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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우리는 정말로 획기적인 소설과 만나게 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에 흠뻑 빠져들게 한 <해리 포터> 시리즈.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이 소설은 초현실적인 세계와 마법,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내세워 이를 토대로 한 영화 시리즈까지 탄생시켰어요. 물론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고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소설이었지만, 모든 연령층을 사로잡은 이 소설은 어린이 소설로는 최초로, 어른들이 들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점잖은 표지를 따로 제작하기도 했죠.

 

저는 처음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접했을 때의 그 흥분과 감격, 그리고 마치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던 마법의 세계를 소개한 작가의 상상력에 놀랐습니다. 또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한번 더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주인공: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작가 조앤 롤링은 영국 멘체스터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딘 버러에 있는 있는 작은 카페에서 자신의 딸을 달래며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하죠? 가난한 그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해리 포터> 시리즈.의 감동은 전 세계인이 나눠갖을 만큼 풍요로웠죠!

 

그런데 우리 나라에도 조앤과 같이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작가가 있습니다!!!!
아동 문화운동가이자, 독립 운동가셨던 ‘대한 어린이’의 아버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십니다.


오늘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인생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방정환의 서재는 꿈과 희망이다!]

 

방정환 선생님의 인생과 책

 

<방정환 선생님>

 


방정환 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어린이 날’의 창시자라는 사실이죠. 당시 일제의 강점이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이 땅의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의 인권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친 문화 운동가, 사회 활동가셨습니다.

 

사랑의 선물, 어린이


1899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학교 입학 후부터 그의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요, 1908년 스스로 ‘소년입지회’를 조직해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하셨다고 해요. 초등학생이 이렇게 스스로 모임을 조직할 수 있었다니, 대단하죠? 고등학생 시절 1913년 이광수 선생님이 펴낸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개재 되면서부터 글짓기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1919년 전국을 뒤흔든 독립운동 에 감명을 받은 그는 독립신문을 발행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었어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그는 그해 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1921년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안데르센 동화>, <그림동화> <아라비안 나이트> 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 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합니다. 이것이 방정환 선생님의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단행본입니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번째 동화이며 한국 아동문학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학대 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 방정환, 사랑의 선물, 머리말, 1922

출처: 한국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 http://www.dongsim.net )

 

 

세대를 뛰어넘는 꿈과 희망, 어린이

 

 <월간 어린이 표지>

 

 

방정환 선생님은 1923년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 월간 <어린이(1923~1934)>를 창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8명이 신청할 만큼 인기가 없었다고 해요. 일제 강점기,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독서라는 것은 사치로 여겨지던 현실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구연 동화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던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했습니다. <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선생과 같은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어린이>는 옛날 이야기식의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해, 새로운 창작 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습니다.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잃었던 어린이들 의 슬픔을 달래주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담았던 거죠.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 방정환, 어린이 찬미, <신여성> 1924 -


 

이후 그는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고 <아기별 삼형제>, <칠칠단의 비밀>, <동생을 찾으러> 소년 소설, 창작극,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에 의한,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의 세상을 만들어주신 방정환 선생님, 우리 어린이들에게 잊지 못할만큼의 선물을 주신 소파 방정환.

 

1957년 어린이를 위한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이 동상은 1987년 5월 3일에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물론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힘썼던 방정환 선생님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정부에서는 1978년 문화예술계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198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소파 방정환 선생의 동상>

 

 

어쩌면…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지금의 어린이들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어린이의 꿈을 채워주신 방정환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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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악보' 팔아가며 모은 돈은,,

 

 '애국가'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주신 익태 선생 아시죠?

 

<부다페스트에서의 안선생> 출처 : 안익태 기념재단

 

작년, 편찬위에서 안익태 선생이 친일파라고 발표하여서 국민들이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데요,

친일파 행동의 기준이 모호해서 아직도 국민들의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안익태 선생은 어렸을때 부터 자존심과 정의심이 매우 강해서 숭실학교에 재학당시 (현재 초등학생)

친일 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장학 처분을 받게 되자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었다고 해요.

1919 3.1운동이 터지자 일본 경찰의 쫓김을 받다가 일본, 미국, 유럽까지의 유학길에 오르게 되죠.

1936 독일의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당시 히틀러의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 애국심 때문이었을까,, 6애국가의 선율을 완성하게 됩니다.

같은 8월엔 독일에서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었죠.

바로 올림픽에는 비록 일장기는 달고 있었지만 마라톤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7명의 한국선수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안익태 입상식이 끝나자마자 이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꺼내어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입니다'

 

 하고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의 애국가가 불러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이죠.

애국가를 완성한 안익태 악보의 사본을 만들어 미국에 있는 교민회로 보냈고

 

<애국가 악보> 출처 : 샌프란시스코 연합감리교회

 

특히,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널리 퍼졌어요. 나라를 잃고 타국에 있는 교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던 것일까요?

대한인국민회가 악보들을 시가보다 훨씬 비싼, 일반 노동자의 1주일 급료에 해당하는 20센트를 받고 팔아

모두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쓰였다고해요.

