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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1941. 11. 20.)


위 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서시」는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광복 이후 간행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에 놓였습니다.

이 시를 통해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올곧은 삶을 지향했던 윤동주 시인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지난 2017년 12월 30일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 순국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 전해드릴게요.


▲ 윤동주 시인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북간도의 명동촌은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 출생 이전에 설립되었던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용정의 서전서숙은 설립자인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이후 문을 닫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명동촌의 명동서숙이었는데요, 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학교에 1910년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오르게 되었죠.


▲ 명동학교와 학생들 기념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윤동주 시인은 명동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시절 그의 동기였던 고종사촌 송몽규와 김정우, 문익환 등은 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하여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지요.


▲ 윤동주와 명동학교 출신 친구들. 뒷줄 맨 오른쪽이 윤동주 시인 (출처 : 독립기념관)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 시인은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을 더 다녔습니다. 이 무렵 윤동주 시인의 집은 용정으로 이사를 했고, 가세가 기울어 옹색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윤동주 시인은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고, 교내 잡지를 내는 등 활기찬 학창 생활을 보냈습니다. 이 당시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 시인은 7개월 동안 무려 15편의 시를 썼습니다.

 

1938년 2월, 윤동주 시인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했는데요, 또한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갔습니다. 


▲ 외솔 최현배 선생 흉상 (울산 소재, 출처 :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그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조선에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하여 우리 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습니다. 연희전문에서 수학하는 4년간 윤동주 시인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을 인식하며,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 갔습니다.

 

이후 1942년 일본으로 넘어간 윤동주 시인은 교토에 있는 도지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후 송몽규, 장성언 등과 함께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을 담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또한,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는데 힘썼으며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였습니다.

 

1943년 7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는 송몽규 등과 일경에 피체되었습니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죠. 


▲ 윤동주 시인의 재판 기록 (출처 : 독립기념관)


윤동주와 시인은 1944년 3월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윤동주 시인 졸업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윤동주 시인은 암담한 식민지의 현실을 목도하고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워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묵묵히 문학 작품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이는 조국에 대한 민족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데에 대한 죄책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서시」의 한 대목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오늘 하루,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의 어두운 감옥에서 눈을 감은 그의 독립 의지와 숭고한 정신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499&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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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이번 기사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에 대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임병래 중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의 판세를 바꿀 수 있었는데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이 됐던 X-RAY 작전


▲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함대 (출처 : 국가기록원)


19508, 인천상륙작전 실시가 결정되기 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정보수집을 위해 미군 투입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리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미군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해 국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해군 정보국장인 함명수 소령은 정보수집 임무를 지시했고 임병래 중위를 포함해 사병 6, 민간인 7명으로 특수공작대가 조직됐습니다. 이들은 818일 새벽에 부산항을 출발해 6일 후 인천 앞 영흥도에 도착했습니다. 역사적인 X-RAY 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특수공작대는 영흥도에 본부를 차리고 인천에 잠입해 서울, 수원에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첩보대원들은 경인 지방의 북한군 병력 배치 상황과 규모,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기뢰 수송 사항,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인천 시내의 주둔병력의 규모와 활동내용 등 북한군의 상세한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에 전달했습니다.

또 월미도에 침투해 북한군 장교 2명을 납치하여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특수공작대가 입수한 정보를 전달받은 유엔군은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기로 합니다.


성공적인 작전 후 14일까지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안타깝게도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철수 중 북한군 1개 대대의 기습을 받았고 수적 열세에 몰립니다. 부대원들을 탈출시킨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에게 잡히면 군사 기밀이 유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은 영웅들이었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장렬한 최후였습니다. 두 영웅의 희생이 있었기에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전세가 뒤집혀 우리나라의 국토를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 영원히 기억될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 임병래 중위 동상 (출처 :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임병래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습니다. 1941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해 1950420일 대한민국 해군 중위로 임관했습니다. 임병래 중위는 해군본부 정보국 특수공작대 창설 당시부터 창설 요원으로 활약한 인재였고, 인천상륙작전 직전 수행한 영흥도 첩보전 조장을 역임했습니다. 영흥도 첩보작전 수행 후 철수하던 과정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할 때까지 북한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해 연합군과 우리 국군에게 제공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 홍시욱 하사의 동상 (출처 :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홍시욱 하사는 1929년에 출생해, 1948년 6월 1일 대한민국 해군 신병 제10기로 입대했습니다. 홍시욱 하사는 복무 중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본부의 정보국 특수공작대의 조(하사)로서 임병래 중위와 함께 영흥도 첩보 작전에 투입됩니다.

