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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다부동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는데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발발한 6.25전쟁,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마산-왜관-낙동리-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은 마지막 저지선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무려 55일 동안이나 물러서지 않고 격전을 치른 끝에야,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의 판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참극을 재현하지 않도록 실천적 의지를 다지는 곳입니다. 전시실에는 다부동전투에서 사용된 무기들과 사진 자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국용사 충혼비와 구국관이 있고, 구국 경찰 충혼비도 있습니다. 참전한 군인과 경찰의 이름이 새겨진 명각비가 있으며, 이름 없는 유해 259점을 합장한 무명용사 묘지가 있습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입니다.

또한 다부동전적기념관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나라사랑큰나무GO 어플에서 보너스를 획득할 수 있는 장소인데요. 기념관에 방문하여 나라사랑큰나무도 획득하고, 전쟁의 비극이 전하는 교훈을 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 나라사랑큰나무GO 어플

안드로이드 다운받기 http://goo.gl/WenYGa

IOS 다운받기 http://goo.gl/8ncGvT

 

출처 - 나라사랑배움터 edu.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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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 물러나면 바다다.”

 

6•25전쟁의 최대의 격전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다부동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최후의 저지선 (마산 ~ 왜관 ~ 낙동리 ~ 영덕: 240km)으로, 이 전투에서 우리는 55일 동안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으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냅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 외에도 경찰, 학도병, 노무병 지역주민 등 보이지 않는 숨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영덕 장사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 유학산 6•25 격전지를 가기 위해 경부선 왜관 기차역에 내렸습니다. 왜관역에서 도보로 1km 걸어가면 왜관철교가 보입니다. 지금은 호국의 다리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측 맨 끝부분 아치가 없는 부근이 6•25전쟁 당시 다리를 끊었던 자리입니다.

 

왜관지구 전적비

 

 

작오산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왜관지구 전적비가 입구의 애국 동산에 있습니다. 좌측에 왜관철교 호국의 다리가 보입니다. 작오산 격전지를 등산하려고 하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등산은 포기하였습니다.

 

 

 

다음날 언제 비가 왔었느냐며 맑고 화창한 날씨가 반깁니다. 왜관역 근처 북부 버스정류장에서 농어촌버스를 타고 학산 1리(듬티재) 정류소에 하차하면 눈앞에 유학산이 장대하게 펼쳐집니다.

 

버스정류소에서 1.8km 도보로 28분 정도 올라가면 다부동 유학산 휴게소를 만나게 됩니다. 저 암벽 위에 유학정 정자가 있는데, 그곳은 치열하였던 고지탈환전이 있었던 839고지입니다. 유학산 6•25 격전지 순례탐사 안내도를 바라보며 그 당시 젊은이들이 소총을 들고 올랐을 산을 스틱과 등산화로 무장하고 산행에 나섭니다.

  

 

이 것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입니다.

 

6•25전쟁 당시 이곳은 5번과 25번, 907번과 908번 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1950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총 11일간 국군 제1사단 12연대와 북한군 제15사단이 혈전을 벌인 ‘다부동 지구 전투’의 최대 격전지(激戰地)로써, 고지(高地)의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뀌었고 유학산의 능선과 골짜기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구국의 현장입니다.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국군전사자들의 유해(遺骸)를 발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이곳 유학산에서만 123구가 발굴되어 현충원에 모셔졌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라는 국가 무한책임을 완수하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유해발굴지역 옆에는 유학산의 암벽 아래 도봉사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유학산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 할 수 있는 '쉰질바위'입니다. '쉰질바위'란 어른 키로 50질이나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학바위'로도 불리는데, 예전에 학이 노닐던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유학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였던 들꽃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839고지 탈환전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유학정 앞에 정상표지석과  ‘839고지 탈환전’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표지판에는 '839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는 사실이 적혀있었습니다. 
 

