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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16건

  1. 2018.02.28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
  2. 2018.02.01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3. 2018.01.02 1월의 독립운동가 -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2)

3.1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김원벽 선생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3.1절이 있어 더욱 뜻 깊은 3월의 첫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원벽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 김원벽 선생 (출처 : 독립기념관)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 소재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선생은 2월 초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 학생대표들이 모여 학생간부회를 개최한 승동교회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었는데요.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김원벽 선생은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학생 대표가 중심이 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행동하는 지식인,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였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출처: 독립기념관)

 

▲ 1920년대 남대문역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군중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시작된 만세시위에서 김원벽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시위 주모자인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때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선생은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 서대문형무소 (출처: 독립기념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고, 낙향한 후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원벽 선생

 

행동하는 지식인,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었던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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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여러분!

2018년 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린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2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리게 되었네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2월의 독립운동가는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한신민단 단장, 백추 김규면 선생입니다.


▲ 김규면 선생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김규면 선생은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고, 무관이 되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학교가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되자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 김규면 선생의 직접 쓴 회고록인 ‘노병 김규면 비망록’.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이동휘 선생


이후 훈춘으로 망명한 김규면 선생은 1915년, 일제가 종교 탄압을 위해 포교규칙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를 만들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또한, 김규면 선생은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14년 이동휘 선생과 함께 중국에서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을 들 수 있지요.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청산리전투도(출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규면 선생은 이에 호응하여 대한신민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찍은 사진_1920년

(앞줄 왼쪽부터 김규면, 장병태, 이홍파, 손두현,

뒷줄 왼쪽부터 김병화, 김일수)


1924년, 김규면 선생은 윤자영 선생과 함께 조직한 상해청년동맹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한중연대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선생은 피습을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계속해서 독립운동의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10년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 (왼쪽) 김규면 선생과 아들 김호둔, (오른쪽) 말년의 김규면 선생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선생은 연해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짐지만, 선생은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어 모스크바로 피신하게 되었고,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200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어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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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무술년의 해가 밝았습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처음으로 전해드릴 소식은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한인구제회, 인성학교를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을 소개해 드릴게요!


▲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1883년 1월 23일 출생한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장로교 선교사였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가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1909년,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상해로 돌아온 이후 선생은 YMCA에서 활동하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에게 여운형 선생을 소개해 주었고 한국 독립운동가를 위한 회합 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 여운형 선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미국에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상해 주재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아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에 나섰습니다. 또한, 선생은 한인학교인 ‘인성학교’를 위한 모금활동도 전개했지요.

 

▲ 인성학교 졸업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합동으로 거행되었던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에서 단상의 일본군사령부 수뇌부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하였습니다.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장면

(출처 : (사)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 선생은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되었죠. 당시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이들을 자택에 숨겨 주었습니다.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선생은 이들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아내 제랄딘 여사와 함께 상해를 탈출시켰습니다.


이후 선생은 프랑스 조계지역 언론과 경찰에 서한을 보내, 일본 경찰의 한국인에 대한 불법 체포와 검문에 항의 하였습니다.

1937년 일본군이 남경 대학살을 일으키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당시 남경에 있던 외국인들과 함께 국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출처 : 우리역사넷)


뿐만 아니라 선생은 1941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 전달하는 첩보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이듬해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한국의 YMCA의 총간사로 임명되어 6.25전쟁 중 구호활동에 전념하다 1951년 은퇴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선교사였고, 한국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였습니다. 2018년 무술년 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선생을 꼭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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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8.01.03 1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나라의 인물들도 공헌을 많이 하셨지만, 외국인 분들의 공헌은 더욱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6·25전쟁영웅과 함께 독립운동가에도 외국인 선정자를 선정하여 홍보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마침 올해도 첫 달부터 외국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을 선정하여 독립운동가 분들께 대한 감사와 보은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매우 좋습니다. 앞으로도 훈터 블로그 등을 통해서 소개 될 '이달의 보훈인물' 정책에 대해 고문인 저로서도 더 많은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었을 수도 있지만, 관계자 분들께서도 2018년 戊戌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를 상징하는 동물인 개의 장점처럼 하시는 모든 일마다 현명함과 지혜를 바탕으로 술술 잘 풀려가는 성공적인 한 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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