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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들 국가보훈처 기자단 주하늘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제99주년을 기념해 열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에 다녀왔습니다. 


▲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 입구


이번 특별기획전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열렸습니다.

특별기획전은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국회의원회관 로비 2층에서 진행되었고 사진자료 50점, 실물자료 15점이 전시되었습니다. 


▲ 3월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개막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있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3월 26일, 이 특별기획전 개막식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축사에서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대해, “정부에서는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과 일제강점기 수형기록 전수조사, 국외 사적지 실태조사 등을 조속히 추진하여 3.1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2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특별 전시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익숙하지만 둘의 연관성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대표는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이고, 우리민족은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3.1만세운동은 수개월 간 이어졌고, 이후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한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선열들이 중국 상해로 집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9년 4월, 최초의 민주공화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는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 1919년 8월 21일 창간된「독립신문」상해판 창간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임시정부가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발행한 독립공채 실물자료


임시정부의 위기와 한인애국단


 1920년대에 임시정부는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며, 1931년에는 일제의 술책으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이 충돌한 사건인 만보산 사건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는 특무공작대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의거를 실행했습니다. 


 ▲ 이봉창 의사의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모습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일왕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합동으로 열린 홍구 공원에서 투탄의거를 일으켜 일본군 사령관 등을 처단하였습니다. 이 의거는 곧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중국이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인애국단원들은 일제의 수탈기관을 파괴하거나 침략에 앞장선 사람들을 처단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랜 세월, 독립을 열망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2018년, 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9주년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였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위대한 역사입니다.



* 자료 출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

독립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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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많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분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쳤는데요.

 

▲ 중국 서안 인근에 있는 한국광복군 기념비

 

기나긴 36년의 일제강점기 끝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의 내용처럼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 광복의 날에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이하 현충원)에서는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광복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순국선열의 충의 및 위훈을 기리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겨례얼마당 도로변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담은 사진, 만남의 집 1층 전시실에서는 현충원의 초창기 모습 및 추모행사 등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국립 서울 현충원 전경

 

먼저 저는 호국보훈의 성지, 현충원의 옛 모습을 보기 위해 만남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만남의 집은 현충원 정문에서 약간 왼쪽에 위치해 있는데요. 식당과 매점, 꽃집이 있어 만남의 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1층에 들어서자, ‘국립 서울 현충원 옛 사진 전시’라는 팻말과 함께 현충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1967년 진행된 제12회 현충일 추념식 관련 사진들이 있었는데요. 당시 추념식 광경과 더불어 50여 년 전의 현충원의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 국립 서울 현충원 옛 사진 전시를 알리는 안내판

 

▲ 흑백 사진 속 제12회 현충일 추념식 모습

 

다음으로 저는 현충문에서 약간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겨례얼마당 우측 도로변을 걸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현충원 정문인 종합민원실까지 총 45점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이 사진들은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그들이 남긴 문서 등으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 전 함께 찍은 사진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 철기 이범석 장군의 훈시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철기 이범석 장군의 훈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요. 제가 작년 이맘때, 국가보훈처 주최 국외사적지 탐방으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활약한 곳들을 다녀왔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았습니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조선의용군의 전신인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도 있었습니다.

 

또 '독립신문'의 사진도 흥미로웠습니다. 순한글판과 영문판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서재필 선생은 여기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당시의 신문

 

위 사진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입니다.

 

▲ 현재 중국에 있는 조선의용군 석정 윤세주 열사의 묘

 

지난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72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 순국선열 분들의 기쁜 눈물인 듯 전국에 비가 내려 대한민국 전역을 적셨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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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국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갈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 독립선언서 中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3.1운동에서 낭독되었고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독립선언서는 어디에서 인쇄되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ㆍ배포하고,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 (출처 : 태안군)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고 불릴 정도로 영특하여 온 마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일찍이 학문을 익혀 15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1882년 8월, 이종일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선생은 유교사상을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있었던 선생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고, 1898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1898년, 선생이 중추원 의관을 지내고 있을 때의 대한제국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워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세계 열강들의 침략에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 이종일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10개월 말에 의관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이종일 선생은 인재양성이 국력을 키우는 힘이라 생각하여 민영환 선생 등과 함께 1898년에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진작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신문 (출처 : 위키백과)

 

특히 이종일 선생은 실학운동의 재현수단으로, 언론에 선생의 사상을 전개해 갔는데요. 1898년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뎨국신문 (출처 : 샘이 깊은 물 블로그)

 

이종일 선생은 1910년까지 10여 년간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민중의 개화와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선생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요. 필화사건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 필화 : 언론매체 등에 당시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불이익을 받는 것을 뜻함.)

 

그러던 중 1919년 1월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는데요. 이후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자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이 높아져, 적대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기운이 감돌던 2월,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의 항일운동진영들은 종교 단체들과 유림, 학생 진영과 연합하여 거국적인 구국시위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독립선언식에 관한 계획을 듣게 된 이종일 선생은 자신도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고, 2월 20일부터 그가 사장으로 있던 수송동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인쇄소 안에서 선생은 공장 감독 김홍규, 보성사 총무인 장효근, 신영구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한 장 한 장 평판인쇄기에 찍어 냈습니다. 그렇게 인쇄된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는 각계의 동지들에게 돌려졌습니다.

 

▲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 (출처 : 쇼콜라 블로그)

 

2월 28일 밤, 민족대표 33인은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생 역시 민족대표로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이종일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이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된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 이종일 선생과 보성사 직원들이 선언한 자주독립선언문

 (출처 :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도 이종일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세웠는데요. 1922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그때 낭독할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 김홍규 선생에게 인쇄하도록 지시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사전에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종일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평생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동상 (출처 : 태안군)

 

8월 31일(목), 옥파 이종일 선생의 서거 92주기를 기해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에서 추모제향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청껏 부르짖었던 때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이면에는 이종일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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