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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많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분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쳤는데요.

 

▲ 중국 서안 인근에 있는 한국광복군 기념비

 

기나긴 36년의 일제강점기 끝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의 내용처럼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 광복의 날에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이하 현충원)에서는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광복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순국선열의 충의 및 위훈을 기리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겨례얼마당 도로변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담은 사진, 만남의 집 1층 전시실에서는 현충원의 초창기 모습 및 추모행사 등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국립 서울 현충원 전경

 

먼저 저는 호국보훈의 성지, 현충원의 옛 모습을 보기 위해 만남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만남의 집은 현충원 정문에서 약간 왼쪽에 위치해 있는데요. 식당과 매점, 꽃집이 있어 만남의 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1층에 들어서자, ‘국립 서울 현충원 옛 사진 전시’라는 팻말과 함께 현충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1967년 진행된 제12회 현충일 추념식 관련 사진들이 있었는데요. 당시 추념식 광경과 더불어 50여 년 전의 현충원의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 국립 서울 현충원 옛 사진 전시를 알리는 안내판

 

▲ 흑백 사진 속 제12회 현충일 추념식 모습

 

다음으로 저는 현충문에서 약간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겨례얼마당 우측 도로변을 걸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현충원 정문인 종합민원실까지 총 45점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이 사진들은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그들이 남긴 문서 등으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 전 함께 찍은 사진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 철기 이범석 장군의 훈시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철기 이범석 장군의 훈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요. 제가 작년 이맘때, 국가보훈처 주최 국외사적지 탐방으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활약한 곳들을 다녀왔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았습니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조선의용군의 전신인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도 있었습니다.

 

또 '독립신문'의 사진도 흥미로웠습니다. 순한글판과 영문판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독립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서재필 선생은 여기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당시의 신문

 

위 사진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입니다.

 

▲ 현재 중국에 있는 조선의용군 석정 윤세주 열사의 묘

 

지난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72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 순국선열 분들의 기쁜 눈물인 듯 전국에 비가 내려 대한민국 전역을 적셨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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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국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이 스스로 생존하는 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명함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갈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지니라.

 


- 독립선언서 中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3.1운동에서 낭독되었고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독립선언서는 어디에서 인쇄되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ㆍ배포하고,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 (출처 : 태안군)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고 불릴 정도로 영특하여 온 마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일찍이 학문을 익혀 15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1882년 8월, 이종일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선생은 유교사상을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있었던 선생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종일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고, 1898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1898년, 선생이 중추원 의관을 지내고 있을 때의 대한제국은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워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세계 열강들의 침략에 국내 정세가 어려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 이종일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10개월 말에 의관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이종일 선생은 인재양성이 국력을 키우는 힘이라 생각하여 민영환 선생 등과 함께 1898년에 흥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진작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신문 (출처 : 위키백과)

 

특히 이종일 선생은 실학운동의 재현수단으로, 언론에 선생의 사상을 전개해 갔는데요. 1898년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뎨국신문 (출처 : 샘이 깊은 물 블로그)

 

이종일 선생은 1910년까지 10여 년간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민중의 개화와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선생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요. 필화사건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 필화 : 언론매체 등에 당시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불이익을 받는 것을 뜻함.)

 

그러던 중 1919년 1월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에, 수많은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는데요. 이후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자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이 높아져, 적대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의 기운이 감돌던 2월,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고무된 국내의 항일운동진영들은 종교 단체들과 유림, 학생 진영과 연합하여 거국적인 구국시위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독립선언식에 관한 계획을 듣게 된 이종일 선생은 자신도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고, 2월 20일부터 그가 사장으로 있던 수송동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인쇄소 안에서 선생은 공장 감독 김홍규, 보성사 총무인 장효근, 신영구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한 장 한 장 평판인쇄기에 찍어 냈습니다. 그렇게 인쇄된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는 각계의 동지들에게 돌려졌습니다.

 

▲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 (출처 : 쇼콜라 블로그)

 

2월 28일 밤, 민족대표 33인은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생 역시 민족대표로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이종일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이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된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 이종일 선생과 보성사 직원들이 선언한 자주독립선언문

 (출처 :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도 이종일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세웠는데요. 1922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그때 낭독할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2월 20일에 직접 작성, 김홍규 선생에게 인쇄하도록 지시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사전에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종일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평생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 옥파 이종일 선생 동상 (출처 : 태안군)

 

8월 31일(목), 옥파 이종일 선생의 서거 92주기를 기해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에서 추모제향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청껏 부르짖었던 때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이면에는 이종일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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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송 장덕준 선생


추송 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명신중학교에 진학, 1911년에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2년간 일했습니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며 조만식, 김동원, 이덕환 등 평양의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장덕준 선생은 1920년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습니다.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필명 ‘추송’)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으로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의 여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장덕준 선생은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1920년 7월말,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정간처분(발행정지)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장덕준 선생은 ‘신문은 정간 중에 있지만 기자의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며, 보도할 지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학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10월 중순, 간도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 선생은 간도 용정에 이르러 여관에 여장을 풀고, 일본군 헌병대장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추궁하고 힐책합니다. 일본군측은 당연히 그러한 일이 없다고 부정하면서 후일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여관으로 돌아와 취재 중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선생은 일본인 두세 명에 불려 나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이날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1921년 10월 28일자)은 「장덕준씨 조난논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생이 일본군에게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 장덕준 선생 (출처: 정진석 제공)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면서 장덕준선생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리고 본받자는 취지로 기념 메달의 뒷면에 선생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 청년지사로서 일본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대한민국 언론인 추송 장덕준 선생. 평생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고 일본에 의한 동포 학살의 참극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던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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