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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지난 1992년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훈선양 및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금까지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총 314명!


1992년~2017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 보러 가기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1992~2017).hwp

 

어느덧 2017년의 절반인 6월의 중순이 지나고 있는데요.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함에 앞서, 국민 여러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런 분을 추천해주세요!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건국훈장, 건국포장 및 대통령표창을 받은 분들을 자유롭게 추천해주세요. 또한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던 분들 중에서도 연차별 중점 홍보가 가능한 인물이라면 대 환영!(신한청년당ㆍ전로한족회중앙총회 조직 100주년 등) 의거 80주년, 서거 20주기 등 그 인물과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보일 수 있다면 홍보 효과 역시 높아지겠죠?


또한 2018년도에는 남녀, 내·외국인이 고르게 선정될 수 있도록 여성 및 외국인 서훈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방침입니다.




# 추천 접수는 이렇게 해주세요!


20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은, 관심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추천해주실 수 있는데요. 만약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각 지방보훈관서 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finding@korea.kr)로 아래 첨부된 양식을 작성하여 오는 6월 30일까지 보내주시면 됩니다. 


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양식 다운로드

20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접수 양식.hwp


독립운동가의 생몰년월일, 훈격, 주요공적은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http://e-gonghun.mpv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릴 수 있는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접수,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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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어느새 겨울이 가고 벚꽃이 만개한 봄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고향 충청남도 논산시의 독립운동가를 알아보던 중, 논산 출신 독립운동가인 ‘오철식’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철식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황석공교(黃石公敎)’에 입교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937년 음력 3월 은세룡 등과 함께 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충남 논산의 천호산에서 독립을 기원하는 천제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저는 충남 논산시의 연산군에 거주하고 있는 오철식 독립운동가의 손자 분을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철식 독립운동가의 손자 오재양 분과의 인터뷰>

 

안녕하세요. 저는 제10기 국가보훈처 훈남훈녀 기자단 유수연 기자입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건국포장을 받으신 오철식 독립운동가의 장손 오재양입니다.

 

오철식 선생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저의 할아버지이신 오철식 독립운동가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셨고, 독립운동 단체에서 자금 조달 책임자로 계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 새벽에 집에 들이닥친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전주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셨고, 이러한 공적 사실을 인정받아 2010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습니다.

 

 

고인께서 건국포장에 추서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제가 13살의 어린 나이일 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들께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으려고 애쓰셨지만 어려웠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2001년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다시 찾기 시작했고, 전주 교도소, 부안, 고창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알아보던 중 할아버지께서 재판을 받았던 재판소가 공주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주 재판장을 방문하였는데, 모든 서류가 정부청사로 이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후에 정부청사에서 재판기록 서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구 보관 서류로 분리되어있던 재판기록 서류는 종이 문서였지만 다행히도 전자문서화 되어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2월, 대전에 위치한 보훈청을 방문하여 재판기록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2010년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건국포장을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산소 재정비, 기념비 설립, 연금 논의 등 구체적인 보훈 결정이 오고 가게 되었습니다.

 

<오철식 선생 기념비>

 

오철식 선생님의 기념비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 연산 공원에 위치한 기념비는 제가 졸업한 백석초등학교 졸업생들이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황명선 논산 시장이 추진위원장으로, 이인제 전 국회의원, 충청남도 도의원, 논산시 시의원, 연산면 주민 등 여러 사람들의 모금과 도움으로 연산 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주니,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6월 6일 현충일마다 논산시에서는, 오철식 독립운동가와 6·25전쟁에서 전사한 군인, 경찰관, 의용청년, 일반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 유성에 위치한 공원묘지의 독립유공자 무덤으로 산소 이장 제의를 받았으나, 셋째 작은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자손들이 명절에 고향을 방문하여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데, 고향과 멀리 떨어진 유성으로 이장하면 소홀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배움에 어려움이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지만 그 공적의 증거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 또한 그랬습니다. 어렵게 재판기록을 찾은 뒤 다른 독립운동가 분들의 후손을 만나려 했으나 쉽지 않았거든요.
정부와 보훈처에서 이러한 어려움이 개선되도록 앞으로 좀더 노력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오철식 선생의 후손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독립운동 행적,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고 건국포장에 추서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철식 선생의 기념비와 묘>


인터뷰를 마친 뒤, 연산군의 연산공원에 위치한 오철식 독립운동가 기념비와 인근의 묘를 방문하였습니다.
오철식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간단히 설명되어있었는데요, 이곳에서 묵념을 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가 분들의 노력을 생각하였습니다.

