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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05건

  1. 2017.08.01 8월의 독립운동가 - 김수민 의병장
  2. 2017.07.03 7월의 독립운동가 - 조마리아 여사
  3. 2017.06.01 6월의 독립운동가 - 장덕준 선생




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출신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 등 무예에 능했는데요. 이러한 능력은 훗날 선생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할 줄 알았기 때문에, 훗날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이후 김수민 선생을 신임하는 많은 농민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구한말 의병의 모습들


김수민 선생은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일본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이 당시의 경험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인데요.

이후 김수민 선생은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1907년, 김수민 선생은 13도 창의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갑작스러운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작전이 무산되자, 1908년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는데요. 김수민 선생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병운동을 펼치며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습니다. 


▲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1909년 3월, 김수민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새롭게 의병부대를 재편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였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제공하거나 모처에 은닉하여 의병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됩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 선생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선생은 서울의 사정이 여의치 않자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성필동헌병대에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 정미의병


김수민 선생은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1월, 교수형을 받고 약 2년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수민 선생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문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고군분투했던 김수민 의병장. 그의 진심어린 애족, 애국심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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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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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황해도 해주군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조마리아 여사는, 같은 지역의 안태훈 선생(1862~1905)과 혼인했는데요. 1897년 여사는 남편의 권유에 따라 영세를 받았고,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 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는 슬하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성장하여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식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요. 1905년 지병으로 서거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유산을 나눠주며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형제들의 민족교육운동 역시 조마리아 여사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 안정근 선생


1907년 1월, 서상돈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때 조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합니다. 안중근이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여사 또한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합니다. 이 의거는 국내외 각지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에게 큰 찬양을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이 주목한 국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족은 의거 직후부터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았습니다.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견하여 조마리아 여사를 추궁하였으나, 여사는 태연하게 자신의 아들 안중근은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조마리아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 안중근 의사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에게 손수 지은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죠.


▲ 뤼순감옥특별면회실에서 안중근과 홍석구 신부,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면회 장면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이후 여사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는 찬양과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뒷쪽 왼쪽 4번째가 안공근 선생)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요. 1922년 조마리아 여사는 상해로 이주하여 2남 안정근과 함께 지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사는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위암으로 인해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담대하고 의기로운 성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조마리아 여사. 이러한 여사의 인품을 토대로 한 가르침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간 자식들에 가려져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은 잘 드러나 있지 않았는데요.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던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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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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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송 장덕준 선생


추송 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명신중학교에 진학, 1911년에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2년간 일했습니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며 조만식, 김동원, 이덕환 등 평양의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장덕준 선생은 1920년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습니다.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필명 ‘추송’)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으로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의 여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장덕준 선생은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1920년 7월말,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정간처분(발행정지)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장덕준 선생은 ‘신문은 정간 중에 있지만 기자의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며, 보도할 지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학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10월 중순, 간도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 선생은 간도 용정에 이르러 여관에 여장을 풀고, 일본군 헌병대장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추궁하고 힐책합니다. 일본군측은 당연히 그러한 일이 없다고 부정하면서 후일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여관으로 돌아와 취재 중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선생은 일본인 두세 명에 불려 나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이날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1921년 10월 28일자)은 「장덕준씨 조난논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생이 일본군에게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 장덕준 선생 (출처: 정진석 제공)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면서 장덕준선생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리고 본받자는 취지로 기념 메달의 뒷면에 선생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 청년지사로서 일본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대한민국 언론인 추송 장덕준 선생. 평생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고 일본에 의한 동포 학살의 참극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던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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