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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07년 정미의병 때 경기도 광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밀고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올해는 선생이 순국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의령남씨 진희(晉熙)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그해 5월경에는 선생의 고향인 낙생면 하산운리의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노임도 지불하지 않은 채 수목의 벌채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구국 일념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을사조약 늑결,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등 정국은 더욱 악화 되었고, 일제의 침략 야욕은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미 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나라의 존립자체가 위태롭다고 느낀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였고 선생의 휘하에는 구국의 일념으로 무장한 의병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와 이시영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한 김태동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남상목부대의 활 동 범위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펼쳐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선생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가매장 되었으며 해방 후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 이순이(李順伊)여사와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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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安重根의사 의거 99주년 기념식』이 26일(일) 오전 10시, 남산에 있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대강당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안응모)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기념식에는 이종정 국가보훈처 차장, 승병일 광복회 부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호일 안중근기념관장의 약전봉독 및 이영옥 이사의 의거의 이유봉독, 광복회장과 국가보훈처 차장의 기념사에 이어 작곡가 안용희씨의 기념연주(봉숭아/선구자), 글짓기대회 수상자 시상, 역사음악어린이합창단의 안중근노래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安重根의사(1878~1910)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1906년도에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삼흥(三興)·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또한 일제의 강권에 의해 광무황제가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해외로 나가 이범윤·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다시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우덕순(禹德淳)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으며, 의거 당일(10월 26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주살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위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다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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