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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지난 기사 1편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가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려드렸는데요. 이번 기사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숙부, 사촌 및 조카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안중근의사의 숙부, 사촌 및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안중근 의사의 막내 숙부(작은 아버지) 안태순, 사촌동생 안명근, 안홍근, 안경근과 그의 아들들도 안중근 의사와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막내 숙부 안태순은 1919년 음력 3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고, 동년 5월에는 서울 보신각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동생 안명근 선생은 어려서부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악군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했으며, 1911년 황해도 신천에서 일제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15년간 복역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습니다.


한편, 105인 사건이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는데요, 이 105인 사건의 발단은 안명근 선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안명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이후 매국노 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는데요, 군자금을 주기로 약속했던 사람의 밀고로 1910년 12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 등 160여명을 체포하는데, 이를 「안악사건」이라고 합니다. 이후 1911년 1월에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했다고 해서 양기탁 등 신민회 중앙간부들을 체포 투옥하였는데요, 이는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민회가 일제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했다고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검거하고, 이미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투옥된 신민회 간부들을 재기소하여 최종적으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하였는데요,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안명근의 해서교육총회 교사와 학생들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안명근의 해서교육총회 교사와 학생들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안명근 선생의 동생 안홍근은 1918년 4월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고, 같은 해 8월말 경에는 독립군의 일원으로서 노령 이만과 연해주 일대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22년 1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였습니다.


또한 여동생 안익근 여사의 남편 최익형 선생은 신민회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는데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신민회 회원을 일제히 검거할 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21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안악에 거주하고 있던 백범 김구선생 가족의 중국 망명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안경근 선생 역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데요. 1918년 안중근 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해삼위로 가서 박은식·안정근·신채호·이범윤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을 보좌하여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동지들의 권유로 노주군관학교와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독립투쟁의 역량을 저해·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의 통합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0년에는 상해로 다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32년 낙양군관학교가 세워지자 이곳에서 직접 학생들을 훈련시키면서 군관생도 모집에도 주력하였으며, 이후에는 애국단․한국독립군특무대 조직, 임시정부 의정원 및 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계속 참여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장근의 장남 안봉생은 1927년 김좌진 장군의 위촉을 받아 독립투사 양성과 계몽활동을 벌였으며, 1935년에는 임시정부 김구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자 당숙인 안정근․안공근의 특명을 받고 만주에서 반만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습니다.


또한, 동생 안춘생도 1936년 남경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고, 1940년 6월에는 임시정부 산서지역 특파단원으로 파견되어 군사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에 광복군 총사령부의 제1지대 간부 및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독립기념관장,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부인 조순옥여사도 남편을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활동했습니다.


이렇듯 안중근의사 가문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숙부 안태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동생과 조카들, 그리고 사촌 형제와 5촌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40여 명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정부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 독립운동 내용이 확인된 15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안중근의사에게 수여된 건국훈장(좌)과 건국훈장증서(우)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저는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요.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있으나 15명이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경우는 안중근의사 가문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풍족한 재산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안중근 의사 집안의 사람들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분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느덧 2017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여러분도 본인들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안중근의사 가문의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생각하며, 그 분들의 열정을 본받아 남은 시간들을 더 잘 보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훈남훈녀 제10기 기자단 이지민 기자


〔참고자료〕

 1.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

 2. 오영섭,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기반과 성격, 「교회사연구 제35집(2010년 12월)」

 3.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및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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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


일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황해도 출신의 심호 채상덕 선생입니다. 선생은 만주지역 일대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했던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개척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0월의 독립운동가 채상덕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집니다. 당시 국민들은 일제의 만행에 크게 분노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의병은 한데모여 무장 투쟁을 하게 됩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요. 이때 일어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채상덕 선생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재령·해주·신막·안악 일대에서, 안필호(安弼濩)·최봉소(崔鳳韶)·최전구(崔銓九)·윤항식(尹恒植)·이승회(李承會)·채만식(蔡萬植)·이승원(李承遠)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동참하였습니다.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당시 모습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자,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여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전개하였습니다. 


▲ 항일의병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 이후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이 각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채상덕 선생은 모두가 갈라진 상태에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요.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광한단 등 각 군단의 대표들과 함께 관전현에 모여 남만통일회의가 개최되어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22년 2월,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습니다.


선생은 대한통군부의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선임되었는데요. 얼마 되지 않아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같은 해 8월,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부총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 대한통의부 훈련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그 후 채상덕 선생은 1923년에 대한의군부를 조직하여 총재를 역임하였고, 같은 해 여름 중국 남만주 화전현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58명과 함께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지로에 대해 회의를 가지는 등 독립을 위한 체계적인 움직임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의부 대원들의 모습


또한, 1924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인 참의부에 자신의 제자와 부하들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밀정 이죽파의 밀고로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원들이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독립군 다수가 희생당하는 참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일로 비통함에 빠진 선생은 제자 이수흥에게, “너는 아직 어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독립군이 되어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뜻을 이어줄 것을 당부한 뒤, 한참을 통곡하다가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1995년 채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이수흥 선생


10월, 본격적으로 가을이 찾아온 듯 쌀쌀한 날씨가 마음을 에워싸는데요. 먼 타지에서도 조국만을 위해 모든 일생을 바쳤던 10월의 독립운동가, 심호 채상덕 선생의 정신과 마음가짐을 기억하여 애국심으로 마음 따뜻해지는 한 달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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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석한 피우진 보훈처장과 각계 인사, 광복군동지 회원


지난 9월 14일(목)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에 많은 희생과 기여를 한 한국광복군을 기리기 위한 ‘한국광복군 창군 제77주년 기념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사)한국광복군동지회 주관으로 열린 이 날 행사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광복군동지회원을 비롯하여 많은 시민이 참석했습니다.


▲ 축사를 하고 있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 민족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광복군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김구 선생이 발표한 <광복군 선언문> 중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서 한국광복군 을 창설했습니다. 이 날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의 이름으로 발표된 한국광복군선언문에는 일제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ㆍ일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틀 뒤인 12월 10일,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1943년부터 1945년에 걸쳐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고, 이후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ㆍ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광복군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며, 1942년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본이 패망의 길로 접어든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훈련시켰습니다. 


▲ 기념사를 하고 있는 이영수 한국광복군동지회장


이날 행사에 참석한 많은 인사들은 광복군의 공헌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연단에 선 이영수 (사)한국광복군동지회장은 기념사에서, “한국독립군 창군 이념인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대의정신이 조국통일을 평화롭게 이루는 유일무이한 길이며, 이번 행사가 그런 의미로 승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축사에서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본받고 애국이 정당하게 보상받는 보훈이 시행되어야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며, “관계자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번 행사가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 기념식 합창공연


기념사와 축사에 이어 광복군 창군 선언문 낭독, 만세삼창이 있었습니다. 2부에서는 ‘한국광복군 창군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한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 기념식 합창공연


이번 행사를 통해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들의 노고와, 자주적인 애국정신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앞으로도 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계승하여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했던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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