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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로 풀어보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이벤트에


응모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Ctrl+F로 휴대폰 뒷자리를 검색하시면 당첨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경품: 스타벅스 화이트 초콜릿 모카 Tall 10명

김○순(0390) 김○리(0308) 김○남(5413) 박○은(0129)

○암(3556) 박○늘(1439) 성○종(8392) 이○천(0424)

○ (7939) 한○우(5104)


경품은 이번주 10월 13일 (목)에 발송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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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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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병천

    2017.10.11 1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

  2. 성화종

    2017.10.16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자로 기프트콘을 수령하지 못했는데 어떡하죠?

  3. 2017.10.18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일제강점기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기의 끝에서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줬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유관순 열사 생가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유관순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 유중권 선생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국권 회복을 위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이러한 부친의 가르침으로 유관순 선생은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해 갔는데요. 인정 많고 총명한 유관순 선생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샤프 선교사는 이화학당에 갈 것을 권유했고, 선교사의 추천으로 선생은 17살이 되던 해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 유학생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교비생: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


▲ 이화학당 수업 모습 (출처: 하루 블로그)


유관순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힘들어하는 동포들을 지켜보며 민족의 처지에 대해 인식하는 한편,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피어난 마음가짐으로 일제의 만행에도 이겨낼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당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 (출처: 최석호의 여가이야기)


이화학당에 들어간 선생은 한 해 먼저 입학한 사촌언니 유예도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와 친분을 쌓고,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화학당 생활 중에도 유관순 선생은 민족과 동포들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이문회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요. 유관순 선생 또한 들끓는 민족애로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 고종황제 장례행렬 (출처: 이도경세 이의보본 블로그)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일제의 독살설이 돌고 있어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는데요. 참다못한 한국인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했고,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


▲ 서울 3.1만세운동 당시 모습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이때 이화학당 전교생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에 당시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였는데요. 열사는 친구들과 함께 소복을 입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만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학생들의 만세 운동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19년 3월 10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 선생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당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친구들은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대한 독립, 대한 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 이화학당 다닐 때 유관순 열사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브런치)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부친 유중권 선생과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습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보여주며, 천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열사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을 어른들께 이 소식을 전했고,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천안 일대에 봉화에 불을 지펴 만세시위 운동의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유관순 열사의 열변-


▲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선생은 유중권, 조인원, 유중무 등 가족 및 마을 어른들과 함께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의 선두에 섰는데요. 이 사건이 오늘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불리 우는 독립운동입니다. 


오전 9시, 약 3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 선생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선창하였습니다. 곧이어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고, 유관순 선생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대열의 선두에서 장터를 행진하였습니다.


▲ 아우내 장터의 현재 모습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게 됩니다. 이에 유관순 선생은 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는데요. 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습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들어가 숨어버렸고, 시위 군중은 조인원 선생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시위대에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시위 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총을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고 말았는데요.


오후 4시경, 선생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유관순 선생은 아우내 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부모를 잃고,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는데요. 


그러나 선생은 갖은 고문에도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치고, 공주교도소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외치는 등 독립에 대한 당찬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에 쳐들어온 너희에게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나라에서 당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재판 중 유관순 열사의 발언


▲ 서대문형무소 현재 모습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 선생은 옥중에서도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에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그 만세 소리가 형무소 밖으로 까지 퍼지게 되어 형무소 주위 전차 동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 선생은 물론, 수감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일본에 거세게 항거했으나 결국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유관순 열사 수형 기록표 (출처: 보배드림 블로그)


유관순 선생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8세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생전의 고귀한 희생으로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 소리는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뜨거운 함성이 되었습니다.


오는 9월 28일(목) 오전 11시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유관순 열사 순국 97주기 추모제>가 거행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독립운동에 있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열여덟 소녀의 노력과 마음가짐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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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일 장군 앞에 놓인 다양한 화환들


일평생 조국만을 위해 살아간 독립운동가이자 전쟁영웅이 있습니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오산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귀주 강무학교에서 군사학과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중국군에 있으면서 상해 임시정부를 도왔습니다.


