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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05건

  1. 2016.12.01 12월의 독립운동가 - 최수봉 의사
  2. 2016.11.01 11월의 독립운동가 – 이한응 선생 (2)
  3. 2016.10.04 10월 독립운동가 – 나운규 선생





2016년 마지막 이달의 독립운동가,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식민통치 폭압기관이었던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선생입니다. 의열단 출신으로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최수봉 의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밀양의 학도, 의열단에 들어가다


최수봉 선생은 1894년 경남 밀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신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걸었던 배움의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선생은 약산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大和族)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10년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학교에 편입하여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웠고, 1912년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1916년에 들어서는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사금광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했고, 1919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윤세주, 윤치형과 함께 3월 13일 밀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제에게 수배를 받게 되고,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습니다. 이때 최수봉 선생은 길림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동료들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운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1920년, 의열단이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수봉 선생은 이종암 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 진 것은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 놓고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폭탄은 안타깝게도 불발하였고, 일제 경찰의 추격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피체 당하고 말았습니다.


최수봉 선생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진행되었으나 일제는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해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경기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 당했고, 확정판결 한 달 보름 만인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최수봉 선생의 의거는 일제시설의 한복판에 폭탄을 던져 넣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항일 민심과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켰고, 이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으로 이어지는 쾌거를 낳았습니다. 

2016년을 마무리하는 12월, 우리는 최수봉 선생의 그 때 그 용기를 기억하고 또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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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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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우리나라를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국권수호 움직임 중 하나로 ‘구국외교’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07년 고종이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던 ‘헤이그 특사 파견’이 있습니다. 일본의 치졸함과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국권도 회복하기 위해서는 외교만큼 중요한 일이 또 없었던 것이죠.


이처럼 영국에서도 활발하게 우리나라의 상황을 알리던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바로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한응 선생’입니다. 낯선 땅에서 누구보다 조국을 뜨겁게 사랑했던, 결국 대한독립을 위해 순국을 택한 이한응 선생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봅시다.



국은(菊隱) 이한응 선생, 대한제국과 함께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다


이한응 선생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학문을 익히게 되는데요. 우리나라 최초 관립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익히고 16세부터는 새로 생긴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해 2년의 과정을 거쳐 영어를 깨쳤다고 합니다. 


1894년 성균관 진사시에 응시해 과거에 급제하지만, 직후 옛날 과거제도가 없어지고 신식 관리임용제가 생기는 바람에 문과나 무과를 보지는 못하고 광무 1년에 한성부 주사가 됩니다. 이후 1899년 관립영어학교의 교관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가 1901년 3월 민영돈이 주영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될 때 선생도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함께 영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이한응 선생의 여권, 출처=http://heyi.pe.kr/>



영국에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기 위한 외교업무를 시작하다


당시 우리나라와 외교를 맺었던 나라들은 몇 곳이 안 된다고 하는데요. 이웃나라인 청나라,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같은 서구 열강들을 포함해 고작 열 개 정도의 국가가 전부라고 합니다. 그 중 영국은 가장 중요한 외교대상국 중 하나였습니다. 이미 일본처럼 전세계의 1/4 가량을 식민지로 지배한 제국주의 국가였던 곳인데다 당시에는 미국보다 더 열강이었던 국가이기에 더욱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할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한응 선생은 함께 간 민영돈 공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외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영국의 교류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대내외 압박으로 인해 민영돈 공사가 먼저 귀국한 이후에는 혼자 남아 전권 공사 서리로서 대영외교업무를 모두 처리합니다. 이 시절을 겪으며 그는 조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갖게 됩니다.



<이한응 선생이 한반도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요구하고자 영국 외무성에 보낸 친필 공문,

출처=http://heyi.pe.kr/>



낯선 땅 영국에 꽂고자 했던 국권수호의 깃발


선생은 영국에서 지내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이긴 국가가 조선을 지배하고자 할 것임을 단박에 느꼈습니다. 선생은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며, 한반도의 평화가 유럽의 세력균형과 연결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이고 독특한 발상으로, 전쟁을 예비하기 위해 영국 외무부를 설득하려 한 것입니다. 1905년 3월에는 영국 외무대신에게 거중조정(good office)를 요청했으며 러일전쟁 초기에 을사오적에 의해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제 1차 한일협약(을사늑약)’속 내용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도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한응 선생의 주장은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우리나라의 사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기에 이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온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로부터 우리나라의 모든 공관과 대사, 공사 등 외교관을 철수시킨다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해외의 모든 공사나 외교관의 일 및 문서는 일본공사 혹은 일본인 대사에게 연계하고 오라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한응 선생의 순국기념비, 출처=http://heyi.pe.kr/>


나라가 장차 무너지고, 온 민족이 남의 노예가 되리라.

산다는 것은 욕만 더할 따름이다. 이 어찌 죽는 것보다 낫겠느냐.


이한응 선생은 명령을 받고도 약 5개월 정도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해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5월 12일, 자결 순국을 선택합니다. 이후 선생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경기도 용인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순국기념비에 새겨진 선생의 유서를 보면 당시의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지금의 우리로써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한응 선생의 마음을 기리며 현재에 감사하는 것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1월,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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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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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02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6.11.03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김준식님! 말씀 하신 내용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꼼꼼하게 검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일제강점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이루어졌던 독립운동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의 힘! 국권회복을 위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독립투쟁이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국민들의 애국심과 근대의식을 키우는데 노력했습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였는데요.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운규 선생은 ‘영화’를 통해 조국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독립군 출신이자 ‘아리랑’을 만든 감독이자 배우인 춘사 나운규 선생을 소개해 드립니다. 


나운규 선생, 3•1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하다



재건된 명동학교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 선생은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습니다. 1918년에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약 1년간의 떠돌이 생활 끝에 1919년, 함북 회령에서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3•1운동의 중심이었던 명동중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맙니다. 나운규 선생은 이를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여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지만 목숨을 건 생활에 대한 회의감에 이기지 못해 탈영 후 북간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



나운규 단성사


간도지역에서 나운규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일제가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며 공연을 하던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후 연기에 더 큰 뜻을 두게 된 나운규 선생은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할로 첫 주연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습니다.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을 영상으로 담아내다



아리랑 출연진과 제작진



나운규 영화소설 <아리랑>


그러나 백남프로덕션이 문을 닫게 되자 나운규 선생을 비롯해 윤백남을 따랐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농중조>를 첫 작품으로 내세웠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였습니다. 1926년, 나운규 선생은 이곳에서 <아리랑>을 제작하였는데요. 영화 <아리랑>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로, 선생은 이를 통해서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 받았습니다. 



나운규 선생이 제작한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담은 영화로 서양작품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삽입하여 많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게 되었죠. <아리랑>의 흥행 후에도 나운규 선생은 <풍운아>를 제작하여 꾸준한 흥행을 이어갔으며 1927년에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선생이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사랑을 찾아서>와 <벙어리 상룡>, <잘있거라> 등을 제작하여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발성영화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다



아리랑의 한 장면


나운규 선생은 꾸준하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재발하였습니다. 병중에서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폐병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습니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 공헌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나라 영화는 제작하는 족족 일제의 검열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적인 메시지를 넣은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하지만, 나운규 선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며 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10월 한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 국민은 침통했던 일제강점기를 조금이나마 참고 버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시회에서 함께하여 그의 정신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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