 

<오철식 선생 묘 안내석>

 

<오재양 씨 내외>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잘 모르고 있었던 우리지역의 독립운동가 분을 알아가며 일제강점기, 독립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헌신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철식 선생님을 포함하여 다른 독립운동가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요. 훈터 독자 여러분들도 각자의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으로 제10기 국가보훈처 훈남훈녀 기자단 유수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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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일은 우리나라의 광복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올해 71주년을 맞는 광복절,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를 계기로 독립유공자 235명을 포상하였습니다. 어떤 독립운동가분들이 포상을 받게 되었는지, 훈터지기와 함께 알아볼까요?


건국훈장 152명(애국장 58, 애족장 94),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7명


대토벌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옥중 순국한 의병, 최봉선 선생



일제의 ‘호남 대토벌’에 맞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봉선(崔鳳先)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최봉선 선생은 1908년 음력 2월 의병장 김영백(金永伯)의 부하로 들어가 이듬해 음력 9월까지 동료의병 40여 명과 함께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흥덕․고창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년 2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10)에서 활동내용을 파악하고,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合葬簿)』(전주형무소, 1916)에서 순국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합장부 - 형무소에서 수감 도중 사망한 수인(囚人)들을 가매장하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합장한 내용을 정리한 목록)  




<원문 번역> 


제1. 피고는 김영백이라는 자가 스스로 발의해 이름을 의병에 빙자하여 다수를 무리로 모으고 이들의 수괴가 되어 폭동을 한 사정을 알면서 1908년 음력 2월 3일에 그 부하에 투입하여 이래 1909년 음력 9월에 이르기까지 수괴의 지휘에 따라 동류 4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라남도 장성군, 전라북도 정읍•흥덕•고창군 등의 각 마을을 횡행하고 (중략)




대한제국 경찰간부 출신의 연해주 의병 지휘관, 전제익 선생


1910년대 노령 연해주 일대를 무대로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한 전제익(全濟益)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전제익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대한제국 경찰간부(성진 경무관)로 활약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망명하여 1908년 노령 연해주에서 동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1908년 이범윤이 이끄는 연해주의병에 도영장으로 참가하여 함경북도 접경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이끌었는데, 당시 안중근이 선생의 부하(우군영장)로 종군하였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까지 연해주 일대에서 홍범도․백규삼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 통감부문서의 일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로 여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진술한 내용입니다. 이에 의하면, 전제익 선생은 1908년 음력 6월 이범윤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우군영장 안중근 등 부하 50여 명을 이끌고 함북 경흥군에 가서 이 일대를 정찰하던 일본군 4명을 처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평화 시위에 총격을 가한 일이 순사부장을 응징한 홍문선 선생


경기도 화성에서 독립만세동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홍문선(洪文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19년 3월 28일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서 자전거를 탄 채 만세시위운동을 감시하던 일본인 순사부장이 평화적 시위를 이끌던 주도자를 향해 총격을 가하자, 이에 분개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고 순사부장 처단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 7년이라는 만세운동 참여자로서는 이례적인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과『매일신보』(1920.8.4.) 기사에서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요. 선생의 투쟁 사례는 송산면 사강리 시위투쟁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시위와 달리 매우 격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 4. 7) 중 홍문선 선생 등이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게 된 배경을 기술한 부분. 1919년 3월 28일 순사부장이 시위주도자(홍면)에게 권총을 발사해 등에 부상을 입히자 홍문선 선생 등이 이에 격노하여 군중과 함께 순사부장 처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투쟁에 동참한 여성독립운동가, 정수현 선생


임신한 채 남편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돕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정수현(鄭壽賢)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20년 9~10월 경 서울에서 모형 권총 2정을 구입하고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대동단 간부로서 당시 전남 광주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분주하던 남편 신덕영(申德永, 1963 건국훈장 독립장)에게 전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매일신보』(1920.12.21) 보도에 따르면 처에게서 모형 권총을 전달받은 신덕영은 이를 동지들에게 전달하였고 동지들은 이 모형권총을 활용하여 수백환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선생은 일제 당국의 취조 과정에서 임신 6개월인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징역 8년을 받고 선생과 함께 투옥되었던 남편 신덕영은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한 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1930년대 초까지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정수현 선생의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21. 5. 31)


