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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의 발발 당일, 북한군의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국토 수호를 위해 적에게 저항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이었던 감봉룡 경찰 경감이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1946년 경찰 창설 1주년 기념 시가 행진

(출처: 국방일보DB)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 지역의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개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죠.


▲ 서울에 진입하는 북한군 보병부대

(출처: 연합DB)


새벽 4시경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2연대는 북한군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김포 반도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감봉룡 경감이 근무하고 있던 개성경찰서의 병력 또한 국군과 함께 철수했죠.


▲ 6.25전쟁 당시 국군

(출처: 육군 공식블로그 동고동락)


그러나 감봉룡 경감은 그가 지휘하는 50명의 철도경찰대원과 함께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주요 요충지들을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추었습니다.


▲ 6.25전쟁 중 시가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감봉룡 경감이 이끄는 철도경찰대는 북한군의 공세에 완강히 저항했고, 개전 이후 처음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다른 통로로 진출하던 전차 5대까지 동원하여 본부 건물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은 우월한 자동화기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습니다. 총탄이 떨어지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도 감봉룡 경감과 대원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돌격하여 장렬히 산화하였습니다. 


▲ 감봉룡 경감


애초에 북한군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지만, 이들의 저항은 전쟁 초기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면서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숭고한 희생이었습니다.


정부는 감봉룡 경감의 고귀한 뜻을 기리어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국토 수호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뜻 깊은 12월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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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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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김치보 선생입니다.


김치보 선생은 1859년 9월 17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1908년 경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대한노인동맹단 단장을 지내며, 단원이었던 강우규 의사의 조선 총독 사이토 폭살 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선생은 현지에서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였습니다. 덕창국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 김치보 선생


이후 김치보 선생은 1909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같은 해 4월, 선생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 청년돈의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며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집단 거주지, 신한촌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합병’의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성명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김치보 선생은 성명회의 병탄조약 원천무효 선언서에 서명하였고, 1911년에 권업회에 참여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습니다. 


▲ 권업신문 (출처: 독립기념관)


김치보 선생은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1운동의 소식이 들려오자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 대한노인동맹단 명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생은 1919년 3월 대한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노인동맹단은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결성되어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활동 방침이었습니다. 


단장인 김치보 선생을 필두로 한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단원이었던 강우규 의사를 1919년 9월에 국내에 파견하였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고,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 강우규 의사 동상 (출처: 중구문화재청 홈페이지)


이후 1922년 4월, 김치보 선생은 해삼위천도교교구장 고문자격으로 귀국하여 최시형 선생의 아들 최동희를 만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선생의 행적은 1924년 3월까지 확인되나 이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김치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어느덧 12월,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국외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12월의 독립운동가, 김치보 선생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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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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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7.12.04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으로, 국가보훈처 '이달의 보훈인물' 카페의 고문을 맡고 있는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이제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이 시작 된 가운데, 올 한 해도 훈터에서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와 '이달의 전쟁영웅' 선정자 분들의 업적을 월별로 잘 정리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이달의 보훈인물' 선정은 계속 되겠지만, 내년에도 계속해서 좋은 정보를 통해 보훈 분야를 바탕으로 한 네티즌 분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럼 모든 보훈처 관계자 분들께서도 항상 하시는 모든 일마다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제 짧은 인사를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12. 4.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나라를 사랑하는 대학생, 김준식 드림.

    ※ 그리고, 저는 최근 보훈처의 한 홍보 매체를 통해 내년 이달의 독립운동가와 전쟁영웅 선정 결과를 확인했는데요. 혹시 훈터 블로그에서는 언제 쯤이면 이 분들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다룬 포스팅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7.12.05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김준식 님^^
      늘 애정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20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와 전쟁영웅 포스트는 12월 중순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국가보훈처 블로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추운 날씨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초기,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다부동, 포항 일대에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 통일을 이룩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군과 유엔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대거 개입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이른바 ‘인해전술’로 1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계속해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 지역을 점령했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 남진하는 중공군의 모습 (출처: 중국해방군화보사)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 중 일어났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장진호의 한파 속에서 전개된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물자의 주요 이동경로를 차단했고, 북한군 병력은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북진하던 미군 제1해병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독 추운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무려 영하 40도에 달했던 강추위로 물과 식량이 얼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하였습니다. 차량과 탱크의 기름도 얼어붙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설상가상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은 11월 27일, 미 제1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군은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11월 30일 장진호 근처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하갈우리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한 중공군이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출처: 국방부 공식 블로그)

 

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가며 가까스로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함흥 지역에 모두 진입하면서 장진호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1만 5천여 명의 미군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켰던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 부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죠.

또한, 6.25전쟁 3대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는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던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한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장진호 전투중 국군의 모습 (출처: EBS다큐멘터리)


67년 전 극한의 추위 속에서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 이 전투에서 스러져간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숨 바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국군과 유엔군의 명복을 빕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8591&cid=46628&categoryId=4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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