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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지난 1992년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훈선양 및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금까지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총 314명!


1992년~2017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 보러 가기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1992~2017).hwp

 

어느덧 2017년의 절반인 6월의 중순이 지나고 있는데요.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함에 앞서, 국민 여러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런 분을 추천해주세요!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중에서 건국훈장, 건국포장 및 대통령표창을 받은 분들을 자유롭게 추천해주세요. 또한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던 분들 중에서도 연차별 중점 홍보가 가능한 인물이라면 대 환영!(신한청년당ㆍ전로한족회중앙총회 조직 100주년 등) 의거 80주년, 서거 20주기 등 그 인물과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보일 수 있다면 홍보 효과 역시 높아지겠죠?


또한 2018년도에는 남녀, 내·외국인이 고르게 선정될 수 있도록 여성 및 외국인 서훈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방침입니다.




# 추천 접수는 이렇게 해주세요!


20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은, 관심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추천해주실 수 있는데요. 만약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각 지방보훈관서 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finding@korea.kr)로 아래 첨부된 양식을 작성하여 오는 6월 30일까지 보내주시면 됩니다. 


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양식 다운로드

2018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접수 양식.hwp


독립운동가의 생몰년월일, 훈격, 주요공적은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http://e-gonghun.mpv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릴 수 있는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접수,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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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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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일은 우리나라의 광복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올해 71주년을 맞는 광복절,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를 계기로 독립유공자 235명을 포상하였습니다. 어떤 독립운동가분들이 포상을 받게 되었는지, 훈터지기와 함께 알아볼까요?


건국훈장 152명(애국장 58, 애족장 94),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7명


대토벌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옥중 순국한 의병, 최봉선 선생



일제의 ‘호남 대토벌’에 맞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봉선(崔鳳先)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최봉선 선생은 1908년 음력 2월 의병장 김영백(金永伯)의 부하로 들어가 이듬해 음력 9월까지 동료의병 40여 명과 함께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흥덕․고창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년 2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10)에서 활동내용을 파악하고,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合葬簿)』(전주형무소, 1916)에서 순국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합장부 - 형무소에서 수감 도중 사망한 수인(囚人)들을 가매장하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합장한 내용을 정리한 목록)  




<원문 번역> 


제1. 피고는 김영백이라는 자가 스스로 발의해 이름을 의병에 빙자하여 다수를 무리로 모으고 이들의 수괴가 되어 폭동을 한 사정을 알면서 1908년 음력 2월 3일에 그 부하에 투입하여 이래 1909년 음력 9월에 이르기까지 수괴의 지휘에 따라 동류 4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라남도 장성군, 전라북도 정읍•흥덕•고창군 등의 각 마을을 횡행하고 (중략)




대한제국 경찰간부 출신의 연해주 의병 지휘관, 전제익 선생


1910년대 노령 연해주 일대를 무대로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한 전제익(全濟益)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전제익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대한제국 경찰간부(성진 경무관)로 활약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망명하여 1908년 노령 연해주에서 동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1908년 이범윤이 이끄는 연해주의병에 도영장으로 참가하여 함경북도 접경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이끌었는데, 당시 안중근이 선생의 부하(우군영장)로 종군하였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까지 연해주 일대에서 홍범도․백규삼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 통감부문서의 일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로 여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진술한 내용입니다. 이에 의하면, 전제익 선생은 1908년 음력 6월 이범윤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우군영장 안중근 등 부하 50여 명을 이끌고 함북 경흥군에 가서 이 일대를 정찰하던 일본군 4명을 처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평화 시위에 총격을 가한 일이 순사부장을 응징한 홍문선 선생


경기도 화성에서 독립만세동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홍문선(洪文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19년 3월 28일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서 자전거를 탄 채 만세시위운동을 감시하던 일본인 순사부장이 평화적 시위를 이끌던 주도자를 향해 총격을 가하자, 이에 분개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고 순사부장 처단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 7년이라는 만세운동 참여자로서는 이례적인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과『매일신보』(1920.8.4.) 기사에서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요. 선생의 투쟁 사례는 송산면 사강리 시위투쟁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시위와 달리 매우 격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 4. 7) 중 홍문선 선생 등이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게 된 배경을 기술한 부분. 1919년 3월 28일 순사부장이 시위주도자(홍면)에게 권총을 발사해 등에 부상을 입히자 홍문선 선생 등이 이에 격노하여 군중과 함께 순사부장 처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투쟁에 동참한 여성독립운동가, 정수현 선생


