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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 1930년 장진홍 의사, 순국하기 전 옥중에서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10월 18일, 여러분들은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장진홍 의사가 대구에서 폭탄의거를 실행에 옮긴 지 90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장진홍 선생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있을 듯한데요. 장진홍 선생은 경북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하고 제2의 의거를 준비하다 피체된 인물입니다. 


#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까지


▲ 장진홍 선생 (출처: 네이버캐스트)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난 장진홍 선생은 어려서부터 애국계몽운동가 장지필 선생의 가르침 아래 구국항쟁과 애국심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1914년 3월, 선생은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였으나 일제 치하에 있던 군대에 복무한다는 것이 더 이상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1916년에 제대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장진홍 선생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는데요. 이때, 향리 출신인 이내성의 권유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점점 강화되는 일경의 감시에 광복단 활동을 이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장진홍 선생은 그 곳에서 조선광복단 소속 이국필, 김정묵 등과 교류하며 보다 과감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명을 규합해 군내 내무서 보병조전을 설치하고 몇 달 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심화된 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해 활동하기 어려워져 장진홍 선생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고국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장진홍 선생이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학살하고 진압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진홍 선생은 이 사실을 세계 만방에 알려야겠다고 판단, 동생을 설득해 땅 약 천 평을 팔아 목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서적 행상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만행을 낱낱이 적어 경북 출신 승무원 하사관 김상철에게 조사서를 전달하며 그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해 줄 것을 요청하였죠.


# 폭탄 전문가를 만나 폭탄의거 계획을 세우다


1927년 4월경 장진홍 선생은 광복단 동지 이내성의 소개로, 폭탄전문가인 일본인 굴절무삼랑(掘切茂三郞)을 만나게 됩니다. 장진홍 선생은 그에게서 확보한 폭탄을 가지고 일제의 관공서, 은행 등의 공공기관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선생은 폭탄의거를 위해 추가적으로 폭탄을 더 확보하는 한편, 함께 의거를 추진할 동지들을 규합하고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선산의 산중 협곡에서 폭파 시험을 해 보는 등 폭탄의거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해 10월 17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그는 그동안 결심했던 폭탄 의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계획인 자동차를 통한 폭탄 투척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방법을 바꾸어 폭탄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거를 실행하기로 했죠. 다음 날인 10월 18일 아침, 장진홍 선생은 인근 상점의 점원으로 위장하여 의거지 주변 한 여관에 잠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관 사환에게 벌꿀선물 상자로 위장한 폭탄을 건네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의 순서대로 급히 배달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출처: 국가보훈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예정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도착한 사환은 어떤 사람의 선물이라며 벌꿀선물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선물을 받은 일본인 은행원은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전달한 벌꿀선물상자에서 화약 냄새까지 나자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죠. 상자를 개봉한 은행원은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 은행 밖으로 이 상자를 급히 옮겨두었습니다. 이내, 은행 주변에는 큰 굉음과 함께 파편이 튀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은행원, 경찰관 등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전파되었습니다. 이 유리 파편은 인근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위의 전선이 모두 끊어지는 등 실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습니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하던 사환을 급히 체포해 폭탄 운반 경위를 조사하고 장진홍 선생이 묵었던 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장진홍 선생은 이미 변장하여 피신한 상태였고, 난감해진 일경은 경북 지역의 의심 가는 인물들을 모두 수색하고 검거하는 등 조사에 박차를 가했지만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경은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악독한 고문을 자행하여 자백을 받아 진범으로 꾸미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일로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이원록 선생이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죠.


▲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제2의 거사의 준비, 그리고 일경에 체포된 장 의사


한편, 자신이 의도한 폭탄 의거가 뜻대로 성사되지 못함을 알게 된 안 장진홍 선생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제2의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927년 11월 안동군에 있는 친족 장용희를 설득하여 안동의 경찰서, 은행을 폭파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1928년 1월 20일, 장용희를 대신하여 폭탄을 투척할 사람을 찾아 폭탄을 다시 투척하기로 계획했으나 일경의 수사망이 점차적으로 좁혀져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선생은 그해 2월경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일제의 중의원 및 경시청에 폭탄을 투척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오사카에 거주하는 동생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경에 의해 장 의사의 동생이 수 년 전 일본에 건너가 있다는 소식을 입수한 상태였죠. 결국 장진홍 의사는 동생의 집을 포위하고 있던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2월 19일 대구에 압송된 의사는 일경의 심문에 자신의 거사 일체를 시인하는 한편 “일제가 한국을 독립시켜주지 않는다면 일본이 멸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와 폭탄을 던진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라고 크게 호통친 다음 “한국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광복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 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꾸짖는 등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또한 모진 고문에도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만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피체된 지 반년 만인 1930년 2월 17일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습니다. 그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역시 사형이 언도되자 의사는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은 다음 품에 간직하고 있던 돌을 꺼내 재판장을 향해 던지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삼창한 다음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사형이 확정된 장진홍 의사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자고 결심하고 1930년 6월 5일(음) 무더운 여름밤에 자결 순국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경북 칠곡군 석적면 남률의 한 언덕에 매장되었습니다. 친족이나 동지들조차 영결 장소에 입회하지 못한 무덤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15년간 그의 무덤 곁을 지나는 행인들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옷깃을 여며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순국의사 장진홍 선생 기념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 소재)