특히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사용될 폭탄을 직접 제조하기도 했는데요. 이 분이 만든 폭탄으로, 두 사람의 의거가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군에서 복무하면서도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이후 김구 주석의 권유로 중국군에서 나와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한 이 분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에도 힘을 쏟으며 국내진공작전에서도 관여했는데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이후, 국군이 갖춰진 다음에는 ‘장군’으로서 대한민국 국군을 지휘했습니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맡으며, 한강방어선 전투를 지휘했기도 했는데요. 이 사람은 바로, 우리 마음속 영원한 장군, 일서 김홍일(逸曙 金弘壹) 장군입니다.


▲ 한강방어선 전투 기념비 모습


김홍일 장군의 이러한 뜻 깊은 애국정신을 본받고, 숭고한 뜻을 기르고자 지난 9월 22일(금) 오전 11시, 전쟁기념관 뮤지엄웨딩홀에서 ‘일서 김홍일 장군 37주기 추도식(이하 추도식)’이 평안북도 성우회의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이 날 진행된 추도식에는 각계인사와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의 교장, 또 육군종합학교의 총장을 맡으며 후배 장교들을 길러냈었는데요. 그 때 김홍일 장군을 기억하기 위해 많은 예비역 장성들이 찾아왔습니다. 또한 김홍일 장군이 졸업한 서울 오산고등학교(오산학교의 후신)의 임직원 등 뜻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김홍일 장군을 기리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이날 추도식은 장군을 기리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는데요. 먼저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그리고 김홍일 장군에 대한 묵념이 이뤄졌습니다.


다음으로 現 평안북도 도지사이자 김영철 예비역 장성은 “먼 길 마다 않고 왕림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김홍일 장군의 추도식을 찾은 모든 내빈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어 김 예비역 장성은 “김홍일 장군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독립운동가 이자 장군이지만, 지난 35주년을 맞아 진행한 학술회의에서도 보듯이 평가절하 되어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 김영철 평안북도 도지사의 기념사


또한 그는 “김홍일 장군의 탄생일에 맞춰 이번 추도식을 열었다”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김홍일 장군이 제작하지 않고, 이 폭탄이 없었다면 한인애국단의 의거도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끝으로 그는 6.25 전쟁 당시 한강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김홍일 장군의 업적을 소개하며 인사말을 마쳤습니다.


인사말에 이허 장정렬 예비역 장성의 추념사가 진행됐습니다. 장 예비역 장성은 “오산고등학교 후배와 임직원, 평안북도 동향 후배, 6.25 전우들이 함께 했고, 국가보훈처 피우진 처장의 화환까지 더해져 참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말했습니다.


▲ 추념사를 읊기 전, 김홍일 장군에게 예를 갖추는 장정렬 예비역 장성


이어 그는 “현재 북한은 IBCM 발사와 6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며 “마치 6.25 전야의 무관심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오늘 김홍일 장군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우리가 각성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반성하겠다.”고 김홍일 장군의 사진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추념사에 이어 국가보훈처를 대표해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도사를 낭독했습니다. 이 청장은 “중국군과 독립군을 넘나들고, 국내 진공 작전 등 장군의 업적은 셀 수 없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 청장은 “1948년 정부 수립 뒤에는 장성으로서 국가의 큰 공헌을 했다”며 “따라서 국가에서는 장군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자 ‘오성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의 추도사 낭독

 

이 청장은 김홍일 장군의 파란만장한 삶을 언급하며 지난날의 재력과 뜨거운 애국충정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말했는데요. 이 청장은 하늘에 있는 김홍일 장군의 안녕을 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후 헌화분향을 끝으로 이번 추도식이 마무리됐습니다.


▲ 헌화를 하고 있는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김홍일 장군의 추도식에 참석하여 장군의 업적을 하나하나 들으니, 과연 혼자서 이룬 업적인가 의문이 들을 정도로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장군, 일서 김홍일 장군의 애국정신을 저도 본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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