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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폭염이 지속되는 8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의 무더위 속 조국 수호의 의지로 북한군과 격렬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구국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경북 칠곡군 다부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전투인 ‘다부동 전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낙동강 방어작전 중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는 미군 전차
(출처: 경기문화재단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

 

# 낙동강 전선으로 집결한 북한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국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탓에 끝없이 남쪽으로 후퇴했습니다. 유엔군 역시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요. 7월 말, 낙동강이 있는 곳까지 밀려 내려온 국군과 유엔 연합군은 마지막 보루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240Km)을 연결하는 전선까지 진출했습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해서 의기양양했던 것도 잠시, 북한군은 7월 5일 오산의 죽미령 전투를 치르며 미 지상군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를 만난 이후 남진 속도가 둔화됩니다. 전차를 앞세워 경부국도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경부국도에는 미군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하게 되는데요. 이에 북한군 사령부는 빠른 남하를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해 부산까지 한번에 내려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격파하기 위해 북한군은 1950년 8월 초, 동시 공격을 위해 가용부대의 절반에 달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할 대구 북방 지역의 국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적의 주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을 몇 차례 격퇴하였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상태였습니다.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위천지역으로 물러났고 왜관일대의 미군은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다부동전투에서 미군에 의해 파괴된 북한군 전차
(출처: 경기문화재단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

 

# 구국의 전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라

그 무렵인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는데요. 8월 중순, 미군이 낙동강변 일대에 폭격을 시작했고, 그 무렵 미군 정면의 적이 도하작전 중 많은 손실을 입는 일이 벌어집니다. 또 국군 제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으로 인한 북한군 격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
(출처: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에 따라 북한군의 공격은 자연히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대구 북쪽에 위치한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군은 2만여 명의 3개 사단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이후 14대가 추가 증원) 및 각종 화기로 공격해 왔습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학도병 500여 명과 7,600여 명의 국군 병력을 투입해 필사적으로 방어했습니다. 수적으로 병력이 열세였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로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미군과의 협동으로 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일대에서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마침내 8월 20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게 되는데요. 결국 북한군은 영천 방향으로 전환하며, 한여름 무더위 속 전개되었던 다부동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 다부동~대구를 잇는 간선로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던 미 27연대 장병들과 미군 전차
(출처: 송풍수월 松風水月 블로그)

 

 # 다부동 전투를 기리는 다부동 전승비, 다부동 전적 기념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다부동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미 보병 제27연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와 제2군사령부가 1971년 12월 15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 다부동 전승비를 세웠습니다. 이 전승비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전승비는 미 보병 제27연대(존 에취 마이캘리스 대령 지휘) 용사들이 수행한 찬연한 무훈과 공훈을 길이 남기기 위한 기념비이다.
1950년 8월 이곳에서 미 27연대는 한국군 제1사단 장병과 더불어 공산침략자들을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무찔렀으며 대한민국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남긴 탁월한 지휘력과 결단성과 돌격정신을 이 겨레와 함께 영구히 간직될 것이다.

 

 

▲ 다부동 전승비 (출처: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또한,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에는 다부동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구국의 정신과 평화의 소중함을 널리 깨닫게 하기 위해 왜관지구 전투와 다부동전투에서 사용한 전쟁 유물은 물론, 다양한 6.25전쟁 유품과 무기를 살펴볼 수도 있으며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다부동 전적기념관 (출처: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비록 적군에 비해 전력은 열세였지만, ‘기필코 대한민국을 지켜내야겠다’는 굳은 의지 아래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힘을 합쳐 치러낸 다부동 전투. 이 전투의 과정에서 숨져간 수많은 무명용사들과 학도병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반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 그 속에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기억해 주세요.

