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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일제강점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분들이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분은 조금 색다른데요, 바로,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향화 선생입니다.  


얼핏 생각했을 때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김향화 선생이 어떤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김향화 선생


▲ 김향화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김향화 선생


김향화 선생은 1897년 7월 16일 서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향화라는 기명을 갖고 이름 높은 기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승하하자 김향화 선생과 수원의 기생들은 소복에 나무비녀를 꽂고 대한문에 도착해서 슬픔을 토로하는 곡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매일신보에 생생하게 기록되었습니다.


▲ 화홍문


또한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지역 기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수원의 기생들은 수원의 화홍문 근처에 살았고, 이곳에 수원예기조합이 있었습니다.

김향화 선생의 주도 아래 수원예기조합 기생 30여 명은 몰래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9일로 시위의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 자혜의원이 있던 봉수당 (출처: 독립기념관)


▲ 자혜의원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29일은 김향화 선생과 동료 기생들이 자혜의원에서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조합의 기생들은 김향화 선생을 필두로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습니다. 이후 자혜의원에서 만세를 외쳤고, 다시금 수원경찰서에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 김향화 선생 관련 매일신보 기사


이 사건으로 김향화 선생은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고를 치른 이후 선생의 활동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습니다. 선생의 대통령 표창은 현재 수원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수원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대통령 표창장


저는 화홍문에서 자혜의원이 위치했던 화성행궁까지의 길을 자주 걷습니다. 이전까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별 생각 없이 걸어 다녔던 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 길을 걸어가면서 만세운동을 위해 김향화 선생은 어떠한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걸었는지, 항상 걷던 길에서 다른 생각을 해봤습니다.


일제 권력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찰서로 향했던 김향화 선생선생. 그 길에서 선생은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그 길을 한발 한발 의연하게 걸어갔을 선생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평소에 걸어가는 길에도 혹은 지나쳐가는 일상에도 독립운동가들의 흔적과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분들의 모습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걷던 길도 자세히 바라보면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 얽힌 독립, 호국, 민주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소 살아가는 일상은 과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김향화 선생을 알게 된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선생을 일상 속에서 기억하며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향화 선생에 대해서 알아본 경험은 우리의 ‘일상’을 지켜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도 일상에서 그분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

국가기록원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 · 국가수호 사적지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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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차정 의사의 캐리커쳐.

무장투쟁에 힘썼던 선생답게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대부분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곤 하는데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돌이켜보건대,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 저는 훈터 독자 여러분께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일평생을 바친 박차정 의사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매년 5월, 부산에서는 박차정 의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열립니다. 또한, 부산에는 박차정 의사가 생전에 살았던 집과 동상이 있어 그의 얼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박차정 의사의 생가에서 느껴본 선생의 삶과 정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박차정 의사 (출처:독립기념관)


저는 들뜬 마음에 박차정 의사의 생가에 이른 아침에 도착하였으나, 개관시간이 오전 10시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니 참고해주세요.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의사의 생가는 예상외로 소박한 건물 한 채였습니다. 아담한 방 안 곳곳에서 박차정 의사의 나라를 사랑하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 골목을 지나면 바로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보인다.

▲ 박차정 의사의 생가


생가에서는 박차정 의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선생의 집안이 독립운동 집안이었다는 것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1910년 부산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박 의사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할 정도로 항일의식이 강했던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 김두봉과 친척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오빠 박문희 선생도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고 합니다.


▲ 생가의 내부. 일가의 사진이 보인다.

▲ 박차정 의사의 부모님


 선생은 부산지방 여성교육의 산실이자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래일신여학교에 다니며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였습니다. 1927년 항일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한 근우회가 결성되자 선생은 이 단체에서 활동을 주도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습니다. 


▲ 박차정 의사의 모교인 동래여자고등학교


1930년, 박차정 의사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둘째 오빠 박문호 선생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합니다. 그러던 중 의열단의 수장인 김원봉과 결혼을 하게 되며 더욱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선생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선도하고 여자부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박차정 선생은 민족혁명당의 요인으로 활약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과 관련된 활동을 하며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장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선생은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에 온 평생을 바쳤습니다.


