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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고서 한집과 한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일평생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말입니다. 저는 이번에 안창호 선생의 일생과 업적을 살펴보기 위해 <도산 안창호 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 기념관 앞에 있는 안창호 선생 동상. 굳건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20’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일과 토·일요일(공휴일 포함)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신년 1월 1일과 설날, 추석 연휴는 휴관일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도산 유품 및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도산 사상 학술연구 활동과 도산 사상 교육보급활동 등 여러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성장과 구국운동’, ‘미주활동기’, ‘임시정부활동’, ‘대독립당 활동’, ‘국내 활동과 서거’ 순으로 전시되어 있어,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알 수 있습니다.



  # 성장과 구국 운동기


도산 안창호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양 시내를 보며 청과 일본이 조선 땅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 밀러 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신학문을 공부하며 기독교에 입교한 도산은 1897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3년간 경기, 황해, 평안 각도를 순회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안창호 선생은 정부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통쾌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1899년 고향에서 점진학교를 세우고 교육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1902년 9월 부인 이혜련 선생과 함께 떠난 안창호 선생은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듯 자기의 호를 직접 ‘도산(島山)’이라고 지었습니다.



  # 미주 활동기

 

1902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1903년 이 강, 정재관, 김성무 선생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한인친목회는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공립협회는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로, 도산은 초대 회장에 선임된 후 재미한인 동포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7년 선생은 국내로 귀국하여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며 동지들을 결집하여 이 갑,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전덕기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신민회는 교육, 산업, 언론 등 다방면의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잠시 뜻을 얻었노라 /

까불대는 이 시운이 / 나의 등을 내밀어서 / 너를 떠나 가게 하니 /

일로부터 여러 해를 / 너를 보지 못할지나 / 그 동안에 나는 오직 /

너를 위해 일할지니 / 나 간다고 설워마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

- 안창호 선생이 조국을 떠나며 부른 이별의 노래 ‘거국가’ 中


1910년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한 도산은 중국 청도에서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였습니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재러 한인사회를 지도하고 북만주 말산의 봉밀산 독립운동기지를 돌아본 후 시베리아, 독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습니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발족한 후 도산은 총회장으로 활약하며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 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한인사회를 결집하여 민족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1913년 도산은 민족운동을 담당할 중견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흥사단’을 창립하였습니다.



  # 임시정부와 대독립당 활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서 5월 상해에 도착한 후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습니다.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락을 세우고 헌법과 법류를 제정, 검토하고 국내외 연락망인 연통부와 교통국을 조직하였습니다. 또한,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대한민국적십자회 결성,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설립을 추진하는 등 임시정부가 정보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상해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설치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민족운동의 중견간부를 양성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음으로써 혁명활동과 흥사단운동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내분이 깊어지자,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국내외 단체 및 지역 대표 150여 명이 참가하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습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접한 도산은 이를 독립운동단체 규합의 적기로 보고 유일당 원칙에 찬동하는 각 단체만을 규합하여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 최초의 정당조직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습니다.




  # 국내 활동과 서거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일어난 4월 29일, 도산은 소년동맹단에 기부금을 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해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을 방문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1932년 6월 국내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은 도산은 4년 실형을 선고 받았고, 대전감옥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1935년 2월 가석방되었습니다. 출옥 후 도산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한 후, 고향 근처 대보산 송태산장에 기거하면서 동우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습니다.

송태산장에서 체포당한 도산은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도산은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환으로 위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2월 24일 서둘러 도산을 보석시키고 경성제국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산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3월 10일, 만 6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안창호 선생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었고, 나라의 소중함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17년 겨울, 한 해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고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현재를 위해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김태의 기자였습니다.


* 참고

도산안창호기념관 http://www.ahnchangho.or.kr/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883&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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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한때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대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고,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다시 북진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열렸고, 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를 비롯하여 휴전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 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건의 문제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장기간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회담 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된 것이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전까지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죠. 중요한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 속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 백마고지 기념관 입구에 있는 돌로 만든 표지판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5사단 열쇠전망대.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사전에 신청과 승인을 거쳐 들어가야 했는데요. 여기에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5사단 열쇠전망대 전경


충현탑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덕산리에 있던 탑을 열쇠전망대로 옮겨온 것인데요. 6.25전쟁 중 대광리 북방고지 탈환을 위해 ‘아더 지 투르도’ 소장이 지휘한 장병들은 중공군 주력부대를 섬멸, 격퇴합니다. 따라서 대광리 북방고지의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죠.


이들 장병의 공적을 찬양하며 자유 평화를 위해 산화한 참전용사와 우리 국군장병의 영령 893위를 추모하기 위해 충현탑을 건립했습니다. 충현탑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발견되었으며 2000년대 초반, 열쇠전망대로 옮겨 관리하고 있습니다.


▲ 열쇠전망대에 있는 충현탑


다음으로 백마고지 기념관에 방문해 보았습니다.


백마고지 기념관 안으로 걸어가면,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가 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 장렬하게 산화한 국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전사자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기념관으로 올라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


백마고지 기념관은 동편과 서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편에서는 백마고지 전투 당시 제9사단장이었고, 제15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종오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백마고지 기념관에 있는 백마 한 마리


동편과 서편에는 동판이 있습니다. 이 동판들은 백마고지 전투 당시에 소모됐던 탄피를 녹여 제작되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약 27만 5천여 발의 탄피가 나왔다고 할 만큼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기념관 한쪽에서는 중공군이 사용했던 장비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 탄피를 녹여 만든 동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백마고지 기념탑. 기념탑 앞에 서서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과 유엔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백마고지 기념탑


열쇠전망대에 있는 충현탑과 백마고지 기념관을 다녀와서, 6.25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목숨 걸고 우리 국토를 수호한 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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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터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선아 기자입니다.

지난 11월 17일,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거행된 곳이 서대문형무소였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날 기념식 취재를 갔던 저는 기념식장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께서 기념사를 하던 중 오른편에 위치한 사형장을 바라보며 울먹였던 것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이후 서대문형무소를 한 번 더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 제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남긴 여옥사와 보안과청사를 중심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표지판을 따라 걷자, 좌우가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형무소 외벽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헌신했던 분들이 옥고를 치렀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입구로 들어가자, 왼편에 ‘여옥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형량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 사형수를 수감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소위 보안법, 치안유지법, 국가총동원법, 출판법 위반 등의 명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사상범으로 분리되어 감옥 내에서도 일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들은 벽을 두들겨 암호화된 신호를 주고받는 이른바 ‘통방’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보를 교환한 이들은 3.1운동 1주년과 같은 시기에 다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이곳 여옥사에서는 유관순 열사 뿐만 아니라 신관빈, 어윤희, 권애라 선생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옥사 옆에는 역사 전시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가장 마음이 먹먹해지고 생각이 많아졌던 순간은, 바로 ‘민족저항실 2’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의 벽면은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기록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5천여 장의 수형기록표를 통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또 추모하며,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한 분 한 분을 모두 마음 속에 담고자 이곳에서 거의 사십분이 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린 소녀부터 나이가 많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있었지만, 모두 당당한 얼굴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물고문실, 임시구금실, 취조실, 고문실, 고문육성증언실, 고문체험실, 지하 독방실 등도 있었습니다.

이곳 서대문형무소 보안과청사 지하실은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을 취조하였던 공간이었습니다. 취조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견디기 힘든 온갖 고문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는 고문 방법인 물고문, 손톱찌르기 등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고, 고문 도구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직접 그 현장을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독립을 위해 희생, 헌신한 선열들을 기리고 그분들의 뜻을 기억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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