(출처: 국가보훈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10월 18일(수) 오전 10시 경북 구미의 왕산허위기념관에서, <장진홍 의사 대구 의거 90주년 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각계인사,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하여 장진홍 의사의 불굴의 항일정신을 되새겼는데요.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와 독립의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들도 장진홍 의사를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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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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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의 고향입니다. 때문에 추념비나 생가 등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많은 장소들이 경주 지역 내부에 있는데요. 그러나 시내권에 비해 시외권은 교통의 문제로 찾아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이 어려운 교통 여건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에 선선해지는 가을 날씨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의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떠나고자 합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고운모래해변


경주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경주시 감포읍에는 두 명의 독립운동가 생가가 있습니다. 감포읍 팔조리에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 나정리에는 김봉규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요.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감포읍으로 가는 버스는 100번과 100-1번 버스 두 대입니다. 버스는 약 30여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정내영선생의 생가는 노동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하며, 김봉규 선생의 생가는 전촌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합니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이후 김봉규 선생의 생가로 가는 것으로 여정을 잡았습니다.


▲정내영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는 감포읍 팔조리 268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에 도착하고 보니 산에 둘러싸인 주변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정내영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20년 4월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시 임시정부 군자금을 추적하던 의령경찰서 갑비(甲斐)라는 일본 순사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지인 김종철이 순사를 사살했고 선생과 함께 도피하였는데요. 그 후 정내영 선생은 일제 순사 갑비(甲斐) 사살사건에 연루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지만 출옥 후에도 비밀리에 중국과 국내를 다니며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61년 4월 23일에 생을 마감했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봉규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127에 위치한 김봉규 선생의 생가인데요. 앞서 찾은 정내영 선생의 생가와는 또 다르게 산림이 아닌 감포읍 바다 인근에 있었습니다.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도로변에 있어서 찾아가기 더 수월했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1920년 송두환, 최윤동, 이수영 등 다수의 동지와 함께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이와 더불어, 경상남도 합천과 의령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의령경찰서의 일본 순사 갑비(甲斐)가 김봉규 선생과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하게 되는데요. 그 후 선생은 송두환, 정동석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광복을 맞이하고 1968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단 한 가지의 소망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광복을 맞이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절히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순국선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내영, 김봉규 두 독립운동가의 고향, 경주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 자료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https://goo.gl/ApFq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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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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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광화문 연가 / 이문세-


덕수궁(경운궁) 돌담길은 노래 가사로 쓰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입니다. 한적한 고궁의 돌담에서 뿜어져 나오는 운치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늘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곤 하죠. 선선한 가을 날씨에 심취한 필자도 홀로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덕수궁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관광객과 시민들로 붐볐습니다.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된 후 고종이 경운궁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궁의 칭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은 ‘덕을 누리며 장수하라’는 의미로, 고종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덕수궁’으로 칭하겠습니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덕수궁(경운궁) -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이자, 가족의 나들이 명소인 덕수궁!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이곳의 ‘한 건물’이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바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이 건물’에서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어디냐고요? 도대체 모르겠다고요? 자, 저를 따라오시죠. 훈남훈녀와 함께 역사의 현장, 덕수궁의 중명전으로 떠나 봅시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와 잠시 걸어가면 덕수궁이 보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그 시간, 마침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었는데요. 황실의 위엄과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아, 잠깐 ‘대한문(大漢門/덕수궁의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수궁 중명전은 별채 건물이라서 덕수궁 돌담 밖에 위치해 있거든요.


▲ 덕수궁 대한문의 모습.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고 있다.


운치 있는 돌담길의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정동극장이 나오는데요, 그 옆 골목으로 살짝 들어가시면 중명전 건물이 보이실 겁니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매력이 느껴지시나요?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 덕수궁 돌담길의 모습. 고풍스러운 모습과 가을 햇살이 사랑스럽다.


▲ 문밖에서 바라본 덕수궁 중명전. 마치 이웃집처럼 도심 속에 어우러져 있다. 

