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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의 유언 중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민족의 청년들을 걱정했던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위 말은 조선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던 강우규 의사가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는데요. 9월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98주년을 맞이하여 강우규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강우규 의사 초상 (출처: 국가보훈처)

 

강우규 의사는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고, 의기 또한 대범하여 주변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술을 배워 살림을 꾸려 나갑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서양문물을 접한 그는 전통적 학문으로는 조국의 근대화를 실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개화사상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또한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면서 당시 서학을 배척했던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이 심해짐에 따라 고향 덕천을 떠나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1883년 홍원으로 이주를 한 선생은 친형으로부터 배운 한의술을 이용하여 읍내에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는데요. 강 의사는 모은 재산을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민족의 교육과 계몽을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합니다.

 

▲ 성재 이동휘 선생 초상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1910년 8월 국운은 계속 기울어 급기야 경술국치를 맞게 되고, 이때부터 일제의 침탈이 시작되게 됩니다. 민중의 계몽과 교육이 국권 강화의 힘이라 믿었던 강우규 의사는 경술국치로 인해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요.

 

선생은 이듬해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으로 망명하여 민족계몽운동 당시 친분을 쌓았던 이동휘 , 박은식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러시아 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강우규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한인 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선생은 이곳에서 3가지 일을 추진했습니다. 첫 번째는 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신흥동을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성장시키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대한국민노인동맹단명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런 가운데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요. 신흥동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강우규 선생은 동포들을 모아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주요 활동 방침은 실전에 참여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청년 못지않게 가슴 속에 일제를 향한 분노로 뜨거운 피가 흐르던 강우규 의사는 이 같은 방법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3.1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일본은 조선 총독을 교체하고,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강우규 선생은 일본의 정책 변화에 대해 3.1운동을 무마하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술수임을 꿰뚫어 보고, 새로운 조선 총독의 처단을 결심하게 됩니다.

 

강우규 선생은 거사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미리 구입해둔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끼고 일경의 눈을 피해 1919년 8월 5일, 무사히 국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고 다니던 중, 선생은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고, 매일같이 남대문역 앞에 나아가 답사하면서 폭탄을 투척할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 제3대, 5대 조선총독을 맡은 사이토 마코토 (출처: 고구려역사저널)

 

1919년 9월 2일 거사 당일, 선생은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맨 뒤,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폭탄을 가리는 동시에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강우규 선생은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습니다.

 

▲ 강우규 의사 의거지_현 서울역 광장 (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오후 5시, 강우규 선생은 남대문역에서 환영행사를 마치고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을 담은 폭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터진 폭탄은 일대가 진동하듯 그 위력이 대단했으나 사이토 마코토 총장을 폭살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혼란스러운 군중의 틈을 의연하게 빠져나온 그는 결연한 의지로 또다른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폭살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강 의사의 은거지인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붙잡히게 됩니다.

 

▲ 강우규 의사의 사형 선고 사진과 관련한 보도기사 (출처: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강우규 선생은 일제의 법정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는데요. 선생의 기개와 인격에 압도된 일본인 판사는 ‘피고’라는 말 대신 ‘강선생’ 혹은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습니다. 이는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토 총독 암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고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최자남, 허형, 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법정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항소를 한 것은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자남 등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요. 그리고 검사가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니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요. (중략)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폭탄의 위력을 몰랐소. 내가 왜 그 불쌍한 신문기자나 사진반을 죽이겠소.”

 

* 매명한 : 재물이나 권리를 얻으려고 자기의 이름이나 명예를 팔다.

 

하지만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강우규 선생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기개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강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는 날에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時)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강우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의거를 행했던 백발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대한의 청년들의 교육을 염려했으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 서울역 광장에 설치된 강우규 의사 동상 (출처: 중구 문화관광)

 

9월 2일(토) 오전 11시, 강우규 의사의 의거가 이루어졌던 서울역 광장에서 <강우규 의사 의거 98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강우규 의사 동상은 서울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보실 수 있는데요. 강우규 의사를 생각해 보며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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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광복군

 


“너는 국가민족을 위하여 盡忠(진충)하여라”

 

이 말은 공창준 선생이 생을 마감하며 아들 고운기*(본명 : 공진원) 선생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공창준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운기 선생은 의병 출신인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 고운기 선생


* 서훈 이후 여러 기록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이 공창준이며 선생의 본명은 공진원으로 확인되나

서훈당시 자료에서 고운기로 활동하여 포상되었기에 고운기로 표기함.


▲ 만주로 망명한 한국독립군 모습 (출처: Today happy 블로그)

 

선생은 한국독립당에서 조직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하였는데요. 1931년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에는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 낙양군관학교 터 (출처: 독립기념관)

 

1933년 고운기 선생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1934년 2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1935년 4월 졸업 이후, 선생은 1937년에 지청천 장군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당은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홍진·조소앙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고운기 선생은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유주의 중국청년공작대 (출처: 독립기념관)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해 오면서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고, 선생 또한 이들과 함께 이동하여 1938년 11월에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유주에서 고운기 선생은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게 되었는데요. 선전활동을 통해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항일투쟁의 대열로 참여하게 했습니다.


▲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고운기 선생은 제2지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시안으로 이동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아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사열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광복군 대원 중 한 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었고, 이로 인해 비밀조직망과 거점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진 고운기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겨울 서안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서안의 총사령부가 충칭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고운기 선생 또한 1942년 대원들과 함께 충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충칭에서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의 자율적 활동을 제한하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취소시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였는데요. 이를 진행하던 중,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우리 민족을 위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고운기 선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투쟁했던 선생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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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인물은 기계-안강지구전투와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용감하게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입니다.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전개되었던 기계-안강지구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기계와 안강 등지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입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했는데요. 


▲ 김용식 육군 일등병


당시 군 지휘부는 기계-안강지구전투 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탈환하고자 김용식 육군 일등병이 소속되어 있던 부대에 습격 임무를 내렸습니다. 


▲ 6.25전쟁 출정하는 육군의 모습 (출처: 세상의 모든 정보 블로그)


당시 김용식 일등병은 국군 수도사단 17연대 소속으로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었지만, 고참병들도 두려워하는 돌격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비록 전투 경험은 거의 없었으나, 그는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용기로 침투대열의 선봉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김용식 일등병은 적 경계병을 신속히 처치하고 기습사격과 과감한 수류탄 투척으로 적 진지를 초토화시켰으며,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북한군 제766 유격부대는 해체되었습니다.


▲ 전투 중인 한국군의 모습 (출처: 오늘 생각을 저널로그 홈페이지)


▲ 북한군 유격부대의 모습 (출처: 동고동락블로그)


이후에도 김용식 일등병의 활약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1950년 9월 19일,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적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척후병 임무를 맡아 정찰하던 중,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의분과 정의감에 불탄 김용식 일등병은 소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6명과 교전을 벌여 모두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전 도중, 김용식 일등병은 적의 탄환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6.25전쟁 당시 국군의 모습 (출처: 국방일보)


국군은 김용식 육군 일등병의 용기와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기점으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국가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꽃다운 청춘을 바친 김용식 일등병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적과 싸우며 활약했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 우리는 그를 포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투혼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 기계-안강지구전투 알아보기 mpva.tistory.com/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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