 

(어렸을 , 학교에서 애국가 4절까지 외우라 숙제내줄 , 왜이렇게 길어-!하고,

조회시간에도 건성으로 불렀던 경험들 있으시죠?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인 만주국 건국을 기념한 '만주환상곡' 작곡, 지휘한 일로

안타깝게도 친일조사를 받았지만,

짧은 소견으론, 당시 유일무일하게 실력있는 유학파 음악가였기에

 당시 상황에 의해서 일제에 반강제적으로 동원되셨을 있는것이라고 생각도 되구요. 흑흑 ㅠㅠ

 

 나라를 사랑하여 만든 애국가와 그를 활용해 나라독립에 기금을 보태는 등의 행적만 보아도

아무래도 자발적으로 일제에 적극 참여한 이완용같은 친일파와는 차이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야경출처 : 본인소장

 

이번달 13일에는 한국과 헝가리 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안익태선생의 흉상건립 착공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선생이 헝가리 유학시절 3년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던 외트뵈시대학의 음대정원에 말이죠. 뿌듯하죠?

대학에 재학하면서 애국가를 작곡하는데 많은 영감도 받았다고해요.

 

 <헝가리 부다페스트 야경출처 : 네이버까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걸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물을 흘릴 있게하는,

그렇게 전세계에 당당하게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탄생시킨 안익태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국가를 제창할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정도의 진심으로 부르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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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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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주인공인 김좌진 장군! 장군님을 도와 두배나 많은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한 승리의 또다른 주역인 이범석 장군을 아시나요?

이범석 장군이 청산리대첩에 참여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젊은날의 이범석 장군
출처:
http://cafe.naver.com/independencekkun/66

 

 

1907년, 평범한 7살짜리 소년이었던 이범석 장군은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자신의 집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 정미 7조약으로 인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항일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합니다.

 


※정미7조약이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을 가리킵니다.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하는 이 조약은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되었습니다.

8년 뒤, 만15세가 되던 1915년에 이범석 장군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합니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 중대장의 신분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격파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불꽃처럼 뜨겁고 나비처럼 화려한 역사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스무살 때 청산리 대첩을 이끈 이범석 장군은 불혹의 나이에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이 되었습니다. 9월 17일 바로 오늘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일이 되는 날입니다. 국가보훈처 블로그에서는 한국광복군의 창설일을 맞아 한국광복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국광복군 창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www.i815.or.kr)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도로 중국의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한국광복군”이 청설되었습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습니다.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2년 1월 중국 충칭 주재 미국 대사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충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총 숫자는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해봅니다.

 

한국광복군은 시안(西安)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제1지대, 제2지대, 제3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면서 제5지대로 편제되었는데요.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제1지대로 편제되고, 기존 부대가 제2지대와 제3지대로 개편되었습니다.  밖에도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土橋隊) 등의 이름을 가진 조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광복군 배지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www.i815.or.kr)

 

한국광복군의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화민국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하달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분개한 임시정부는 미국 워싱턴으로 거점을 옮기려고도 했으나, 중국정부의 설득으로 무산됐다고 합니다. 이 준승은 1944년 8월 폐기되어, 광복군의 지휘권이 임시정부로 넘어오게 됩니다.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광복군의 활동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www.i815.or.kr)

 

 한국 광복군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주요 활동 중의 하나는 일제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애국심이 투철한 부대원을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군무처 산하에 징모처를 설치하여 한인청년들을 모집하였고, 아울러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상황을 국내외 동포에게 알려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고, 국제적 여론과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선전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또한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면전구공작대(印面戰區工作隊)를 파견하여, 미얀마 등지에서 영국군과 더불어 대일작전을 전개하였고, 미국 첩보기구인 OSS와도 '독수리작전'이란 이름의 공동작전을 추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광복군은 일제를 우리 땅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고국산천은 물론이고 이역만리 해외에서까지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승전국으로서의 쾌거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한국광복군, 그 꿈의 좌절

 

 

 


한국광복군 제3지대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www.i815.or.kr)

 

광복군은 원래 1945년 8월 10일경 서해안으로 상륙하여 경인지방에 침투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8월 10일 오후 출동명령을 대기하던 중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요청을 중립국을 통하여 연합국에 통고해 왔다」내용의 전문(電文)이  날아와 모든 작전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8월 14일에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미군과 함께 이범석 제2지대장과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이해평 등이 시안(西安)에서 비행기로 출동하여 서울을 향했죠. 그런데 이것도 서해 상공에서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들의 진입을 막았습니다.

 

그리하여 8월 15일이 지나 18일에 다시 서울에 오게 됩니다.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아직도 일본군의 저항이 거세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사령관 맥아더에게 일본의 패전에 대한 모든 권한이 넘어갔고, 이후 미 군정하에서 광복군의 재건이 시도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역사, 한국 광복군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www.i815.or.kr)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얼룩진 순간이 많았습니다. 독립의 기쁨과 일본에 항거한 광복군으로서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도 강대국의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 광복군들이 피땀을 흘려 나라를 지키며 되찾으려는 했던 노력들은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광복군 창설일에 맞춰 ‘국군의 날’을 9월 17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그러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한국광복군의 활동이나 역사를 소재로 다룬 풍부한 콘텐츠를 소개해드리고 싶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아요.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책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로도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멋진 한국광복군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나온다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처럼 명작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 ‘한국광복군’
http://ko.wikipedia.org
서울시 八白年史 > 중경(重慶)의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의 국내진격작전 (國內進擊作戰)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1-4-2-4.html
독립기념관 > 한국광복군 특별자료전
http://www.i815.or.kr/NEW/inspect/exhibition/2005/09/korea_indep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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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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