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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정환 선생(출처: 독립기념관)


최초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어린이의 영원한 벗이자 독립운동가인 방정환 선생의 일생을 소개합니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어린 방정환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17년 방정환은 상고를 다니다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 때에 방정환은 소년입지회에서 동화구연, 토론회에 참여하며 어린이를 위한 놀이와 문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방정환은 이후 천도교 핵심인물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33인 중 한 명이되는 권병덕 선생이 그를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에게 소개해 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요.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의 딸 손용화 여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천도교의 정신적, 물질적, 조직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때부터 청년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갑니다.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소설, 수필, 시 등을 발표하며 문학가로서의 삶도 시작하게 되죠.



▲ 손병희 선생(출처: 독립기념관)


1919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청년회 회원으로 만세운동 준비에 협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동료 오일철과 함께 자택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방정환 선생은 192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조금 다른 성격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요. 1922년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 제1회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이는 현재 5월 5일 어린이날의 기원이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1923년 3월 20일 소년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 4월 30일 동경에서 손진태, 윤극영, 진장섭, 고한승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어린이의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정서적, 문화적 계몽에 힘씁니다.


▲ 천도교소년회의 첫 ‘어린이날’ 행사 기사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은 어린이의 현실적,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해방을 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 및 동화 ‘사랑의 선물’ 등을 집필하고 윤석중, 이원수,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를 발굴·육성하며 최초로 동화문학 장르를 개척하였습니다.


▲ 어린이날 노래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나 방정환 선생의 민족 계몽 운동의 청사진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고,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과 재정난 등은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선생은 그해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정부는 방정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방정환 선생. 무장독립운동과 더불어 우리 민족을 이끌어갈 세대를 계몽시켜 민족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 역시 독립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사와 어린이들의 인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방정환 선생의 업적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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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종종 그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선열들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경상북도 안동도 예외가 아닌데요.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바로 안동이 낳은 훌륭한 계몽운동가요, 항일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입니다.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서 태어난 정통 유학자로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는데요.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5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결심하였고, 독립군 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선생은 이후에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맡으면서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는데요. 지금부터 선생의 헌신적인 생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석주 이상룡 선생(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룡 선생은 1858년 11월 24일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가문은 19대조가 좌의정을 지낼 정도로 조선중기까지는 명문에 속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를 통해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학식이 밝았으며, 선생의 외적 환경은 매우 좋은 상태였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선생의 의병활동은 재정적인 도움만 행한 1894년 동학운동기와 재정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1905년 을사늑약 직후의 의병활동기로 나눌 수가 있는데요. 먼저, 1894년 동학운동기에 선생은 병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번진영련노(한 번에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로 알려짐)와 같은 신무기를 만들어 실험하였고, 의병장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계속 펼쳤습니다. 1905년 의병활동 때는 여러 동지들과 가야산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거사를 하며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선생의 의병활동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때 의병항쟁의 실패를 경험한 이상룡 선생은 결국 사상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어 자신의 의병활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그 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상룡 선생의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자신의 동지였던 류인식, 김동삼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선생은 학교설립을 계기로 안동에 구국계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생의 애국계몽운동은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09년 봄에 의병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선생을 지지하는 데모대의 압력으로 석방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석방 후에 선생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했는데요. 이때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시국강연회와 회보발간 등과 같은 홍보활동과 협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립학교를 추진하여 청소년들은 대상으로 한 신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안동지회는 일진회와의 관계, 경술국치 등의 문제로 대한협회본부와 충동을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1911년 음력 1월,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만주에 망명한 직후 선생은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는데요.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수전 농업의 정착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고산에서 살고 있어서 경제력이 약화된 상태였는데, 선생은 벼농사를 정착시켜 경제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고대 민족발달사’를 연구하여 만주를 더 이상 먼 땅이 아닌 친밀한 땅으로, 독립운동의 신흥기지로서의 관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중국 당국과의 교섭에도 기여하였는데요. 주로 산업, 교육, 권리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위와 같은 활동으로 이상룡 선생은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고 또 굳건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11년 4월에 선생은 자신의 거주지를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동하고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는데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동시에 선생은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김대락 등 여러 동지들에 의해 경학 사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선생은 항일민족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 교육의 우선주의와 군사 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총재로 추대되었는데요. 5월에는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요. 11월에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이때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또한 선생은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는데,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하여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그 해 4월에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동지들과 논의하였는데요.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여 대한통의부를 수립하였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선생은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는데요. 선생은 조국광복운동이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선생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 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미비와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통감한 선생은 이 양자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책무를 자기가 적임이라고 자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선생은 1924년 10월에 한국독립운동단체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에 선출이 되었고,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까지 했는데요. 그러나 그 당시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인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선생은 안타깝게도 국무령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임 후에 선생은 다시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하지만 선생은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는 도중에 병에 걸려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나를 데려갈 생각을 하지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습니다. 그 후 1962년에 정부에서는 이상룡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치한 선생의 묘


지금까지 이상룡 선생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이처럼 선생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동포들과 함께 계몽에 힘썼으며,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통일과 총화, 그리고 종합을 지향한 것입니다. 결국 50여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한 것이었고, 이는 선생의 평소 폭넓은 인품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맡으면서 여러 분파로 갈린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이상룡 선생. 이러한 이상룡 선생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많은 국민들이 이상룡 선생의 계몽활동과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공로를 생각하며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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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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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ㅇㄹㄴㄹ

    2013.10.03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있는분이네요!!

  2. 이승백

    2014.08.15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조상분이십니다. 그래서 항상 바르게 참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3. 이대승

    2017.04.28 0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석주선생님을 조국에 모시기 위해 큰 노력을 하신 아버님및 종친어르신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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