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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03건

  1. 2017.03.02 3월의 독립운동가 - 권병덕 선생
  2. 2017.02.02 2월의 독립운동가 - 이태준 선생
  3. 2017.01.02 1월의 독립운동가 - 이소응 선생


“나는 차라리 계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 권병덕 선생의 『조선총사(朝鮮總史)』 중 -


바로 어제가 3‧1운동이 일어난 3‧1절이었는데요. 3‧1운동이 있기 전,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제작 및 배포하였습니다. 그중에 3월의 독립운동가 ‘청암 권병덕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도교인으로서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식이 끝난 후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외친 3월의 독립운동가 ‘권병덕 선생’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868년 4월 25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태어난 권병덕 선생은 평등한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의 교의에 감명을 받고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는데요. 입교 이후 1886년 2월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에도 참여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을 꿈꾸었으며,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천도교 간부들


그러던 중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이 일어나는 등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이처럼 독립을 열망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천도교에서는 1918년 말부터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천도교에서는 행정 자치 청원, 독립 청원, 독립 선언의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도교 인사들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민족대표의 선정 등을 협의하는 등의 계획을 2월 20일경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2월 21일. 권병덕 선생은 손병희로부터 민족대표가입을 제의받았고,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이후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에게 건의서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에 보내는 청원서의 날인과 제출 등에 대하여 협의 및 서명하였습니다.


▲ 태화관 기록화


그리고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중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진행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결국 1920년 10월 30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게 되었고, 서대문감옥에서 경성감옥으로 옮겨져 옥고를 치렀습니다.


▲ 권병덕 선생의 재소자신분카드


선생은 1921년 11월 4일 출옥 직후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며, 천도교의 구파와 혁신파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1922년 천도교 혁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 및 분립하려 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고 1923년 11월 11일 수운교 본관을 창립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갔습니다.


또한, 1930년대 중후반 일제의 민족말살통치에 대항하여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 및 궁중비사(宮中祕史)를 간행하고, 『조선총사(朝鮮總史)』 를 발간하려던 중 출판법에 의해 삭제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요. 역사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권병덕 선생은 1943년 7월 13일 자택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됩니다. 정부에서는 故권병덕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고인의 넋을 기렸습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출처: 대한민국 상훈)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권병덕 선생.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3월의 독립운동가 권병덕 선생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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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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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몽골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혹시 몽골 국왕으로부터 친히 제1급 관리등급의 국가훈장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몽골에서 의술을 베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대암 이태준 선생이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조국독립에 앞장선 의술인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은 몽골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서 한국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추천으로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인해 몽골망명을 결심하게 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선생은 몽골에서 비밀군관학교 설립 계획을 하고 있던 김규식의 권유로 1914년경 몽골 고륜에 정착하여 동의의국(同議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하게 됩니다. 근대적 의술을 베풀며 몽골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선생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는데요. 특히, 몽골과 중국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도 2천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몽골의 의술을 개혁한 몽골의 슈바이처]


당시 몽골은 라마교의 영향이 커서 병에 걸리더라도 기도나 주문 등의 미신적인 치료법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러한 몽골인들에게 근대적 의술을 펼쳐 몽골인의 70~80%가 감염된 전염병을 치료하였습니다. 또한,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가 되는 등 몽골 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몽골 국가훈장을 받았을 정도면 어느 정도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겠죠?


▲ 보그드 칸(Bogd Khan)

[항일혁명활동의 중요한 역할을 자처하다]


선생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확보한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운송에 깊숙이 관여한 일입니다. 선생은 당시 한인 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담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자금의 운송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가입하여 그 비밀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는데요.


모스크바 자금 가운데 김립이 책임졌던 12만 루불의 1차분 8반 루불의 운송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북경에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됩니다. 당시 의열단 단원들이 사용한 폭탄은 질이 좋지 않아 불발되거나 단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크고 작은 사건 및 인명사고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에 선생은 우수한 폭탄제조기술자인 헝가리인 마쟈르를 의열단에 소개함으로써, 질이 우수한 각종 폭탄제조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마쟈르는 의열단의 폭탄운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제조된 폭탄들은 황옥경부 사건, 김시현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파괴공작에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선생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에게 피살되어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건국훈장 애족장(출처 : 대한민국 상훈)


자신의 일생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대암 이태준 선생.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역만리 몽골에서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했던 노력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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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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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유년의 해가 밝았습니다. 훈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를 맞아 훈터지기가 가져온 첫 번째 독립운동가는 바로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소응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춘천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습재 이소응 선생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드릴게요



습재 이소응

(習齋 李昭應)

1852. 8. 7.() ~ 1930. 3. 25.()

강원 춘천, 독립장(1962), 탄신 165주년


강원도 춘천 출신인 이소응 선생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의 후손입니다. 1872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일생을 화서학파 선배인 의암 유인석과 항일투쟁에 매진했는데요. 조선이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자 면암 최익현 등 화서학파 유생들과 반대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했습니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인석의 권유로 의병 대열에 동참했고, 1896년 춘천의병장에 추대되었습니다.

 

당시 춘천의병진에는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군인, 보부상,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는데, 선생은 의병진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한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정당성을 천명하고 백성들의 참여와 원조를 독려했습니다.

 

춘천의병은 관찰사로 부임한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경기도 가평에서 패전하여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선생은 제천 유인석 의진에 입진하고, 이들과 함께 1898년 서간도로 망명했습니다.  

 


명지에서 항일의지를 다지던 선생은 1900년 의화단 난을 계기로 유인석과 함께 귀국한 뒤 후학 양성과 제천의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경술국치 후 일제의 핍박이 극심해지자 1911년 서간도로 다시 망명했고, 철저하게 수의(守義) 생활을 고수하던 선생은 심양 외각 강평현(康平縣)에서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선생은 화서학파의 항일사상을 실천에 옮긴 학자이자,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2017년 정유년, 첫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선생에 대해서 꼭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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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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