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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겨울이 벌써 이렇게 가까이 왔나 싶은 요즘입니다. 따스하게 잘 보내고 계신가요? 이제까지 훈터 블로그에 많은 기념관이 소개되었는데요. 저는 지난번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이어 이번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전경 (출처: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우선 왕산 허위 선생은 1908년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치려 계획했던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위 선생은 그 이전인 1896년에도 의병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는데요. 해당 시기에는 고종의 명을 받아 의병을 자진 해산한 이후에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이후 1907년, 선생은 해산 당한 관군까지 포함한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서울 진공작전을 위해 왕산 선생이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허위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항일전을 재개하였습니다. 1908년 5월, 선생은 연천에서 일본헌병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같은 해 9월 27일,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이러한 왕산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서울시에서는 1966년 왕산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의 약 3km 구간을 ‘왕산로’로 명명하였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순국 의병장 (왼쪽에서 두 번째가 왕산 허위 선생)

(출처: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은 ‘경북 구미시 왕산로 28-33’에 위치해 있는데요. 왕산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개관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허위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요.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의 왕산허위기념공원에는 생가 터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출처: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생가 터와 함께 유허비와 왕산의 묘소 역시 자리하고 있습니다. 

 


 

 

(출처: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왕산 허위 선생은 순국 직전 왜승(倭僧)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올곧은 의기와 품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평생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던 그의 우국충정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왕산허위선생기념관 www.wangsanhuhw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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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은 한국의 언론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베델 선생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에 맞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그의 발자취 속에는 배울 점들이 많습니다.


▲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모습


어니스트 베델 선생은 1872년 11월 3일,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처음 한국에 방문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시기였던 1904년 7월 18일에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는데요. 이를 필두로 1905년 8월,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1907년부터는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많은 구독자를 얻음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대내외로 알리게 됩니다. 그의 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을 했지만, 당시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선생의 신문은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일본의 언론 탄압 속에서 신속한 보도와 논설로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기 위해 열강의 개입을 요청하는 밀서를 여러 나라에 보냈습니다. 그 중 영국 신문 <트리뷴>지가 고종의 밀서를 실었는데요. 이에 대해 일본은 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것이 아니고,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었는데요.

고종 밀서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매일신보>는 밀서의 사진을 큰 사진판으로 실었습니다. 이로 인해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해 오던 일본 당국은 크게 당황했고, 우리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고종의 친서


이러한 언론 활동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끔 노력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베델 선생을 추방하기 위해 수차례 끈질긴 재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일제 통감부는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베델 선생의 추방에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통감부는 반일적인 신문기사를 썼다는 이유를 구실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통감부는 베델 선생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신문지법’에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베델 선생의 <대한매일신보>도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통감부는 이 법률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고 베델 선생 추방을 강력히 추진하자, 영국도 마침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베델 선생의 제2차 재파는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서 열렸고, 한국,영국,일본 세 나라가 관련된 역사상 유례없는 재판에 한국인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베델 선생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선동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해에서 3주동안 구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델 선생은 그 후에도 계속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 언론 활동을 이어갔고, 일제는 언론을 통해 베델 선생이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배포하며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에 베델 선생은 명예회복을 위해 언론과 법적인 절차로 대응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여러 차례의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를 받으며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37세에 갑작스럽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베델 선생의 묘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베델 선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신문사에 모여들었습니다. 베델 선생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나라, 한국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으로 그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베델언론인장학금'을 제정하였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비록 생김새는 달랐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컸던 베델 선생. 대한민국의 언론을 지켜낸 영웅, 베델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479&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485&cid=46668&categoryId=46668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385&cid=40942&categoryId=3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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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습니다. 올해 571돌을 맞은 우리의 한글은 과거, 일제의 탄압으로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꿈꾸던 많은 국어학자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데 힘썼고, 그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의 한글을 지켜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지만 우리 민족의 생활과 문화에 필요한 한글 교육이 당장 이루어질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글 대신 일본어를 배우고 있어, 그들을 다시 가르칠 한글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일본어로 된 교재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한글을 지켜낸 독립운동가, 한뫼 이윤재 선생에 대해 다뤘는데요. 이번 기사에서는 나라를 잃었던 시대에서 한글을 지키고, 광복 직후 한글 교육 정책이 시급해지자 한글을 보급하며 현대화에 힘쓴 외솔 최현배 선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기념관 전경

 

