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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한말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 신돌석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내일 6월 13일(화)은 신돌석 장군 순국 109주기인데요. 평민 출신에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적을 세웠던 신돌석 장군의 일대기, 함께 살펴보시죠!



신돌석 의병장은 경북 영해군(지금의 영덕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예이지만 영해에서 그의 문중은 서리, 즉 중인 집안이었고 그의 집은 아전에서도 밀려나 갓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신돌석 장군은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히며 학문을 익혔습니다.


▲ 신돌석 의병장의 복원 생가(출처: 독립기념관)


▲ 명성황후 국장 장면(출처: 독립기념관)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이 극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합니다. 이듬해 신돌석 장군 역시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결국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습니다.


▲ 단발령 지령문 (출처: 독립기념관)



그는 이때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를 거쳐 7월 초 영덕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이들과의 연합작전을 벌였습니다. 또한 유시연의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했습니다. 이들 연합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해왔고 신돌석 의병장과 김하락 의병장 등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격전을 치르게 됩니다. 적병이 물러가자 신돌석 의진은 지역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의병을 자처하며 그의 의진에 합류했습니다. 인근 일대에 그의 명성이 크게 떨쳐 군사는 무려 3,00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보의 삼위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1907년 11월, 의병장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국의 의병부대는 양주로 집결했죠. 이 때 신돌석 의병장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습니다. 그는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지도력의 미흡과 부실한 계획, 의병 재편 과정에서의 마찰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는데요.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장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위정척사 사상을 전개한 양반, 유생 출신으로만 편성되어 있었는데요. 의병장으로서 용맹을 떨치기는 하였지만 평민 출신이었던  신돌석 장군을 비롯하여 백제, 홍범도, 김수민 등 각처에서 용맹을 드날리던 천민 의병장들도 의병 연합에 배제되는 등 갖가지 문제점이 불거졌습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서울 공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돌석장군 유적지 정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소재)


1908년 신돌석 의진은 고향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그는 평해로 들어가 독곡의 일군을 섬멸하고 2월에는 영양읍에 주둔하며 의병의 기세를 불려나갔습니다. 그러나 엄동으로 인해 의병 활동에 지장이 생기자 나중의 거병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시켰습니다. 일제는 무력으로 신돌석 장군을 제압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유책으로 끊임없이 도장관의 맹서와 통감의 편지 등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돌석 장군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의병을 해산시킨 이후 신돌석 장군은 가족들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영덕으로 이동합니다.


그가 영덕 눌곡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 김상렬을 만나게 됩니다. 김상렬의 간청으로  투숙하며 은신하던 신돌석 장군은, 그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상렬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지방민들은 모두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 신돌석 의병장 유허비(경북 영덕군 소재, 출처: 독립기념관)

 

신돌석 의병장의 활약상은 일제 치하 속 양반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던 의병활동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당시의 신분차별 의식을 극복하고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자 뛰어든 민중들의 삶을 대변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오는 6월 13일 화요일 오전 11시, 신돌석 장군 순국 109주기를 맞아 경북 영덕군 축산면의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립니다. 국난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되었던 신돌석 의병장의 빛나는 애국심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참고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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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선생 생가(출처: 독립기념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71.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한산에서 태어난 이상재 선생은 열여덟 살 때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처음으로 상경했습니다. 하지만 관료계의 부패는 이미 과거 시험에까지 번져있었고, 결국 선생은 낙방하여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 라고 탄식하며 과거시험의 꿈을 접었습니다.


과거 낙방 후 선생은 귀향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으로 10년 동안 세상을 배웠는데요. 이때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의 단장, 박정양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선생은 단장 수행원으로서 일본에 갈 수 있었는데요. 함께 갔던 홍영식, 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어,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상재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 후, 내무독판이 된 박정양의 추천으로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이 되었습니다. 이어 학무국장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교육과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요. 이러한 끝없는 자문자답은 후에 선생이 올곧은 삶을 살 수 있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올곧은 성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당시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치자, 이를 본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소리친 뒤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넣어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곤 통곡하며 왕 앞에 엎드려 대죄하자, 고종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습니다.



1896년 선생은 국어학교의 교장을 맡았습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민계몽에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던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규탄했는데요. 이 일로 일반 민중 정치 참여 선동죄로 첫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원들(출처: 독립기념관)


▲독립문(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은 1903년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풀려나자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합니다. 1905년에는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는데,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으며,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준비하면서 한규설과 이상설의 집을 오가던 중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 풀려납니다.


