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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위 문구는 이준 열사의 유훈 중 일부입니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애쓰셨던 분입니다. 유훈에서도 이준 열사의 의지를 볼 수 있는 듯 한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오는 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나라를 위해 애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준 열사


이준 열사는 1859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 이병관공과 청주 이씨 모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마저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그는 당대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이준 선생은 1884년 함경도시(咸鏡道試)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이후 1895년 처음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고위 관료들의 비리를 척결하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나섰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 일성 이준 열사 동상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이후 그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를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02년에는 이상재, 민영환,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였는데요.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 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열사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04년 12월, ‘공진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는 등 구국활동에 적극 임하다가 일제에 의해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


1905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하고,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준 열사는 동지들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여 을사늑약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과, 시민들과 투석전을 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이준 열사는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에 들어가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와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그것이 확대개편된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준 열사는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주위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인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고종은 이에 동의하여 극비리에 정사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이 임명하였는데요. 이어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낼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습니다.   


▲ 헤이그특사 신임장 (출처: 독립기념관)


이상설 선생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있었고, 이위종 선생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 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습니다. 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는데요.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선생을 만나 밀사 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 선생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습니다.


이준 열사를 포함한 세 특사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받았고, 1907년 6월 25일경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공식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1907년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 [일인불법행위]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자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는데요. 세 특사는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던

빈넨호프 왕궁의 기사홀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이 이어졌고,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까지 더해져 특사들의 뜻은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 특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 1907년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광경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세 특사들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성토했고 그 결과, 장서의 전문이 평화회의보에 게재되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7월 9일에는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이상설 선생과 이위종 선생이 귀빈으로 초청되어 을사늑약 무효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 선생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요. 이는 언론인들과 각국 인사들에게 귀감을 주었고, 그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헤이그 특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청원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 헤이그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던 호소문 (출처: 독립기념관)


이준 열사는 이에 분개하여 연일 통탄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는데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 1907.7.15일자 기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의 입장과 일제의 침략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이준 열사.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1963년,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현재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선열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 이준 열사의 묘역

                       


▲ 이준 열사 기념관(출처: 독립기념관)


오는 7월 14일(금) 오전 10시 서울 수유동의 이준 열사 묘소에서, ‘일성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 추념제전’이 열리는데요. 이준 열사가 낯선 땅에서 나라를 위해 펼쳤던 노력과 용기를 기억하고, 그 강직한 성품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던 이준 열사의 유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던 이준 열사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자료출처

네이버캐스트(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905&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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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을 맞았습니다. 또한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4주년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요. 7월 27일‘6.25전쟁 정전 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6·25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5일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부대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유엔군을 파견하여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습니다. 1951년 7월 10일 처음으로 시작된 휴전 회담과 그로부터 2년 후 체결된 정전 협정.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시간으로 잠시 되돌아가볼까 합니다.


# 정전 협정 체결, 그 길었던 과정

6.25전쟁 초기 북한군은 압도적인 기세로 우리 군을 몰아붙였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패전의 위기 속,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결의안에 따라 유엔군 참전이 결정되었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강력한 전력을 앞세워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그러나 1950년 10월, 갑작스런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의 목전에서 아쉽게 후퇴하게 됩니다. 1951년 5월 이후 전투는 지금의 38선 근처에서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 6.25전쟁 휴전협정 문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진 고지전. 남북 양측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유엔군과 중공군의 인적, 물적 손해 역시 불어났습니다.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했는데요. 


양측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회담은 매 의제마다 장기간의 설전이 벌어지는 등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게 됩니다. 휴전 회담에서 가장 큰 난제는 포로 문제였습니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 송환을, 북·중 연합군은 강제 송환을 주장함에 따라 협상은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접어들게 됩니다.


▲ 수많은 병사들이 숨져간 고지 ‘단장의 능선’


양측은 38선 근처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이며 그 혈전 속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요. 전선의 병력들은 회담장과 전방을 주시하며 전투를 전개하는 특이한 양상을 되풀이했습니다. 그야말로 회담 장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서명식


그러던 중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북한군 대표가 휴전조인문에 서명함으로써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햇수로 3년, 전쟁 발발 1,129일에 걸친 길고 길었던 전쟁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힌 것입니다.


