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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훈터지기는 지난 9월 28일, 유관순 열사의 순국 97주기를 맞아 천안의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와 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사의 조국과 민족을 향한 애국심을 느낄 수 있는 천안 병천면의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에서 열사의 생애를 알아 볼 수 있는 유적지를 소개해드릴게요!



가장 먼저 열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울창한 숲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바로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 의해 불에 타 빈터만 남겨져 있던 자리를 1991년 복원한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열사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초가집 안에는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들의 모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가지에서 나오면 우측에는 유관순 열사의 기념비가, 좌측에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생가 옆에 피어있는 무궁화를 보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는데요.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열여덟 꽃다운 나이의 소녀의 자리엔 무궁화가 그 온기를 대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열사의 생가에서 약 4K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버스 한 번으로 이동이 가능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데요. 




유적지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조형물이 바로 ‘희망의 물결’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조형물 주위로 벤치가 위치하고 있어 잠시 쉬어가면서 유적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중앙에 위치한 추모각을 기준으로 왼쪽에 기념관 오른쪽에 순국자추모각이 위치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왼쪽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에 들어서기 전 바로 보이는 타임캡슐이 눈에 띄는데요.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열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선인들의 유산을 특수용기에 넣어 후대에 자손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3.1운동 당시의 모형들은 생생했던 독립운동의 현장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태극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당시 선열들이 만세를 외쳤던 현장에 함께 서서 독립만세를 외쳐 보시는 건 어떨까요?




3.1만세운동의 현장을 느낄 수 있었던 모형들을 지나쳐 나오면 유관순 열사가 형무소에서 겪었던 모진 고초를 느낄 수 있는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겪었을 고문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그밖에도 기념관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모형들이 있어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초상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현재의 우리를 살게 해준 유관순 열사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기념관에서 나왔습니다. 



기념관에서 빠져 나와 중앙에 위치한 추모각으로 향했는데요. 추모각은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맞배지붕의 한식 목조 건물로 만들어졌습니다. 



추모각에 모셔진 영정은 윤여환 화백의 작품으로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매년 열사의 순국일인 9월 28일에 추모제가 진행된다고 하는데요. 열사의 영정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추모각 입구에 위치한 향로에 향이 피어 있었는데요. 매일 열사의 혼을 기리고, 추모각에 방문한 방문객들을 위해 피워지는 향의 연기는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의 선조들의 영혼처럼 느껴졌습니다.


훈터와 떠나는 보훈여행, 어떠셨나요? 저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와 기념관을 돌아보며 열사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 보니, 나라를 사랑하는 그 고귀한 정신이 마음 속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긴 추석 연휴 기간, 천안의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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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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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은 치열한 혈투를 거듭했습니다. 정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 중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는데요. 10월의 전쟁영웅은 바로 이 저항과 역습의 최전방에서 백마고지 탈환을 이끌어낸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입니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하루 평균 5만발의 포탄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적진에 투하되는 곳으로, 작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 당시 백마고지는 포격으로 인해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될 정도로 그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국군 (출처: 군포시민신문)


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당시)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하였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는 국군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최전방으로 나아가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습니다.




▲ 적진을 향해 쏘는 박격포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이 상황에서 김경진 중령은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으로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헤쳐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있던 제6중대를 제5중대의 좌측으로 진출시켰습니다. 이후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자신도 직접 최전방으로 나아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 소비된 수 만개의 탄피 (출처: 경북일보)


정상을 20여 미터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던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의 박격포가 근처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포탄의 파편이 중령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경진 소령은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격전지로 진격하는 국군의 모습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김경진 소령이 전사한 이후 대대원들은 그가 생전 보여준 용맹한 솔선수범에 전투의지를 불태웠고, 과감히 돌격하여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경진 중령의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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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


일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황해도 출신의 심호 채상덕 선생입니다. 선생은 만주지역 일대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했던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개척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0월의 독립운동가 채상덕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집니다. 당시 국민들은 일제의 만행에 크게 분노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의병은 한데모여 무장 투쟁을 하게 됩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요. 이때 일어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채상덕 선생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재령·해주·신막·안악 일대에서, 안필호(安弼濩)·최봉소(崔鳳韶)·최전구(崔銓九)·윤항식(尹恒植)·이승회(李承會)·채만식(蔡萬植)·이승원(李承遠)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동참하였습니다.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당시 모습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자,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여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전개하였습니다. 


▲ 항일의병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 이후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이 각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채상덕 선생은 모두가 갈라진 상태에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요.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광한단 등 각 군단의 대표들과 함께 관전현에 모여 남만통일회의가 개최되어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22년 2월,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습니다.


선생은 대한통군부의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선임되었는데요. 얼마 되지 않아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같은 해 8월,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부총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 대한통의부 훈련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그 후 채상덕 선생은 1923년에 대한의군부를 조직하여 총재를 역임하였고, 같은 해 여름 중국 남만주 화전현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58명과 함께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지로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등 독립을 위한 체계적인 움직임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의부 대원들의 모습


또한, 1924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인 참의부에 자신의 제자와 부하들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밀정 이죽파의 밀고로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원들이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독립군 다수가 희생당하는 참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일로 비통함에 빠진 선생은 제자 이수흥에게, “너는 아직 어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독립군이 되어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당부한 뒤, 한참을 통곡하다가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1995년 채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이수흥 선생


10월, 본격적으로 가을이 찾아온 듯 쌀쌀한 날씨가 마음을 에워싸는데요. 먼 타지에서도 조국만을 위해 모든 일생을 바쳤던 10월의 독립운동가, 심호 채상덕 선생의 정신과 마음가짐을 기억하여 애국심으로 마음 따뜻해지는 한 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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