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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며칠째 이어지는 미세먼지 소식에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들 많으시죠. 오늘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통쾌한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김상옥 의사 (출처 :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1923년 1월 12일, 세상을 뒤흔든 의거를 감행하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쪽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부,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바로 한지 김상옥 의사였습니다.

식민통치의 중심에서 과감하게 의거를 실행했고, 이후 일본 경찰들과 ‘400대 1’의 총격전을 벌였던 김상옥 의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1. 식민지시대의 소년, 민족운동가로 자라다


김상옥 의사는 1889년 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8세 때는 쳇불공장(체의 그물) 직공으로, 14세 때는 말발굽제조 직공 등으로 일하며 어려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상옥 의사는 17세 무렵에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했고, 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는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 광복단을 조직한 채기중(왼쪽), 한훈(오른쪽) 선생.


20대에 약행상을 하며 전국 각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던 김 의사는 1913년 경북 지역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선생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경제적인 독립을 이룬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3.1운동 후 해산하는 여학생을 치려는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칼. (출처 : 독립기념관)


#2. 비밀결사 ‘혁신단’과 ‘암살단’을 조직하다


김상옥 의사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해산하는 여학생을 위협하는 일본 경찰을 맨손으로 때려 눕히고 군도를 빼앗았던 일화는 유명하죠.

의사는 같은 해 4월 1일,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합니다. 혁신단은 각지의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가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신문 발행은 중지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상옥 의사는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이후로 김 의사는 평화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죠.


1920년 봄, 김상옥 의사는 만주 소재 독립군 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 선생을 만나 무력을 통한 항일운동을 구상하고, 같은 해 4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한 것이죠.

의사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김 의사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워 나갔습니다.


#3. 다시 서울, 의거를 준비하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의열투쟁의 뜻을 굳힌 김상옥 의사는 안흥한 선생 등과 함께 폭탄, 권총, 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1922년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와 거사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종로경찰서 폭파’, 그리고 ‘조선총독 제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주요 수단이었던 경찰력의 중심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곳으로,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지에 설치된 표지석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김상옥 의사는 서울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회의를 거듭하며 활동자금을 모으고 거사용 폭탄을 마련해나갔습니다. 또한, 거사에 임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작별의 말을 남겼습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4. 종로경찰서에 던져진 폭탄, 일제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쪽 모퉁이에서 경찰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창문에 적중하여 굉음과 함께 터졌습니다. 김 의사는 이후 용산에 거주하던 매부 고봉근의 집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폭탄투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지만 의사의 행방은 물론 인적사항조차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반면 김상옥 의사는 다음 목표인 조선총독 저격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서울역을 답사하는 등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었습니다.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출처 :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그러나 밀정에 의해 며칠 뒤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무장한 순사 14명이 은신처를 포위하였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의사는 뛰어난 사격술로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승복을 입고 변장한 채 의사는 다시 동지들과 재회하여 조선총독 암살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일경은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함)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경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수백 명의 일경과 접전을 벌이던 중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시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출처 : 독립기념관)


#5.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했고, 무장한 일경을 대상으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 

그는 어린 시절 생활고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2018년 1월 22일(월) 오후 4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5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 인사, 유족, 시민 등이 참석하여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던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기릴 예정입니다. 


▲ 김상옥 의사 순국지 (『조선일보』, 1923년 3월 14일, 출처 : 독립기념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34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삶을 살다 가신 김상옥 의사를 함께 기억하는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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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1월 17일, 오늘은 일왕 암살 누명으로 체포되어 긴 시간 수감생활을 했던 박열 의사의 서거 44주기입니다. 

지난 여름, 박열 의사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어 세간의 관심을 얻기도 했었죠.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독립 의지를 가진 박열 의사의 삶을 함께 들여다볼까요?


▲ 박열 의사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1. 독립운동에 눈 뜨다


1902년 경북 문경시에서 태어난 박열 의사는 소년 시절 한 교사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사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일본의 요구에 맞추어 거짓교육을 시켜왔다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이에 박열 의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며 민족을 위한 큰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박열 의사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2.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그리고 흑도회와 블령사 활동


박열 의사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박열 의사의 자작시를 접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그의 사상에 공감하여 민족적 차이를 넘어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어려운 생활에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 정열을 쏟아 붓는 청년 박열의 내면을 보았다’

- 1922년 박열의 시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의 감상



▲ (출처 : 박열의사기념관)

 

#3. 일왕 폭살 계획, 세상에 드러나다


1923년 4월, 박열 의사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보다 적극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도쿄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습니다. 

일제는 그간 항일 활동을 벌여왔던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을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을 별다른 근거 없이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시켜 버렸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폭탄 구입 계획이 밝혀졌고, 박열 의사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 여론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이 사건을 ‘대지진을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하며 ‘대역사건’으로 비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박열 의사는 의거 계획이 밝혀진 이후에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재판에서는 ‘죄인취급을 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재판장에서는 미리 써 두었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김구(가운데), 양근환(왼쪽), 박열 선생(오른쪽)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4. 꺾이지 않은 독립 의지


‘저들은 내가 불령(不逞) 불경(不敬)하다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세상에서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박열


1926년 3월, 일본 정부는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이는 스스로 조작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3개월 후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유해는 박열 의사의 가족들이 일본에서 경북 문경시 문경읍으로 옮겨와 안장하였습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 의사는 1945년 10월 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습니다.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열 의사는 일본에서 순국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봉환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작년에 거행되었던 <박열 의사 43주기 추모제>


#5. 박열 의사 서거 44주기 추모제


1월 17일(수) 오전 11시, 경북 문경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에서 <박열 의사 서거 44주기 추모제>가 거행되었습니다.  


