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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의 고향입니다. 때문에 추념비나 생가 등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많은 장소들이 경주 지역 내부에 있는데요. 그러나 시내권에 비해 시외권은 교통의 문제로 찾아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이 어려운 교통 여건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에 선선해지는 가을 날씨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의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떠나고자 합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고운모래해변


경주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경주시 감포읍에는 두 명의 독립운동가 생가가 있습니다. 감포읍 팔조리에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 나정리에는 김봉규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요.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감포읍으로 가는 버스는 100번과 100-1번 버스 두 대입니다. 버스는 약 30여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정내영선생의 생가는 노동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하며, 김봉규 선생의 생가는 전촌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합니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이후 김봉규 선생의 생가로 가는 것으로 여정을 잡았습니다.


▲정내영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는 감포읍 팔조리 268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에 도착하고 보니 산에 둘러싸인 주변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정내영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20년 4월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시 임시정부 군자금을 추적하던 의령경찰서 갑비(甲斐)라는 일본 순사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지인 김종철이 순사를 사살했고 선생과 함께 도피하였는데요. 그 후 정내영 선생은 일제 순사 갑비(甲斐) 사살사건에 연루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지만 출옥 후에도 비밀리에 중국과 국내를 다니며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61년 4월 23일에 생을 마감했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봉규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127에 위치한 김봉규 선생의 생가인데요. 앞서 찾은 정내영 선생의 생가와는 또 다르게 산림이 아닌 감포읍 바다 인근에 있었습니다.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도로변에 있어서 찾아가기 더 수월했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1920년 송두환, 최윤동, 이수영 등 다수의 동지와 함께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이와 더불어, 경상남도 합천과 의령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의령경찰서의 일본 순사 갑비(甲斐)가 김봉규 선생과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하게 되는데요. 그 후 선생은 송두환, 정동석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광복을 맞이하고 1968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단 한 가지의 소망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광복을 맞이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절히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순국선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내영, 김봉규 두 독립운동가의 고향, 경주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 자료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https://goo.gl/ApFq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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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8일,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와 친구들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해 듣고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합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와 학생들은 시위운동에 동참했습니다.

학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점점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총독부는 같은 해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해 휴교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관순 열사는 사촌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되는데요.

몰래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향한 유관순 열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인근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들었고, 인근의 마을을 찾아가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해 알렸습니다.

거사 전날이었던 3월 31일, 유관순 열사는 다음 날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고 목천·천안·안성·진천·연기·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습니다.

4월 1일, 충남 천안 병천면의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 열사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저 잔인한 일본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되찾읍시다! 대한 독립 만세!”

약 3천여 명의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세시위에서 부모를 잃은 유관순 열사는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법정에서도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고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였습니다.

재판 이후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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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10일은 6.10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1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오전 10시 6.10독립만세운동의 주축이 된 서울 종로구의 중앙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제91주년 6.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렸는데요.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3.1운동과 함께 민족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6.10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해요!


# 6.10독립만세 운동 발발 배경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을 계기로 해외까지로 확산되었던 민족 독립운동은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소극적 지원에 의해 점차 잠잠해져 가는 추세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으로 민족운동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전투로 대승을 거둔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후퇴하게 되었는데요.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국내 독립운동의 침체에 이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역시 부진한 상태였죠.


# 6.10독립만세 운동의 발발


이런 상황 속에 1920년대 민족운동은 학생운동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이전의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만세운동과는 달리 학생운동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 학생운동이 가시적인 집단행동으로 표출된 결과가 바로 6.10만세 운동입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 황제의 인산일이 큰 계기로 작용했는데요.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과 민족주의 계열 등 세 개 단체들이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대규모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했습니다.


▲ 권오설 생가 터


먼저, 사회주의자 권오설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중국지폐위조사건과 개벽지압수사건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루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아쉽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 역시 독립운동을 준비하는데요. 5월 20일 40여명의 청년들이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맺고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을 준비했습니다. 이들의 거사 계획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쏠리는 틈에 진행된 까닭이죠.



▲ 6.10만세운동 사직동계 거점(박하균 하숙 터)


또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 역시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준비합니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천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종로 일대에 대기하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독립 만세운동이 발발하게 됩니다.


▲ 6.10만세운동 통동계 거점(김재문 하숙 터)


# 6.10독립만세 운동의 결과


학생들의 조직적인 만세 운동에 지켜보던 군중들도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하며 이들을 막았지만,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각 지역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6.10만세 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들 수는 무려 210여명,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6.10만세 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학생들의 애국정신이 집단으로 표출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6.10만세운동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을 보여주었던 6.10만세운동.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입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 우리나라를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탄압받았던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보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6.10만세 기념비


* 참고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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