마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발견된 것입니다. 김주열군의 사망이 경찰의 소행임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더 거세집니다. 김주열군의 사망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독재 타도를 더욱 크게 외치며 제 2차 시위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후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낭독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괴한의 습격을 당했고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1960년 4월 19일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투쟁을 펼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 故 김주열 열사 (출처=국립3·15민주묘지 홈페이지)



3·15의거에 이어 4·19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혁명으로 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사건입니다. 4·19혁명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크고 작은 운동들은 쉼없이 일어났습니다. 



제2군사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무력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군부와 정치권을 장악한 이들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였습니다.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되자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생 시위를 벌이자 군사통치를 앞세우던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령의 전국적 확대를 의결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고 비상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휴교령 철폐', '계엄철폐'를 외치며 광주 중심대로 금남로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 중에서는 학생시위대뿐 아니라 이를 지지하던 일반 시민들도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하고 체포당하게 되었습니다. 



▲ 광주도심에서의 시위와 계엄군의 진압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외침 


5월 19일 계엄군의 첫 발포가 있은 이후 5월 20일 밤 광주역 앞에서도 발포가 이어졌습니다. 계엄군의 발표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분노한 수십만의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곳곳에서 계엄군과의 대치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퇴각을 요구하였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하게 됩니다. 평화적인 해결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무고한 목숨을 잃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민군을 형성하여 계엄군과 싸웠지만 계엄군에 둘러싸인 광주는 끝내 계엄군에 항거하고 맙니다.  



▲ 시위를 진압하려는 무장경찰을 향해 저항하는 시위학생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18 민주화운동 이후 전국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대학가를 중심으로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이 확산되었고 이후 1987년 6월 항쟁 전개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꼭 기억해야만 하는 희생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3·15의거와 4·19혁명,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 ‘민주화’를 피어내기 위해 대학생과 시민들은 많은 장애물들과 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수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을 희생하며 독재와 싸웠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2014년이 시작된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와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많은 이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 제3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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