▲ 부산 만남의 광장에 있는 박차정 의사 동상


이렇듯 무장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박차정 의사는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5세의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박차정 선생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선생의 투신으로 제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박차정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 박차정 생가에 걸려있던 액자.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자는 글귀가 적혀있다


박차정 선생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두 가지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요. 그 첫 번째는 흔들리지 않았던 굳센 의지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던 여성이었음에도 독립운동과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위해 힘썼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여러 국가에서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한되어있는데요.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전부터 여성의 활동이 제약받는 상황에서도, 여성의 사회 평등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쓴 선생의 행동은 정말로 용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글쓰기 솜씨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동래일신여학교 재학 시, 교지 <일신>에 자신의 항일의식과 시대에 대한 인식을 표출하는 문학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민족전선>에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에 관한 글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박차정 선생은 자신의 훌륭한 글 솜씨를 바탕으로, 때로는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발휘하여 글을 통해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힘썼습니다.


부산의 조숙한 문학소녀

경술국치 치욕의 날 자결한 아버지 뒤를 이어

타오르던 항일 투지 끝내 의열단 투신했었지


이 시구는 이윤옥 시인이 박차정 의사의 삶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시의 일부인데요. 박차정 선생과 그 일가의 나라를 위한 헌신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일제의 압박과 주변의 어려운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 숨 쉬던 35년의 시간을 오로지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박차정 의사. 그 숭고한 뜻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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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은 독립운동부터 6.25전쟁까지 국가수호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은 학생들의 주도로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금 되살린 6.10만세운동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 6.10만세운동이란?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출상일)을 계기로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6.10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의 뒤를 이은 전 국민, 전 민족적 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학생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 순종의 상여를 둘러싼 군중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침체되었던 1920년대 독립운동


3.1만세운동 당시 우리 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족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독립운동의 방점을 찍은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한층 더 교묘하게 우리 민족을 탄압했습니다.


서구열강의 소극적인 원조와,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일제의 대토벌, 그리고 임시정부의 내부불화로 1920년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상당히 침체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다


이렇듯 독립운동이 침체된 상황에서 민족의 미래를 밝힌 것은 바로 학생들이었습니다. 노총계(勞總系), 전문학생 중심의 사직동계, 중등학교 학생중심의 통동계의 학생들이 힘을 모았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연희전문학생들이 만세운동을 결의, 6.10만세운동를 계획합니다. 


▲ 6.10만세운동 관련 기사 (출처: 독립기념관)



▲ 순종의 인산일 당일 일제경찰의 감시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결의한 뒤 격문 1만 여장을 인쇄하였습니다. 이어 중앙고보, 중동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6월 10일 인산일에 학생 2만 4천명이 모였습니다. 중앙고보 학생 300여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군중들도 이에 응답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펼쳐졌습니다.


▲ 시위 참여자를 검속 중인 일제경찰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의 토양이 되다


6.10만세운동은 침체되었던 1920년대의 독립운동을 다시금 일어서게 만드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6.10만세운동의 경험으로 우리 민족은 3.1운동 이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기록되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 6.10만세운동, 오늘의 이정표가 되다


학생들의 힘으로 일구어 낸 6.10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6.10만세운동 92주년 기념식’이 6월 8일 오전 서울 중앙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중앙고등학교(교장 김종필)가 주최한 기념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6·10만세운동 유족대표 이원정님을 비롯한 중앙고등학교 학생 등 700여 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습니다.


▲ 중앙고교 내 세워진 6.10만세운동 기념비 (출처: 독립기념관)


▲ 서울 종로에 위치한 중앙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제92회 6.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있다.


이 날 기념식에서는 ‘독립군가 플래시몹’, ‘역사골든벨’이라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며 6.10만세운동을 생생히 체험하는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기념식 후에는 1920년대 당시 6.10만세운동이 펼쳐졌던 돈화문, 종로3가역 일대에서 6.10만세운동 거리재현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 중앙고등학교에서 진행된 6.10만세운동 92주년 기념식


우리 민족의 가슴에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준 6.10만세운동. 92주년을 맞이한 6.10만세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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