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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103건

  1. 2016.10.04 10월 독립운동가 – 나운규 선생
  2. 2016.09.01 9월 독립운동가 – 나중소 선생
  3. 2016.08.01 8월 독립운동가 – 채광묵•채규대 부자(父子) 의병


일제강점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이루어졌던 독립운동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의 힘! 국권회복을 위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독립투쟁이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국민들의 애국심과 근대의식을 키우는데 노력했습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였는데요.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운규 선생은 ‘영화’를 통해 조국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독립군 출신이자 ‘아리랑’을 만든 감독이자 배우인 춘사 나운규 선생을 소개해 드립니다. 


나운규 선생, 3•1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하다



재건된 명동학교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한 나운규 선생은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습니다. 1918년에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약 1년간의 떠돌이 생활 끝에 1919년, 함북 회령에서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3•1운동의 중심이었던 명동중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맙니다. 나운규 선생은 이를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여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지만 목숨을 건 생활에 대한 회의감에 이기지 못해 탈영 후 북간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



나운규 단성사


간도지역에서 나운규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일제가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며 공연을 하던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후 연기에 더 큰 뜻을 두게 된 나운규 선생은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할로 첫 주연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습니다.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을 영상으로 담아내다



아리랑 출연진과 제작진



나운규 영화소설 <아리랑>


그러나 백남프로덕션이 문을 닫게 되자 나운규 선생을 비롯해 윤백남을 따랐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농중조>를 첫 작품으로 내세웠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였습니다. 1926년, 나운규 선생은 이곳에서 <아리랑>을 제작하였는데요. 영화 <아리랑>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로, 선생은 이를 통해서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 받았습니다. 



나운규 선생이 제작한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담은 영화로 서양작품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삽입하여 많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게 되었죠. <아리랑>의 흥행 후에도 나운규 선생은 <풍운아>를 제작하여 꾸준한 흥행을 이어갔으며 1927년에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선생이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사랑을 찾아서>와 <벙어리 상룡>, <잘있거라> 등을 제작하여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발성영화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다



아리랑의 한 장면


나운규 선생은 꾸준하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재발하였습니다. 병중에서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폐병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습니다. 이후 정부에서는 그 공헌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나라 영화는 제작하는 족족 일제의 검열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적인 메시지를 넣은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하지만, 나운규 선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며 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10월 한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 국민은 침통했던 일제강점기를 조금이나마 참고 버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시회에서 함께하여 그의 정신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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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는 청산리 대첩!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했던 나중소 선생입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나중소 선생님의 일생을 지금 만나보겠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나비장군”



나중소 선생은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무예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이로 인해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곧바로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한 선생은 1907년 9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국비유학생으로 유학해 일제의 군대의 특성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나중소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 해 10월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후에는 참모부장으로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였습니다.



청산리 대첩 기록화-박환교수 

(이미지 출처 : 국가보훈처)


또한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을 겸임하며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기르는 힘썼고, 직접 일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나중소 선생이 참가했던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의 대승으로 유명합니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일제와의 전투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 정예군대와 맞서 싸웠는데요, 나중소 선생은 이중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이며 일본군을 무찔렀습니다. 결국 청산리 전투는 단 1,300여 명의 독립군으로 일본군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고 끝이 납니다.


이후 나중소 선생은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으나 6월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후임을 양성하기 위해 안도현 군인양성소에 들어가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합니다. 1922년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인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만주 독립군 단체를 모두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1924년 3월, 드디어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자,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됩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사용한 무기


1925년 3월, 애국지사들을 규합한 신민부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을 맡았고, 9월에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餉官)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맡으며 무장항일투쟁의 훈련을 계속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갔습니다.


