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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이번 포스팅에서는 일제강점기 무력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박상진 의사 초상

 

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상진 선생은 1907년 우리나라 근대식 사립학교인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할 때까지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익혔습니다.


 

▲ 울산의 박상진의사 생가(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이후 선생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식민지의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사임합니다.

 

판사직을 사임한 박상진 선생은 이듬해 1911년 일제 치하에 고통 받는 조국을 향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중국 만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허위의 형인 허겸과 이상용, 김동삼, 김대락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고 모색하였습니다.

 

▲ 종숙 박시준에게 독립자금 부탁을 하는 편지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이 당시 중국에서는 민주혁명으로서 신해혁명이 진행 중이었는데요. 박상진 선생에게 만주에서의 활동은 잔존하고 있던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주의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린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해혁명을 목격한 박상진 선생은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선생의 개인적 경험은 선생이 독립·혁명 단체로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겉으로는 상업적 무역과 곡물상으로 위장하여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아 독립운동기지와 독립자금조달기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1915년 7월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을 맡게 됩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 서른둘이었습니다.

 

▲ 고헌 박상진 선생이 직접 쓴 엽서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로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기본강령을 바탕으로 그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나갔습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는데요. 그러나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친일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요.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박상진 선생은 군자금 강제모금의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서 무기를 구입하여 반입하기로 합니다. 선생은 1916년 무기를 만주에서 구입해 오던 중 서울에서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됩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 1920년 박상진 의사의 형판결문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출옥 후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하게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합니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되어 박상진 선생은 일경에 체포됩니다. 이후 선생은 사형을 언도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박상진 의사의 옥중시 (출처 :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두 번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이룩한 일 하나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청산은 비웃고 물길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구나
- 박상진 의사의 옥중 청취서 中

 

고헌 박상진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그마저도 ‘이룩한 일 하나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선생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선생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일 부호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 우리 민족정기가 건재함을 표출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이후 의열단 등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 울산에 위치한 박상진의사 동상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지난 8월 15일(화)에 울산 송정동 소재 고헌 선생 생가에서 ‘고헌 박상진 의사 96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고헌 박상진 의사의 행동력과 그의 업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그를 기억해 주세요.

 

*참고사이트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 사업회 http://www.goheon.or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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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7.08.1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와 문화, 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김준식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는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보훈인물(독립운동가+전쟁영웅)' 정책 홍보 카페의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 하면 그래도 대한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박상진 의사께서 대한민국 최초의 법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 분들께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나 경력 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관련 정보의 더욱 많은 발굴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상진 의사께서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보훈인물' 정책처럼 전쟁기념관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인물을 매월 선정하는 '이달의 호국인물' 정책의 올해 8월의 주인공이 되셨기 때문에 8월 중순인 지금, 이 글을 보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앞으로도 훈터 관계자 분들과 훈남훈녀 기자단 분들께서도 진정한 보훈의 의미를 많은 분들께 널리 알릴 수 있는 기사들로 네티즌 분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저의 글을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8. 17.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 문화, 나라사랑(보훈)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달의 보훈인물' 카페 고문-대학생, 김준식 드림.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외국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우리나라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나가 힘을 쏟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위 문구는 1949년, 그 분의 서거 후 묘비명에 새겨진 생전 소원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8월 11일 거행되는 ‘헐버트 박사 서거 68주기 추모식’을 맞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셨던 그 분의 생애와 한국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업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호머 헐버트 박사 사진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63년 미국 버몬트 주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을 지낸 아버지 캘빈 헐버트와 다트머스대학교 창립자의 후손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인격이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가훈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가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교사가 되기 위해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교육에 누구보다 열정이 가득했던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순 한글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직접 저술하는 등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서구식 교육제도를 뿌리내렸습니다. 1891년,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의 축소 운영으로 사임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그로부터 2년 뒤, 선교활동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 육영공원에서 교육 중인 호머 헐버트 박사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블로그)

 

이 때 한국으로 돌아온 헐버트 박사는 출판사에 외국의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는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하며 수많은 서적과 기사를 작성합니다. 편집과 출판에 경험이 있던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 서재필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우리나라의 언론 창달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연구에 동참하였고, 한글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최초로 도입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 을사늑약 반대 고종친서 (출처 : 초록별과 그린 라이프 블로그)

 

 

 

한편, 1890년대의 한국은 일제에 국권침탈의 위협을 받는 풍전등화 정국의 연속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 1894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헐버트 박사는 조선조선의 주권회복을 위해 본격적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때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으로, 고종의 정치적·외교적·문화적 자문위원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 11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는데요.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면담하여 을사늑약을 저지해 달라는 내용의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헐버트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 헤이그 특사 (좌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또한, 그는 고종에게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을 제안했습니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게 되는데요.


헐버트 박사는 특사 3인보다 먼저 헤이그로 넘어가 각국 대표에게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대한 일제의 부당함과 독립을 주장하는 등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펼칩니다. 또한, 일제 통감부의 감시를 피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위해 준비해야하는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는데요. 이는 헐버트 박사가 이후 ‘제4의 헤이그 특사’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제2차 만국평화회의 (출처 : 양원주부학교 홈페이지)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인의 헤이그 특사는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헐버트의 헤이그 특사 파견 가담이 발각되자 일본은 헐버트 박사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합니다.

 

헐버트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전역과 전 세계를 돌며 각종 회의와 강연에 참석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해 알리고 이를 규탄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각종 한국의 분리 독립에 관한 글을 쓰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 4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호머 헐버트 박사 (출처 : 오소운 목사의 [찬송가 블로그])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40여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였습니다. 감격스러운 한국 방문이었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헐버트 박사는 86세의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소망에 따라, 고인은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정부는 헐버트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50년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호머 헐버트 박사 모습 (출처 : 피터김의 체험 나누기 블로그)


오는 8월 11일(금) 오전 11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마포구 합정동 소재)에서 ‘헐버트 박사 서거 68주기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이번 추모식에서는 1903년에 헐버트 박사가 역사상 최초로 만들었던 거북선 모형이 114년 만에 공개됩니다. 이 거북선 모형은 헐버트 박사가 1904년에 미국 세인트 루이스 시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하고자 미국으로 가지고 갔으나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요. 이번에 해양유물수집가 전우홍 선생에 의해 한 세기가 넘어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고, 이날 추모식에서 최초로 공개됩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 정신을 높이 사고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생을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던 헐버트 박사를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http://www.hulbert.or.kr/
대한민국역사박물관

 http://muchkorea.tistory.com/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751&cid=40942&categoryId=3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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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출신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 등 무예에 능했는데요. 이러한 능력은 훗날 선생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할 줄 알았기 때문에, 훗날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이후 김수민 선생을 신임하는 많은 농민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구한말 의병의 모습들


김수민 선생은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일본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이 당시의 경험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인데요.

이후 김수민 선생은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1907년, 김수민 선생은 13도 창의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갑작스러운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작전이 무산되자, 1908년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는데요. 김수민 선생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병운동을 펼치며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습니다. 


▲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1909년 3월, 김수민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새롭게 의병부대를 재편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였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제공하거나 모처에 은닉하여 의병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됩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 선생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선생은 서울의 사정이 여의치 않자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성필동헌병대에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 정미의병


김수민 선생은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1월, 교수형을 받고 약 2년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수민 선생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문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고군분투했던 김수민 의병장. 그의 진심어린 애족, 애국심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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