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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16건

  1. 2018.08.01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2. 2018.06.29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3. 2018.06.01 6월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 (1)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무더운 여름, 많은 분들이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을 듯한데요.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민족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쓴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선생입니다.



독립협회를 통한 민중계몽, 일본의 만행에 민족의식을 자각하다


▲ 김교헌 선생(출처 : 독립기념관)


김교헌 선생은 18세가 되던 해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 한 수재였습니다. 선생은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몸담기 시작했는데,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 내각 수립과 의회 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습니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선생은 그곳에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선생은 일본인들의 횡포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으로 해직되고 말았습니다. 


대종교에 입교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다


▲ 대종교(출처 : 독립기념관)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 연구에 뜻이 있었던 선생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습니다.


▲ 신단민사(출처 : 독립기념관)


1914년에는 단군 관련 문헌자료를 모아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서 망국이후 한국 국민들의 애국혼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 대종교 단체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1916년 9월, 대종교의 초대 교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한 김교헌 선생. 그 무렵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 화룡현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했습니다.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에서부터 무장투쟁까지


▲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선생은 1919년 2월, 대종교 주요 인사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합니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세계 각국에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향후 수립될 국가는 자주 · 독립적인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둘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같은 해 3월 24일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종교인과 학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합니다. 


선생은 무력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1919년 10월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여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본은 만주 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 간도참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인 농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러한 상황에서 대종교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서일이 순국했고, 김교헌 선생은 한인들을 보호하고 대종교를 지키고자 대종교 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서일의 죽음과 일본의 한인 학살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1923년 11월 18일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합니다.


대종교의 지도자로서 민족의 무너진 혼을 일깨우고, 민족교육을 전개하고자 했던 김교헌 선생.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민족교육을 통해 민중계몽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주세요.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김교헌 선생입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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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어느덧 7월입니다. 2018년도 벌써 반이나 지났고, 호국보훈의 달인 6월도 마무리가 되었네요.

호국보훈의 달이 지났어도, 대한민국의 보훈은 계속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연미당 선생은 1908년 7월,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부친 연병환은 1919년 3월 3일 북간도 청년들의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다 체포된 독립운동 지도자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운영하던 인성학교에서 공부한 연미당 선생은 학교 졸업 후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과 결혼합니다. 


▲ 연미당, 엄항섭 선생의 결혼식 (출처: 독립기념관) 


당시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대다수 여성들이 그러했듯,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 맹활약하는데, 이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그들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임시정부를 지키며 

한인들의 힘을 결집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상하이에서는 한인 색출작업이 벌어집니다.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상해를 탈출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합니다. 그 와중에도 피습으로 부상을 입은 김구 선생 등 연로한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시기 정부요인과 가족 (출처: 독립기념관)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연미당 선생은 한인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하여 재중 한인 여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따뜻한 가슴을 가진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은 광복 직후 바로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귀국을 미룹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연미당 선생


지칠 줄 모르는 투지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다지고, 재중 한인들의 항일 의지를 독려한 연미당 선생.

그는 한국 독립운동이 깊이 뿌리내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헌신한 독립투사였습니다.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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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어느덧 2018년도 반이 지나 6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따가운 햇볕에 벌써 여름이 다가왔나 느껴지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의 첫날에 소개해 드릴 분은 바로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대위 선생입니다.


이대위 선생은 먼 미국 땅에서 한인 사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신 분입니다.



1878년 평남에서 태어난 이대위 선생은 190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선생은 교포들의 도움을 받아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 이대위 선생 (출처 : 독립기념관) 


1913년 선생은 미주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했습니다. 선생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미주한인이 한일 강제병합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음을 알리며, 한인들의 국적을 일본인과 구분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했습니다.


선생은 1914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여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동포들의 보증을 서고 정착을 돕는 영사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대한인국민회 제1회 대표원 의회(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대위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 국민회 입회 증서 자료 (출처 : 국가지정기록물 온라인 전시관)


또한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한인사회의 출판문화를 향상시켰습니다.


선생은 미주지역 대표로서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신한민보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동포들에게 알리며,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 대한인국민회가 운영한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 (뒷줄 가운데 이대위 선생) (출처 : 독립기념관)


▲ 신한민보 (출처: 국가기록지정물 온라인 전시관)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대미외교업무 수행을 위해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던 선생은 과로로 병을 얻어 1928년 서거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이라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던 6월, 호국보훈의 달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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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네스카페)

    2018.06.03 1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먼저, 이제 '가정의 달', 5월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시작되면서 나라사랑의 의미 등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요즘 더워지는 날씨가 과거 선열들의 나라를 위한 뜨거운 희생 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호국·보훈의 달', 6월에 탄신 140주년&(이번 6월로) 순국 90주기를 맞는 이대위 선생께서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점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보훈처에 추천하여 이대위 선생께서 선정이 되셨기에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분들 중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어떤 분보다도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인 이대위 선생의 이름과 업적이 널리 알려지고 홍보되는 6월 한 달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6월은 (매년 반복되는) 현충일/6·25전쟁 기념일을 비롯하여, 민선 7기 지방선거와 "대~한민국!" 열풍을 낳았던 제21회 러시아 월드컵이 열리는 만큼, 더욱 의미 있는 달인 만큼,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이번 달에도 좋은 자료에 깊이 감사를 드리고, 훈터 블로그 운영진 분들께서도 앞으로도 하시는 모든 일마다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저의 글을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 6. 3. 충남 아산에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적극 실천하고 있는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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