선생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 시위를 전개했으며, 조선중앙 YMCA 등 10개 YMCA 단체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 총무로서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양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이러한 이상재 선생의 행보를 곱게 볼 리가 없었는데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을 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3개월간의 옥살이를 시킵니다.


그리고 선생은 이듬해인 1920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 만든 단체였습니다.


그 이후 1922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 청년연맹대회(WSCF). 대표단을 이끌고 나간 선생은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을 벌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놓았습니다. 1924년에는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보이스카우트)의 초대총재가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4월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내는 등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27년 2월 이념을 초월한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지만, 당시 이상재 선생은 고령과 노환으로 거동조차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흔쾌히 회장직을 수락하였고, 다음 달 3월 29일, 서거하게 됩니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출처: 독립기념관)


그리고 4월 7일 치러진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 서울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약 10만 명이 운집하여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30만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선생이 민중들에게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출처: 대한민국 상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올곧은 삶을 살았던 월남 이상재 선생. 비록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지 못한 채 서거하게 되었지만,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뿌린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3월 29일은 월남 이상재 선생이 서거한 지 9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생을 기억해주세요.


▲이상재 선생(가운데)의 가족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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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ㅅㅁ

    2017.03.28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기사 잘 보았습니다.^^

  2. 확인

    2017.06.09 0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거 90주년' '90주기'가 맞는 표현입니다.


“……, 결국은 남의 일은 남에게 맡기고 당장에 이해체척(利害體戚)을 

같이 하는 조선 사람의 생존을 위해 일생을 희생할 밖에 없는 것이다.”

- 안재홍, <아아, 그러나 그대는 조선사람이다> 中


민세 안재홍 선생은 1891년 12월 경기도 진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숙(家塾)*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7세부터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은 그 곳에서 이상재, 남궁억, 신채호 등의 계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 가숙 : 한 개인이나 집안에서 경영하는 글방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민세 안재홍 선생의 고가 (출처: 독립기념관)


1910년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 국권을 강탈합니다. 이에 안재홍 선생은 망국의 치욕을 견딜 수 없어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되지만, “미국을 가더라도 동양 사정과 일본의 국정에 어두워서는 안 될 것이니 일본을 먼저 가라”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조언을 듣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 안재홍 선생이 존경하던 ‘월남 이상재’ 선생


선생은 일본의 청산학원과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선진 학문을 수용하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한인 유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에, 안재홍 선생은 1914년 여름에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전념하게 되는데요. 그는 민족 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산직장려계’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서울에서 이병철 등과 함께 비밀리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와 공작 활동을 지원하다가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1922년 출옥 후에는 민족자본과 민족경제 육성에 힘쓰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였고, 언론 기관에 종사하며 새로운 활동 분야를 개척해 갑니다.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신문사에서 논설 기자, 주필 등으로 활동하면서 사설과 시평을 통해 민중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애썼습니다.


▲ ‘조선물산장려회’ 포스터 (출처: 독립기념관)


그리고 1920년대 중반 대두한 자치론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한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신간회의 조사연구부 간사로서 민족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던 중 발각되어 또다시 고초를 겪게 됩니다.


▲ 신간회 신의주지부 창립 1주년 기념촬영(출처: 신간회기념사업회)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정치적 운동이 불가능해지자 국사와 국어, 그리고 고전 연구 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안재홍 선생은 ‘조선상고사관견’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인「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면서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청년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를 알선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어학회 회원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드디어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안재홍 선생은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국민당, 좌우합작위원회 등을 통해 좌우세력을 아우르는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노력하였으며, 경기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6, 25전쟁 중에 북한군 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 (좌측부터) 조소앙, 안재홍, 위드 마이어(1946년) (출처: 독립기념관)


정부에서는 이러한 안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건국훈장 대통령장(출처: 대한민국 상훈)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에 앞장섰고, 광복 후에도 우리 민족을 위해 애썼던 민세 안재홍 선생. 그는 우리 민족이 홀로 설 수 있게 노력한 민족주의자였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선생이었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려 애썼던 역사학자였습니다. 선생의 업적을 글로 담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독립과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굳건한 신념으로 한결같이 노력한 안재홍 선생의 정신을 본받고 또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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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병희

    2017.03.07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랜시간이 지난 뒤에야 집안 어르신께서 이렇게 조명 받으니 눈물이 나네요..

  2. 로사리아

    2017.03.07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세 안재홍 선생님은 평소 잘 알지 못했던 분인데요~ 앞으로 이런 분들을 많이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3. 김혜남

    2017.03.08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 하신 분이네요..
    정말 대단하시고.. 존경합니다.^^

  4. 역사가좋다

    2017.03.09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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