홍시욱 하사는 특수공작대원들과 함께 인천에 잠입해 성공적인 첩보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14일, 임병래 중위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부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의 전공을 기리어 1951년 충무무공훈장,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1953년 7월 6일, 은성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두 분의 유해는 1975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부활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 대한민국 해군의 유도탄고속함 10번함 '임병래함' (출처 : 방위사업청 홈페이지)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고 전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부활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은 201393일 유도탄고속함 10번 함인 임병래함을 방위사업청으로부터 인도받았습니다

이어 2014년 10월 4일에는 유도탄고속함 11번함인 '홍시욱함'이 해군에 인도되었습니다. 450t급의 임병래함과 홍시욱함은 해군의 낡은 고속정을 대체하는 유도탄고속함으로 연안 방어, 초계 임무를 수행합니다. 함대함유도탄 및 76MM 함포 등의 무장을 탑재한 전투력이 우수한 함정입니다.


68년 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임무를 수행하고 장렬히 산화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는 함정으로 부활하며 영원히 대한민국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인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우리가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호국영령입니다.


* 참고사이트

방위사업청 홈페이지 

(http://www.dapa.go.kr/user/boardList.action?command=view&page=1&boardId=I_626&boardSeq=11950&id=dapa_kr_040200000000)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8512&cid=46628&categoryId=46628)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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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인천 수봉공원에는 다양한 현충시설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수봉공원을 찾아가 인천지구 전적비, 재일 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방문하였습니다.

 

기념비들이 있는 수봉공원은 인천지하철 1호선 도화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추운 날씨였음에도 많은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수봉공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 들어가자, 인천지구 전적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 인천 수봉공원에 있는 인천지구 전적비


가까이에서 본 조각상의 모습은 굉장히 역동적이었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당시 마산-왜관-포항을 연결하는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고,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죠.

 

이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1980년 9월 15일, 옛 격전지를 굽어보는 이곳 수봉공원에 전적비를 건립하였고, 2017년 10월 11일 인천시 6.25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해 명비를 건립한 것입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천지구 전적비 옆에 나란히 있던 유엔 참전 기념탑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힘을 합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함께 이것을 기념하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 인천지구 전적비 옆에 있던 유엔 참전 기념탑


인천지구 전적비를 지나 산책로를 걷는 도중,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탑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재일동포의 자녀와 유학생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병역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고 합니다.

 

그 중 동경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와 유학생들은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는데요, 이처럼 바다를 건너 달려온 재일학도의용군의 고귀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탑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지나 마지막으로 제가 방문한 곳은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입니다.


▲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는 조국과 민족의 자유 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무공수훈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인천 무공수훈자 공적비의 건립취지문


특히 비석에 쓰여 있는 ‘이곳은 조국과 민족의 자유 수호를 위해 멸공 전선에서 함께 한 전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터전이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전시 또는 그에 따르는 비상사태 아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수훈자들의 애국애족 불꽃정신은 자자손손, 남으리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실제 전투에 참여하셨던 분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무공수훈자 명각비도 볼 수 있었는데요. 


▲ 무공수훈자 명각비


비석에 빼곡이 쓰여진 이름을 보니 이 분들의 애국심을 좀 더 무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세 곳의 현충시설 외에도 인천 수봉공원에는 현충탑, 자유 수호의 탑 등의 현충시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인천에 살며 수봉공원을 많이 방문했지만, 이러한 현충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던 게 사실입니다.

 

인천은 6.25전쟁 중 전세를 뒤집은 계기였던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곳이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현충시설이 많습니다.

제가 이번 취재를 하며 느낀 것은 주변에 있는 현충시설에 관심을 두고, 방문하는 것이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 헌신한 분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http://mfis.mpva.go.kr/)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어떤 현충시설이 있는지 찾아보고,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참고사이트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http://mfis.mpva.go.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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