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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한때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대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고,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다시 북진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열렸고, 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를 비롯하여 휴전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 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건의 문제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장기간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회담 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된 것이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전까지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죠. 중요한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 속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 백마고지 기념관 입구에 있는 돌로 만든 표지판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5사단 열쇠전망대.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사전에 신청과 승인을 거쳐 들어가야 했는데요. 여기에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5사단 열쇠전망대 전경


충현탑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덕산리에 있던 탑을 열쇠전망대로 옮겨온 것인데요. 6.25전쟁 중 대광리 북방고지 탈환을 위해 ‘아더 지 투르도’ 소장이 지휘한 장병들은 중공군 주력부대를 섬멸, 격퇴합니다. 따라서 대광리 북방고지의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죠.


이들 장병의 공적을 찬양하며 자유 평화를 위해 산화한 참전용사와 우리 국군장병의 영령 893위를 추모하기 위해 충현탑을 건립했습니다. 충현탑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발견되었으며 2000년대 초반, 열쇠전망대로 옮겨 관리하고 있습니다.


▲ 열쇠전망대에 있는 충현탑


다음으로 백마고지 기념관에 방문해 보았습니다.


백마고지 기념관 안으로 걸어가면,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가 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 장렬하게 산화한 국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전사자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기념관으로 올라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


백마고지 기념관은 동편과 서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편에서는 백마고지 전투 당시 제9사단장이었고, 제15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종오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백마고지 기념관에 있는 백마 한 마리


동편과 서편에는 동판이 있습니다. 이 동판들은 백마고지 전투 당시에 소모됐던 탄피를 녹여 제작되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약 27만 5천여 발의 탄피가 나왔다고 할 만큼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기념관 한쪽에서는 중공군이 사용했던 장비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 탄피를 녹여 만든 동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백마고지 기념탑. 기념탑 앞에 서서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과 유엔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백마고지 기념탑


열쇠전망대에 있는 충현탑과 백마고지 기념관을 다녀와서, 6.25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목숨 걸고 우리 국토를 수호한 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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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은 치열한 혈투를 거듭했습니다. 정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 중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는데요. 10월의 전쟁영웅은 바로 이 저항과 역습의 최전방에서 백마고지 탈환을 이끌어낸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입니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하루 평균 5만발의 포탄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적진에 투하되는 곳으로, 작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 당시 백마고지는 포격으로 인해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될 정도로 그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국군 (출처: 군포시민신문)


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당시)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하였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는 국군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최전방으로 나아가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습니다.




▲ 적진을 향해 쏘는 박격포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이 상황에서 김경진 중령은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으로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헤쳐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있던 제6중대를 제5중대의 좌측으로 진출시켰습니다. 이후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자신도 직접 최전방으로 나아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 소비된 수 만개의 탄피 (출처: 경북일보)


정상을 20여 미터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던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의 박격포가 근처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포탄의 파편이 중령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경진 소령은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격전지로 진격하는 국군의 모습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김경진 소령이 전사한 이후 대대원들은 그가 생전 보여준 용맹한 솔선수범에 전투의지를 불태웠고, 과감히 돌격하여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경진 중령의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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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수영

    2018.01.30 0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백마고지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는 국군' 이라는 사진 확인 바랍니다.
    저 사진 중국군 상감령전투에서 중국군 사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누는 국군' 이라는 제목은 좀이상하지 않은가요?
    '겨누는' 말이...



1951년 7월 10일, 6.25전쟁이 시작된 지 꼭 1년 남짓한 시점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나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고, 특히 최전방에서 적을 마주하던 국군 장병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951년 12월 27일 이후 발표된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의제의 합의안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순간에 양쪽이 대치하고 있는 선을 중심으로 새롭게 군사분계선을 그리기로 한다.’ 그리고 ‘포로문제와 송환’에 대한 협상이 18개월 11일간 지속되면서 국군장병들은 언제 조인될지 모르는 정전협정을 기다리며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한 전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나긴 협상이 낳은 또 다른 비극, 고지전투의 서막이었는데요.

고지전투의 한 예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이뤄졌던 ‘백마고지’ 전투는 길이 3km, 폭 2km에 불과했던 작은 야산에서 벌어졌고 중공군 1만여 명, 국군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고지전 전투 때 북한국 전사자를 바라보는 미군


또, 강원도 화천의 ‘425 고지전’은 남한 전체 전력의 30%를 차지했던 화천 수력발전소를 확보하고 휴전선을 38선 북쪽으로 35km 밀어올렸지만 160명의 국군전사자를 내는 안타까운 결과도 수반하였습니다.


정전협상이 있던 7월 27일 당일에도 오후 10시까지 한 평의 땅을 얻기 위해 사라진 꽃 같은 젊음들.

이외에도 군사전략상 중요한 고지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 속에서 많은 젊은 목숨이 사라져 갔습니다. 불모고지,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 고지전투는 한이 맺힌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 실제 고지전 때 쓴 탄피들


우리는 이들의 희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요?

제10기 훈남훈녀 기자단 1조 ‘썸남썸녀’의 팀미션 영상을 통해 6.25전쟁과 고지전투에 대해 더 잘 알게되는 기회가 되었길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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