정수현 선생은 광주지방법원(1921. 5. 31)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위반, 공갈, 가택침입, 방화미수, 총포화약류취체령시행규칙위반’으로 懲役 6月을 언도 받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선생은 경성(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중 독립금 모집 거사에 찬성하여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거사에 이용할 도구(모형 권총 2정)를 관헌의 눈을 피해 광주의 동지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통합에 힘쓴 하와이 한인사회의 큰 지도자, 민찬호 선생



민찬호 선생 사진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단체의 임원․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민찬호(閔燦鎬)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1909년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로서 공립협회와의 통합을 주도, 국민회 출범에 기여하였고 1910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18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1~1924년 하와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승만을 도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원장으로서 1923년 5월 남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모국을 방문하여 국내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후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38년 하와이 중한민중동맹단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지부 위원장, 1945년 같은 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7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재뉴욕소약국동맹회에는 네바다주 대학 재학생 민찬호와 네브라스카 대학 재학생 정치현(정한경)이 파견된다는 일제의 정보문서(1918. 12. 10.)


아들에게 불멸의 조국애를 심어준 미주 독립운동가, 
김영옥 대령의 부친 김순권 선생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김순권(金順權)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경기도 남양 출신으로 1903년 2월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뒤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습니다. 1905년 4월 공립협회 레드랜드지방회 응접위원, 1910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평의원 및 동 지방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한인교민단에서 활동했죠. 

1932년 일제가 상해사변을 일으키자 대한인국민회 상해사변 임시위원부 수전위원으로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1910년부터 1936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미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고 6․25전쟁에도 참전하여 미국 은성무공훈장(1951),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2005), 프랑스 레종드뇌르 무공훈장(2005)을 받은 저명한 참전용사 김영옥 대령(1919.1.29~2005.12.29)이 선생의 장남입니다. 

선생에 대해서는 2011년 국가보훈처가 공적을 확인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금년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한우성 기자의 자료 제출과 심사요청에 따라 포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김순권선생의 사망 사실을 보도한 신한민보 기사(1941.5.8.)


미주 한인사회의 부부 독립운동가, 임메불, 임정수 선생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부부 독립운동가 임메불(林메불)․임정수(林正秀)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 임메불 선생 : 1919년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대표로 미주지역 여성단체가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조직에 참여하고, 1930~1936년과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 임정수 선생 : 1906년 하와이에서 공진회 조직에 참여하고 1907년 합성협회 총회장, 1909년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1912년 대한인국민회 총무, 1922년 동 샌프란시스코지방회장,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조선의 딸을 자처하며 한국독립을 도운 중국인 여성, 두쥔훼이 선생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한 중국인 여성혁명가 두쥔훼이(杜君慧)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두쥔훼이 선생은 중국 광주 중산대학 재학 중 항일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광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한국인 김성숙(金星淑, 1982 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1929년 상해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때부터 한․중연대의 신념으로 남편과 함께 항일 선전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였습니다. 또한 한국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1943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요원, 1945년 5월 한국구제총회 이사로 활약했습니다. 

선생이 한국의 독립을 얼마나 간절하게 염원했는지는 미주에서 발행되던 『독립』(1945.7.11)에 기고한 논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을 ‘조선의 딸’로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여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다”면서 독립운동가 후원을 호소한 것이죠. 이러한 활동은 항일여성운동 분야에서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할 만합니다. 



조선민족해방의 전도는 더욱 중대하여지고 긴박해짐에 따라 조선부녀들이 더욱 준비하고 실행하여 독립운동가를 후원해야한다는 두쥔훼이 선생의 글.
※『獨立』(1945. 7. 11.)


이번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1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지방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되는데요! 이로써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649명, 건국포장 1,176명, 대통령표창 2,739명 등 총 14,564명입니다. 

이번 포상자 235명 중 국가보훈처가 발굴하고 포상을 하게 된 독립유공자의 수는 총 227명인데요.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를 찾기 위해 일제의 수형기록과 정보문서, 신문기사 등 각종 문헌자료를 분석하고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입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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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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