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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dwardcromy

    Волонтер - Джиголюк Наталья, проводит сбор средств на приобретение вещей, которые обеспечат безопасность и выживаемость Солдат:

    Бронежилеты
    Термобелье
    Теплая обувь
    Дождевики и перчатки
    Фонари
    Приборы ночного виденья
    Рации
    Генераторы
    Бинокли
    Медикаменты

    Мы за мир. Мы за жизни тех Солдатов, которые выбрали своей миссией спасение Украины – Украины единой и неделимой.
    Помните о том, что хотят у нас забрать: помните о нашей значимости. Нас не лишат того, что принадлежит нам с рождения. Мы не позволим за нас вершить наше будущее.
    Главное – быть вместе. Равнодушие рождает тех, кто готов за Вас принимать решения, оно позволяет управлять Вами. Только вместе мы справимся с тиранией тех, кто не уважает нас и наш выбор.
    И стоя за спинами наших защитников, мы сделаем все, чтобы они остались живы.
    Никогда нельзя сдаваться. Мы верим в каждого.
    Борітеся — поборете!
    За вас правда, за вас слава
    І воля святая!

    Контакты :

    E-mail - shpilya@online.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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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Яндекс деньги для пожертвования : shpilya@online.ua

  2. 이효섭

    연락처가 없어서 관리자분에게 글로 남깁니다.
    제가 실수로 이벤트 댓글 남기면서 비밀글을 안했는데 수정/삭제가 안되어 제 개인정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삭제 요청드립니다.
    '낱말로 풀어보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9월 26일 13:04 에 올렸습니다. 삭제요청드립니다.

  3. 김윤겸

    최근 보훈처에서 학생들에게 국가 유공자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국가 유공자를 선정하여 학생들에게 책자로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하는 작업과 관련하여 본 책자를 편집하고 있는 김윤겸이라고 합니다.
    이에 이정숙 유공자가 선정되어 책자에 수록됨을 유족에게 알려드리고자 유족의 연락처를 문의합니다.

    아울러 관련 수록 사진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바쁘신 가운데 협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연락처를 알고 계시면 문자나 전화 부탁드립니다.

    * 보훈처 책자 제작 편집실: 010-9135-6994/dapkyk@empal.com

    김윤겸 올림

  4. 반서경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5. 2017.04.17 23:35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대한민국 훈남훈녀 2017.04.18 10:47 신고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국가보훈처 블로그 운영 담당자입니다. 본 건은 오늘 중으로 선물 지급이 될 예정입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6. 우송

    최순실 사태와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교과서 집필 내용도 큰 방향은 더 손댈 것 없을 정도이고, 세세한 몇 군데만 고치면 내년 3월부터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건국일자와 최순실 사태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자와 세력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매우 이기적인 집단이다. 해방전후 남노당과 빨치산의 후예들이 물려받은 사상적 유전자를 중시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시켜 북한세습독재 집단에 의한 통일을 획책하려는 집요하고 끈질긴 투쟁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를 간과하면 눈 뜨고 당하게 된다.

  7. 제2 연평해전때 전사하신분들 애도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유가족들분들에게도 심심한위로를 전합니다

  8. 김응수

    6.25 참전용사입니다. 반백년이 지난 추억에 옛 전우들과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봄니다.

  9. 정순권

    정태화 항일의병 기록



    정태화 1870.5.13.~1955년6.30)

    (안규홍 의진 의병장으로 2012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개 요 (정태화 손자 정순권의 조사 내용)

    1907년 정태화(재화)나이 37세, 전라남도 보성군 백야면 입석동(겸백면 석호리) 입석마을에서 시작된 항일 독립운동(의병활동)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구전내용을 녹취하고 구술 내용을 정리했다. 정태화의 온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1909년~1945)해방까지 40여년 이상을 억압받고 그 가족이 수난을 겪으니 항일 독립운동의 모든 사실을 감추고 지워야 했고, 실체를 없애버려서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족이 겪은 생생한 사실과 구전으로 전해오는 증언을 토대로 진실을 규명하여 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하기에 사실적 기록을 남긴다. (정태화 손자 정순권)



