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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990건

  1. 2010.11.17 [순국선열의 날 웹툰]'잊은건 아니지?' (4)
  2. 2010.11.16 호서지역 의병을 총괄하다 이강년 (1)
  3. 2010.11.11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 전해산 (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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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사랑

    2010.11.17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카툰이네요~ 저도 군대를 갔다왔지만, 순국선열분들에 비하면 제가 2년동안 느낀 부담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2. 익살이스머프

    2010.11.17 17: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한 번 순국선열에 대한 애틋함을 떠오르게 하는 웹툰이네요.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선생이 옥중에서 남긴 시-

 

 

동학군 투신, 후일 의병항쟁에 필요한 전략자원을 구축

이강년(李康秊, 1858. 12. 30~1908. 10. 13) 선생의 본은 전주이며 철종 9년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낙인(樂仁)이며 호는 운강(雲崗)이다. 선생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장성함에 따라 기골이 점차 장대해져 키가 여덟 자가 넘었고 눈빛은 불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선생은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향리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던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이때 휘하에서 농민군으로 활약하며 심산유곡을 누볐던 많은 농민들이 후에 의병항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보급조달, 지형탐색, 현지 정보망 구축과 같은 의병항쟁에 있어 긴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94년에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전쟁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이때 선생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제천에 유인석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흩어 군사들을 모집하였고, 출생지인 문경에서 거의하여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하여 농암시장에서 이들의 반역행위와 토색질한 죄상을 낱낱이 들추며 효수(梟首)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제천으로 가서 의암 유인석 선생을 찾아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하였다. 당시 영남유림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정맥을 이은 유인석 선생은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동년 11월 28일 서상열, 이춘영, 안승우 등으로부터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 직후에 많은 의병들과 유생들에게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무장 출신으로 유림과 간격이 있던 선생은 유인석 선생의 문하에 들면서 의병활동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굳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시의 의진들은 아무래도 전투력이 취약하였고 유인석의 제천 의진 역시 이러한 고충을 겪고 있었으니 무장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선생의 참여는 유인석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 17일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선생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하였다.

 

의병활동에 따른 문집을 정리하며 지내던 선생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 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의병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만들다

단양 금채동에 은신 중에 선생은 자기 수양과 학문연구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선생의 친필로 남아있는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공사로 하여금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에 걸쳐 광무황제를 협박하였으며,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외교권 등 국권탈취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나라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뭉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즉, 해산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의병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함을 좌시할 수 없던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 하였다. 동년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사를 모아 군세를 확충하였다. 이어 동년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
선생이 일본군과의 의병전투를 전개했을 당시 의병부대의 진법전개 및 작전에 활용한 도해도.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 임명을 받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광무황제는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비장한 밀조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 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 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낱 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할 것이다.”

 

 

도창의대장에 추대되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에서 선생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원주 민긍호, 청풍진 조동교와 연합하여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 이곳의 공략은 의병활동의 거점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충주를 치고자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선생은 틈을 내어 [국수원류(國讐源流)], [군계 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으며 이어 일제 앞잡이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하여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하였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때 공을 세운 이만원을 도총독장, 권용일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하였다. 8월 3일 선생의 군사들은 주흘산 아래에 있는 혜국사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갈평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 다시 갈평에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일본군 육군소좌 과전삼태랑과 육군 보병 대토촌을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허나 9월에 들어서면서 김상한, 윤기영, 주광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는 등 분전하였으나 선생은 그 간의 과로로 병을 얻어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고 탄식하며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1908년에 쓴 선생의 옥중서한들로써,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과
자신이 일본군에게 잡혔을 때 심정을 묘사한 글이 담겨 있다.

 

 

13개도 의병연합의 호서지역 대장으로 선임되다

한편,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어온 각 의진 중심의 개별 항쟁만으로는 거의의 궁극적 목표인 일제를 몰아내는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이인영허위 등의 의병장은 대일연합전선의 형성을 도모하였다. 즉,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분산적으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에 동년 11월 각 의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의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이와 같은 거시적 항쟁계획에 호응하여 즉각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약속한 기일 내에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의진의 북상을 서둘렀다. 박장호 의진과 연계하여 경기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11월 21일 전동, 12월 3일 낭천, 12월 5일에는 경기도 건천에서 일제의 발악적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을 미루고 부대를 재정비하여 이후의 항전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되어 순국하다

선생은 신돌석 의병장 같은 평민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할 만큼 민중의 이해를 잘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에 접근해 있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위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제자로서 유림과 선비들과의 교분,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위임, 선생 자신의 뛰어난 용병술,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여케 한 헌신성 등은 선생의 의진을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케 하는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선생의 판결문.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이 의병장 이강년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교수형에 처한 판결문이다.