임신한 채 남편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돕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정수현(鄭壽賢)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1920년 9~10월 경 서울에서 모형 권총 2정을 구입하고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대동단 간부로서 당시 전남 광주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분주하던 남편 신덕영(申德永, 1963 건국훈장 독립장)에게 전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매일신보』(1920.12.21) 보도에 따르면 처에게서 모형 권총을 전달받은 신덕영은 이를 동지들에게 전달하였고 동지들은 이 모형권총을 활용하여 수백환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선생은 일제 당국의 취조 과정에서 임신 6개월인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징역 8년을 받고 선생과 함께 투옥되었던 남편 신덕영은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한 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1930년대 초까지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정수현 선생의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21. 5. 31)


정수현 선생은 광주지방법원(1921. 5. 31)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위반, 공갈, 가택침입, 방화미수, 총포화약류취체령시행규칙위반’으로 懲役 6月을 언도 받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선생은 경성(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중 독립금 모집 거사에 찬성하여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거사에 이용할 도구(모형 권총 2정)를 관헌의 눈을 피해 광주의 동지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통합에 힘쓴 하와이 한인사회의 큰 지도자, 민찬호 선생



민찬호 선생 사진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단체의 임원․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민찬호(閔燦鎬)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1909년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로서 공립협회와의 통합을 주도, 국민회 출범에 기여하였고 1910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18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1~1924년 하와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승만을 도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원장으로서 1923년 5월 남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모국을 방문하여 국내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후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38년 하와이 중한민중동맹단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지부 위원장, 1945년 같은 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7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재뉴욕소약국동맹회에는 네바다주 대학 재학생 민찬호와 네브라스카 대학 재학생 정치현(정한경)이 파견된다는 일제의 정보문서(1918. 12. 10.)


아들에게 불멸의 조국애를 심어준 미주 독립운동가, 
김영옥 대령의 부친 김순권 선생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김순권(金順權)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됩니다. 선생은 경기도 남양 출신으로 1903년 2월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뒤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습니다. 1905년 4월 공립협회 레드랜드지방회 응접위원, 1910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평의원 및 동 지방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한인교민단에서 활동했죠. 

1932년 일제가 상해사변을 일으키자 대한인국민회 상해사변 임시위원부 수전위원으로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1910년부터 1936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미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고 6․25전쟁에도 참전하여 미국 은성무공훈장(1951),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2005), 프랑스 레종드뇌르 무공훈장(2005)을 받은 저명한 참전용사 김영옥 대령(1919.1.29~2005.12.29)이 선생의 장남입니다. 

선생에 대해서는 2011년 국가보훈처가 공적을 확인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금년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한우성 기자의 자료 제출과 심사요청에 따라 포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김순권선생의 사망 사실을 보도한 신한민보 기사(1941.5.8.)


미주 한인사회의 부부 독립운동가, 임메불, 임정수 선생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부부 독립운동가 임메불(林메불)․임정수(林正秀)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 임메불 선생 : 1919년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대표로 미주지역 여성단체가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조직에 참여하고, 1930~1936년과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 임정수 선생 : 1906년 하와이에서 공진회 조직에 참여하고 1907년 합성협회 총회장, 1909년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1912년 대한인국민회 총무, 1922년 동 샌프란시스코지방회장,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조선의 딸을 자처하며 한국독립을 도운 중국인 여성, 두쥔훼이 선생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한 중국인 여성혁명가 두쥔훼이(杜君慧)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됩니다. 두쥔훼이 선생은 중국 광주 중산대학 재학 중 항일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광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한국인 김성숙(金星淑, 1982 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1929년 상해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때부터 한․중연대의 신념으로 남편과 함께 항일 선전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였습니다. 또한 한국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1943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요원, 1945년 5월 한국구제총회 이사로 활약했습니다. 

선생이 한국의 독립을 얼마나 간절하게 염원했는지는 미주에서 발행되던 『독립』(1945.7.11)에 기고한 논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을 ‘조선의 딸’로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여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다”면서 독립운동가 후원을 호소한 것이죠. 이러한 활동은 항일여성운동 분야에서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할 만합니다. 



조선민족해방의 전도는 더욱 중대하여지고 긴박해짐에 따라 조선부녀들이 더욱 준비하고 실행하여 독립운동가를 후원해야한다는 두쥔훼이 선생의 글.
※『獨立』(1945. 7. 11.)


이번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1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지방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되는데요! 이로써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649명, 건국포장 1,176명, 대통령표창 2,739명 등 총 14,564명입니다. 

이번 포상자 235명 중 국가보훈처가 발굴하고 포상을 하게 된 독립유공자의 수는 총 227명인데요.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를 찾기 위해 일제의 수형기록과 정보문서, 신문기사 등 각종 문헌자료를 분석하고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입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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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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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혹시 11월 17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요?


