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비스(BOVIS) 선포 10주년] 5.18 민주유공자와의 만남
안녕하세요, 훈터 가족 여러분. 국가보훈처의 찾아가는 보훈복지서비스인 보비스(BOVIS)가 선포된 지 1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보비스(BOVIS)’라는 이름이 생소한 분들도 있을 텐데요. ‘보비스(BOVIS)’는 국가유공자 분들의 노후를 건강하고 안락하게 지원해 드리기 위해 ‘이동보훈’과 ‘노후복지’를 통합한 국가보훈처의 이동보훈복지 서비스 브랜드입니다. 국가보훈처는 보비스(BOVIS)를 통해 국가유공자 분들에게 재가복지서비스, 건강ㆍ문화교실 등 여가활동, 후원연계 등을 지원해 드리며 나라에 헌신하신 분들의 건강하고 명예로운 노후 생활을 종합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8월 3일 목요일 오후 4시, 재가복지서비스를 지원받고 계신 5.18 민주유공자 이영자님(43년생)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현재 광주에 거주 중인 이영자님께서는 주 1회의(16:00~18:00 총 2시간) 재가서비스를 받고 계십니다.
이영자님께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목과 허리 쪽의 통증을 달고 사셔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훈처에서 지원받고 있는 재가복지서비스는 몸이 불편하신 이영자님께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매번 실시하는 만족도 조사에서도 항상 ‘매우 만족’에 체크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 인터뷰를 하시는 이영자 5.18 민주유공자 님, 담당 보훈섬김이의 모습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이영자님으로부터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생생한 현장의 기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38세셨던 이영자님께서는 처음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반 가정주부였습니다. 1980년 5월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데모가 성하게 되고 맨손으로 ‘전두환, 노태우 물러가라’, ‘계엄령도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은 도청 앞(구 광주 시청)에서 데모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이영자님께서는 학생들이 하는 연설을 듣는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로 광주 지역에 공수특전단을 투입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5월 18일 오전, 공수부대는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았습니다. 학생들의 항의에 공수부대는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들은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고, 맨손으로 저항하던 학생들은 피를 철철 흘렸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이 죽어나갔고, 그 당시 광경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고 합니다.
광주의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공수부대는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그렇게 5월 21일, 문화의 전당 앞에 일제히 모인 시민들과 주차된 시내버스를 향해 총이 난사되었습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현재까지도 여전히 발포 명령을 한 책임자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듯 광주시민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자, 공수부대는 변방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후 시민들은 서로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으며 주체적으로 은행과 경찰서를 지켰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시민들끼리 주요 기관을 지켰던 그 기간에 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6일 새벽, 광주로 쳐들어온 계엄군들은 무기를 가지고 도청 안에 있는 학생들에게 ‘총 버리고 나와서 자수해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방송국도 다 끊어버리고 거짓 방송을 하였으며,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조그만 폭동이 일어났다고 오보를 합니다. 도청 안에 있는 학생들을 살려보려던 수습대원들도 있었지만, 일부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결국 도청 안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영자 유공자께서는 도청 근처에서 사셨기 때문에 학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다 보셨다고 합니다.
27일 새벽 4-5시 경에 비행기로 ‘광주 폭도는 나오라’는 삐라가 뿌려지고,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신 이영자 님의 마음 속에서는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속에서 천불이 나 무서워서 숨고 싶지도 않았고, 아침 9-10시 경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순수한 광주 시민으로서 계엄군에게 가서 본 대로 이야기 하자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만큼 살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죽어 나간 것은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또한 여기 사람들은 폭도가 아닙니다.
본대로 이야기 합시다. 우리 시민들이 전부 나섭시다.”
오후 4시가 되도록 외치셨던 이영자 님은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광주경찰서 114 수하본부로 잡혀가시게 되고, 먼저 잡혀온 20-30명 중 유일하게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조서에 적혀있었고, 누가 이런 말을 하라고 조종했냐는 심문과 함께 팔이 뒤로 묶인 채 몽둥이로 4시간 정도를 맞으셨다고 하니,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셨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이영자님은 저녁 9시쯤 조사계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4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조사계장을 만나게 됩니다. 광주시민 편이셨던 조사계장은 이영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 말 들리냐, 아야, 나를 봐라.
너 같은 동생이 둘이 있다. 너 이런 말이 나오디야.
지금은 계엄 시기여. 지금은 재판도 안 하고 죽여버려.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데.
너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해도 목숨은 하나여.”
그리고 밥을 시켜서 주셨다고 합니다. 광주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계엄군들이 몰고 온 짚차를 타고 31사단으로 보내졌지만, 미리 조서를 간단하게 수정해서 보내주신 조사계장 덕분에 더 이상의 큰 고초는 면하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광주 남자들이 죽어가는 소리, 명태 엉키듯이 엉키어 뚜드려 맞는 소리, 30명 정도 되는 잡혀온 여인들이 고문 받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지만 말입니다.
5월 27일 들어가서 9월경에 밖으로 나오신 이영자 님은 자신을 도와주신 조사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 당시 이미 사표를 내고 경찰직을 내려놓으신 바람에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분의 유족에 대한 정보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혹시 이 기사를 보신 분 중, 이와 관련하여 정보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꼭 연락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영자 5.18 민주유공자님께는 그 분의 말이, 한 평생을 바꾼 말이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내가 지금껏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가 많은 분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세대가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요?
찾아가는 보훈복지서비스, 보비스(BOVIS) 10주년. 국가보훈처는 2018년부터 관계 기관과 협의하여 재가복지서비스의 지원 대상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보다 많은 국가유공자 분들의 노후를 건강하고 안락하게 지원해 드릴 수 있도록, 보비스에 더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 참고사이트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http://www.518archive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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