박열 의사의 서거일인 오늘, 암울한 시대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그의 삶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 참고사이트

박열의사기념관 http://www.parkyeol.com/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303&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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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연일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세계인의 축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어느덧 약 한 달 앞으로 훌쩍 다가왔습니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요.


국가보훈처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주한 캐나다대사관과 함께 ‘임진클래식(Imjin Classic)’ 아이스하키 재현행사 및 성화 봉송을 위해 6.25참전 캐나다 참전용사(가족) 6명을 초청합니다.


“6.25전쟁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임진클래식 재현 행사와 성화 봉송 주자 참여”


▲ 1953년 겨울, 얼어붙은 임진강에서 캐나다 왕립22연대와

PPCLI 소속 장병들이 친선하키경기를 즐기고 있다.


캐나다 참전용사들은 겨울이면 임진강이 아이스하키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6.25전쟁 당시 캐나다에서 하키 장비를 공수해 왔습니다. 캐나다 참전용사들은 임진강에서 하키 경기를 하며 향수를 달랬지요. 캐나다 군인들로 구성된 두 팀(PPCLI와 VanDoos)은 친목을 위해 임진강 근처에서 ‘임진클래식(Imjin Classic)’이라는 이름으로 하키경기를 개최했는데요. 

이후 캐나다 연아 마틴 의원의 제안으로 캐나다가 아이스하키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6.25전쟁 참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재현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캐나다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국들 중 세 번째로 큰 규모인 26,791명의 병력을 파병하였고, 그 중 51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이들이 참여한 주요 전투에는 가평전투(1951)와 임진강전투(1952)가 있습니다. 


▲ 2017년 4월 24일,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참전비 앞에서 열린 제65주년 가평 전투 기념식


올해, 2018년은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5주년이 되는 해이자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입니다. 

동계올림픽의 주요 종목인 하키와 6.25전쟁 당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싸웠던 캐나다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지역으로 결정된 파주 파평면에서 임진클래식 경기를 재현하기로 한 것인데요.


▲ 6·25전쟁 캐나다 참전용사인 클로드 샤를랭씨(왼쪽)와 데니스 무어씨(오른쪽)


이번 초청행사에는 6·25전쟁 당시 파주 임진강에서 아이스하키를 했던 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부대의 데니스 무어(Dennis Moore, 87세)씨, 22연대(Van Doos) 클로드 샤를랭(Claude Charland, 89세)씨 및 2012년부터 17년까지 국제한국전참전협회장을 역임하였던 존 비숍(John Bishop, 89세)씨가 참석합니다.


그리고 6·25 참전 당시 캐나다연대 선수였던 클로드 샤를랭씨는 아이스하키 경기장 주변 성화 봉송로 구간에서 주한 캐나다대사, 한국참전용사 등과 함께 성화 봉송 주자로도 참여합니다.


캐나다 참전용사의 방한 주요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클래식 재현행사는 오는 1월 19일(금), 파주 임진강 인근의 율곡습지공원에서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됩니다. 


▲ 클로드 샤를랭 씨


이번에 성화봉송 주자로 참여하는 참전용사 클로드 샤를랭씨는 왕실 22연대 소속으로 1951년 11월부터 1952년 11월까지 참전하였습니다.


그는 “65여 년 전 전우들과 함께했던 아이스하키를 다시 할 수 있다니 놀랍다. 그 당시는 보급된 바람막이 바지 속을 잡지, 신문 등으로 채워 상대편 스틱의 강타에서 오는 충격을 흡수했다. 그때의 전우들이 그립고 항상 우리를 잊지 않는 한국 정부에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 데니스 무어 씨(왼쪽)와 클로드 샤르랭 씨(오른쪽)


그리고 캐나다 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소속 선수로 뛰었던 데니스 무어씨는 “1950년에서 1952년까지 13개월동안 캐나다를 대표하여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자랑스럽게 총을 들었고, 꽁꽁 얼어붙었던 임진강에서 하키스틱을 들 때도 자랑스러웠다.”라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 존 비숍 씨


또한, 전(前)세계한국전참전협회장인 존 비숍씨는 “나는 6.25전쟁 당시의 추위와 전우들의 죽음이 기억나고 그 때의 큰 충격은 여전히 남아있다. 60여년이 지나도 우리를 잊지 않고 초청해 주는 대한민국 정부에 항상 감사하다.”라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 2017년 4월 26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캐나다 대사관 주관으로 열린 전몰용사 추모식


유엔 참전용사 등 초청 사업은 1975년 민간단체 주관으로 시작되어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계기로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으로 지난해까지 3만 2천여 명의 유엔참전용사와 가족이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올림픽 기간, 네덜란드 총리 등 정부대표 방한시기에 맞춰 네덜란드 참전용사(가족)를 초청하고, 이낙연 국무총리와 함께 횡성 참전기념비 참배, 올림픽 경기관람 등을 추진하여 대내외로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홍보를 강화할 계획입니다.


▲ 지난해 9월 진행된 유엔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당시,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 앞에서 헌화하고 있는 참전용사의 모습


60여 년 전,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 땅에 왔던 젊은 용사들은 하키 경기를 하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습니다. 그리고 올해, 노병이 된 이들은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땅에서 그 옛날 그들이 펼쳤던 경기의 재현행사를 보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에는 과거 국군과 유엔군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요?

평창 동계올림픽 계기 캐나다 참전용사를 초청하여 진행되는 임진클래식 재현행사와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하는 참전용사의 이야기! 또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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