    정태화(鄭太化):(족보:在化, 댁호:加谷) 의 일생

    정태화는 1871년(실제) 보성군 겸백면 석호리 입석에서 정환종과 선갈음의 1남 1여로 태어나서 겸백면 평호리 가곡마을 경주김씨 김가곡과 혼인하여, 37세인 1907년 슬하에 3남 3녀의 가장으로 부모와 같이 살았다. 그해 3남이 9월 16일(음)출생하고 1~2달 지난 초겨울 어느 날, 왜경은 이동을 위한 오솔길을 내는 울력동원에 주민을 동원 했다. 그 울력에 왜경 감독자가 마을주민들을 경시하고 폭력노역을 시킴으로 불의에 발근해서 감독자를 응징, 중상을 입혔다. 그로 인해서 수배자가 되었고 1908년 정월(설) 이후부터 동지인 안규홍과 같이1907부터~1909년 채포 될 때 까지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항일활동하다 1929~30년경 조성면 감동마을 출신 경주김씨 ‘봉오’와 재혼하였다. 재혼 전까지 23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930년(59세)에 ‘김봉오’와 재혼하여 60세에 3남‘주현’을 62세에 5남 ‘수현’을 낳았고, 6.25 전쟁에 5남‘수현’이 입대하여 1951년 10월16일 강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태화는 1954년 1월 29일(음:실제사망일) 83세로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에서 운명하였다. 정태화가 겸백면 선영이 있는 곳이 아닌 타향 득량면에서 살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 집안의 배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의병활동의 발단

    정태화는1907 초겨울 일본군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서 도로(현:845지방도 ‘득량면~ 겸백면 구간 중, 석호리~남양리 사이 길 내기 (’쏫모랭이‘-다락금 지역)울력을 하는데 일본군 감독이 동네 사람을 너무도 심하게 구타를 하자, 참다못해 도구로 감독자를 응징하였다. (죽도록 패서 선혈이 낭자하고 실신하니 죽었구나 싶었다.) 그 후 1907년 겨울부터 수배자 신분으로 은신, 도피 중 보성 택촌 안규홍을 유인하여 같이 활동하였다. 정태화처는 경주김씨로 김가곡이며, 정태화의 처제가 보성읍 택촌부락 안규홍 문중으로 출가하여 보성택촌 안대순씨 조부와는 동서지간이다. 이런 이유로 수배 시 동서의 도움으로 사돈인 안규홍을 의병으로 유인하게 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소와 쌀을 군량미로 제공(호군활동)했다”

    당시 정태화는 부친 정환종 모친 선갈음 처 김가곡과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둔 중농의 농사꾼이었다. ‘부유하여 음식(귀한 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고 정태화의 큰딸과 친구였던 ‘정칠현씨 모친(미력댁)’은 증언했다. ‘소와 말이 있었다’ 한다. ‘정태화 집에 하룻밤에 소가 없어져 난리가 났는데, 며칠 후 ‘가곡양반’(정태화댁호)이 시켜서 ‘의병이 가져갔다’ 했다. 또한, ‘곡식도 지게꾼을 시켜 초암산등 어딘지 모르나 가져간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정칠현씨 모친은 증언을 내게 해줬다. 의병활동 했다는 증언과 훈련을 했다는 장소인 초암산의 베틀굴의 유래 등, 의병이 숨어 훈련을 했다는 구전은 어려서 나도 들었기에 대강은 알고 있었다. 또, 석호산 물망골의 물이 좋아서 그 곳에서 자주 모였다고 한다. 석호산, 초암산, 보성강가 와 마을에서 전투를 2년간 한 사실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정칠현씨 모친, 조영태외, 구전을 김재경, 김재용, 최상전씨 등이 증언)



    “정태화는 ‘재정담당과 훈련대장’을 했다”

    “원통하고 애통하다”는 ‘김순제’의 후회는 시부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음을 표현함이다. 정태화의 자부 ‘김순제’가 시부께 들은 바로는 “보성 안대장과 같이 의병활동을 했고, 정태화가 재정담당과 훈련대장을 했다” 는 정도를 알았다. 당시는 “무서운 세상이고, 시부에 대한 원망감에 더 알고 싶지 않아서, 듣지 않았고, 반발심에 대화가 단절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다.

    (내가 탐문 조사를 하면서 ‘안대장이다’는 어머니께 들은 성씨만 기억했는데,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 실마리를 찾지 못하다가 보성향교 전교 김재경씨(2012.8.25.)에게 듣고서야 모친(김순제) 말씀과 일치하여 확신을 하게 되었다. 정태화와 안규홍대장과는 동서인 안대순씨 조부에 의해서 맺어졌고, 정태화가 안대장 보다 나이가 7~8세 정도 많기에 안규홍 장군의 후견인 역을 하고 자신의 수배를 피하며 의병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확신 판단했다.)



