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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 191931,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이후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남강 이승훈 선생의 답변

 

날씨가 쌀쌀하긴 하나, 곧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 오면 서울 어린이 대공원은 데이트를 하는 커플, 봄나들이를 나온 가족들로 인해 인산인해가 되곤 합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99년 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의 동상이 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저는 이번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생애에 대해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 (출처: 남강문화재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독교 대표였던 이승훈 선생.

이승훈 선생은 18643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재산을 모았습니다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잃는 아픔을 겪었으나, 이후 침착하게 공장을 다시 일으켜 굴지의 사업가가 되었습니다그는 오산면에서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한 남강 이승훈 선생의 동상

 

외세와 민족문제에 눈을 뜨다

 

후진 양성을 하면서 지내던 이승훈 선생은 1907, 평양에서 안창호 선생의 교육진흥론강연을 듣게 됩니다. 당시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면서 나라의 정세가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이때 선생은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라고 하는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고, 이후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강명의숙(소학교)과 오산학교(현재 오산중·고등학교의 전신)를 건립하는 한편,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교육사업에 힘쓰던 이승훈 선생은 19112, 이승훈 선생은 안악 사건(1910년 말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선생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105인 사건(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42개월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오랜 기간 옥고를 치렀음에도, 선생의 독립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191931일 오후 2, 이승훈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습니다. 만세삼창을 외치던 이들은 일경에 체포되었고, 이승훈 선생은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출옥 이후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했고,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선생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하게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힘썼습니다.

193058, 여느 때처럼 오산학교를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선생은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9, 6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오는 323() 오후 2, 서울 용산구의 남강기념관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 탄신 154주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를 꿈꿨던 남강 이승훈 선생. 이승훈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공훈록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5792&ipp=10000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027&cid=40942&categoryId=343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9853&cid=46623&categoryId=46623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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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24 14: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이네요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은 한국의 언론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베델 선생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에 맞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그의 발자취 속에는 배울 점들이 많습니다.


▲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모습


어니스트 베델 선생은 1872년 11월 3일,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처음 한국에 방문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시기였던 1904년 7월 18일에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는데요. 이를 필두로 1905년 8월,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1907년부터는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많은 구독자를 얻음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대내외로 알리게 됩니다. 그의 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을 했지만, 당시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선생의 신문은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일본의 언론 탄압 속에서 신속한 보도와 논설로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기 위해 열강의 개입을 요청하는 밀서를 여러 나라에 보냈습니다. 그 중 영국 신문 <트리뷴>지가 고종의 밀서를 실었는데요. 이에 대해 일본은 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것이 아니고,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었는데요.

고종 밀서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매일신보>는 밀서의 사진을 큰 사진판으로 실었습니다. 이로 인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해 오던 일본 당국은 크게 당황했고, 우리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


이러한 언론 활동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끔 노력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베델 선생을 추방하기 위해 수차례 끈질긴 재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일제 통감부는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베델 선생의 추방에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통감부는 반일적인 신문기사를 썼다는 이유를 구실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통감부는 베델 선생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신문지법’에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베델 선생의 <대한매일신보>도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통감부는 이 법률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고 베델 선생 추방을 강력히 추진하자, 영국도 마침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의 제2차 재파는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고, 한국,영국,일본 세 나라가 관련된 역사상 유례없는 재판에 한국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베델 선생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해에서 3주동안 구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델 선생은 그 후에도 계속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 언론 활동을 이어갔고, 일제는 언론을 통해 베델 선생이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배포하며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에 베델 선생은 명예회복을 위해 언론과 법적인 절차로 대응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여러 차례의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를 받으며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37세에 갑작스럽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베델 선생의 묘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베델 선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신문사에 모여들었습니다. 베델 선생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나라, 한국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으로 그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베델언론인장학금'을 제정하였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비록 생김새는 달랐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컸던 베델 선생. 대한민국의 언론을 지켜낸 영웅, 베델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479&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485&cid=46668&categoryId=46668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385&cid=40942&categoryId=33384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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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국가보훈처 훈남훈녀 기자단 10기 김도헌입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들은 영남 지역 최대 규모의 3.13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의열단과 조선의용대가 창단된 곳이 어디인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경상남도 밀양입니다. 저는 이번에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지금부터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전경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에, 밀양시립박물관과 같이 붙어있습니다. 밀양터미널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쉽게 가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의 건립 배경에는 다양한 역사가 존재합니다. 영남 지역 최초로 일어난 3.13밀양만세의거를 필두로, 의열투쟁의 역사를 새로 쓴 의열단의 창단과 무려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5당 통합의 정치조직인 민족혁명당의 창당을 비롯해서 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와 독자무력으로 일제를 타도하려한 조선의용대의 항일전쟁 및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는 애국충정이 빛나는 밀양출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신간회와 청년계몽운동을 비롯해서, 대종교를 통한 간도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신민부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에 이르기까지의 빛나는 역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면서 밀양 지역이 항일운동과 많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기념관에 대해 하나씩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독립운동기념관 입구