하지만 1928년 8월, 신민부의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나중소 선생은 돌연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나비장군’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했던 나중소 선생, 자신의 뛰어난 무예와 실력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후배양성에 쏟아 부었던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독립군들에게 충분한 구심점이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우리 역시 그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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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바로 채광묵•채규대 부자(父子) 의병입니다. 오늘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에 항거하며 홍주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한 채광묵 선생과 부친의 뜻을 따라 함께 항전한 그의 아들 채규대 부자 의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 합니다.



강직한 유생, 의병이 되다



1850년, 충남 홍주 매평리의 한 가정집에서 채광묵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부친 아래서 훈육 받아 강개하고 절개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왔으며 남들보다 효성이 지극해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 10월, 일본자객들이 경복궁을 기습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을미사변 발생 후 불과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895년 12월 30일에는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단발령 공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에 전국의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 의병을 봉기해 전통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였고, 1896년 채광묵 선생 또한 홍주에서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 김복한을 총수로 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반개화, 반침략 등 반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병투쟁은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친일내각을 비판하고, 벼슬을 거부하다



홍주관찰부


그 후, 채광묵 선생은 송수만, 김운락, 심선승 등과 함께 상경하여 도약소를 차리고,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제에 대한 복수와 이 사건을 도운 친일내각의 외부대신과 법부대신 등의 탄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1901년 8월, 조정에서는 대흥의 광시에 거주하고 있던 선생에게 내부주사의 교지를 내려 보냈지만, 그는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어떻게 영예를 먼저 받을 수 있냐며 거절하였고, 자신의 뜻을 표시한 시를 남겼습니다.


대한제국의 나라 光市 산속에 숨어 / 光武國中光市隱

빛을 감추고 몸을 아끼나 이름이 없음이여 / 韜光自愛嘿無名

원수와 아직도 같은 하늘아래 있으니 살아있음이 부끄럽구나 / 讐天尙戴生猶愧

의로운 길을 찾았으니 죽음 역시 영예롭다 / 義路能尋死亦榮


채광묵 선생은 이 시를 통해 시골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살며 참고 있지만 원수를 갚을 힘이 없다는 슬픔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국모의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죽음 또한 영예로운 길이라는 말에서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된 의병 봉기, 그리고 아들 채규대 선생의 합세



의병 진압을 위해 출전한 일본군


그러던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조선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일에 대해 채광묵 선생은 유학 김기우와 이기하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통문을 작성해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을 비롯한 김기우, 허위, 김연식, 이상천 등 5명은 일본공사를 만나 일본인의 요구가 무리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 공사는 일본 순사와 헌병에게 김기우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는 경무청에 인계되고 말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 선생은 다음 해 5월 홍주의병을 함께 일으켰던 안병찬과 의병을 다시 계획하였고 군사를 모아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습니다. 민종식은 이들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의병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우고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에 진을 치는 등 홍주성을 포위공격 하였습니다.


수 차례의 싸움 끝에 이들은 홍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의진을 재편성하며 채광묵 선생은 김광우, 조회수와 함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아들 채규대는 병중이던 부친의 출진을 만류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난을 당하여 순사하는 것이 뜻이라는 채광묵 선생의 말에, 아들 채규대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한 희생, 채광묵•채규대 부자(父子)



홍주성 수복 기록화


한편, 일본군이 홍주성에서 패주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으며 일본군 보병 제 60연대 대대장 다나카 소좌의 지휘에 따 보병 2개 중대는 홍주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였죠.


홍주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며 일본 정예 부대의 고역을 끝까지 대항하였으나 끝내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고 참모장으로 활약하던 채광묵 선생과 아들 채규대를 비롯한 수백 명의 동료 의병들은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채광묵묘



채규대묘


이에 정부는 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항거하다 전사한 채광묵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의 아들 채규대에게 199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8월 한 달간 천안시 동남구에 위치한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전시장에서 채광묵•채규대 부자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가 개최됩니다.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한 부자(父子) 의병 채광묵•채규대 선생,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신 분들입니다. 이들이 지닌 충성심과 효심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본받아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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