# 기억되어야 할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



6.25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참전에 이어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국가가 52개국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중 우리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보낸 유엔 참전국은 총 21개국으로,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약 3년의 전쟁 기간 동안 우리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인적, 물적 피해 역시 상당했는데요. 당시 국군의 전사자는 약 14만 명, 부상을 당하거나 실종, 포로가 된 사람도 약 49만 명에 달합니다. 유엔군 또한 4만여 명이 전사하고, 1만여 명이 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6.25전쟁 참전국 참전현황 및 피해현황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유엔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희생과 위훈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정부는 정전 60주년을 맞은 지난 2013년,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또한 2013년 정전 60주년을 계기로, 참전 21개국 정부대표단을 초청하여 감사를 표하는 첫 국제행사 거행 이후 매년 정부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는데요. 다양한 대상의 참여 속에 국군과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 참전국과의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 2016년 거행되었던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


또한 관련된 행사로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및 후손 초청, 감사만찬, 참전국 현지 기념식 등 국내외 계기행사가 개최됩니다.


다가오는 7월 27일(목) 오전 10시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이 “함께 지켜온 대한민국, 함께 나아갈 통일한국”이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이면에는 많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전협정의 과정과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현재는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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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6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개봉하면서, 실제 박열 선생의 삶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박열 선생의 공적과 더불어 정신적 동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 등, 박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 역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인물 역시 이번 영화로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바로, 박열 선생 재판에서 변론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입니다.


스크린에서 그는 단지 식민지 청년에게 연민을 느끼는 선한 심성의 소유자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동정심이나 인권 의식을 뛰어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군국주의 반대 투쟁을 펼친 강골이었습니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후세 다쓰지. 오늘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까 합니다. 함께 살펴보시죠.


▲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시보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껴 1903년 변호사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11년,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하여 일본 검찰의 밤샘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론을 무료로 맡았는데요. 그의 도움으로 당시 최팔용 선생 등 많은 이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후세 변호사는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평생 서겠다”는 뜻을 담은 글 ‘자기 혁명의 고백’을 언론에 배포하기에 이릅니다. 1923년 8월에는 서울을 처음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무자비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자 후세 변호사는 이듬해 독자적인 조사 보고서를 내는 등, 진상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의 내용처럼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가 일왕 폭살 혐의, 이른바 ‘대역죄’로 기소되자,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조작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는데요. 재판에서는 물증도 없이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를 거세게 비판하였습니다.


▲ 가네코 후미코(좌)와 박열 선생(우)


후세 변호사는 재판 이후 박열 선생과 가네코 여사의 옥중 결혼도 도왔으며, 가네코 여사의 유골을 발굴해 화장한 뒤 박열 선생의 형에게 전해주었는데요. 덕분에 가네코 여사는 먼 길을 돌아 박열 선생의 고향, 문경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 왼쪽에서 2번째가 박열 의사, 맨 오른쪽이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많은 조선인들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24년에는 일본 왕궁 바로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도와 사형을 피하게 도와주었고, 1925년 을축대홍수 때는 조선 수재민 구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으로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자 다시 조선을 찾아와 중재를 이끌었습니다. 이 때 궁삼면 일대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을 정도로 그는 조선인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이어 김재봉, 강달영 등이 조직을 재건하려다 붙잡힌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후세 변호사는 광복 후에도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을 펼치고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 일행에게 자신이 쓴 ‘조선건국 헌법초안 사고’를 선물로 건네며 대한민국의 부흥과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일제 치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을 변호해 주었던 후세 다쓰지는 1953년 9월 13일 타계했는데요. 그의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죠.


2004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이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에 헌신했던 그동안의 노력과 공적들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 훈장 추서는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는데요. 그 당시 건국훈장을 받았던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기록되었죠.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합니다.”

- 후세 다쓰지 -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 유일하게 사죄를 한 일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홀로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일왕을 신격화하며 맹목적으로 숭배할 때 군국주의 반대에 앞장섰으며,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억울하게 기소된 민중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변호사. 그가 보여준 평등한 자애심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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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현석

    2017.07.07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세 변호사와 박열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일본인 소설가인 나카니시 이노스케인 듯합니다. 이번 영화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그 역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인을 주인공 삼아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소설,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모델로 한 소설, 불령선인은 일제에 의해 날조된 말이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소설 3편을 썼는데, 이는 그의 조선과 관련된 3부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도 친분이 있던 사람으로, 그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일본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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