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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8일은 고당 조만식 선생 순국 67주기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 국권 회복을 향한 심어준 분인데요. 뿐만 아니라 신간회 결성, 반탁운동 등 폭넓은 영역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조만식 선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만식 선생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여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고자 1905년, 23세 만학의 나이로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졸업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한 조만식 선생은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했습니다.


#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이후 조만식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의 초청으로 1913년,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였는데요. 2년 후에는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 포부를 가졌다는 점을 인정받아 교장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민족적인 긍지를 갖고 국산품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만식 선생은 교장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조직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 오산학교(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을 펼치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맡은 조만식 선생은 1922년 7월, 민족 경제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게 되고 각 지방에서도 지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교육 운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만식 선생은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1927년 2월, 선생은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발기했으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습니다.


▲ 물산장려운동 관련 인쇄물

(출처: 아이티탑부동산)


▲ 동아일보에 실린 물산장려운동 기사(출처: 동아일보)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만식 선생은 신간회 중앙 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12월 13일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선생은 해외에 있는 우리 국민의 권익 보호에도 힘썼는데요. 1931년 7월 만주에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자 동지들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중심으로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보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1932년에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신문사를 수습하고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부는 조만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조만식 선생의 노년 모습(출처: 뉴스천지)


▲ 조만식 선생 동상(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소재)


지난 10월 18일, 서울YWCA(서울 중구 명동)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순국 67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교육과 권익 보호에 평생을 바친 고당 조만식 선생. 일제에 항거하여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대항을 펼치신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선생을 담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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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의 고향입니다. 때문에 추념비나 생가 등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많은 장소들이 경주 지역 내부에 있는데요. 그러나 시내권에 비해 시외권은 교통의 문제로 찾아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이 어려운 교통 여건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에 선선해지는 가을 날씨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의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떠나고자 합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고운모래해변


경주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경주시 감포읍에는 두 명의 독립운동가 생가가 있습니다. 감포읍 팔조리에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 나정리에는 김봉규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요.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감포읍으로 가는 버스는 100번과 100-1번 버스 두 대입니다. 버스는 약 30여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정내영선생의 생가는 노동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하며, 김봉규 선생의 생가는 전촌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합니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이후 김봉규 선생의 생가로 가는 것으로 여정을 잡았습니다.


▲정내영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는 감포읍 팔조리 268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에 도착하고 보니 산에 둘러싸인 주변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정내영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20년 4월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시 임시정부 군자금을 추적하던 의령경찰서 갑비(甲斐)라는 일본 순사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지인 김종철이 순사를 사살했고 선생과 함께 도피하였는데요. 그 후 정내영 선생은 일제 순사 갑비(甲斐) 사살사건에 연루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지만 출옥 후에도 비밀리에 중국과 국내를 다니며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61년 4월 23일에 생을 마감했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봉규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127에 위치한 김봉규 선생의 생가인데요. 앞서 찾은 정내영 선생의 생가와는 또 다르게 산림이 아닌 감포읍 바다 인근에 있었습니다.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도로변에 있어서 찾아가기 더 수월했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1920년 송두환, 최윤동, 이수영 등 다수의 동지와 함께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이와 더불어, 경상남도 합천과 의령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의령경찰서의 일본 순사 갑비(甲斐)가 김봉규 선생과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하게 되는데요. 그 후 선생은 송두환, 정동석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광복을 맞이하고 1968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단 한 가지의 소망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광복을 맞이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절히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순국선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내영, 김봉규 두 독립운동가의 고향, 경주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 자료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https://goo.gl/ApFq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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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지난 기사 1편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가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려드렸는데요. 이번 기사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숙부, 사촌 및 조카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안중근의사의 숙부, 사촌 및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안중근 의사의 막내 숙부(작은 아버지) 안태순, 사촌동생 안명근, 안홍근, 안경근과 그의 아들들도 안중근 의사와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막내 숙부 안태순은 1919년 음력 3월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고, 동년 5월에는 서울 보신각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동생 안명근 선생은 어려서부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악군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했으며, 1911년 황해도 신천에서 일제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15년간 복역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습니다.


한편, 105인 사건이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는데요, 이 105인 사건의 발단은 안명근 선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안명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이후 매국노 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는데요, 군자금을 주기로 약속했던 사람의 밀고로 1910년 12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 등 160여명을 체포하는데, 이를 「안악사건」이라고 합니다. 이후 1911년 1월에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했다고 해서 양기탁 등 신민회 중앙간부들을 체포 투옥하였는데요, 이는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민회가 일제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했다고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검거하고, 이미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투옥된 신민회 간부들을 재기소하여 최종적으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하였는데요,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안명근의 해서교육총회 교사와 학생들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안명근의 해서교육총회 교사와 학생들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안명근 선생의 동생 안홍근은 1918년 4월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고, 같은 해 8월말 경에는 독립군의 일원으로서 노령 이만과 연해주 일대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22년 1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였습니다.


또한 여동생 안익근 여사의 남편 최익형 선생은 신민회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는데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신민회 회원을 일제히 검거할 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21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안악에 거주하고 있던 백범 김구선생 가족의 중국 망명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안경근 선생 역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데요. 1918년 안중근 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해삼위로 가서 박은식·안정근·신채호·이범윤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을 보좌하여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동지들의 권유로 노주군관학교와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독립투쟁의 역량을 저해·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의 통합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0년에는 상해로 다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32년 낙양군관학교가 세워지자 이곳에서 직접 학생들을 훈련시키면서 군관생도 모집에도 주력하였으며, 이후에는 애국단․한국독립군특무대 조직, 임시정부 의정원 및 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계속 참여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장근의 장남 안봉생은 1927년 김좌진 장군의 위촉을 받아 독립투사 양성과 계몽활동을 벌였으며, 1935년에는 임시정부 김구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자 당숙인 안정근․안공근의 특명을 받고 만주에서 반만 항일전선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습니다.


또한, 동생 안춘생도 1936년 남경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고, 1940년 6월에는 임시정부 산서지역 특파단원으로 파견되어 군사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에 광복군 총사령부의 제1지대 간부 및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독립기념관장,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부인 조순옥여사도 남편을 따라 광복군에 입대하여 활동했습니다.


이렇듯 안중근의사 가문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숙부 안태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동생과 조카들, 그리고 사촌 형제와 5촌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40여 명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정부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 독립운동 내용이 확인된 15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안중근의사에게 수여된 건국훈장(좌)과 건국훈장증서(우)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저는 이번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요.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있으나 15명이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경우는 안중근의사 가문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풍족한 재산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안중근 의사 집안의 사람들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분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느덧 2017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여러분도 본인들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안중근의사 가문의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생각하며, 그 분들의 열정을 본받아 남은 시간들을 더 잘 보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훈남훈녀 제10기 기자단 이지민 기자


〔참고자료〕

 1.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

 2. 오영섭,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기반과 성격, 「교회사연구 제35집(2010년 12월)」

 3.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및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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