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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은 매서운 속도로 남하하여 우리나라는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영토를 빼앗겼고, 많은 피난민들이 경상도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50년 8월 18일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하고, 정부 각 부처와 국회 등 국가 주요 기관들을 부산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당시 경남도청과 부산시청에 주요 기관들이 입주하였고, 경남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서울을 대신하여 수도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1,023일간 임시수도의 역할을 한 부산. 이번 기사에서는 부산에서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 부산임시정부청사(현 동아대 부민캠 석당박물관)


먼저 찾은 곳은 당시 임시정부 건물로 사용되었던 현재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입니다. 1925년 완공되었던 이 건물은 경남도청으로 사용되었다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정부청사로 두 차례 사용되었는데요.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 그해부터 10월 27일까지 1차 임시수도정부청사로, 1951년 1.4후퇴 때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2차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쓰였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경남도청으로 쓰이던 건물은 2009년부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동아대학교의 개교기념일, 법정공휴일,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 30분~오후 5시에 이용할 수 있는데요. 이곳에서 개국원종공신녹권(국보 제69호), 동궐도(국보 제249호) 등 국보와 중요 민속 문화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등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3층에는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1925년 경남도청, 1950년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그리고 현재 건물의 축소 모형과 수리ㆍ복원 시 수습한 각종 구조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석당박물관의 외부에도 6.25전쟁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물이 있는데요. 바로 ‘부산전차’입니다.


▲ 부산전차


부산전차는 6.25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이면서 발생했던 교통문제를 해결하고자 1952년 미국의 무상원조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부산전차는 1968년까지 운행하였고, 당시 부산 시민들의 편리한 대중교통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부산전차 내부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표와 가격 등이 그대로 있어, 그 시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후 저는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뒤편에 위치한 임시대통령관저와 임시수도 기념관을 찾아갔습니다.


▲ 임시정부기념거리


임시정부기념거리를 지나가다보면 임시대통령관저로 가는 계단이 두 곳이 있습니다. 그 계단에는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군사, 의료, 물자 지원을 보낸 국가들의 국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유엔 참전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겼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바로 2017 임시수도 기념관 특별사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임시대통령관저입니다.



▲ 임시대통령관저


임시대통령관저 야외정원에는 현재 ‘1950’s 부산 엘레지’라는 특별사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17일까지 이곳을 방문하신다면 난민촌과 군사시설이었던 부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임시대통령관저 입구와 내부


임시대통령관저는 1926년 경남도지사 관사로 준공된 건물이었습니다. 1층에는 응접실과 서재, 내실, 식당, 부엌으로 꾸며져 있으며, 2층은 6.25전쟁과 관련된 유품이 전시된 전시실이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곳은 임시대통령관저 2층에 위치한 ‘회상의 방(마루방)’이었습니다. 회상의 방에서 6.25전쟁 때의 사진 등으로 짜깁기된 영상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요. 전쟁 당시 현장을 보고 싶으시다면 꼭 2층을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임시대통령관저를 보고 전시된 사진들을 따라 뒤쪽으로 가시면 임시수도 기념관이 있습니다.




▲ 임시수도 기념관


임시수도 기념관은 1987년 9월에 개원한 부산고등검찰청의 검사장 관사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이후 검찰청사가 이전하면서 2002년에 임시수도 기념관의 영상관으로 이용되었다가 2012년 전면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임시수도 기념관에서는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일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어린 아이들이 공부하는 장면, 먹었던 음식, 전쟁의 순간에도 피어났던 문화생활 등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여름 휴가지의 대명사, 국제시장, 부산국제영화제 등으로 화려한 도시 부산이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었던 부산입니다.


부산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과의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의 8월,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해 주세요.


67년 전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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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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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 제가 독자님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허훈, 허겸, 허위 세 형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삼 형제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는데요. 맏형 허훈 선생은 군자금 지원과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셋째 허겸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넷째 허위 선생은 의병을 이끌어 항일전을 지휘하는 등 세 형제가 모두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도와주고 지지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는데요, 세 형제의 숭고한 애국정신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허위의 영정사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세 형제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1836년 4월 14일, 세 형제의 맏이인 허훈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 년 뒤인 1851년 10월 23일에 셋째인 허겸 선생이, 1854년 4월 1일 막내 허위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둘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첫째 허훈 선생

 

삼형제 중 맏이였던 첫째 허훈 선생은 구한말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이와 동시에 의병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었습니다. 허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막내 허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동생을 지지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요. 그는 허위 선생에게 토지 3,000여 두락을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습니다. 보통 논의 경우에는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이라고 한다니 3,000여 두락은 현재로 따지면 60~90만 평 정도로,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또한, 허훈 선생은 1896년에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영해·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선생은 1907년 8월 23일 영면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셋째 허겸 선생

 

셋째 허겸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는데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허겸 선생은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맏형과 막내를 모두 여읜 허겸 선생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김동삼, 유인식 등과 함께 중어학원을 개설하고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허겸 선생은 부민단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는데요. 부민단에서 애족ㆍ구국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선생은 민생 교육과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9년 10월 21일, 중국 길림성의 주하현 하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하였습니다.

 

# 막내 허위 선생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반포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전국적인 봉기 상황에 자극받은 허위 선생도 구국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는데요.