    일가족은 풍비박산 나다!

    정태화가 채포되고 구속 될 때까지와 탈옥 이후, 몇 년 동안 의병활동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조영태, 정칠현 모친(미력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정태화로 인해서 정환종과 그 가족이 호군활동을 했고, 정환종의 집에서 “소와 쌀 곡식 등을 제공, 지원했으며” 1908 초부터~1909년(약 2년간) 의병과 일경과 “직접 총을 쏘는 총소리를 듣고 양편의 대원을 목격했다한다.” 또, 도안리의 정순도는 ‘진산댁’ 사랑방에서 정태화와 자면서 의병활동을 들을 수 있었다. 정태화가 ‘이라리제’의 상황을 얘기하며, 의병활동의 종말이 될 체포상황을 언급하며 ‘이라리제’ 사건이후로 “의병이 몰살당했다”고 말했는데, 대화진행 중 ‘얘 한테 별 말을 다 한다’는 삼자개입 만류로 대화가 끊겨서 더 상세하게 알 수 없었다고 정순도씨는 증언했다. ‘이라리제’ 사건으로 의병진지가 노출되어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 되고, 잡혀서 감옥을 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론은 ‘안대장과 잡혀 간 것은 확실하고’ ‘감옥에서 정태화 혼자 탈옥 했고’, 정환종과 그 가족은 지원세력이라 하여 ‘정환종과 선갈음, 김가곡을 일본군이 폭행, 고문하여 절명시켰다’는 증언과 구전이 전해온다.



    정환종 과 그 가족의 구타 고문 상황 묘사

    내가 초등학교(1969년 추정) 4학년 여름방학 때, 당시의 상황을 겸백면 석호리에서 도안리로 시집온 정칠현씨 모친(미력할머니,1898년생 추정)한데 들었다. 그 분이 10~12살 때 쯤 기억 증언은, “겸백면 석호리 조영태 부의 집과 정태화 집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같이 있었다 한다. 현재의 조영태 씨 집(근처)에 왜경이 시도 때도 없이 와서 감나무에 말 고비를 묶고는 감시를 수시로 했다. 그 집에는 큰 감나무가 수 구루 있었는데, 일본군은 ‘정환종’을 그 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어놓고 정태화 찾아내라고 때리고 기절하면, 똥물을 뿌리고, 고춧가루 물 뿌리고 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또한, 선갈음, 김가곡을 폭행 고문하여 김가곡의 성기와 유방을 짓이기고,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폭행 고문했다. 시퍼렇게 먹지고 피멍들고 맞아서 사람이 축 쳐진, 그 광경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하며, 당시를 기억 했다. 이 고문으로 정환종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몇 달 후 (처) 김가곡도 사망하고, 그 후 (모)선갈음도 장독으로 사망했다.

    (정환종은 독자 아들을 구할 목적으로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했고, 그로 인해서 의병의 저항이 격렬해 져서 일본군의 희생이 커지자 정환종, 선갈음, 김가곡 등 온 가족을 지원 세력이라 하여 폭행 고문을 해서 풍비박산 낸 것이다.)



    풍비박산 난 가정, 자식들의 비참한 삶

    의병에게 식량을 지원하여 재산이 몰 수 당했는지, 몰수 될 같으니 의병에게 지원한 건지 그 상황은 알 길이 없다. 정태화의 모든 가족은 반역자라 낙인찍히니 흩어졌고, 먹고 살길이 없으니 입양 보내고, 담살이로 보낸 것으로 추정 할 뿐이다. 선갈음은 고문 장독 등, 생계가 막막해서 장손(성현)은 머슴으로 보냈고, 어린 차 손자(장현)은 절로 보냈다. 10대 중반의 장손녀는 북쪽 담양으로 조기출가 보내서 어린손자, 손주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정태화의 3남(중현: 내 아버지)이 7살이 되던 해, 수배자로 도피 중에 정태화가 집에 와서 3남(중현)을 대면하게 되었다. 정태화는 거지몰골인 3남을 보며 먹을 것을 해서 먹이고는, 도피 길에 3남을 시렁선반 받침에 긴 머리채를 묶고 죽도록 폭행을 했다.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의 도움으로 풀려난 3남은 그길로 하루 낮과 밤, 수일을 도망쳐 큰 누나를 찾아 나섰다가 못 찾고, 화순동북, 담양, 장성, 김제를 거쳐 유랑 구걸하여 전북 옥구군 까지 가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3남 (중현)은 옥구군 회현면에서 머슴살이 후, 경주 김씨(순제)와 혼인하여 가정을 이뤘다. (해방이후 시부 정태화와 남편(중현)의 양쪽 행적을 들은 자부(김순제)는 당시 가족사의 상황을 그렇게 판단했다.)