11월 17일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인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인 1905년 11월 17일을 전후해 수많은 애국지사가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실질적인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하여 순국선열을 추모해 왔습니다.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사진>


17일 제7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선열들이 꿈꾸던 대한민국, 우리가 만드는 통일한국’이라는 주제로 기념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기념식에서 새롭게 공적이 확인된 67명 독립 유공자에 대한 정부 포상이 이루어지는데요. 황교안 국무총리가 수상자 5명에 대하여 유족들에게 훈장을 전수하여 그 공훈을 기렸습니다.



건국훈장 43명(애국장 9, 애족장 34)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14명 


총 67명 독립유공자 포상



6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중 60명은 국가보훈처가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의 분석·검토와 현지조사를 통해 발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제76회 순국선열의 날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업적을 한번 알아보도록 할까요?



파리장서운동의 숨은 조력자, 곽윤 선생






곽윤 선생 (사진출처: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곽윤 선생은 1905년 경상도에서 이승희 등이 상경해 올린 을사늑약 반대상소에 연명하였습니다. 1919년 초 서울에서 김창숙 등과 파리장서운동을 협의한 뒤 경남 거창으로 내려가 숙부 곽종석에게 계획을 전달하는 한편 파리장서를 정서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김창숙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을사늑약 반대상소의 일부(사진출처:국가보훈처)




1925년 10월 입국한 김창숙, 송영우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결성하고 서울과 경상도 일원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선생 집안의 문서인 [신문조서] 등 일제 강점기 형사기록 등을 발굴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었고, 이로서 한국독립운동사상 유림의 가장 상징적인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파리장서 운동의 숨은 조력자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스승을 지키며 끝까지 재기를 위해 진력한 의병, 곽한소 선생



곽한소 선생의 모습 (사진출처:국가보훈처) 




충남과 전북 일대에서 최익현 선생이 작성한 항일 격문에 연명하고 동지모집과 격문전달, 의병규합에 노력한 곽한소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선생은 1905년 12월 스승 최익현이 지은 항일 격문에 연명하고 이를 지방향교에 발송하였으며, 의병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충남 논산에서 개최된 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동지규합에 나서 홍주의 안병찬 선생 등과 의병궐기를 준비하고 최익현의 지시에 따라「상소문」,「이등박문을 성토하는 글」등을 작성하였습니다. 같은해 음력 4월 최익현의 의진에 합류하려다 태인 의병의 패배 소식이 들리자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였으며,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의병의 잔여세력 규합을 시도하는 등 끝까지 의병의 재 거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미주 민족 언론을 전파한 흥사단 창단 멤버, 정원도 선생





정원도 선생 (사진출처 : 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정원도 선생은 전남 광주 출신으로 1903년 11월 말 하와이를 거쳐 북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1906년부터 1925년까지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등 재미한인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주도로 흥사단이 창단될 때 전라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특히 1912년부터는 『신한민보』 주필과 편집인을 맡아 미주에서 민족 언론 창달에 기여하였는데 그가 “신한민보를 매양 부칠 때에 자기 등에 지고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는 일화는 동포사회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신한민보는 1932년 7월 21일 선생의 부음을 전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에 많은 공헌이 있는 분으로 이제 영원히 불귀의 길을 떠났다는 흉음을 듣는 본사 동인은 눈물겨운 느낌으로 씨의 이역 고혼을 위로한다”는 조사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미주지역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임초 선생





임초 선생(사진출처:국가보훈처)




임초 선생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1912년 선천에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 중 ‘105인 사건’에 연루,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임초 선생은 이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는데요.


선생은 1913~1914년경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에 입단한 뒤 1945년까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장, 간부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선생은 1921년 6월 임시의정원 북미지역 후보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의 활동비 조달을 위해 미 서부지역을 순방, 2만여 달러의 의연금을 모집하였습니다. 1932년 2월에는 미주의 여러 한인단체가 망라된 공동대회를 주도해 뉴욕한인연합회를 결성했는데 이는 1930년대 이래 민족단일당 건설이라는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의 거대한 흐름을 미국에서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조국독립을 확신한 청년학도의 과감한 투쟁, 이무영 선생


1941년 1월 경북 대구에서 비밀결사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이무영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동료 학생들과 함께 “현재 긴박한 세계정세는 불원 장래 필연 조선독립의 실현을 볼 것”이라고 확신하고 “조선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조선독립을 위하여 협력 매진하자”는 취지로 비밀결사 연구회를 조직한 후 전기과학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는데요.


일제는 이들이 겉으로는 학술연구를 표방하였지만, 이면에서는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등 비밀리에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고 판단(「판결문」등), 이들을 체포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일제 말기의 가혹한 통치하에서도 장차 조국의 장래를 짊어질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쓴 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업적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는데요.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입니다.


훈터 여러분 이번 순국선열의 날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독립유공자들을 기억해주시고, 조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택한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11월 17일을 가치 있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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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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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24 1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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