이처럼 역사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 덕수궁 중명전


▲ 덕수궁 중명전 전경


중명전(重明殿)은 1901년,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습니다.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인 것이죠! 원래 명칭은 ‘수옥헌(漱玉軒)’이었는데요.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중명(重明)’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대한제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고종의 마음이 담겨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전각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였습니다.  또,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에도 민간에 수차례 매각되는 등 순탄치 않은 역사를 겪었습니다. 2006년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 등기 되고, 2007년 2월에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포함되며 복원에 힘써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덕수궁 중명전의 내부 모습.


# 을사늑약 강제 체결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의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 

가운데에 앉아있는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1905년, 11월 17일 늦은 저녁, 일본 군대가 덕수궁(당시 경운궁)을 둘러쌉니다.


“생각건대 이 조약을 거부한다면, 체결하는 것 이상의 곤란한 경우에 처하여 불이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위와 같은 말로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궁 안팎은 경찰과 군인들로 인해 매우 삼엄했고, 대신들은 한 명 한 명 조약에 대한 동의를 강요받았습니다. 을사늑약은 무력으로 인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을사늑약문>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소사와 영사는 외국에 체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치 아니하고서는 국제적 성격을 띤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직접 황제폐하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광무 9년 11월 17일

외무대신 박제순(인)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인)


을사늑약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않은 조약이었습니다. 첫째, 각국의 통수권자가 조약체결 당사자에게 주는 ‘전권 위임장’이 없었습니다. 이 위임장이 없으면 조약체결 당사자들이 대표성을 지닐 수 없게 됩니다. 둘째, 대한제국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의 어새와 비준 절차 없이 날림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셋째, 일본에게만 지나치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넷째, 을사늑약문 원본에는 제목이 없으나, 일본이 국제사회에 공표할 때에는 임의로 “Convention(조약, 협약이라는 의미)”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호조약으로 위장했습니다. 


이렇게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힘의 논리 속에 을사조약의 불법성은 묵인되고,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을사늑약의 정황과 원문에는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과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점과 국제법을 어긴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1906년에 ‘프랑시스 레이’가 ‘국제공법’에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또, 이후 1935년과 1963년에도 국제법상으로 무효인 조약임이 재확인되었습니다. 


#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이후, 꺼져가는 대한제국의 불씨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상설 선생이 올린 상소-


▲덕수궁 중명전 내 제 3전시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의 모습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자주권이 위협받자 고종은 각국에 특사들을 파견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를 비롯한 각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외교공사들은 대한제국의 주권 유지를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청국 등 9개국 원수들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대한제국의 문제를 제소하라고 명했습니다. 


고종의 명을 받은 특사들도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점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논리가 지배하던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그들의 외침은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아쉽게도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우위가 국제적으로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활동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그를 강제퇴위 시킵니다.


 <친서>

(한국어 해석본, 실제로는 한문과 영어로 적혀 있다.)


대한제국 대황제는 삼가 절하며 러시아 대황제 폐하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귀국과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지내오며 여러 차례 두터운 위의를 입은 바,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어서 모름지기 정의로운 우의로써 우리를 돌보아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불의를 자행하여 1905년 11월 18일 강제로 늑약을 맺었습니다. 그 일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무대신이 조인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정부회의 운운하나 국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이며, 일본인들이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즉 이른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공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짐이 우러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응낙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번에 불법 조약으로 국체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 운운하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그것이 근거 없는 일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독립국이 이와 같은 불미스런 일로써 국체가 손상당하였으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즉시 공사관을 이전처럼 우리나라에 다시 설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이 사건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에서 공판에 부치려 할 때에 공사관을 우리나라에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도록 특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진실로 공법상 당연히 옳은 일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각별한 관심을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의 상세한 내용은 짐의 특별위원인 헐버트에게 하문하시면 남김없이 밝혀 줄 것이며 옥새를 찍어 보증합니다.


귀 폐하의 황심과 신민이 영원히 하늘의 도움을 받기를 엄숙히 축원하며 아울러 성체 평안하심을 희구합니다.


대한개국 515년 6월 22일

1906년 6월 22일

한성에서 이경(고종의 이름) 삼가 올림

<출처> - 중명전 팜플렛, 문화재청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주권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일반 민중들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친일내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잠식하는 여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계속된 일제의 마수 앞에 대한제국은 행정, 사법, 군사권까지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게 됩니다. 이후 한반도는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일제강점기를 맞게 됩니다. 


필자는 덕수궁 중명전을 보며 나라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다시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나라의 힘을 기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주 주말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중명전에 들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름다운 경치 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 docId=561267&cid=46656&categoryId=4665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0695&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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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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