    정태화 도피, 은신에 도움 줬다가 사망한 재종형제 ‘정재평’

    눈이 내리는 날 (년도미상 1909~1910년 추정), 도안리 정순식씨 조부(정재평)는 소죽을 쑤는데 정태화가 왔다. 일본군에 쫓겼는지 도움을 요청해서 토굴에 숨겨주었다. 일본군이 들이닥쳐 정태화 어디 있느냐? 하니 모른다고 주저하며 발뺌하니, 일경 일행이 소죽을 쑤던 정재평을 “몽둥이와 장작으로 구타하자 기절하고 생똥을 쌌다. 그 후, 혈변을 보며 고생하다 운명했다” 이 사건으로 그 아들‘정용현’은 정태화가 당숙임에도 아버지를 죽게 하였으니, 원수 대하듯 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문중 대소사뿐만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 해방이후 까지도 정태화 가계에는 어떤 것도 도울 수 없었다고 정순식은 자기 부친께서 들은 얘기를 증언하였다.

    그렇게 정재평을 패고 간 일본군은 앞집 봉동댁에 가서 정태화 왔냐 하니, 겁에 질려 오지 않았다 하며 방문 등,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서 보여주고 무사히 넘겼다.(정순식 증언)



    ‘이라리제’ 이야기

    정태화는 해방 후, 장 손자(순범, 순명)가 14세 무렵(1947~8년 경)에 겸백면 도안리 선영이 있는 고향을 첫 방문했다. 그 후로 고향을 방문하여 겸백 도안리 일가 댁 (유쟁이댁, 진산댁..등) 사랑방에서 잤다하며, 어린 정순도가 호기심으로 정태화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들은 바로는 ‘이라리제’(현, 보성군 복내면과 문덕면, 화순군 경계로 추정)에서 결전을 위해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말을 타고 지나가는 두 놈이 수상하여 정태화가 부하들에게 잡아 오라하였다. ‘정태화가 안규홍 대장에게 촉수병(정탐병) 같으니 죽이자’하였다. 그러자 안대장이 ‘살려 주자고’하여 살려 줬다. 그 이후 일본군의 기습으로 의병이 일망타진 당했다. ‘그놈들을 죽였으면 몰살은 면했는데’” 하며 당시를 후회했다고 정순도가 증언했다.



    “안대장과 감옥에 잡혀 갔고, 혼자 감옥을 탈출 했다”

    정순도(당시18세)가 호기심에 더 물으니 “안대장과 감옥에 잡혀갔는데, 일본군이 격리하여 안규홍 대장을 찾으려고 아침에 일어나 헛기침 소리도 내보고 여러 방법을 취했으나 감옥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정태화는 혼자서 감옥에서 탈출을 했다”. 이런 증언이 길어지자 옆에 계셨던 분이 애들에게 별말을 다 한다 하여 중단 되었다.(그분은 급변기라 몸조심 말조심 할 때라서 말렸단다.)



    자식과 상봉 후, 정태화 의병활동 기록이 불태워지다.

    3남의 자부 김순제는 결혼 후 17년만에 시부 정태화를 만났다. 3남 중현이 43세 경으로 35년 만에 부자상봉(1947-48년경)이다. 기쁨과 원망으로 울음바다 되었고, 정태화는 3남 자부 김순제에게 당신의 의병생활을 말하고자 했는데, 험한 때고 김순제 또한 한 많은 삶인지라 “뭐 자랑 이라고” 하시냐며.. 반감을 표해서 단절되었다.(김순제는 생전에 시부의 얘기를 듣지 않은 자신을 한탄하며 “원통하고 애드럽다” 평생을 후회하다 운명했다.) 정태화는 항상, 둘둘 말아서 싼 자그마한 베게 크기의 문서(의병활동기록)를 허리춤에 메고 다녔고, 잠잘 때는 그것을 베게 삼고, 신주 모시듯 귀히 관리했다. 이 서류를 정태화 잠들 때, 후환이 두려워 가족의 손으로 불에 태워졌다.