 

* 참고사이트
다부동전적기념관 : http://www.dabu.or.kr/dabu/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4210&cid=46628&categoryId=46628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9121&cid=40942&categoryId=3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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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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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날을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오는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 기념관 3곳을 훈터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http://www.815gb.or.kr/)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출처 : 국가보훈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독립기념관길 2’, 안동역에서 영덕 방면으로 15km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한말 동산 유인식 선생이 교육구국운동을 일으켰던 협동학교의 자리인데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2007년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문을 연 뒤 2014년 1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는데요. 이후 증축되어 지난 6월 30일,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 지난 6월 30일 거행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 (출처: 국가보훈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관(전시1관)과 의열관(전시2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의병항쟁, 협동학교, 광복회, 독립군 기지개척 등 국내외 활동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데요. 또한, 안동의 독립운동가 1,000인을 추모하는 공간인 영상 추모관이 마련되어 있어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독립관(전시1관)에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한 때까지, 약 51년에 걸쳐 펼쳐진 경상북도 사람들의 국내외 독립운동이 담겨져 있습니다.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 자정순국, 만주지역 항일투쟁, 6.10만세운동,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등 경북 사람들의 항일투쟁과 관련된 유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의열관(전시2관)은 안동실, 추강영상실, 새싹교육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곳에서 안동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전통마을의 항일투쟁과 관련된 영상 등을 볼 수 있습니다.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련 코스보기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그리고 추석은 휴관일입니다.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이 위치한 안동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 속에서 전통을 느끼고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올 여름, 경상북도독립기념관에서 역사도 배우고 전통 체험도 하며 애국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http://1931gimpo.fgy.or.kr)

 

▲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출처 : 김포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두 번째로 소개해 드릴 기념관은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입니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2로 30번길 46’에 위치해 있는데요.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2013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경서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양촌면의 오라니장터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재조명하고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해 김포시 양촌읍에 건립되었습니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실, 사료열람실(북카페)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김포시 양촌면에서의 오라니 장터, 월곶면의 군하 장터, 고촌면, 기타지역에서의 만세 운동 전개과정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포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의병운동에 대해서도 소개되어 있답니다.

 

▲ 김포시 독립운동 기념관 (출처 : 김포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김포시 독립운동 기념관 지도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의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 및 법정공휴일(신·구정연휴, 석가탄신일, 성탄절), 근로자의 날(5월 1일)은 휴관일입니다. 기존에 잘 알지 못했던 김포 지역의 3.1만세운동과 의병항쟁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에 방문하신다면 양촌읍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오토캠핑장과 하동천생태탐방로가 있으니 가족과 함께 생생한 역사 체험도 하고, 오토캠핑장에서 즐거운 하루를 마무리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http://gsim.gen.go.kr)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곳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입니다. ‘광주광역시 서구 학생독립로 30(화정동)’에 위치해 있는데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되어 11월 3일 대규모 항일 시위로 확대되었는데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입니다.

광주시는 일제의 억압을 뚫고 불같이 일어난 광주 학생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ㆍ발전시키고자 1967년 설립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을 시작으로, 선배들의 얼을 이어받을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지난 2005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문을 새롭게 열었습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들어서면 높이 39미터의 기념탑을 볼 수 있는데요. 하나의 구심점으로 군중이 집합하는 힘을 생각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펼친 학생들의 단결된 의지를 상징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입석군들의 조화로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훈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1층은 참배실, 2층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1층 참배실은 방문객 누구나 참배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고, 2층 전시실에는 독립운동 사건 각각이 입체적인 모형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에서는 그 당시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과 학적부, 사용했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관련 코스보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일입니다. (단 3.1절, 현충일, 광복절,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제외)
역사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서 잠깐 보고 지나쳤을 광주학생 독립운동.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 기념관 3곳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가까운 독립운동 기념관에 방문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지역별 항일투쟁의 역사를 배워 의미를 더해보는 건 어떠세요? 광복 제72주년을 맞은 8월, 독립을 염원하며 고군분투했던 분들을 기억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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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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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출신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 등 무예에 능했는데요. 이러한 능력은 훗날 선생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할 줄 알았기 때문에, 훗날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이후 김수민 선생을 신임하는 많은 농민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구한말 의병의 모습들


김수민 선생은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일본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이 당시의 경험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인데요.

이후 김수민 선생은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1907년, 김수민 선생은 13도 창의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갑작스러운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작전이 무산되자, 1908년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는데요. 김수민 선생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병운동을 펼치며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습니다. 


▲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1909년 3월, 김수민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새롭게 의병부대를 재편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였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제공하거나 모처에 은닉하여 의병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됩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 선생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선생은 서울의 사정이 여의치 않자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성필동헌병대에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 정미의병


김수민 선생은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1월, 교수형을 받고 약 2년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수민 선생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문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고군분투했던 김수민 의병장. 그의 진심어린 애족, 애국심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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