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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07건

  1. 2017.10.02 10월의 독립운동가 - 채상덕 선생
  2. 2017.09.01 9월의 독립운동가 - 고운기 선생
  3. 2017.08.01 8월의 독립운동가 - 김수민 의병장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


일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황해도 출신의 심호 채상덕 선생입니다. 선생은 만주지역 일대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했던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개척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0월의 독립운동가 채상덕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집니다. 당시 국민들은 일제의 만행에 크게 분노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의병은 한데모여 무장 투쟁을 하게 됩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요. 이때 일어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채상덕 선생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재령·해주·신막·안악 일대에서, 안필호(安弼濩)·최봉소(崔鳳韶)·최전구(崔銓九)·윤항식(尹恒植)·이승회(李承會)·채만식(蔡萬植)·이승원(李承遠)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동참하였습니다.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당시 모습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자,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여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전개하였습니다. 


▲ 항일의병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 이후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이 각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채상덕 선생은 모두가 갈라진 상태에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요.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광한단 등 각 군단의 대표들과 함께 관전현에 모여 남만통일회의가 개최되어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22년 2월,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습니다.


선생은 대한통군부의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선임되었는데요. 얼마 되지 않아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같은 해 8월,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부총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 대한통의부 훈련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그 후 채상덕 선생은 1923년에 대한의군부를 조직하여 총재를 역임하였고, 같은 해 여름 중국 남만주 화전현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58명과 함께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지로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등 독립을 위한 체계적인 움직임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의부 대원들의 모습


또한, 1924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인 참의부에 자신의 제자와 부하들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밀정 이죽파의 밀고로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원들이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독립군 다수가 희생당하는 참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일로 비통함에 빠진 선생은 제자 이수흥에게, “너는 아직 어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독립군이 되어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당부한 뒤, 한참을 통곡하다가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1995년 채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이수흥 선생


10월, 본격적으로 가을이 찾아온 듯 쌀쌀한 날씨가 마음을 에워싸는데요. 먼 타지에서도 조국만을 위해 모든 일생을 바쳤던 10월의 독립운동가, 심호 채상덕 선생의 정신과 마음가짐을 기억하여 애국심으로 마음 따뜻해지는 한 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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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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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광복군

 


“너는 국가민족을 위하여 盡忠(진충)하여라”

 

이 말은 공창준 선생이 생을 마감하며 아들 고운기*(본명 : 공진원) 선생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공창준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운기 선생은 의병 출신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 고운기 선생


* 서훈 이후 여러 기록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이 공창준이며 선생의 본명은 공진원으로 확인되나

서훈당시 자료에서 고운기로 활동하여 포상되었기에 고운기로 표기함.


▲ 만주로 망명한 한국독립군 모습 (출처: Today happy 블로그)

 

선생은 한국독립당에서 조직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하였는데요. 1931년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에는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 낙양군관학교 터 (출처: 독립기념관)

 

1933년 고운기 선생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1934년 2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1935년 4월 졸업 이후, 선생은 1937년에 지청천 장군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당은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홍진·조소앙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고운기 선생은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유주의 중국청년공작대 (출처: 독립기념관)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해 오면서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고, 선생 또한 이들과 함께 이동하여 1938년 11월에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유주에서 고운기 선생은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게 되었는데요. 선전활동을 통해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항일투쟁의 대열로 참여하게 했습니다.


▲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고운기 선생은 제2지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시안으로 이동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아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사열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광복군 대원 중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었고, 이로 인해 비밀조직망과 거점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진 고운기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겨울 서안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서안의 총사령부가 충칭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고운기 선생 또한 1942년 대원들과 함께 충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충칭에서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의 자율적 활동을 제한하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취소시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였는데요. 이를 진행하던 중,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우리 민족을 위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고운기 선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투쟁했던 선생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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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출신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 등 무예에 능했는데요. 이러한 능력은 훗날 선생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할 줄 알았기 때문에, 훗날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이후 김수민 선생을 신임하는 많은 농민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구한말 의병의 모습들


김수민 선생은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일본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이 당시의 경험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인데요.

이후 김수민 선생은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1907년, 김수민 선생은 13도 창의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갑작스러운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작전이 무산되자, 1908년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는데요. 김수민 선생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병운동을 펼치며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습니다. 


▲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1909년 3월, 김수민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새롭게 의병부대를 재편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였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제공하거나 모처에 은닉하여 의병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됩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 선생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선생은 서울의 사정이 여의치 않자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성필동헌병대에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 정미의병


김수민 선생은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1월, 교수형을 받고 약 2년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수민 선생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문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고군분투했던 김수민 의병장. 그의 진심어린 애족, 애국심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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