    정태화의 외형 모습

    의병활동 당시의 정태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증언한 정칠현씨 모친증언은 기골이 장대하다. 가슴이 떡 벌어져 두껍고 몸집도 컸다, “네 아버지가 닮았다, 네 둘째 형이 네 할아버지와 닮았다” 했다. 득량면 마천리 사는 주민 어른들은 ‘정태화 할아버지는 침을 잘 놓고 의사같이 치료를 잘했다며, 의병장 이었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며, ‘정수현의 전사 유품을 묻은 가묘장소도 알려주었다’ 또한, “5남 정수현의 대전국립현충원 안장과 정태화의 훈장 서훈 소식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품의 소유자라며 축하를 해 주셨다.”**



    “정태화는 100년이 훨신 지나서 2012년 건국훈장을 수훈했다”

    이제, “정환종, 김가곡, 선갈음 등”

    그 일가족의 의병활동 사실을 인정받아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



    정태화의 재판기록과 수형기록은 없고, 표제부인 수형인 명부만 발굴하였다.

    탈옥으로 수형기록을 없애 버린 건지, 세월이 너무 오래 되어 없어진 건지

    알 수가 없다. 폭도 죄로 7년 형을 선고 받은 수형자 표제부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서훈의 계기였다. 수형생활과 재판기록이 더 발굴되면 좋겠다.

    또한, 정환종과 그 가족의 고문폭행 사실과 “정재평”의 폭행치사 기록도 발굴되어 진실이 밝혀지길 소망한다.*



    작성자: 정순권 010-5264-2889

    (작성:2016.5.23.)
    담산 안규홍의병장 의진의 탄생의 실체적 진실될 역사사료입니다.

  10. 정순권

    정태화 항일의병 기록



    정태화 1870.5.13.~1955년6.30)

    (안규홍 의진 의병장으로 2012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개 요 (정태화 손자 정순권의 조사 내용)

    1907년 정태화(재화)나이 37세, 전라남도 보성군 백야면 입석동(겸백면 석호리) 입석마을에서 시작된 항일 독립운동(의병활동)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구전내용을 녹취하고 구술 내용을 정리했다. 정태화의 온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1909년~1945)해방까지 40여년 이상을 억압받고 그 가족이 수난을 겪으니 항일 독립운동의 모든 사실을 감추고 지워야 했고, 실체를 없애버려서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족이 겪은 생생한 사실과 구전으로 전해오는 증언을 토대로 진실을 규명하여 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하기에 사실적 기록을 남긴다. (정태화 손자 정순권)



    정태화(鄭太化):(족보:在化, 댁호:加谷) 의 일생

    정태화는 1871년(실제) 보성군 겸백면 석호리 입석에서 정환종과 선갈음의 1남 1여로 태어나서 겸백면 평호리 가곡마을 경주김씨 김가곡과 혼인하여, 37세인 1907년 슬하에 3남 3녀의 가장으로 부모와 같이 살았다. 그해 3남이 9월 16일(음)출생하고 1~2달 지난 초겨울 어느 날, 왜경은 이동을 위한 오솔길을 내는 울력동원에 주민을 동원 했다. 그 울력에 왜경 감독자가 마을주민들을 경시하고 폭력노역을 시킴으로 불의에 발근해서 감독자를 응징, 중상을 입혔다. 그로 인해서 수배자가 되었고 1908년 정월(설) 이후부터 동지인 안규홍과 같이1907부터~1909년 채포 될 때 까지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항일활동하다 1929~30년경 조성면 감동마을 출신 경주김씨 ‘봉오’와 재혼하였다. 재혼 전까지 23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930년(59세)에 ‘김봉오’와 재혼하여 60세에 3남‘주현’을 62세에 5남 ‘수현’을 낳았고, 6.25 전쟁에 5남‘수현’이 입대하여 1951년 10월16일 강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태화는 1954년 1월 29일(음:실제사망일) 83세로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에서 운명하였다. 정태화가 겸백면 선영이 있는 곳이 아닌 타향 득량면에서 살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 집안의 배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의병활동의 발단