선생은 그 동안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생사를 같이하던 휘하 장병들의 시신을 돌아 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충주로 압송되었다. 군수가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음식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느냐고 물리쳤으며, 서울의 재판정에서도 ‘국가의 세금을 빼앗는 것이 의병인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국가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나라를 위하여 공금을 사용한 것이 역적이냐? 원수인 적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하여 적을 섬기면서 국가의 녹을 먹는 것이 역적이냐?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섬멸하고 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 것이다”고 준열히 꾸짖었다. 선생은 결국 교수형을 선고 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하여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896년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활동
1907년 도창의대장에 추대
1908년 피체되어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일  2010.11.16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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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수열정

    2010.11.16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58년과 1907년은 정말 차이가 많이나고,.1800년대는 마치 과거시대같고,갓쓰고,한복입은,
    그런 양반과 상놈이 존재한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1907초라고 하면,.얼마전에,..1999년 이후라 그런지,..정말 오래되지 않은거 같다.
    왜일까.? 51세밖에 안사셨다고 하는데,.이당시는 60살이 가장 많이 산 시대라면,.지금은,대부분,
    고령인구가 많은것이,..80도 청춘이라고 하는데,.100세 되어야 참 오래 살았다고 한다.
    90세정도 사시는 분들도 많아서,.아무튼 1세기를 사신분들은,.세상사는것이,.어떨까 생각해본다.
    각쓴적도 있고,보리고개도 견디고,등화관제도 알고,2천년의 아이팟과 아이패드시대,.애플리케이션시대도 있고,정말 감회가 남다를거 같네요.마치 영화를 보는것처럼,.필름이 막 지나가고,.그럴것이 아닌가.
    1908년 그당시는 한자를 써서,..양반시대같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시대감각은 현재와 가깝다 느끼고,.생활상은 참 오래된 조선시대를 사는거 같다.


“사람이란 어차피 한 번 죽고 마는 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 진데 어찌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전해산진중일기](1908) 중에서-

 

 

어린 시절 시가와 문장에 영특함 보여

해산 전수용(全垂鏞, 1879. 10. 18(음)~1910. 7. 18(음)) 선생은 187 9년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부친 전병국과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휘(諱)는 기홍(基泓), 자(字)는 수용(垂鏞),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선생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조선시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진안에 내려와 정착하였고 그 이후 수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은 불의를 보면 의기가 북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당천 이한용(李漢龍) 문하에서 학문을 틈틈이 연마해 사장류(시가와 문장) 학문에 영특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한용은 영남의 거유(巨儒) 곽종석의 문인으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가 인근의 양반 자제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자 선생도 그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닦고 원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유학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심취했던 것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으며 월남 망국사(越南亡國史)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생은 성장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는데 이때 호남의 명유지사들인 기우만, 기삼연, 김영엽, 오성술, 고광순, 오준선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구국의 방책을 모색하는 등 학문과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히었다.

 

 

면암 최익현의 의병항쟁에 영향 받아

1903년 한창 열혈의 기질이 발하던 청년시절에 절의로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마을인 익산군의 낙영당(樂英堂)에서 회동, 강회를 베풀 때 동향인 이석용과 함께 참가하여 선비들의 우국충정에 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이러한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장류의 박학한 지식과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실천 유학자로서 성숙하였다.

 

이 당시 최익현은 일제가 무력과 강압에 의해 매수한 대신을 앞세워 이른바 을사조약을 늑결하는 것을 보자 곧 창의토전소를 올려 거의할 뜻을 밝히고 호남 유림지사와 문하생들을 규합하여 1906년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석용과 함께 태인에 가서 최익현을 만났으나 최익현의 의진이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귀향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의 거두 최익현은 정읍, 순창, 남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군에 붙잡히어 대마도에서 순국(1907. 1)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의 거두로서 그 때까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백성으로부터 추앙 받던 최익현의 창의는 선생으로 하여금 의병항쟁에 투신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의동맹단의 참모로 본격적인 의병대열에 참가하다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남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선생은 이 회맹소의 종사라는 직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소는 1908년 2월 공음전투에서 김용구 의병부대가 패전한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즈음 전북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동단에 합류, 참모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항쟁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병분파소, 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 남원 사촌에서 일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 전투에서의 연패로 의진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이에 선생은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뒤 장성부근에서 활동 중이던 김태원과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결별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장성에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순국(1908. 4. 25)한 후였다.

 

김태원 의병장마저 순국하게 되자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의진의 일부를 거두어 진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오성술이 흩어진 의병을 규합,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선생이 오성술의 의진에 참여하여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일시적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있을 때 8척의 헌헌장부인 정원집이 광무황제의 조칙을 휴대하고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선생을 찾아왔다. 정원집은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일찍이 을사늑결을 규탄하다가 국사범으로 몰려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를 탈출했던 것이다.

