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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 김좌진 장군은 만주 화룡현 청사리 백운평 전방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들에게 방심하고 있던 일본군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1920년 10월 21부터 26일까지 이어졌는데요.

독립군은 그들(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출병한 일본군을상대로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주도면밀한 작전 지휘로

일본 가납 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 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소수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물리친,

전사상 보기 드문 대승리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부하들과 함께

밀산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 집결한 10개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에 취임하였습니다.


1925년 3월 15일, 김좌진 장군은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권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었습니다.


또한, 북만주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한 김좌진 장군은 부교장으로서,

교장 김혁 선생 등과 아울러 독립군 간부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10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김좌진 장군은 이를 사양하고

계속해서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한편, 김좌진 장군은 지속적으로 특수공작대와 밀사를

국내에 파견하는 등 국내 진격을 위한 작전에도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이 쏜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습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질 길 없구나.


-장군의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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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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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에서 벌어졌던 청산리 전투는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일본군을 상대로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와 함께 민중계몽을 위해 힘썼고,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보려 합니다. 


▲ 백야 김좌진 장군의 모습(출처: 금강일보)


# 백야 김좌진,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김좌진 장군은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천성이 영민했던 그는 일찍이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구국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는데요. 김좌진 장군이 15세가 되던 1904년, 그는 집안의 노비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본인 소유의 전답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1905년, 김좌진 장군은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계몽운동 실현을 위해 호명학교를 세웠는데요. 호명학교에서 지방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켰습니다. 

이와 더불어 김좌진 장군은 홍성에 대한협회지부를 설치하여 민중 계몽에 힘쓰는 한편, 기호흥학회를 창설하여 교육 사업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세우고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지내기도 하였는데요. 또한, 김좌진 장군은 한성신보의 이사를 역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진력하였습니다. 



#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그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군자금 모집과 대한광복회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렸는데요. 이를 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와, 남북만주와 연락하는 비밀기관으로 삼았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는 중국 길림성의 봉오동에서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군의 사상 첫 승리, ‘봉오동 전투’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이는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보복을 위해 1920년 10월 엄청난 수의 부대를 이끌고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토벌한다며 간도로 출병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일본군이 백운평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멸하게 됩니다.


다음날인 10월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 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킵니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 장군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며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치르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 청산리전투도(출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다음날인 23일부터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그들을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며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습니다.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는데요.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신속히 대피했다가 전열을 정비하고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게 됩니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뀌어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고지로 퇴각하게 됩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가납(加納) 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고, 소수의 독립군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물리쳤던 전사상 보기 드문 대승리였습니다.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 이후 북만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장군은 이후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 한인마을을 전멸시키려 했기 때문인데요. 1925년 신민부를 조직하여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향상에 주력하게 됩니다. 장군은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신민부는 1928년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고 결국 해제하게 됩니다. 장군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북만지역으로 이동해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계속해서 국내에 밀사와 공작대를 파견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조선의 독립은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생을 민중 계몽과 독립운동, 국외 한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힘썼던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 김좌진 장군 생가(출처: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 김좌진 장군 생가지 정문 어록비에 적힌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

김좌진 장군이 무장독립운동을 결심하고 만주로 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며 지은 것


▲ 김좌진 장군 동상(충남 홍성군 소재)

(출처: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지난 10월 21일(토)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제97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대첩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전투에 참가했던 독립군은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는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었는데요. 청산리 전투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입증해 보인 대첩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유년시절부터 세운 그의 뜻을 오늘날 우리도 기억하고, 청산리 전투에서 스러져간 독립군울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3467&cid=46623&categoryId=4662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599&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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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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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지난 7월의 독립운동가에는 조마리아 여사가 선정되어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이었고 그를 포함한 네 명의 자식을 모두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키워냈으며, 본인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 집행 직전의 안중근 의사에게 전한,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는 당부의 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자세히보기 http://mpva.tistory.com/4610)


▲ 안중근 의사 영정사진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오는 10월 26일(목)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0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도와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동양의 평화를 해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외쳤는데요.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에서도 항일 투쟁의 본보기가 되었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었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사형 집행을 앞두고 여순 감옥을 찾아온 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


이번 포스팅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8주년을 맞아, 그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토히로부미(출처: 나무위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몸에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이 응해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에는 '안응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였는데요. 후에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를 ‘안씨 가문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기록했을 만큼, 안중근 의사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 안태훈 선생을 따라, 도내에서 동학 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은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는데요.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안중근 의사는 근대적 사고를 지닌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안중근 의사가 27세가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 침략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지만, 반대 세력들과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의사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요. 사비를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위태해져만 갔습니다.


#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에 맞서다


▲ 안중근 의사의 모습(출처: 마이데일리)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는데요.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령 일대의 한인촌에서 의병을 모집한 그는 참모중장이 되어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전투 중에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 대패하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였는데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안중근 의사는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9년 1월, 그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한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 안중근 의사 의거 직전 하얼빈 역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는 1909년 9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제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고 판단한 안 의사는, 지체 없이 이토를 격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권총을 빼들어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 의사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습니다.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 방청인, 심지어 통역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본인들로 에워싸여 형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같은 해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요.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그는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거사의 이유를 밝힌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습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저술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요.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1910년 2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 선 안중근 의사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제에 항거하여 일본의 심장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민족의 교육계몽운동과 무장투쟁에 앞장섰고, 어떤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양의 평화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런 영웅이 지켜낸 땅에 살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을 기념하여 소개한 이번 포스팅을 통해, 안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20&cid=59011&categoryId=59011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www.ahnjungge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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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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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30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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