    정태화는1907 초겨울 일본군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서 도로(현:845지방도 ‘득량면~ 겸백면 구간 중, 석호리~남양리 사이 길 내기 (’쏫모랭이‘-다락금 지역)울력을 하는데 일본군 감독이 동네 사람을 너무도 심하게 구타를 하자, 참다못해 도구로 감독자를 응징하였다. (죽도록 패서 선혈이 낭자하고 실신하니 죽었구나 싶었다.) 그 후 1907년 겨울부터 수배자 신분으로 은신, 도피 중 보성 택촌 안규홍을 유인하여 같이 활동하였다. 정태화처는 경주김씨로 김가곡이며, 정태화의 처제가 보성읍 택촌부락 안규홍 문중으로 출가하여 보성택촌 안대순씨 조부와는 동서지간이다. 이런 이유로 수배 시 동서의 도움으로 사돈인 안규홍을 의병으로 유인하게 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소와 쌀을 군량미로 제공(호군활동)했다”

    당시 정태화는 부친 정환종 모친 선갈음 처 김가곡과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둔 중농의 농사꾼이었다. ‘부유하여 음식(귀한 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고 정태화의 큰딸과 친구였던 ‘정칠현씨 모친(미력댁)’은 증언했다. ‘소와 말이 있었다’ 한다. ‘정태화 집에 하룻밤에 소가 없어져 난리가 났는데, 며칠 후 ‘가곡양반’(정태화댁호)이 시켜서 ‘의병이 가져갔다’ 했다. 또한, ‘곡식도 지게꾼을 시켜 초암산등 어딘지 모르나 가져간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정칠현씨 모친은 증언을 내게 해줬다. 의병활동 했다는 증언과 훈련을 했다는 장소인 초암산의 베틀굴의 유래 등, 의병이 숨어 훈련을 했다는 구전은 어려서 나도 들었기에 대강은 알고 있었다. 또, 석호산 물망골의 물이 좋아서 그 곳에서 자주 모였다고 한다. 석호산, 초암산, 보성강가 와 마을에서 전투를 2년간 한 사실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정칠현씨 모친, 조영태외, 구전을 김재경, 김재용, 최상전씨 등이 증언)



    “정태화는 ‘재정담당과 훈련대장’을 했다”

    “원통하고 애통하다”는 ‘김순제’의 후회는 시부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음을 표현함이다. 정태화의 자부 ‘김순제’가 시부께 들은 바로는 “보성 안대장과 같이 의병활동을 했고, 정태화가 재정담당과 훈련대장을 했다” 는 정도를 알았다. 당시는 “무서운 세상이고, 시부에 대한 원망감에 더 알고 싶지 않아서, 듣지 않았고, 반발심에 대화가 단절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다.

    (내가 탐문 조사를 하면서 ‘안대장이다’는 어머니께 들은 성씨만 기억했는데,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 실마리를 찾지 못하다가 보성향교 전교 김재경씨(2012.8.25.)에게 듣고서야 모친(김순제) 말씀과 일치하여 확신을 하게 되었다. 정태화와 안규홍대장과는 동서인 안대순씨 조부에 의해서 맺어졌고, 정태화가 안대장 보다 나이가 7~8세 정도 많기에 안규홍 장군의 후견인 역을 하고 자신의 수배를 피하며 의병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확신 판단했다.)



    일가족은 풍비박산 나다!

    정태화가 채포되고 구속 될 때까지와 탈옥 이후, 몇 년 동안 의병활동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조영태, 정칠현 모친(미력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정태화로 인해서 정환종과 그 가족이 호군활동을 했고, 정환종의 집에서 “소와 쌀 곡식 등을 제공, 지원했으며” 1908 초부터~1909년(약 2년간) 의병과 일경과 “직접 총을 쏘는 총소리를 듣고 양편의 대원을 목격했다한다.” 또, 도안리의 정순도는 ‘진산댁’ 사랑방에서 정태화와 자면서 의병활동을 들을 수 있었다. 정태화가 ‘이라리제’의 상황을 얘기하며, 의병활동의 종말이 될 체포상황을 언급하며 ‘이라리제’ 사건이후로 “의병이 몰살당했다”고 말했는데, 대화진행 중 ‘얘 한테 별 말을 다 한다’는 삼자개입 만류로 대화가 끊겨서 더 상세하게 알 수 없었다고 정순도씨는 증언했다. ‘이라리제’ 사건으로 의병진지가 노출되어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 되고, 잡혀서 감옥을 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론은 ‘안대장과 잡혀 간 것은 확실하고’ ‘감옥에서 정태화 혼자 탈옥 했고’, 정환종과 그 가족은 지원세력이라 하여 ‘정환종과 선갈음, 김가곡을 일본군이 폭행, 고문하여 절명시켰다’는 증언과 구전이 전해온다.