저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찾아 울산에 위치한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기념관은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12길 15’에 위치해 있는데요. 울산시외버스터미널 혹은 울산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정거장에서 432, 701, 702, 246, 257번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하면 됩니다. 저는 702번 버스를 타고 기념관을 찾아갔고, 다시 돌아올 때는 432번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 동상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10년에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박동 보성학교 안의 국어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의 강의를 받았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며 민족주의적인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최현배 선생도 이러한 스승을 따라 한글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문법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어법 및 문법을 담은 ‘우리말본’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하여 1937년 출판하였습니다.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기, 선생은 한글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통일된 표기법으로 작성된 우리말 사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조선어연구회이 회원이 되어 ‘한글’지를 창간하고 ‘한글날’제정에 참여했으며, 조선어 사전 편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되면서,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에서 강제로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실직한 선생은 이런 탄압에 흔들리지 않고 한글을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1942년에 출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지독한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요. 그 힘든 옥고를 버텨내고 그는 광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우리말로 된 교과서, 특히 한글 교재 편찬이 시급했습니다. 최현배 선생은 바로 동지들을 모아 ‘조선어학회’ 재건을 위한 회의를 열고, 9월 초에 조선어학회 안에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선생은 1945년 9월 21일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1948년 9월 21일에 퇴임하기까지 3년 동안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50가지 이상의 교과서를 편찬하였으며, 한자보다 한글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 교육을 했습니다.

 

 

 

 

▲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 내부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기념관은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알 수 있는 외솔 전시실(제1전시실, 제2전시실)과 특별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한글교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두 곳의 외솔 전시실 중 제1전시실의 일부이며, 제1전시실은 최현배 선생의 생애와 업적, 최현배 선생이 직접 작성한 원고와 책, 그리고 그의 사상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터

 

기념관 밖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최현배 선생의 생가 터를 볼 수 있습니다. 건물은 이미 없어졌지만 집터와 축대를 2008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최현배 선생은 여기서 태어나 17세에 경기중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생활했습니다.


 

▲ 금서집 중 외솔 최현배 선생의 글귀

 

‘한글이 목숨’ 이 짧은 글귀 안에 최현배 선생의 모든 철학이 담겨있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광복 전후로 우리말을 지키고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해여 애썼던 모든 국어학자들의 염원을 기리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글이 목숨이었던 최현배 선생의 고향, 울산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363&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네이버 캐스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363&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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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7.11.03 2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개인적으로 김혜림 기자님의 지난 '한글을 지킨 독립운동가' 1편(한뫼 이윤재 선생) 게시물에 덧글을 달았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주시경 선생 다음으로 제일 존경하는 한글학자 분이 바로 외솔 최현배 선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특히나 '한글날 노래' 작사자이기도 하셨고, 최현배 선생의 대표저서인 '우리말본' 에 등장하는 '한글이 목숨' 이라는 힘찬 글씨체의 붓글씨가 제 마음에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물론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가 계속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희승 선생, 한징 선생, 정인승 선생 등.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이제 571돌 한글날이 있는 올해 10월은 끝이 났지만, 의병, 무장투쟁, 의열투쟁 등 수많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분야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수많은 선열들의 업적 또한 꼭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과 함께 보훈처 측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굴과 홍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럼 이번에도 훌륭한 기사를 작성 해 주신 김혜림 기자님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모든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께서도 항상 하시는 모든 일마다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저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11. 3.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 드림.

  2. 김준식

    2017.11.03 2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개인적으로 김혜림 기자님의 지난 '한글을 지킨 독립운동가' 1편(한뫼 이윤재 선생) 게시물에 덧글을 달았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주시경 선생 다음으로 제일 존경하는 한글학자 분이 바로 외솔 최현배 선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특히나 '한글날 노래' 작사자이기도 하셨고, 최현배 선생의 대표저서인 '우리말본' 에 등장하는 '한글이 목숨' 이라는 힘찬 글씨체의 붓글씨가 제 마음에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물론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가 계속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희승 선생, 한징 선생, 정인승 선생 등.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이제 571돌 한글날이 있는 올해 10월은 끝이 났지만, 의병, 무장투쟁, 의열투쟁 등 수많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분야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수많은 선열들의 업적 또한 꼭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과 함께 보훈처 측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적극적인 발굴과 홍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럼 이번에도 훌륭한 기사를 작성 해 주신 김혜림 기자님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모든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께서도 항상 하시는 모든 일마다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저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11. 3.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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