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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100년이 넘는 근대사를 겪어온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의 창영초등학교는 긴 시간 동안 선배들과 후배들의 강한 정신력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통하여 애국정신을 온몸으로 나타내주었고, 그들의 귀한 노고를 보존해왔습니다. 그리고 1965년, 위급한 상황에서 희생정신을 발휘한 호국영웅이 흉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故 강재구 육군 소령의 이야기를 훈터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인천 창영초등학교 입구 및 현관 모습


1907년 5월 6일 개교한 창영초등학교는 현관의 모습 또한 한국의 초기의 근대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음은 물론, 건물의 보존 상태도 양호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앞에 큰 운동장이 있었고, 왼쪽 언덕을 올라가면 현관과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가 있었는데요.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가는 과정에서, 인천에서는 그 당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현 인천 창영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키고 일부 주동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야간에 교무실과 경찰서 간의 전화선을 절단한 이유로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광복 후에도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지내게 되는 등 그저 그들의 희생이 잊혀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애국심 발휘의 전통을 살리고자 당시의 고증자료 수집과 재판 기록문을 압수, 그리고 선배님들의 뜻깊은 애국정신을 길이 빛내고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나라를 사랑하자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1995년 3월 6일 총동창회에서 세운 기념비라고 합니다.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 모습


그리고 기념비의 옆에는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강재구 육군 소령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강재구 육군 소령 흉상 모습 및 비석


故 강재구 육군 소령은 1937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인천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전 참전을 목전에 둔 1965년 10월 4일 순직하였습니다. 강재구 육군 소령은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되었는데요. 출발 직전, 부하들의 수류탄 투척훈련 중 한 사병이 앞으로 던져야 할 수류탄을 뒤로 추켜들다가 놓침으로써, 그 수류탄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사병들 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강재구 육군 소령은 터지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짧은 순간, 강재구 소령은 수류탄을 끌어안아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고 산화했습니다. 그의 나이 28살에 불과했던 때였습니다. 만약 그 수류탄이 폭발했더라면 수많은 사병들이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해낸 영웅이었습니다. 저는 이 분이 우리가 존경하고 기억해야 할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강재구 육군 소령을 흉상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리는 학교의 모습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기사를 마치며, 우리가 추모하고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이 기억에서 잊혀지는 일은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나라를 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사회는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 국민과 자라나는 아이들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을 위한 시작은, 과거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놓아 외쳤던 순국선열과, 강재구 소령처럼 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호국영웅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에서부터일 것입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기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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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프랑스에는 백년전쟁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치며 화형을 당한 잔 다르크가 있다. 프랑스에 잔 다르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에 청춘을 바친 유관순이 있다. 오는 9월 28일 유관순 열사의 추모식을 맞아 한국 독립에 꽃다운 청춘을 바친 유관순 열사와 3·1운동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1운동은 당시 존재하던 종교들이 뜻을 모아 진행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에 가담했던 종교 중 하나가 기독교인데, 유관순의 집안이 기독교집안이라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에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의 3·1운동에 대한 참여는 집안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다. 


열사가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시절 같이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보각스님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는 의협심이 강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종교가 아닌, 고종의 서거와 대한 독립에 대한 스스로의 염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외에 여러 명의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독립문 앞에서 고종의 서거를 애도한 후 3.1운동 중간에 합류하였다. 이때 유관순 및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이 함께 했는데 이를 ‘5인의 결사대’라고 부른다. 


3·1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붙잡혔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몇몇 사람들이 유관순 열사가 이때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때 유관순 열사는 금방 석방되고 고향인 충청남도 목천군(현재의 천안시)으로 내려간다. 



고향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아버지 및 마을 사람들과 상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병천독립만세시위(아우내 독립만세운동)를 계획하였다. 이 병천만세운동은 훗날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3·1운동인 동시에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립운동으로 남게 된다. 이 운동은 평화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일찍부터 발포를 명령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중상을 입게 만들었다. 이 운동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해 19명이 사망하고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병천만세운동은 미국의 신한민보에도 실리게 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은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에 많은 수감자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형무소 밖으로 만세운동이 퍼져나갔다. 그때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당했고, 유관순 열사 또한 어린 나이에 모진 고민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19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당시 양친이 사망했기 때문에 유관순 열사의 오빠와 이화학당 선생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후 장례식은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지냈다.




열사 사망 후에도 일제는 유관순 열사를 견제했다. 일제는 유관순에 대한 함구령을 내렸고 가족들을 고향에서 추방하였다. 때문에 해방 할 때까지 유관순의 활동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일제의 방해로, 자칫 우리 후손들이 유관순을 모른 채 현재를 살아가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인덕 선생에 의해 극적으로 유관순의 활동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박인덕 선생은 유관순 열사가 나온 이화여고 교장으로, 열사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 인물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운동의 기반을 다졌던 민족 대표 33인 중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의해 친일활동을 전개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평화적인 독립운동으로 저항하였다. 19세라는 그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일제에 굴하지 않으며 반일시위를 주동한 그녀는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서 꽃다운 청춘으로 남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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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을 이끌었고,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옥중 순국한 유관순 열사. 그녀를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와 의연한 태도는 지금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을 향한 의지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요.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올케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을 보면, 그녀의 집안이 얼마나 뜨거운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순국 96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 가족 관계도를 통해서 유관순 家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3•1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 




1902년 12월 16일, 현재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유관순 열사. 열사는 1918년 봄,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해 선진학문을 배워나갔습니다.


평범한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1919년 1월 22일, 고종의 서거 이후로 한 명의 학생에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벌어진 3•1만세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당시 시위행렬은 이화학당 교문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고, 열사는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의 친구들과 함께 시위 행렬에 합류해 대한민국 만세를 함께 외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인 3월 5일, 학생단 주도 아래 진행된 제2차 대규모 만세 운동에도 참여했다 구금되었지만 이화학당 당국의 교섭으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학교 휴교령이 내려진 뒤 고향에 내려간 뒤,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옥중 순국하였고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집안, 유관순 家

유관순 열사의 집안은 천안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 본인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柳愚錫),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柳濟敬), 종조할아버지 유도기(柳道基)로 총 8명이죠. 



당시 신식문물을 받아들인 개화인사였던 아버지 유중권은 향리에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유종권은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동생 유중무•조인원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를 계획했고, 만세운동 도중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제도 아우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녀는 헌병의 총검에 찔려 남편이 죽자 더욱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했고,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아버지, 어머니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면,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은 1919년 4월 1일 공주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유우석은 공주 장명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공주 만세운동에서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6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때, 유우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유관순 열사와 가슴 아픈 상봉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우석은 출옥 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과 결혼하였으며,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올케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유관순 家, 올해 9월 28일은 유관순 열사의 순국 96주기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가 오전 11시에 진행됩니다. 이 날을 맞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천안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와 그녀와 같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유관순 家 사람들을 꼭 기억해주세요! 


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열사와 그의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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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찬희 기자

    2017.06.29 1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관순 수형자 카드에는 정동여고 던데 어떻게 이화학당이 되죠? 국가에서 발행한 기록에 오류가 있어서야.. 그러니 유관순 조작설 주장하는 이가 나오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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