 

기념관 입구의 모습입니다. 관람료를 지불하고 기념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입구에는 독립운동가를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도 있습니다. 관람 전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이듭니다. 



▲ 기념관 내부 관람물


처음으로 관람한 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밀양인의 발자취’였습니다. 밀양지역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단체 등을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관람한 것은 ‘조선의용대’의 창건과 활동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중국 침략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중국정부는 항일전쟁의 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역량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10일 후난성에서 중국군사위원회의 지원 하에 조선의용대가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재현물


위 사진은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재현물’입니다. 당시의 항일정신이 가슴 속으로 느껴질 만큼 재현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는,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밀양경찰서에서 서장이 훈시를 하고 있을 때 의열단원 최수봉이 남쪽 창문으로 폭탄 1개를 던져 넣은 다음, 경찰관들이 뛰쳐나올 때 또 1개를 던진 사건입니다. 그는 자결을 시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요.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7월 8일 순국하였습니다. 최수봉 선생은 1894년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나 1920년 중반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거를 준비하고 폭탄을 던졌던 것입니다. 


▲ 밀양 만세시위운동 재현물


다음으로 관람한 것 은 ‘밀양만세시위운동’ 재현물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귀향한 이들은 학생, 종교 조직과 연계하여 만세시위 준비에 착수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격문·태극기 등이 만들어졌고,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밀양에서는 3월 13일부터 4월 10일까지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 밀양면 장날의 만세운동,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단장 장날의 만세시위, 밀양면의 장례행렬 시위운동 등 아홉 차례의 만세시위운동이 펼쳐졌는데요. 460여 명의 주민이 이른바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대부터 황상규, 김대지, 윤치형 등이 주도해 온 비밀결사 일합사, 동화학교내의 연무단 등을 구심점으로 축적되어 온 독립운동의 역량이 거둔 결실이 밀양 3.13만세운동이었던 것입니다.


▲ 기념관 내부 의열단 관람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영화의 소재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의열단’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중국에서 김원봉의 주도 하에 “일제 침략을 물리치고 정의를 되찾기 위해 맹렬하게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결성되었습니다. 

황상규·윤치형·김원봉·김상윤·윤세주·강인수·한봉근·한봉인·고인덕·김성수 등, 의열단 활동의 중심인물은 밀양 출신이었습니다. 의열단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폭파사건,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의거사건,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의거 사건,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사건 등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독립운동 역사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소개, 독립운동단체에 관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기념관을 나서며 ‘밀양시 독립운동가 추모동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밀양시 독립운동가 추모동상


선열들의 뜻을 이어 민족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밀양인들의 마음을 모아 건립된 독립운동가 동상들의 중심에는 ‘선열의 불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꽃처럼 싸웠던 선열들의 넋이 살아 있는 밀양은 독립운동가들의 성지였습니다. 추모동상 앞에서 묵념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새겼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자랑스러운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평생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상으로 국가보훈처 훈남훈녀 10기 김도헌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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