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583,522
  • Today | 87
  • Yesterday | 2,395


훈터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10기 훈남훈녀 기자단의 김선아 기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국가보훈처의 기자단으로서 작성하는 마지막 기사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취재입니다.

 

68년 전, 우리나라와 북한 사이에서 벌어졌던 6.25전쟁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없으시겠죠.

1,129일 간의 전쟁,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희생되었고, 그 중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용사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들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있지요.

제가 매일같이 다녔던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이 6.25전쟁의 격전지였다는 것은 취재를 하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개화산 호국공원에 있는 호국충혼 위령비와 개화산 전투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 위령비, 김포 개화산지구전투위령비가 있는 호국공원에 오르기까지는 개화역에서 내려 도보로 10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개화산 호국공원에는 개화산 전투에서 희생되었던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호국충혼 위령비’가 있었습니다.


▲ 개화산 호국공원에 있는 호국충혼 위령비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육군 제1사단 11, 12, 15연대 소속 장병 1,100여 명은 김포 지구로 후퇴했습니다.

그들은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개화산에 최후의 방어진을 치고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국군은 당시 아군으로 위장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최후의 1인까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부와 통신이 끊어지고 탄약과 보급이 끊긴 채 북한군의 수와 화력에 밀려 11・12・15 연대 대장과 준장 등 37명만을 제외, 천 백여 명에 가까운 부대원 전원이 전장인 개화산 골짜기에서 장렬히 산화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94년 3월, 이곳 개화산에 위령비를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미타사 석불입상


개화역에서 위령비 중간에는 미타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미타사에서는 매년 6월에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한 전투이지만, 이름이 새겨진 비석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습니다.

무명용사란, 신원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자를 지칭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먹먹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참고사이트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http://mfis.mpva.go.kr/hokukModel/readHokukModelView.do?typo=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서정원

    2018.01.28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화산*
    서정원
    진눈개비 흩날리는 둘레길
    참선중이다
    6.25그때
    천둥소리 하늘에 닿고
    병사의 함성소리
    땅도 울던 그 산

    그날 지옥의 묵시록 터*
    이젠 역사의 땅 무명용사들
    누런 갈잎덮고 잠들어있다

    총알이 빗발치던 그때 산화한
    산자락*엔 은빛날개들 줄이어
    붕정만리 날개짓한다

    눈발사이 그림자들
    幻影되어 떠도는데
    이승길따라 내닫는 나그네 발길 그날
    기린 충혼탑 앞에서
    남과북 경계를넘는
    기러기를 바라본다

    *서울시 강서구 김포공항옆 산이름
    *육군 전진부대 11,12,15,연대 1100명
    인민군대부대와 전투로 산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조국 독립에 몸 바칠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글입니다.

 

지난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였습니다. 저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알리고, 그를 추모하고자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매헌)역 근처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상설전시관 리모델링으로 인해 2월 15일(목)부터 5월 31일(목)까지 휴관된다고 하니, 관람 시에 참고 바랍니다.


▲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태극기 앞에서 폭탄과 권총을 들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년기_윤봉길의사의 출생과 성장’, ‘계몽운동기’, ‘역사 무대로 진출_상해의거’, ‘순국’, ‘상해의거 그 이후’ 순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신문조서


‘계몽운동기’ 전시관에서는 농촌계몽 및 부흥운동을 위하여 조직하였던 부흥원, 월진회 등과 관련된 유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당시 저술하였던 ‘농민독본’, ‘기사년일기’, 서한과 한시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청년 제군들에게', 윤봉길


‘역사 무대로 진출_상해의거’ 전시관에서는 의거 당시 사용했던 폭탄을 비롯하여 소지하고 있었던 여러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이향시', 윤봉길


‘상해의거 그 이후’에는 상해의거를 다룬 보도자료, 1962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1932년 4월 29일 상해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가 미친 영향을 살펴볼까요?



1. 1920년대 이후 침체기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내부 결속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해외 동포들도 다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또한 1930년대 식어가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점점 사라져 변절자가 많아지던 시기에 다시 한 번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고 광복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고취시켰다.

 

3. 상해의거 이후 이와 관련된 수많은 외신 기자들은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렸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한민족이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달성하였습니다.

 

4. 더불어 만보산 사건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한국과 중국 양국이 오해를 풀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동반자로 서로를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며 조선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1932년 5월 김구선생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육 지원 협약 등 임시정부 지원책을 논의하였습니다.

 

- 이후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장교 훈련반을 설립하여 독립군을 길러냈으며, 한국광복군 창설도 지원하였습니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까지 임시정부 활동을 크게 후원하였습니다.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총통이 연합국 수뇌들은 설득하여 카이로 선언문 특별조항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독립의 단초를 마련하였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12월 19일, 효창공원 의사 묘전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저도 이번 취재를 통해 추모의 마음 한 송이를 남기고 왔는데요.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더 자세하고 깊게 알고 싶은 독자분들은 한 번쯤 꼭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백범일지」에 수록된,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심하고 김구 선생에게 한 말입니다.

나라를 위해 큰 용기를 낸 분들이 있어, 지금 제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 훈남훈녀기자단 김태의 기자였습니다.


* 참고사이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http://www.yunbonggil.or.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저는 이번에 인천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인천 연수구 청량로160번길 26’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청량산 자락에 위치해 있고, 1946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입니다.


▲ 인천시립박물관의 모습


개관 당시의 전시유물은 모두 364점이고, 그중에는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대여한 유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인천시립박물관의 이모저모

 

박물관은 역사 1실과 역사 2실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1실에는 주로 인천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인천의 모습을 볼 수 있고, 2실에는 조선시대부터 근대기 인천의 역사와 생활 모습을 고문헌과 근대 유물, 모형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인천의 근현대사, 독립운동을 소개해 드리기 위해 2실을 위주로 돌아보았습니다.


▲ 전시관 내부 모습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만이었던 인천 지역에 일본 자본의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30년대에는 교통이 편리한 인천 지역에 대규모 공업지대가 조성되었고, 부평을 중심으로 군수산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인천 각지에서 항일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 인천의 항만 모습


1919년 민족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인천 지역에서도 자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4일간 동맹휴업을 하였고, 3월 7일에는 시내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국공원 등지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부평에서는 황어장터에서 약 3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강화에서는 기독교계가 주도하여 3월 18일 유봉진 선생의 주도하에 6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 만세시위운동은 강화읍을 기점으로 강화도 전 지역과 부속된 여러 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


일제강점기 말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은 공장과 부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인천에는 노동자들이 많았고, 또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일본인이었던 만큼 인천의 노동운동은 항일 민족운동의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인천의 노동운동은 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며 일본의 자본가들과 대립하였다고 합니다. 


▲ 인천의 노동운동


인천의 독립운동은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지역 내에서 행해진 계몽운동과 연계되어 1930년대에 본격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을 위해 희생, 헌신했던 선열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기사를 마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 호..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평창 동계올림픽 계기 네덜란드 참전용사 재방한 퀴즈 이벤트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설 연휴 기간, 국립묘지 안장 및 보훈병원 이용 안내
네덜란드 참전용사,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대한민국과 다시 만나다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