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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날을 ‘경술국치’라고 하지요.

경술국치 이후 조선 최고 명문가이자 재산가였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 가족 50여 명은 전 재산을 정리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이회영 선생을 기억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우당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우당기념관은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10길 17’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료로 관람 가능하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무이므로 관람 시 참고해 주세요.



우당기념관에는 독립운동 관련 전시물이 있었고, 역사문화강좌와 청소년역사교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가문에 큰 빚을 졌다. 해방되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회영 선생의 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 우당의 가문은 나라를 지킨 원훈(元勳) 배출

 

우당 이회영 선생은 1867년 3월 17일, 서울에서 이유승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습니다. 아버지 이유승 선생은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 백사 이항복 이래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비롯하여 형 건영, 석영, 철영과 아우인 시영, 호영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했고,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망명 이후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에 정착한 이회영 선생은,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이동녕, 이상룡 선생 등과 만주 삼원보 지역의 농촌에 정착지를 확보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前身)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훗날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곳이죠.

이곳은 학생들에게 중등 교육과정과 함께 일정한 군사 훈련을 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또한, 이회영 선생의 가문에서 비용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의 학비와 생활비는 모두 무료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전 중국 북경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라 상해에서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돌아와 1924년 4월 류자명, 이을규, 백정기 선생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간행하였습니다.

 

이후 이회영 선생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논문을 보내 한국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고, 아들 이규창 선생과 함께 상해의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년 중국의 동지들과 만주에서 연락근거지를 마련하고, 한·중 연합의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이회영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형 집행을 당했던 여순 감옥에서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받고 11월 17일, 6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게 되어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회영 선생의 가문이 만주로 망명할 당시 처분한 재산은 40만원 정도였는데 이는 현재 기준으로 약 600억 원에 이르며,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말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

 

이번 취재를 통해 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우당 가문의 헌신을 보며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훈남훈녀 기자단 김태의 기자였습니다.

 

* 참고사이트

우당기념관 http://www.woodang.or.kr/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354&mobile&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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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저는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 특별전 /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 특별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서울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방문하였습니다.

 

백범김구기념관은 용산역에서 400번 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되며(입장마감 : 오후 4시), 3월부터 10월까지는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됩니다.(입장마감 : 오후 5시)

 

정기휴관일은 백범김구기념관 홈페이지(http://www.kimkoomuseum.org/hal/hal_3.asp)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니, 관람시 참고해 주세요.



추운 날씨였음에도 많은 시민들이 전시회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시회장의 입구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김구 선생의 자동차였습니다.



이 자동차는 백범 김구 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오신 후 타시던 차로, 차량번호 서울2331은 성함의 구(九)자를 숫자 네 개로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때도 선생과 함께 하였으며, 이듬해 국민장에서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함께했습니다.

전시된 차량은 통일과 평화에 대한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며 김구재단에서 같은 모델을 찾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기증한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가 침체기를 맞았을 당시, 특무공작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지휘했습니다.


▲ 1931년 윤봉길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선언문 사본(오른쪽)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중국 각처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충칭으로 옮겨간 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 자리에 취임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또한 즉각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준비했습니다.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외무부장 조소앙 선생은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는 내용의 대일 선전 성명서에 도장을 찍고, 전 세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후 1944년, 김구 선생은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됩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다는 비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 특별전 /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 전시는 12월 30일까지 진행되었으며, 특별전 전시관에서 백범일지 70년간의 출간 현황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최초로 출간된 후, 현재까지 단행본 약 110권, 5개국 외국어판, 평전 약 100여 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범일지 국사 원판 초판본, 1942년 2월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장남 윤종 씨에게 친필 서명하여 증정한 백범일지 국사 원판 3판본을 실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존 상태 또한 양호했습니다. 중앙의 ‘숫자로 보는 백범일지’ 코너에서는 1947년부터 현재까지 70년간의 출간 현황과 역사를 수 있었습니다. 



7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책인 만큼, 관련된 역사와 자료들도 방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시회장 한편에는 ‘백범일지 속 인간, 김구의 인간상’이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김구 선생의 과거 행적과 활동에 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고, 이외에도 백범과 함께한 사람들, 김구 선생의 추천 도서와 휘호 등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범일지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도 추천도서였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추천도서가 될 명실상부한 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훈터 블로그 독자 분들 중 아직 「백범일지」를 읽지 않으신 분이 계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기념관 방문시 겨울철에는 마지막 입장이 4시로 제한된다는 점을 참고해 주세요. 백범김구기념관을 방문하여 애국심을 함양하는 경험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참고사이트

백범김구기념관 http://www.kimkoomuseum.org/main/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659&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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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저는 나석주 의사 동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동상은 ‘서울시 중구 을지로2가 181’에 위치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명동 을지로에 있어, 보통 동상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칠 듯합니다. 왜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이곳에 있을까요?



나석주 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황해도 안악군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치다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원과 의정원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한인애국단과 의열단에 가입하여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서기도 했죠.

 

이후 나석주 의사는 1926년,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하여 동포를 구하고 잠들어 있는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워달라는 권고를 받아 이를 실행하기로 결정합니다.



같은 해 12월에 나석주 의사는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인천항에 상륙하였고 12월 28일 오후,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폭탄은 불발되었고, 나 의사는 태연하게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동척으로 들어선 나석주 의사는 1층과 2층에 있던 일본인들을 권총으로 사격했고, 나머지 폭탄 1개를 던진 후 거리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 폭탄 또한 불발되었고, 나 의사는 황금정(지금의 을지로1가) 쪽에서 달려온 일본 경찰을 쏘아 쓰러뜨리고, 일본 경찰들과 접전을 벌였습니다.


일경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나 의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총으로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동상 앞에 서서 나석주 의사를 추모했습니다.


화려한 명동의 밤. 나석주 의사의 동상은 92년 전, 그가 폭파 의거를 감행하고 일경들과 접전을 벌였던 곳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저는 나석주 의사 동상 앞에 서서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가 걸었던 역사의 발자국을 되짚어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나석주 의사를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김태의 기자였습니다. 


*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2364&ipp=10000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580&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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