    정환종 과 그 가족의 구타 고문 상황 묘사

    내가 초등학교(1969년 추정) 4학년 여름방학 때, 당시의 상황을 겸백면 석호리에서 도안리로 시집온 정칠현씨 모친(미력할머니,1898년생 추정)한데 들었다. 그 분이 10~12살 때 쯤 기억 증언은, “겸백면 석호리 조영태 부의 집과 정태화 집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같이 있었다 한다. 현재의 조영태 씨 집(근처)에 왜경이 시도 때도 없이 와서 감나무에 말 고비를 묶고는 감시를 수시로 했다. 그 집에는 큰 감나무가 수 구루 있었는데, 일본군은 ‘정환종’을 그 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어놓고 정태화 찾아내라고 때리고 기절하면, 똥물을 뿌리고, 고춧가루 물 뿌리고 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또한, 선갈음, 김가곡을 폭행 고문하여 김가곡의 성기와 유방을 짓이기고,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폭행 고문했다. 시퍼렇게 먹지고 피멍들고 맞아서 사람이 축 쳐진, 그 광경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하며, 당시를 기억 했다. 이 고문으로 정환종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몇 달 후 (처) 김가곡도 사망하고, 그 후 (모)선갈음도 장독으로 사망했다.

    (정환종은 독자 아들을 구할 목적으로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했고, 그로 인해서 의병의 저항이 격렬해 져서 일본군의 희생이 커지자 정환종, 선갈음, 김가곡 등 온 가족을 지원 세력이라 하여 폭행 고문을 해서 풍비박산 낸 것이다.)



    풍비박산 난 가정, 자식들의 비참한 삶

    의병에게 식량을 지원하여 재산이 몰 수 당했는지, 몰수 될 같으니 의병에게 지원한 건지 그 상황은 알 길이 없다. 정태화의 모든 가족은 반역자라 낙인찍히니 흩어졌고, 먹고 살길이 없으니 입양 보내고, 담살이로 보낸 것으로 추정 할 뿐이다. 선갈음은 고문 장독 등, 생계가 막막해서 장손(성현)은 머슴으로 보냈고, 어린 차 손자(장현)은 절로 보냈다. 10대 중반의 장손녀는 북쪽 담양으로 조기출가 보내서 어린손자, 손주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정태화의 3남(중현: 내 아버지)이 7살이 되던 해, 수배자로 도피 중에 정태화가 집에 와서 3남(중현)을 대면하게 되었다. 정태화는 거지몰골인 3남을 보며 먹을 것을 해서 먹이고는, 도피 길에 3남을 시렁선반 받침에 긴 머리채를 묶고 죽도록 폭행을 했다.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의 도움으로 풀려난 3남은 그길로 하루 낮과 밤, 수일을 도망쳐 큰 누나를 찾아 나섰다가 못 찾고, 화순동북, 담양, 장성, 김제를 거쳐 유랑 구걸하여 전북 옥구군 까지 가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3남 (중현)은 옥구군 회현면에서 머슴살이 후, 경주 김씨(순제)와 혼인하여 가정을 이뤘다. (해방이후 시부 정태화와 남편(중현)의 양쪽 행적을 들은 자부(김순제)는 당시 가족사의 상황을 그렇게 판단했다.)



    정태화 도피, 은신에 도움 줬다가 사망한 재종형제 ‘정재평’

    눈이 내리는 날 (년도미상 1909~1910년 추정), 도안리 정순식씨 조부(정재평)는 소죽을 쑤는데 정태화가 왔다. 일본군에 쫓겼는지 도움을 요청해서 토굴에 숨겨주었다. 일본군이 들이닥쳐 정태화 어디 있느냐? 하니 모른다고 주저하며 발뺌하니, 일경 일행이 소죽을 쑤던 정재평을 “몽둥이와 장작으로 구타하자 기절하고 생똥을 쌌다. 그 후, 혈변을 보며 고생하다 운명했다” 이 사건으로 그 아들‘정용현’은 정태화가 당숙임에도 아버지를 죽게 하였으니, 원수 대하듯 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문중 대소사뿐만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 해방이후 까지도 정태화 가계에는 어떤 것도 도울 수 없었다고 정순식은 자기 부친께서 들은 얘기를 증언하였다.