허위 선생은 의병을 규합하여 1896년 3월 26일,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 의병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허위 선생의 나이 42세 되던 해의 일이었으며, 이 의진은 ‘김산의병’이라고 불렸습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후 전국 각지에 파견된 채두관(머리를 짧게 자르는 관리)이

거리를 지나는 행인을 잡아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모습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친 허위 선생의 의진은 이를 격파하기 위해 소집된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은 쉽게 물리쳤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병을 일으키고 난 직후, 아직 전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를 직면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졌던 것인데요. 이어 경성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 등 의진의 주요 인물을 체포해 갔습니다. 허위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는데요. 아쉽게도 이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진을 해산하였습니다. 당시 허위 선생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의진 해산 이후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전념하던 허위 선생은 1899년 신기선의 천거에 의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은 성균관 박사, 1904년 8월에는 평리원 서리재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직책은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자리로, 허위 선생은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아 온 선생은 장지연과의 교류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한국 침략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허위 선생은 전 국민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배일통문’을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어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반박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귀향 조치된 허위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선생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거병하였습니다.

허위 선생은 1907년 11월에 13도창의군을 조직하는 것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말에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아쉽게 실패로 끝난 작전이었지만 전국에서 모인 여러 의병 부대가 하나로 뭉쳐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큰 의의가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일제의 이권 침탈 중지 등을 위해 항일전을 계속하던 허위 선생은 1908년 6월 11일에 일제에 체포되어, 이후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1908년 9월 27일, 형 집행에 앞서 일본의 승려가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이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허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는데요. 허위 선생의 독립을 향한 기개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08년 5월 22일 경성헌병대에 갇혀서 쓴 허위 선생의 유묵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은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세 형제와 같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 선생의 가문의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허훈ㆍ허겸ㆍ허위 선생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명문대가입니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구미향토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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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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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밀정’ 등 독립운동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영화들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타오를 수 있도록 불쏘시개 역할을 해내었죠. 하지만 뜨거운 관심 속에서도 우리들은 독립운동을 떠올리면 보통 중국의 상해나 간도지역을 주로 떠올리곤 합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러시아 연방’에도 우리 독립투사들의 혼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바로 연해주입니다.

 

러시아 연방의 연해주는 시베리아의 동남단 흑룡강(黑龍江)·우수리강(烏蘇里江)·동해로 둘러싸인 지방입니다. 원래 연해주는 말갈(靺鞨)·여진(女眞)족의 땅으로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1858년의 맺어진 아이훈조약(愛琿條約)에 의해 청나라와 러시아의 공동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부동항(不凍港)이 필요했던 러시아에게 연해주의 가치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 남단에 ‘동방을 정복하라’는 의미를 가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를 건설하고, 군항이자 무역항으로 삼았습니다.

 

연해주는 한반도에서 매우 가까운 곳입니다. 1860~70년대에 조선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인촌을 개척해 살아갔습니다. 또, 일제의 국권 침탈로 국운이 기울어가던 1910년 이전부터 많은 항일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를 거처로 삼았습니다. 이번 기사에서 저는 러시아에 남아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무단통치시대 독립운동의 성지, 신한촌

 

신한촌은 1911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한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에 위치한 땅을 개척하여 그곳을 ‘개척리’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는 콜레라 근절을 명분으로 내세워 한인들을 개척지에서 쫓아내고 군대의 주둔지로 삼았습니다.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다시 터전을 가꾸었고, 새로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의 ‘신한촌’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신한촌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국외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신한촌 건립과 함께 조직된 한인결사인 ‘권업회(勸業會)’는 독립전쟁을 위해 민족계몽활동과 한인사회의 정치적 지휘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독립전쟁론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도 조직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한촌 중심지에는 ‘한민학교’가 건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신한촌은 제정러시아당국의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후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는 간도지방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비록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1937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정책으로 신한촌이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서의 한인 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99년 8월 15일, 사단법인 국외 한민족 연구소는 과거 신한촌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의 아무르만 산기슭(현재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하바로브스카야 거리)에 이 곳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큰 돌기둥 3개와 작은 돌기둥 8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신한촌 기념비의 모습. 옛 신한촌의 터에 세워져 있다.

 

 

# 국가의 자주독립만을 생각했던 진정한 지식인, 이상설 선생

 

 

▲ 이상설 선생 (출처 : 독립기념관)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 말은 이상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민족의 계몽과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북간도로 넘어가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던 연길현 용정촌에 민족교육을 위해 서전서숙을 세웠습니다.

서전서숙은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시하던 유교중심의 구식 교육에서 실용적인 신식 학교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곳이었습니다. 또,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됩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 세 사람의 특사는 공식적으로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각국 정상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하려는 활동을 전개한 것이죠.

 

이후 이상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또한 1911년 12월, 김학만, 이종호, 최재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였는데요.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이후 이상설 선생은 상해에서 박은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병석에 눕게 되어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이상설 선생이 순국했던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는 ‘이상설 유허비’가 있습니다.

 

(* 유허비 :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 유허비 근처 우수리스크 평원의 모습

 

러시아는 왠지 우리나라와 멀리 있는 느낌이지만, 한반도와 가까이 있던 연해주 지역은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만큼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한촌 기념비와 이상설 유허비를 실제로 보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웠던 이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참고자료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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