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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터[호국보훈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886건

  1. 2017.07.05 유엔군 참전의 신호탄, 오산 죽미령 전투
  2. 2017.07.03 7월의 6.25전쟁영웅 - 조지 리비
  3. 2017.07.03 7월의 독립운동가 - 조마리아 여사


여러분들은 혹시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최초로 참전한 유엔 참전군 부대를 아시나요? 우리나라에 처음 도착한 부대는 바로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였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6·25전쟁에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와 북한군의 첫 교전이자, 유엔군 참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첫 전투였던 오산 죽미령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유엔의 파병 결정과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사전 준비를 마치고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을 감행함에 따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한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를 거듭하며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였는데요. 이에 유엔은 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무시했고,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한국으로의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무력 침공한 것은 평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즉각 전투를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한편 유엔한국위원으로부터 북한이 전투를 중지하지 않고 있으며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조처가 시급히 요청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국제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지원을 권고하는 바이다.


- 유엔군 참전결의문(1950. 6. 28)


위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요. 미군 제24사단의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했습니다.


▲ 스미스부대가 타고 온 C-54 수송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원래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1950년 6월 30일 한반도에 미국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자, 미국 사령부는 제24사단 예하 21연대 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을 특수임무부대장으로 임명하고 1대대의 B, C중대를 중심으로 한 병력을 특수임무부대에 포함시켰습니다.


▲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던 스미스 부대는 가장 먼저 전쟁 투입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일본 규슈에서 출발해 7월 1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 도착하였는데요. 이후 기차를 이용해 대전으로 이동했으며 7월 5일 새벽 3시경, 오산 죽미령에 도착합니다.


#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 오산 죽미령 전투


그러나 스미스 부대의 물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는데요. 미국의 지상군 투입 결정 이후 그 날로 급작스럽게 조직된 부대였던 탓이었습니다.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을 기다렸습니다. 


▲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를 겨냥하고 있는 미군 바주카팀


7월 5일 아침 7시경, 스미스 부대는 수원 근처에서 남진하는 북한군 전차부대를 포착하였습니다. 8시 16분, 포병부대의 첫 포격이 시작되면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의 전력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비해 전력상 열세였습니다. 무반동총과 로켓포로는 적 전차를 세우는데 역부족이었죠. 미군 포병은 죽미령을 넘어 미군의 보병진지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전차 2대를 직접 조준으로 파괴하는데 성공했지만 33대의 전차들은 미군 보병 방어선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앞세운 T-34 전차


11시쯤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미군은 적 전차에 박격포 사격을 퍼부었으나 적 전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 보병들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했습니다. 이 교전으로 33대의 적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포병 진지까지 통과하면서 4대는 기동불능 상태, 3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한군 보병들 역시 미군 방어선의 양쪽 측면을 돌아 내려오면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죠.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나갔습니다. 미군은 자신들이 북한군의 전력을 얕잡아봤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전기까지 고장이 나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지 못하게 되자, 2시 30분 경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 오산 죽미령 전투, 그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의 치열했던 첫 전투. 스미스 부대는 많은 부대원들을 잃고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 전투는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했을 때, 그들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개입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발발 10여일 만에 유엔군이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전투의 또 다른 의미는 북한군의 전력을 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죽미령 전투 결과보고를 받고 난 뒤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작전을 짜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 오산에 설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


▲ 유엔군 초전기념관 전경 (출처: 유엔군초전기념관)


오산 죽미령 전투는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된 유엔군이 북한군과 치른 첫 전투이기 때문에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설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오산(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는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64주년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유엔 참전국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7월 5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착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와, 북한군과의 치열했던 첫 전투가 있었던 날. 우리는 죽미령 전투에서 산화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원들과, 우리나라를 지키다가 전사한 유엔군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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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20일, 대전 일대에서 미 제24사단과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공병대대 소속이었던 조지 리비(George D. Libby) 중사 역시 이 대전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악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 한 명 한 명을 모두 차량에 태워 후방으로 철수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요.


▲ 대전에서 철수하는 미군

(출처: 전쟁기념관)


북한군의 사격으로 희생자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조지 리비 중사는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합니다. 때 마침 철수 중이던 포병 M-5 포차를 발견한 그는 운전수를 불러 세우고 부상병들을 태우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살신성인의 리더쉽을 발휘하여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싼 후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보호한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 조지 리비 중사


▲ M-5 고속 트랙터


조지 리비 중사는 포차의 속력을 최대로 올려 달리면서도 길가의 부상병들을 보면 한 명도 빠짐없이 포차에 태우고 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나갔습니다.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운전병을 보호한 채 적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동료들을 구출하던 조지 리비 중사는 전신에 수많은 총상을 입고 안타깝게 전사하였습니다.


▲ 미국 최고 훈장 Medal of Honor


조지 리비 중사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 동료들을 구해낸 공로로 6.25전쟁 최초로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Medal of Honor를 수여받았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희생의 군인정신을 보여주었던 조지 리비 중사. 그의 뜨거운 전우애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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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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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황해도 해주군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조마리아 여사는, 같은 지역의 안태훈 선생(1862~1905)과 혼인했는데요. 1897년 여사는 남편의 권유에 따라 영세를 받았고,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 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는 슬하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성장하여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식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요. 1905년 지병으로 서거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유산을 나눠주며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형제들의 민족교육운동 역시 조마리아 여사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 안정근 선생


1907년 1월, 서상돈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때 조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합니다. 안중근이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여사 또한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합니다. 이 의거는 국내외 각지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에게 큰 찬양을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이 주목한 국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족은 의거 직후부터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았습니다.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견하여 조마리아 여사를 추궁하였으나, 여사는 태연하게 자신의 아들 안중근은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조마리아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 안중근 의사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에게 손수 지은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죠.


▲ 뤼순감옥특별면회실에서 안중근과 홍석구 신부,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면회 장면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이후 여사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는 찬양과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뒷쪽 왼쪽 4번째가 안공근 선생)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요. 1922년 조마리아 여사는 상해로 이주하여 2남 안정근과 함께 지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사는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위암으로 인해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담대하고 의기로운 성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조마리아 여사. 이러한 여사의 인품을 토대로 한 가르침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간 자식들에 가려져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은 잘 드러나 있지 않았는데요.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던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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