 

대구를 공격하려는 공산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들 사이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전선이었던 다부동. 주•야간에 9번이나 그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고, 당시의 전투에서 아군만 하더라도 600여 명이나 목숨을 잃은 격전지를 와보니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전우야 잘 자라 노랫말 중)

 

 

유학정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지금은 산림이 울창하여 낙동강을 볼 수가 없었지만 이 839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유학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초록 잎이 햇빛에 투과되어 너무나 싱그럽게 보입니다.

 

전쟁이 끝난 요즈음은 건강을 위해서 산을 오르며 이런 풍경을 즐기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이런 풍경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길을 걸으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매복한 북한군을 찾아 다녔던 우리의 호국영웅들의 발걸음을 생각하여 봅니다.

 

 

이곳은 837고지입니다.

 

839고지와 높이가 2m 정도 차이가 나지 않아서 837고지는 또 다른 주봉이라 할수 도 있겠습니다. 당시 이 '837고지'는 대구 진입로를 방어하는 최고 요충지였습니다.

 

1950년 8월 16일부터 8월 23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의 유학산 동편에서 국군 제12연대 제1대대와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장소이며, 인민군 제13사단이 먼저 점령한 고지를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1대3의 수적 열세를 딛고 탈환한 곳 이기도 합니다.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매일 수백 명의 젊은이가 산화한 이곳이 반격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저 멀리 고속도로 왼편에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보입니다.

 

 

674고지 탈환전

 

1950년 8월 15일 진행된 674고지 탈환전에서 손해원 이등 중사는 진지로 접근하는 적을 사살하고 1명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소속 부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하여 무공훈장을 받게 됩니다
 
 

 

유학산의 바위에는 그날의 총탄 자국을 볼 수 있었는데요. 길가에 있는 작은 바위의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 총탄 자국을 볼 수 있습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의 무공화와 태극기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이곳 다부동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는지 6•25전쟁을 종군한 경북 영양 출신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라는 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시는 1950년 9월 말 지었습니다. 이후, 1995년 시비로 만들어져 구국용사충혼비와 함께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세워졌습니다.

 

 
다부원에서'

                                            -조지훈

'한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 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國土)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者)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을해년 조지훈 시를 류영희 적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산에서 내려와 산 아래 위치해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외관을 전차모양으로 꾸민 전시관은 보는 순간 가슴을 울컥하게 합니다. 전시관에서 눈길을 끌었던 전시물이 있었는데요.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배경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328고지 전투(8월 13일~23일)

 

주•야간 주인이 15회나 바뀌었고, 8월 13일 북한의 보병 3사단과 전차 105기갑사단 6,000여 명이 협동으로 공격하였으며, 8월 15일~22일 뺏고 뺏기는 혈전이 이어집니다. 주간은 아군이 야간엔 북한군이 점령합니다. 8월 23일 15연대가 최종 탈환하였으며, 양보할 수 없는 핵심 거점지역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원작지라고 합니다.


시신혈하의 유학산(839고지) 전투(1950년 8월 13일~23일)

 

수세로 몰렸던 아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이며, 치열한 고지 쟁탈전("전우야 잘 자라") 노랫말 배경지입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다부동 전투의 승리에는 보이지 않는 숭고한 희생들이 함께 했습니다.
대구사수를 위하여 경찰 15,000여명 참전하였고, 이곳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없다는 생각에 소년들은 소년병으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자원하여 전투에 임합니다. 그리고 장정들은 탄약을 전장까지 운반하는 지게병으로 활약하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국군은 더욱 용기를 내어 전투에 임하였고, 결국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희생이 있었기에 다부동 전투의 승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내전시관을 나와 야외전시장을 둘러보니 최근에 새로 설치한 조형물이 보입니다.

 

지난 2016년 9월 2일 대구지방보훈청에서 다부동전투 호국 영웅 조형물 제막식을 했습니다. 호국영웅 조형물은 총과 철모 형상을 한 동판으로 다부동전투 호국 영웅에 대한 공적을 표기했으며,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최후의 보루였던 다부동 전투의 호국 영웅 3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설치되었습니다.

