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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으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민족의 공적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조국의 독립을 앞당겼던 도마 안중근 의사.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는 그날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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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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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역사와 힙합이라는 독특한 결합을 통해 우리나라 위인들의 업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이렇게 각종 방송매체에서 역사적 인물들, 그 중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얼굴과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요. 과연 우리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을까요?


올해 2017년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7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3월 26일 오전 10시, 서울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애국·애족정신과 평화사상을 많은 국민들에게 알리고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보다 자세하고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요. 이번 기사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삶과 업적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 안중근 의사의 개화사상과 근대적인 사고 


▲ 안중근 의사 표준 영정사진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 응칠(應七)이고, 천주교 세레명은 토마스(도마)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러 방면에 있어 개화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884년 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이 새 내각을 조직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정책의 실행을 도일 유학생을 선발하였는데 안중근 의사가 이에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게 됩니다.


▶ 안중근 의사의 애국계몽운동


안중근 의사는 개화사상과 근대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천주교 포교에 앞장섰으며 동시에 서양 문물수용에 매진하였습니다. 하지만 1904∼1905년에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인 러일전쟁과,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을 보며,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안중근 의사는 각국의 역사를 익혀나감과 동시에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습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이 현실로 닥치자 상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 실상을 보다 널리 알려 국권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식민정책을 보다 더 강화해 나가게 됩니다. 


▶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일제 치하에서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9년 9월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 안중근 의사 의거 직전 하얼빈역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새벽,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으로 나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습니다. 아침이 되어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나자 그는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총탄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이로써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게 됩니다.


▲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의 순간 기록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박영선 화백)


▶ 옥중에서의 저술활동과 순국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의거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됩니다. 여기에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모든 재판들은 일본인들 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 1910년 2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 선 

안중근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앞줄 오른쪽부터)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안중근 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참고 : 전언이 알려진 것일 뿐 실제편지가 존재하지는 않으며, 

당시 조마리아 여사의 심정이 편지의 형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임)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 이후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를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게 되는데요. 특히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2월 13일 사형언도를 받기 전날부터 집필하여 이듬해 3월 15일 탈고한 자신의 살아온 길을 기록한 책입니다.


▲ [안응칠역사]의 첫째 장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책으로써,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했으나 일제가 불허하여 완성하지 못했으며, 결국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유언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그 누구보다 조국을 생각하며 의로운 죽음을 택했던 안중근 의사. 

우리 모두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다시 한 번 기리고 그 숭고한 희생을 추모함으로써 애국·애족정신과 평화사상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더욱 힘써나가야 할 것입니다.


※ 출처

1. 네이버 캐스트 안중근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3920


2.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위대한 인물 안중근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3920


3.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자서전 - 안응칠 역사 E-BOOK

http://bmwith.com/themencode-pdf-viewer-sc/?tnc_pvfw=ZmlsZT1odHRwOi8vYm13aXRoLmNvbS93cC1jb250ZW50L3VwbG9hZHMvMjAxNy8wMy/slYjspJHqt7wtRS1Cb29rLeuzuOusuC0yMDE3XzIucGRmJnNldHRpbmdzPSZsYW5nPWtv#page=&zoom=auto&pagemode=


4. MBC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편(2016.12.31. 방영)


5. EBS 지식채널e 평화사상가 안중근

http://tv.naver.com/v/803059


6. EBS 지식채널e 네 번째묘

http://tv.naver.com/v/120382


7. MBC 무한도전 TV특강편(2013.5.18.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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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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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터 여러분은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총성의 주인공을 아시나요? 네. 바로 안중근 의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의사는 대한민국 국권을 강탈한 원흉이자 동양의 평화를 위협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아 외쳤던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이 간절한 외침은 당시 하얼빈역을 가득 채웠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면


의사의 세 발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로 돌아가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사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는 역사의 뒤안길로 비참한 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사용한 총과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을 그린 인체 도해도(출처: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는 의거 후에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어 일본인 판사, 일본인 검사, 일본인 변호사, 일본은 통역관, 일본인 방청인 등 오로지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법정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의거 직후 찍은 의사의 전신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이에 동요하지 않고 재판장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했다고 밝히며, 이토의 15가지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재판정을 충격에 빠뜨리게 되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의사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발언은 재판장의 분위기를 바꾸었고,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꾸게 되었으며, 세계 여론이 일본에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졸렬하게도 서둘러 이후의 재판을 비공개로 바꾸고, 결국 그들이 원하던 대로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수의 한 벌이 도착합니다. 바로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것인데요. 그녀는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쓴 편지 -


이러한 어머니의 말씀에 의사는 이후 항소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온 힘을 쏟게 됩니다.


▲의사가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그가 거사를 하게 된 이유를 밝힌 책인데요. 재판이 비공개로 이루어지자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구구절절 그 이유를 밝혀서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싫었던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이유를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저술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사형 집행 연기를 요구했지만 결국 예정대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하얼빈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출처: 독립기념관)


올해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차가운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0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일제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 의사. 일본인만으로 이루어진, 너무나 불리했던 재판정에서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늘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 우리가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쓰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 수 있게 해 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을 반드시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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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는 윤회한다

    2017.04.11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월 26일은 또다른 한명의 반민족 친일 부역자가 총탄에 간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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