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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국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갈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 독립선언서 中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3.1운동에서 낭독되었고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독립선언서는 어디에서 인쇄되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ㆍ배포하고,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 (출처 : 태안군)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고 불릴 정도로 영특하여 온 마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일찍이 학문을 익혀 15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1882년 8월, 이종일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선생은 유교사상을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있었던 선생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고, 1898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1898년, 선생이 중추원 의관을 지내고 있을 때의 대한제국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워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세계 열강들의 침략에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 이종일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10개월 말에 의관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이종일 선생은 인재양성이 국력을 키우는 힘이라 생각하여 민영환 선생 등과 함께 1898년에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진작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신문 (출처 : 위키백과)

 

특히 이종일 선생은 실학운동의 재현수단으로, 언론에 선생의 사상을 전개해 갔는데요. 1898년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뎨국신문 (출처 : 샘이 깊은 물 블로그)

 

이종일 선생은 1910년까지 10여 년간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민중의 개화와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선생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요. 필화사건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 필화 : 언론매체 등에 당시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불이익을 받는 것을 뜻함.)

 

그러던 중 1919년 1월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는데요. 이후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자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이 높아져, 적대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기운이 감돌던 2월,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의 항일운동진영들은 종교 단체들과 유림, 학생 진영과 연합하여 거국적인 구국시위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독립선언식에 관한 계획을 듣게 된 이종일 선생은 자신도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고, 2월 20일부터 그가 사장으로 있던 수송동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인쇄소 안에서 선생은 공장 감독 김홍규, 보성사 총무인 장효근, 신영구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한 장 한 장 평판인쇄기에 찍어 냈습니다. 그렇게 인쇄된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는 각계의 동지들에게 돌려졌습니다.

 

▲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 (출처 : 쇼콜라 블로그)

 

2월 28일 밤, 민족대표 33인은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생 역시 민족대표로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이종일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이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된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 이종일 선생과 보성사 직원들이 선언한 자주독립선언문

 (출처 :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도 이종일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세웠는데요. 1922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그때 낭독할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 김홍규 선생에게 인쇄하도록 지시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사전에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종일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평생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동상 (출처 : 태안군)

 

8월 31일(목), 옥파 이종일 선생의 서거 92주기를 기해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에서 추모제향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청껏 부르짖었던 때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이면에는 이종일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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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 선생은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들으며 자랐습니다. 1905년, 한용운 선생은 홀연히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요. 선생은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기존 불교에 맞서 개혁을 주장하며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기도 했습니다. 1919년 2월, 한용운 선생은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될 독립선언식에 대한 계획을 전해 듣습니다.

 

 선생은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며 불교계 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33인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연한 태도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근대적 시인이요, 저항시인이었던 선생은 1926년, 첫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최린, 최남선 등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단호히 연을 끊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습니다. 1944년 6월 29일,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으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안타깝게도 독립을 눈 앞에 두고 입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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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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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을 위해 애쓴 수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억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일 텐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고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정정화 선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왼쪽 첫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기록원)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정화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910년 가을 대한협회의 회장을 지냈던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환과 혼인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출처 : 눈&귀 블로그)


개화파 집안에서 성장한 남편 김의환의 영향으로, 정정화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정정화 선생에게 우리나라에도 독립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민족의식이 일깨워진 계기가 되었는데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을 목도하고 그 이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환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면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선생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치며 열차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도착하게 되었는데요. 먼저 망명해 있던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임무를 받고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정정화 선생의 활약이 시작되었는데요. 선생은 일본의 감시가 비교적 심하지 않은 여성의 신분을 이용하여 무려 6번이나 국내를 왕복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게 됩니다.

 

▲ 정정화 선생과 그녀의 아들 (출처 : 국가기록원)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1922년 6월 중순, 세 번째로 밀파되어 압록강을 건너던 정정화 선생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던 것인데요. 조사를 받고 풀려난 정정화 선생은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다시 상해로 갔습니다.


1924년 12월, 정정화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듬해 6월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힘겨운 시기였지만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하고 부상을 돌보는 등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하며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요. 이 때 정정화 선생 가족 또한 이동녕, 김구, 엄항섭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따라 이동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과 정정화 선생 가족_앞줄 왼쪽 두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보훈처)

 

1934년 정정화 선생은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선생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요.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아래 있는 중경의 3.1유치원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당시 임시정부의 안살림은 정정화 선생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6월 각 당의 대표들이 남목청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정정화 선생은 이 때 총상을 입은 김구,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선생 등을 간호하며 뒷바라지하였습니다. 1940년 3월 초 임시정부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을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도 바로 정정화 선생이었습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기념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정정화 선생은 각 정파의 부인들과 함께 여성 차원의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대한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는데요. 훈련부장에 선출된 정정화 선생은 국내외 한인 부녀의 단결을 위해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 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였으며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해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정화 선생은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 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정정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그녀가 보여준 헌신은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김구 선생은 그녀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녹두꽃」에서 선생은,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안에 계시듯 조국은, 잃어버린 조국은 늘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임시정부에서 교육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정정화 선생. 그리고 힘겨운 시기에도 그녀가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조국,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이 되찾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44766&cid=40942&categoryId=34465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904&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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