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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14건

  1. 2018.04.02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2. 2018.02.28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
  3. 2018.02.01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완연한 봄이 된 4월. 따스한 봄을 맞아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윤현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 윤현진 선생


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선생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하며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하며 반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출처: 독립기념관)


1916년 귀국한 윤현진 선생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끔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 백산무역주식회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월 21일.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윤현진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을 맡았고,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만드는 등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윤현진 선생은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이 되어 살림을 책임지게 됩니다.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같은 해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왼쪽 뒷줄 2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아마도 위의 사진은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는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임시정부의 행정부) 성립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된 것인데요,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뒤편, 왼쪽 뒷줄 2번째에 있습니다. 


위 사진의 윤현진 선생이 유난히 다른 분들에 비해 앳된 모습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어리거나 많은 나이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 상해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60여명의 내빈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윤현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운 윤현진 선생의 묘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서 젊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함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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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김원벽 선생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3.1절이 있어 더욱 뜻 깊은 3월의 첫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원벽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 김원벽 선생 (출처 : 독립기념관)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 소재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선생은 2월 초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 학생대표들이 모여 학생간부회를 개최한 승동교회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었는데요.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김원벽 선생은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학생 대표가 중심이 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행동하는 지식인,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였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출처: 독립기념관)

 

▲ 1920년대 남대문역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군중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시작된 만세시위에서 김원벽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시위 주모자인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때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선생은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 서대문형무소 (출처: 독립기념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고, 낙향한 후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원벽 선생

 

행동하는 지식인,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었던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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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여러분!

2018년 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린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2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리게 되었네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2월의 독립운동가는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한신민단 단장, 백추 김규면 선생입니다.


▲ 김규면 선생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김규면 선생은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고, 무관이 되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학교가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되자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 김규면 선생의 직접 쓴 회고록인 ‘노병 김규면 비망록’.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이동휘 선생


이후 훈춘으로 망명한 김규면 선생은 1915년, 일제가 종교 탄압을 위해 포교규칙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를 만들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또한, 김규면 선생은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14년 이동휘 선생과 함께 중국에서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을 들 수 있지요.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청산리전투도(출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규면 선생은 이에 호응하여 대한신민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찍은 사진_1920년

(앞줄 왼쪽부터 김규면, 장병태, 이홍파, 손두현,

뒷줄 왼쪽부터 김병화, 김일수)


1924년, 김규면 선생은 윤자영 선생과 함께 조직한 상해청년동맹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한중연대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선생은 피습을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계속해서 독립운동의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10년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 (왼쪽) 김규면 선생과 아들 김호둔, (오른쪽) 말년의 김규면 선생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선생은 연해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짐지만, 선생은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어 모스크바로 피신하게 되었고,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200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어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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