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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터 여러분은 항상 한복을 입으며 우리 민족 경제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던 분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고당 조만식 선생 동상이 위치해 있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왔습니다.


▲ 조만식 선생 동상


▲ 멀리서 본 조만식 선생 동상 모습


조만식 선생 동상은 다소 높은 언덕에 있었기에, 시민 분들이 다소 찾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저는 조만식 선생 동상의 힘찬 손짓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언덕 위로 옮겼습니다.



▲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모습


“고당 조만식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시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셨다. 독실한 신앙과 숭고한 인격, 투철한 의지와 실천궁행하는 자력갱생정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과 자유민주통일을 위한 투쟁은 살아있는 교훈이다.”


올곧은 모습으로 서 있는 동상의 모습에, 묵직한 침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고당 조만식 선생 동상의 앞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으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1883. 2. 1.~1950. 10. 18.)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제2차 만세운동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조만식 선생은 1922년, 민족 경제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선생은 교육 운동을 매우 중시하였는데요.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27년 2월, 조만식 선생은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발기했으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조만식 선생에게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1929년 11월, 선생은 신간회 중앙 간부들과 함께 성루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2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언론의 창달에 공헌하는 등 독립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단순해 보이지만, 제가 이번 기사를 작성하며 가장 말하고 싶었던 문장입니다. 우리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중점적으로 펼쳤던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힘쓰며 우리 민족의 교육과 권익 보호에 평생을 바친 고당 조만식 선생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언덕에서 묵묵히 서 계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을 항상 기억하겠다고 약속드리며, 이번 기사를 마칩니다.


*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7465&ipp=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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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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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의 고향입니다. 때문에 추념비나 생가 등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많은 장소들이 경주 지역 내부에 있는데요. 그러나 시내권에 비해 시외권은 교통의 문제로 찾아가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이 어려운 교통 여건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에 선선해지는 가을 날씨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의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떠나고자 합니다.


▲경주시 감포읍 나정고운모래해변


경주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경주시 감포읍에는 두 명의 독립운동가 생가가 있습니다. 감포읍 팔조리에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 나정리에는 김봉규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요.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감포읍으로 가는 버스는 100번과 100-1번 버스 두 대입니다. 버스는 약 30여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정내영선생의 생가는 노동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하며, 김봉규 선생의 생가는 전촌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를 해야 합니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이후 김봉규 선생의 생가로 가는 것으로 여정을 잡았습니다.


▲정내영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는 감포읍 팔조리 268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금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정내영 선생의 생가에 도착하고 보니 산에 둘러싸인 주변 경치가 훌륭했습니다. 


정내영 선생의 업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20년 4월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시 임시정부 군자금을 추적하던 의령경찰서 갑비(甲斐)라는 일본 순사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지인 김종철이 순사를 사살했고 선생과 함께 도피하였는데요. 그 후 정내영 선생은 일제 순사 갑비(甲斐) 사살사건에 연루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지만 출옥 후에도 비밀리에 중국과 국내를 다니며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내영 선생은 1961년 4월 23일에 생을 마감했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봉규 선생 생가(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정내영 선생의 생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127에 위치한 김봉규 선생의 생가인데요. 앞서 찾은 정내영 선생의 생가와는 또 다르게 산림이 아닌 감포읍 바다 인근에 있었습니다.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도로변에 있어서 찾아가기 더 수월했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1920년 송두환, 최윤동, 이수영 등 다수의 동지와 함께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책으로 활약하였는데요. 이와 더불어, 경상남도 합천과 의령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의령경찰서의 일본 순사 갑비(甲斐)가 김봉규 선생과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하게 되는데요. 그 후 선생은 송두환, 정동석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봉규 선생은 광복을 맞이하고 1968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단 한 가지의 소망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광복을 맞이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절히 꿈꿨던 독립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순국선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내영, 김봉규 두 독립운동가의 고향, 경주에서 따스한 소식 올립니다.


* 자료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https://goo.gl/ApFq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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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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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8일,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와 친구들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해 듣고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합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와 학생들은 시위운동에 동참했습니다.

학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점점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총독부는 같은 해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해 휴교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관순 열사는 사촌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게 되는데요.

몰래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향한 유관순 열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인근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들었고, 인근의 마을을 찾아가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해 알렸습니다.

거사 전날이었던 3월 31일, 유관순 열사는 다음 날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고 목천·천안·안성·진천·연기·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습니다.

4월 1일, 충남 천안 병천면의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 열사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저 잔인한 일본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되찾읍시다! 대한 독립 만세!”

약 3천여 명의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세시위에서 부모를 잃은 유관순 열사는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법정에서도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고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였습니다.

재판 이후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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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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