    그렇게 정재평을 패고 간 일본군은 앞집 봉동댁에 가서 정태화 왔냐 하니, 겁에 질려 오지 않았다 하며 방문 등,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서 보여주고 무사히 넘겼다.(정순식 증언)



    ‘이라리제’ 이야기

    정태화는 해방 후, 장 손자(순범, 순명)가 14세 무렵(1947~8년 경)에 겸백면 도안리 선영이 있는 고향을 첫 방문했다. 그 후로 고향을 방문하여 겸백 도안리 일가 댁 (유쟁이댁, 진산댁..등) 사랑방에서 잤다하며, 어린 정순도가 호기심으로 정태화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들은 바로는 ‘이라리제’(현, 보성군 복내면과 문덕면, 화순군 경계로 추정)에서 결전을 위해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말을 타고 지나가는 두 놈이 수상하여 정태화가 부하들에게 잡아 오라하였다. ‘정태화가 안규홍 대장에게 촉수병(정탐병) 같으니 죽이자’하였다. 그러자 안대장이 ‘살려 주자고’하여 살려 줬다. 그 이후 일본군의 기습으로 의병이 일망타진 당했다. ‘그놈들을 죽였으면 몰살은 면했는데’” 하며 당시를 후회했다고 정순도가 증언했다.



    “안대장과 감옥에 잡혀 갔고, 혼자 감옥을 탈출 했다”

    정순도(당시18세)가 호기심에 더 물으니 “안대장과 감옥에 잡혀갔는데, 일본군이 격리하여 안규홍 대장을 찾으려고 아침에 일어나 헛기침 소리도 내보고 여러 방법을 취했으나 감옥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정태화는 혼자서 감옥에서 탈출을 했다”. 이런 증언이 길어지자 옆에 계셨던 분이 애들에게 별말을 다 한다 하여 중단 되었다.(그분은 급변기라 몸조심 말조심 할 때라서 말렸단다.)



    자식과 상봉 후, 정태화 의병활동 기록이 불태워지다.

    3남의 자부 김순제는 결혼 후 17년만에 시부 정태화를 만났다. 3남 중현이 43세 경으로 35년 만에 부자상봉(1947-48년경)이다. 기쁨과 원망으로 울음바다 되었고, 정태화는 3남 자부 김순제에게 당신의 의병생활을 말하고자 했는데, 험한 때고 김순제 또한 한 많은 삶인지라 “뭐 자랑 이라고” 하시냐며.. 반감을 표해서 단절되었다.(김순제는 생전에 시부의 얘기를 듣지 않은 자신을 한탄하며 “원통하고 애드럽다” 평생을 후회하다 운명했다.) 정태화는 항상, 둘둘 말아서 싼 자그마한 베게 크기의 문서(의병활동기록)를 허리춤에 메고 다녔고, 잠잘 때는 그것을 베게 삼고, 신주 모시듯 귀히 관리했다. 이 서류를 정태화 잠들 때, 후환이 두려워 가족의 손으로 불에 태워졌다.



    정태화의 외형 모습

    의병활동 당시의 정태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증언한 정칠현씨 모친증언은 기골이 장대하다. 가슴이 떡 벌어져 두껍고 몸집도 컸다, “네 아버지가 닮았다, 네 둘째 형이 네 할아버지와 닮았다” 했다. 득량면 마천리 사는 주민 어른들은 ‘정태화 할아버지는 침을 잘 놓고 의사같이 치료를 잘했다며, 의병장 이었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며, ‘정수현의 전사 유품을 묻은 가묘장소도 알려주었다’ 또한, “5남 정수현의 대전국립현충원 안장과 정태화의 훈장 서훈 소식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품의 소유자라며 축하를 해 주셨다.”**



    “정태화는 100년이 훨신 지나서 2012년 건국훈장을 수훈했다”

    이제, “정환종, 김가곡, 선갈음 등”

    그 일가족의 의병활동 사실을 인정받아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



    정태화의 재판기록과 수형기록은 없고, 표제부인 수형인 명부만 발굴하였다.

    탈옥으로 수형기록을 없애 버린 건지, 세월이 너무 오래 되어 없어진 건지

    알 수가 없다. 폭도 죄로 7년 형을 선고 받은 수형자 표제부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서훈의 계기였다. 수형생활과 재판기록이 더 발굴되면 좋겠다.

    또한, 정환종과 그 가족의 고문폭행 사실과 “정재평”의 폭행치사 기록도 발굴되어 진실이 밝혀지길 소망한다.*



    작성자: 정순권 010-5264-2889

    (작성:201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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