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97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ㆍ청산리ㆍ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우리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광복이 오기까지 36년의 시간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겪었는데요.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도 우리 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 중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중 대표적으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가 있는데요. 이 전투들은 오늘날 항일독립전쟁의 3대 대첩이라고 불립니다.

지난 10월 21일(토)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에서,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와 (사)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의 공동 주관으로 <제97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ㆍ청산리ㆍ대전자령대첩 기념식 및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행사는 기념사, 축사와 공연이 있는 기념식과 학술강연회로 2부로 나눠져 진행되었는데요. 무엇보다 중·고등 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행사장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습니다.

조영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은 강인한 어조로 기념사에서, “존경하는 애국시민 여러분! 지난 세기 우리는 일제에게 역사를 빼앗긴 치욕과 수모를 겪었지만, 수많은 독립선열들은 분연히 일어나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헌신하여 마침내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성장을 있게 했다” 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국회의장,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국방부 장관과 여러 국회의원 분들이 축사를 해주었습니다. 한 행사에 이렇게 많은 분들의 축사를 들은 건 처음이었는데요. 이 3대첩이 우리 역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원로 애국지사가 대표로 참가자 모두 일어나서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를 외칠 때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의 만세소리는 얼마나 애틋하고 간절했을까 생각되니 순국선열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원로 애국지사 분께서 “한 세기의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홍범도 장국의 유해를 모셔오지 못한 게 너무 원통스럽습니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실 때에는 행사장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 한국독립군의 위대한 3대 대첩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연합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 안무(安武)가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이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요.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의 지휘 아래 독립군은 동서남북에 매복해 있다 한 번에 일본군에게 정밀사격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독립군은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며 대승을 거둔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인 전투였습니다.
독립군의 가장 빛나는 청산리 전투

▲ 청산리 전투 기록화 (출처: 백야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
일제는 봉오동 전투의 참패에 대한 보복과 간도출병의 명분을 위해 ‘훈춘사건’의 음모를 꾸밉니다. 훈춘사건은 1920년 10월 2일 일본이 중국 마적을 매수해 훈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끔 한 작전입니다. 일본은 이 조작된 사건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시켜 심문 없이 무조건 잡아 일렬로 세운 후 총살하고 불태우는 등의 대학살을 저질렀는데요. 이 사건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고, 일본군에겐 한국독립군을 토벌할 명분이 생깁니다.
청산리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요. 이 지역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전략적으로 유리하여 독립군은 청산리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일대 섬멸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10월 21일부터 일본군은 청산리 부근의 남북 골짜기로 들어왔고 김좌진 장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자멸전을 벌이고 참패합니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ㆍ홍범도ㆍ최진동 등이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입증해 보인 대첩이었습니다.
한중연합전투, 대전자령 대첩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와는 달리 생소한 이름인 대전자령 대첩은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 부대가 연합하여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입니다. 한중 연합군은 1933년 대전자령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19사단이 군수물자를 끌고 연길현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듣고, 3일간 100km가 넘는 강행군을 하여 1933년 6월 29일에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합니다.
7월 3일, 일본군은 각종 자동차와 우마차를 싣고 대전자령을 지나갑니다. 이때 한중 연합군은 사격과 함께 바위를 굴러내려 적의 물건을 파괴하고 일본군을 거의 궤멸시켰습니다.
대전자령 대첩은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투쟁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 암흑과도 같았던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의 3대 대첩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고 자부심이었으며, 불굴의 정신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민족의 희망이 되어준 독립군의 3대 대첩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참고사이트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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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262&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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