 

특공대를 편성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의 길을 열어 준 김점곤 소장, 
 

 

백병전을 전개해 적군의 대구 진출을 저지한 김동빈 중장,

 

 

 

천평리 계곡 볼링앨리 전투로 유명한 마이캘리스 대령입니다.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 준 호국 영웅의 이름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고 전했습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을 때만 지켜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가는 방법

 

승용차: 내비게이션 다부동 전적기념관

 

대중교통: 왜관 북부 버스정류장에서 32번, 33번, 34번, 34-1번 농어촌 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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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디오스타

    2016.12.29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직접 발로 뛰며 쓴 글이라 그런지 기자님의 노고가 느껴집니다. 상세한 설명과 사진들... 취재기사 잘 봤습니다~


무더위를 피해 바다나 계곡, 산을 방문하는 분들 많으시죠? 혹시 올해 여름을 보내며 66년 전 여름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떠올려 보신적 있나요?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여름은 6•25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북한군의 급격한 남하로 유엔군과 국군은 마지막 보루로 낙동강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는데요, 우리나라를 사수하기 위해 가장 격렬했던 전투가 바로 이 낙동강 전선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릴 다부동 전투가 그 주인공입니다.


다부동 전투가 일어나기까지




다부동 전투전적비(이미지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인해 국군은 끝없이 남쪽으로 후퇴했고, 유엔군 역시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한 채, 낙동강이 있는 곳까지 밀려 내려와 연합군은 마지막 보루로써 7월 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하며 8월 1일에는 진주에서 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 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던 만큼, 초조했던 북한군 사령부는 더 빠른 남하를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해 한번에 부산까지 내려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격파하기 위해 북한군은 일명 ‘8월 공세’를 시작했고, 동시 공격을 위해 가용부대의 절반인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습니다. 이에 대항할 아군의 병력은 단 3개 사단. 국군 제1•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으로 이루어진 아군들은 그마저도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로, 특히 적의 주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에서 적을 여러 번 격퇴한 것만으로도 큰 무리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제 6사단은 공방전을 반복하다 위천으로 물러났고, 왜관일대의 미군은 적과 비등비등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구국의 전투, 다부동 전투의 전개와 결과



이미지 출처 : Wikimedia


8월 11일, 육군본부가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하자,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낙동강 주변 폭격과 미 제1기병사단의 전투상태 소강, 국군 제6사단의 유엔 전폭기 지원으로 인한 북한군 격퇴 등으로 북한군의 공격은 자연히 아직 남아있던 국군 제1사단의 구역, 대구 북쪽에 위치한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북한군은 강력한 3개 사단을 투입하여 약 21,000여 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국군 제 1사단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으로 매우 미약한 전투력을 극복하며 끝까지 다부동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제 1사단만으로는 이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8월 18일에 미군과의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고, 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일대를 뺏고 뺏는 쟁탈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격퇴하고 8월 20일, 적이 영천방향으로 전화하며 다부동을 포기하게 되는 쾌거를 이룹니다. 결국 북한군 24,000 여명, 한미연합군 10,000 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다부동 전투는 끝을 맺었습니다.


다부동 전투를 기억하는, 다부동전적기념관



이미지 출처 : 다부동 전적기념관


위치 :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관람시간 : 09:00 ~ 18:00

휴관일 : 설/추석 명절

관람료 : 무료

관람문의 : 054-973-6313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던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구국의 정신과 평화의 소중함을 널리 깨닫게 하기 위해 왜관지구 전투와 다부동전투에서 사용된 유물은 물론, 다양한 6•25전쟁 관련 물품과 야외 전시장의 전차, 유도탄부터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 등의 다채로운 다부동 전투 관련 자료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바로 조지훈의 시비로, 다부동 전투에 대해 당대의 시인이 남긴 작품을 시비로 제작하여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당시 전투의 참혹함과 이를 표현한 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부원에서 


-조지훈 -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명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리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격렬한 전투였던 다부동 전투! 

수적 열세와 전투력의 차이에도 끝까지 싸워 다부동을 지켜낸 국군과 유엔군이 아니었더라면 이후에 전개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은 물론, 지금의 평화 역시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찜통 더위라고 늘어져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땀을 흘리며 싸웠던 그분들의 정신을 기억하며, 더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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