  

전해산 의병장 약속문. 선생이 생존 당시에 남겨둔 필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과 인륜에 관한
내용으로서, 재산을 다스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와 당위성, 사물의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는 판단력,
이웃과의 관계, 양심을 지키는 힘, 의병 부대 내에서 상벌 기준(상, 중, 하) 등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의병대장으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선생은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1908년 7월 25일(음)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면서 “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시국모(弑國母)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宗社)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이 적을 소탕한다면 그 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中興第一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라 맹서하여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표하고 의병항전의 당위성을 밝힌 후 적을 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이 해체될 때까지 10여 개월 동안 일제 군경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동단의 활동 지역은 호남 서남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영광, 장성, 광주 등지였고 그 밖에도 장흥, 순창, 무안, 고창, 화순, 담양 등지에 이르기까지 활동영역으로 삼았다. 선생의 의진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심남일, 조경환, 김영엽, 김원국, 박경욱 등의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선생은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 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선생은 의병들이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식별되면 의병들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일군의 보복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훈련되지 않은 의병으로 일군과 정면 대결할 수 없다는 점 등 때문에 소규모의 병력으로 야간에 이동하며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하였다. 변복한 종사나 군사들을 일군의 헌병분견소, 경찰서, 수비대의 배치지역에 은밀히 파견하여 일군의 이동상황을 미리 탐지하거나 마을 주민의 신고, 면장이나 동장을 통해서 얻은 적의 이동상황을 종합하여 은밀한 곳에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였다. 또한 밀정들에 의해 의병진의 소재가 파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유지하는 곳에서는 마을 어귀에 파수를 세우고 종사원들에게 줄을 세워 계속 말을 전달하게 하는 연환식(連還式) 전달제도를 운영하였다.

 

              전해산 의병장의 모습.


의병의 기본화기는 화승총(火繩銃)이었다. 이 총은 화승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해야 하며 비가 올 때는 쏠 수 없었고 더욱이 유효사거리는 20보(약 12미터)에 불과하였다. 신식무기를 휴대한 일군과 대적하기 위해 의병진에서는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한 천보총(千步銃)을 개발했다. 더욱이 이 천보총을 일부 진에서는 자체 생산하거나 수리할 수 있었고 총탄 또한 구식 납철환을 개량하여 보룡철환(寶龍鐵丸)이라는 철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 화승총, 개량 화승총인 천보총, 개량탄환, 화약 이외에도 일군에서 노획한 신식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 수효는 극히 적었다. 

 

선생은 훈련되지 않은 의병,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장성, 영광, 나주, 부안, 함평 등 당시 호남 24개군 가운데 중서부 지방을 완전 장악했으며, 일제가 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미곡수탈을 자행하여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광 서해를 거쳐 부안에까지 진입하여 서해를 경략, 장차 이들을 없애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정규군으로 무장한 일군에 대해 유격전술을 벌였는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의진을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내산 일대에 주둔시켜 작전을 전개하였다. 불갑산은 서남부의 고지대이며 석문내산은 장성, 광주, 함평, 나주 등지의 평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두 지역을 근거지로 함으로써 선생의 의진은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군수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선생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함께 수차에 걸쳐 호남의병 연합체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를 받아 동단의 의병대장에 선입되었다. 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남북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선생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하였다.

 

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다. 세금 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수전(軍需錢)을 배정하되 도세로서 공평하게 가산에 따라 분배, 징수했고 해산 군인을 빙자한 무뢰배, 가짜 의병을 칭하고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수 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들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서 징계하였다.

 

한편 1908년 일제는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1,0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을 토벌하더니 190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임시 파견된 약 2개 여단의 병력을 더 투입하고 4~5월 사이에 한국 주둔 헌병대의 천안 및 영산포 분견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3,000여 명의 한인 무뢰배들을 헌병보조원이라 해서 분산 배치시키고 의병토벌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당도하자 선생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동년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선생은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전해산 의병장이 쓴 8폭 병풍용 묵서(墨書). 서정적이며 유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 직분·책임을 다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

일제는 선생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탐문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에게 밀고하여 선생은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수개월 만에 일군 수십 명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일군들에게 “오늘이 있을 것을 이미 각오하였다. 죽는 것은 거의(擧義)하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부모와 약한 처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만나보고 떠나는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부모를 만나 인사를 올리고 부인에게 “지금 내가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니 부모님을 잘 봉양하기 바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영산포 일군 헌병 분견대에 구금되었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선생은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등과 함께 7월 18일(음)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선생이 순국하자 그 시신을 선생의 4촌형이 운구해 와서 장례를 치렀는데 상여가 고택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선생의 부인 김해(金海) 김씨는 집으로 돌아와서 극약을 마시고 자결함에 상여가 다시 돌아와서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8년 대동창의단 조직 의병장으로 활동
1910년 대구감옥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일  2010.11.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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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수열정

    2010.11.16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어릴적도 이런 갓쓰시고,.머리 튼 사람들 종종 있었다.
    가슴 내민 한복 입은거,.아주 어릴적 한두번 본거 같다.
    그리고 머리는 여자들은 쪽지고,비녀하고.그런분들도 더러있고,
    검은치마에 하얀 한복도 더러입고,그랬다.인두다리미로 다리기도 하고,
    이불호청 풀먹여,.이불도 일일히 조각을 바느질해서 쓰고,
    의병 전해산이 누구인지 모르나..들로 산으로,.나라를 위해,.투쟁하고,싸웠던분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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